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이건우 국장은 얼이 빠졌다.
“솔직히 청천벽력은 아니죠. 국장님도 아시잖아요?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
알다마다.
지난번 해전 영상으로 OMGN이 얼마나 큰 위기를 경험했던가?
그때의 상처는 크게 남아 있는 상태였고, 그런 상황에서 재호의 영상 제공 중단은 그 상처를 찢어 버릴 정도의 큰 후폭풍이었다.
“자, 자네가 직접 만나 봤나? 자네는 친분이 있으니 충분히 설득이 가능하지 않겠나?”
그리 말해도 은 피디 입장에서도 크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신 역시 그때 일에 여전히 불만이 있었기에 별로 생각도 없었고.
“그리고 제가 국장님을 찾아온 건 그 이야기만 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
스윽.
그녀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밀었다.
“음? 이게 뭔가?”
“뭐긴요. 대충 느낌 오시지 않습니까?”
“…….”
뻔하지만 당연히 사직서.
그간 은 피디는 홍창택 본부장의 악의적인 괴롭힘에 계속 시달렸는데, [출렁이는 요단강 해전] 방송이 망하면서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
그래서 퇴사를 마음먹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오기도 했고.
“인수인계도 마쳤고 비품 반납, 자리 정리도 다 끝났습니다. 인사과는 통과됐고 국장님 도장만 남았죠.”
“허허…….”
이건우 국장은 씁쓸히 웃음만 흘렸다.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홍창택 본부장이 사내에서 어떤 난장판을 치는지 알고 있었지만, 본부장을 정면에서 막기엔 상당히 부담되었기에 방치했던 것이다.
“재고의 여지는 없나?”
“아시잖아요?”
“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이건우.
하지만 그는 두 번 붙잡으려고 하진 않았다.
오히려 이런 선택으로 내몰리게 만든 것에 대해 미안할 뿐.
“…회사에서 나가면 당분간은 쉬는 건가?”
“하하, 대출금이 얼마인데요. 바로 일해야죠.”
그런 사람이 퇴사를 한다?
“역시 SPATV에 가려는 건가?”
최근 공격적인 컨텐츠 개발로 상승세를 탄 국내 경쟁사.
비록 OMGN만큼의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은 피디의 이적이 이루어진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옮겨 가면 높은 확률로 황재호의 영상 독점 중계권도 가져갈 테니까.
게다가 현재 방송 중인 메이의 비밀정원 다이어리도 계약 연장도 불투명해졌고.
즉, 은지수 피디를 잃는 건 단순히 유능한 제작자 한 명을 잃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뇨. 그래도 OMGN에 의리가 있는데 어떻게 그러겠어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일.
“그럼 역시 해외인가?”
역시나 은 피디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황재호 씨 개인 방송을 기획하게 될 것 같네요. 이참에 브이튜브를 운영해 보려고 하는데 혹시 생각이 있냐고 제안을 해 왔거든요.”
“…뭐?!”
지금까지 재호가 운영하는 채널은 전혀 없었다.
전부 녹화를 한 뒤에 은 피디에게 맡겨 왔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번 참사 이후, 사내 권력 싸움에 의해 자신이 희생물이 될 수도 있단 걸 알게 되며 마음이 바뀌었다.
차라리 직접 채널을 운영해 영상을 올리자고.
그리고 제작 및 관리를 위한 사람을 뽑기 전, 조언을 얻을 생각으로 은 피디에게 물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직접 하게 해 달라고 도리어 부탁했다.
재호 입장에선 퇴사까지 하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결국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거참… 홍창택 본부장이 큰일을 해냈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이건우 국장은 은 피디의 사직서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아냐. 앞서 말했지만 내가 오히려 미안하지.”
그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나 이따금 기회가 된다면 한 번씩 좀 도와주게나. 흠흠…….”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은 피디도 마주 웃었다.
“황재호 씨가 허락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죠. 물론 홍창택 ‘씨’와 권성주 그 인간이 간섭하지 않는다며 말이죠.”
그렇게 은 피디는 은지수가 되어 OMGN을 떠났다.
* * *
일성 플라워즈 빌딩을 방문한 은지수는 현 감독이자 단장을 맡고 있는 김두표와 만났다.
“하하, 반갑습니다. 김두표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OMGN에 있었던 은지수입니다.”
