273화
망망대해 너머, 저 멀리 지나가는 배 한 척을 발견하고 얼른 불을 피운 우람.
하지만 야속하게도 저쪽에선 연기를 못 본 모양이었다.
“후…….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군.”
한숨을 내쉬는 우람은 야생의 자연인 그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해진 뉴비 코스튬.
겉옷은 이미 누더기가 되어 두건으로 쓰이고 있었다.
“멍청이! 멍청이!”
그때, 우람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귀에 거슬리는 조롱.
“저 녀석이 또……?”
가까운 야자수 위에 앉은 커다랗고 붉은 새가 머리를 까닥거리며 우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앵무새 같았지만 생김새를 자세히 보면 올빼미에 가까웠다.
“구욱! 구욱! 못 나가! 못 나가!”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꽥꽥거리는 녀석이 약 오르기도 했지만 딱히 밉지는 않은 우람.
그도 그럴 게 이 섬에서 유일하게 우호적인 생명체가 바로 저 녀석이기 때문이었다.
며칠 뗏목을 타고 표류하던 우람이 도착한 이곳.
이름도 모를 완벽한 무인도로, 한해안을 따라 한 바퀴를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두 시간 정도였다.
섬 가운데엔 빼곡한 수풀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 안으로는 몇 번 들어갔던 우람은 매번 도망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맹수는 없지만, 이 섬의 모든 생명체들 전부가 현재의 우람은 이길 수 없었다.
다행히 해안가까지 쫓아 나오진 않아 이렇게 생활이 가능했다.
그리고 저 시끄러운 녀석을 만났다.
“부댕아.”
부리로 시끄럽게 나불댄다고 부댕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이제 운동할 거니까 조용히 해라.”
옆에 있는 역 3미터, 100kg에 달하는 통나무.
괜한 고집으로 주먹만 쓴 탓에 새거나 다름없는 강철검으로 그럴듯한 목봉으로 막 완성한 참이었다.
“흡차-”
자리에서 일어난 우람은 그것을 양 어깨에 걸친 다음 스쿼트를 시작했다.
‘힘을 길러야 다음 항해를 준비하지.’
항해를 준비하려면 섬 안에 있는 것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했고.
까닥-까닥-
고개를 90도로 꺾으며 우람이 하는 걸 흥미롭게 지켜보는 부댕이.
“후우- 흡! 후우- 흡!”
우람이 운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
“구욱!”
“음?”
갑자기 꽥 우는 부댕이 탓에 호흡이 흐트러진 우람.
하지만 그는 얼굴을 찌푸리기보단 흥미로운 표정으로 녀석을 돌아봤다.
“흐음…….”
다시 자세를 잡고 스쿼트를 시작했고, 몇 번 하다 보니 또다시 “구욱!” 하고 부댕이의 날카로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오호?”
우람의 표정에선 확신이 생겼다.
“너 이 녀석……. 설마 흐트러진 자세를 알아보는 거냐?”
몇 번 다시 반복해 보았고, 자세가 조금 흐트러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울음소리를 내는 부댕이.
아무래도 최근 우람의 맨손 트레이닝을 계속 지켜보더니 학습이 된 모양이었다.
“굉장히 똑똑한 녀석이었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된다는 점에서 이미 평범한 생명체가 아니었다.
“마음에 들어.”
“멍청이! 구욱!”
그렇지 않아도 혼자 운동하려니 적적했는데, 좋은 코치가 생긴 기분이었다.
* * *
평탄한 고잉헬 호의 항해가 이어졌다.
날씨가 나쁘지도 않았고, 적이나 몬스터를 만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최근엔 저마다 개인 시간도 간간히 보내는 중이었다.
다키스트나 골드투스를 비롯한 몇몇은 행글라이더에 관심을 배웠고 완식이나 진아는 옵티마 성서 공부를 했다.
탄탄보는 행글라이더 날개 디자인에 영혼을 담는 중이었고 사번타자는 추락한 자신의 처지에 아직 넋이 나가 있었다.
삐리리-
그리고 재호는 디오니소스에게 열심히 풀피리를 배우는 중이었다.
현재 악보 수 : 5/20
“알시아 님은 의외로 음악 쪽도 재능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디오니소스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미간을 살짝 구기고 재호 옆으로 고개를 돌린 그.
삑-삑-삐익-삐이이이이이-
대단한 폐활량을 뽐내며 피리를 힘껏 불어 대는 티나.
경쟁적으로(디오니소스를 대한) 풀피리를 배우기 시작한 그녀는 전혀 늘지 않은 최악의 실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때?”
자신감 넘치는 티나의 물음에 디오니소스는 고개를 저었다.
“티나야. 넌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무리 봐도 적성이 아니야.”
디오니소스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재호의 오른팔로도 모자라 왼팔 양다리까지 되고 싶은 티나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실력이 모자라도 배우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그렇긴 한데…….”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디오니소스.
삐이이이-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폐활량 테스트를 시작한 티나.
그리고 낚시를 하던 버팔로가 결국 폭발했다.
“야! 너 때문에 물고기가 다 사라져 버렸잖아! 책임져!”
“뭐?!”
눈이 귀만큼이나 뾰족해진 티나가 벌떡 일어났다.
“맞아! 책임져라!”
“우우- 책임져!”
다른 낚시인들도 함께 나서서 항의했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이 무료한 항해 속, 전에는 몰랐던 짜릿한 손맛을 겨우 알아가고 있었는데 티나가 모두 망쳐 버린 것이다.
낚시인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우, 웃기는 소리하지 마! 너희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거겠지!”
그들의 거센 항의에 스스로도 내심 찔리는 게 있었는지, 티나는 주먹부터 휘두르지 않았다.
상대가 버팔로와 그 일당이라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
“그리고 왜 나만…….”
힐끔-
잠시 재호를 돌아본 그녀.
“…….”
차마 재호도 풀피리를 부는데 왜 자기보고만 그러냐곤 말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초롱초롱-
여전히 잔뜩 성이 난 눈매이면서 눈동자는 무언갈 열망하는 티나의 기괴한 모습에 재호는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뭘 바라는지는 명백했다.
증명해 주세요!
“…….”
증명해 주세요!!
“……….”
“증명해 주세요!!!”
결국 그녀의 마음의 소리가 실체화 되어 재호의 고막에 닿았다.
* * *
삑- 삑- 삐빕- 삐이이-
고잉헬 호에 울려 퍼지는 소음 공해.
사람들은 저마다 귓구멍을 막아 놓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 소음 속에서도 얼마든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단 걸 증명하기 위한 자리.
그리고 재호 역시 티나의 강요된 증명을 위해 낚싯대를 잡고 있었다.
-그냥 네가 하지 말라고 한마디 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냐?
바로 옆에서 낚시 중인 버팔로가 재호에게 귓속말로 구시렁댔다.
-내버려둬. 어차피 잠깐 저러다가 말 테니까.
지루한 항해 속에서 이런 소소한 이벤트도 만들어 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뭐가 잡혀야 이벤트지. 저 소리 때문에 물고기가 아예 씨가 말라 버렸다고.
톡-
그때, 재호의 눈에 포착된 찌의 미세한 출렁임.
팟-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튕겨 올렸지만 바늘엔 아무것도 없었다.
파파팟-!
그런데 연이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낚싯대를 힘차게 들어 올렸다.
“잡았다! 잉?”
“뭐야? 완벽하게 걸린 것 같았는데?”
“멍청이들.”
그들의 모습에 버팔로는 콧방귀를 꼈다.
“찌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손으로 느끼는 거다. 눈으로 봐선 안 되는 거… 흣차! 이렇게 말이야!”
하지만 역시 버팔로도 헛방이었다.
“어?”
“등신.”
“아, 아냐! 분명 손에 느낌이 왔다고!”
“개뿔. 너 전부터 입은 털면서 나보다 못 잡았잖아!”
“그건 초심자의 행운이야! 원래 낚시는 초보자가 더 잘 잡는다고!”
저들끼리 투닥거리고 있는 한편, 재호는 배 아래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한데?’
다른 바다는 괜찮은데 배 아래쪽만 이상할 정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배를 흔들릴 정도는 아니라 체감은 되지 않았으나, 수면 위를 떠다니는 낚시찌들은 확실히 알려 주고 있었다.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삐이이이- 삐삐삐- 삐이익-
그사이, 점점 절정에 달하는 티나의 연주.
출렁출렁-
거기에 맞춰 수면 위의 출렁임도 격해지고 있었다.
“…버팔로.”
“난 베테랑이라서 어쩔 수가 없어! 원래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게 낚시라…….”
“버팔로!”
“어어?! 왜?”
“지금 당장 속도 최대 출력으로 높여.”
“속도? 왜…….”
쿠르르르르-
이젠 분명히 느껴지기 시작한 선체의 진동.
그제야 버팔로를 비롯한 모두가 무슨 일이 터졌음을 알아챘다.
-최대 출력! 빨리! 빨리!
엔진룸의 당직 인력에게 귓속말을 보낸 버팔로.
다행히 선체 아래인 탓에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이상 징후를 느끼고 있던 선원들은 바로 움직였다.
쾅-! 쾅쾅!!
폭발을 일으키며 단번에 힘을 분출하기 시작한 고잉헬 호.
하지만 충분히 속도를 붙이기엔 시간이 필요했고, 그사이 배 아래에선 거대한 실루엣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그 순간, 불쑥 솟아난 심악이의 촉수가 고잉헬 호를 휘감곤 앞으로 빠르게 헤엄쳤다.
위엄을 감지한 녀석의 발 빠른 대처.
그리고…….
퍼어어엉-!!!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물체가 높이 튀어 올랐다.
챠르르르-
“헉?!”
“저, 저게 뭐야!!”
고잉헬 호의 10배는 될 법한 크기인 그것은 언뜻 고래처럼 보였다.
하지만 옆구리에 달린 수십 개의 작은 지느러미와 전체 몸길이의 절반에 달하는 주둥이.
쩍 벌린 입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빨이 동굴 속 종유석처럼 자라 나 있었다.
콰아아아아-!
[lv.??? 곰덫 아귀]
확인한 녀석의 정체.
당연히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난 <곰덫 아귀>가 극도로 분노한 상태입니다.]
“…….”
무엇이 녀석을 깨웠을지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와! 사냥이다!”
“얼마 만에 전투냐?!!”
잔뜩 들뜬 그들.
하지만 재호는 생각이 달랐다.
“튀어!!”
“뭐?”
재호답지 않은 결정에 모두가 당황했다.
하지만 짧은 순간, 재호는 복합적으로 분석하고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체급 차이가 너무 크다!’
지금까지 본 몬스터 중 가장 거대했다.
고잉헬 호도 작은 편이 아닌데, 그보다 10배 이상의 덩치였으니.
게다가 주둥이가 전체 몸의 절반에 달하는 놈이라 마음만 먹으면 고잉헬 호를 한입에 삼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직 겪어 보진 않았으나, 단번에 박살이 날 경우에도 고잉헬 호의 수복 능력이 멀쩡할 거란 확신이 없었다.
또한 어지간해선 먼저 나서는 일이 없는 심악이가 다급하게 고잉헬 호를 끌고 도망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본디 심해에서 서식하는 고레벨 생명체인 심해 악어.
그런 녀석이 줄행랑을 칠 정도면 분명 보통 놈이 아니란 뜻이었으니까.
그런 적과 맞상대를 고집하며 배가 완전히 파괴될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촤악- 촤악-
속도가 붙은 고잉헬 호가 거친 파도에 물수제비처럼 통통 튀어 나갔다.
콰과과과-
그리고 멀지 않은 거리에서 하늘을 덮을 정도로 커다란 입을 쩍 벌린 채, 쫓아오는 곰덫 아귀.
그제야 재호가 도망을 결정한 이유를 모두가 깨달았다.
“으… 으아아악!!!”
“살려 줘!!!”
그때 배 뒤편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쟤들 왜 저기 있냐?!”
당황한 재호.
누구보다 열심히 행글라이더를 배우던 다키스트와 골드투스가 아직 비행 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질질 끌려오는 중으로 지나치게 빨라진 속도 탓에 균형을 못 잡고 휘청거리는 중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바로 뒤에선 곰덫 아귀의 뜨끈한 입김이 느껴지고 있었고.
“제가 돕겠습니다!”
선미에 선 레드는 녀석의 목구멍을 향해 마법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덩치만큼이나 대단한 맷집.
레드의 위력적인 공격이 초라해질 정도였다.
딸랑딸랑딸랑딸랑-
그 어느 때보다 겁에 질린 심연 등불초 정령도 직접 돛대로 올라가 초롱을 흔들어 대며 적의 경직을 유발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철썩-
그때 큰 파도와 충돌하며 높게 튀어 오른 고잉헬 호가 심각하게 감속이 되었고.
“어어?”
“으아아아악! 먹힌다!!!”
고잉헬 호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쿠구구구-
천천히 가까워지는 입천장에 고잉헬 호가 속도를 더 높였지만.
수우우욱-
녀석의 목구멍의 강력한 흡인력에 돛이 뒤로 펄럭이며 전진을 막았다.
그리고 결국은…….
꾸우웅-
굳게 닫혀 버린 곰덫 아귀의 입.
콰직-
파사삭-
입천장의 이빨과 가시 같은 혓바닥의 돌기에 선체가 난도질당했다.
콰르르르-
배와 함께 빨아들인 바닷물을 따라 반파된 고잉헬 호는 시커먼 목구멍으로 너머로 휩쓸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