가벼운 인사와 악수를 나누고 마주 앉은 두 사람.
“재호도 곧 올 겁니다. 최근 디노스 섬 때문에 좀 바쁘다더군요.”
“아! 그렇지 않아도 요즘 난리죠. 황재호 선수가 발견했다는 알림이 뜬 이후, 그 어떤 추가 정보도 풀리지 않았으니까요.”
지난번, 고잉헬 호 출항 계획을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전 불곰 길드원의 새 길드’ 녀석들이 고양이에게 말한 탓에 세상 모두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번엔 특히 신경을 쓴 재호.
그들이 디노스에서 얻는 소득이나 업적엔 관여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항해를 주도한 입장에서 최초 공개 권한은 가져가겠다는 것.
그들 역시 내심 미안함도 갖고 있었고, 재호에게 확실히 빌붙기로 한 입장이니 확실히 입단속을 하는 중이었다.
“뭐, 재호의 영상들이 늘 히트한 게 사실이지만, 이번은 특히나 시끌시끌할 겁니다.”
들은 게 있는 두표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런가요?”
덩달아 두근거리는 지수.
“뭐, 직접 영상을 보시게 되면 알게 될 테니 저는 말을 아끼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희와 함께하기로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표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죄송합니다. 그런 괴작이 나오는 걸 막지 못해서…….”
“흠흠…….”
둘 모두에게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금 두 사람이 마주한 것이었고.
일성 플라워즈 공식 채널.
황재호 개인 채널.
두 개의 브이튜브를 지수가 담당하기로 오늘 계약할 참이었다.
이미 모든 세부 사항은 합의가 된 상태라 도장만 찍으면 끝이었고, 지수 또한 언제든 작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하, 정말 빠르시네요.”
“뭐, 저도 대출이 빠듯하거든요.”
“그럼 일단 아래층에 스튜디오로 가 보실까요? 아마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려면 저희 팀원들과도 인사를 미리 나누어야 할 테니.”
“배려 감사합니다.”
자리를 옮겨 스튜디오를 둘러본 그녀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일성 전자 쪽에서 게임단에 애정이 많다고 하더니…….’
전문 방송사인 OMGN보다 더 훌륭한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 걸 보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재호가 도착한 뒤, 함께 디노스 섬까지의 여정과 섬의 정체가 담긴 원본 영상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걸 보는 순간, 지수는 당장 스튜디오로 돌아가 작업을 시작했다.
그 안에 담긴 흥미로운 내용들은 하루도 참기 힘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 * *
디노스 원시섬에 온 지 일주일째.
재호 일행은 아직 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파악한 바는 없었다.
촉부리 펭귄을 상대하는 것까지가 한계였고, 조금 더 진입하면 완식 파티가 만났던 안개 속 거대 몬스터에게 순식간에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특별한 정보를 얻지는 못한 채, 레벨만 야금야금 까먹은 상황.
“한 방… 한 방만 제대로 걸리면 된다…….”
“딱 한 번만! 그러면 지금까지 잃은 거 복구할 수 있어…….”
“우후후… 이번엔 느낌이 좋아…….”
심지어는 도박 중독 증세를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주로 첫 단추를 잘못 꿰어 레벨을 왕창 날린 녀석들이 그러했다.
“근데 보통 뽕맛을 봐야 도박에 빠지는 거 아냐? 쟤들은 일방적으로 털리기만 했잖아.”
문득 든 재호의 의문.
“뭐, 나라도 쟤들 입장이었음 그랬을 거야.”
완식은 동감하며 말했다.
“쟤들 날려 먹은 레벨만 100 가까이 되니까.”
“뭐……? 언제 그만큼이나 까먹은 거야?”
레벨에 그리 집착하지 않는 재호조차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소리.
불과 일주일.
이 괴물 같은 섬은 저들이 몇 달 동안 쌓은 모든 노력의 결과물을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 처참한 현실에 결국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었다.
이 와중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이는 유일한 이가 재호였다.
그동안 해안과 인접한 곳에서 채집 및 연구 활동만 계속해 왔기 때문.
기존 대륙에서도 아직 모르는 꽃들이 많긴 했지만, 디노스 섬은 특히나 희한한 것들이 많았다.
[<알시아의 식물 도감> - <디노스 원시섬의 꽃들>]
[현재 달성률 : 20%]
지금까지 발견한 꽃의 종류는 다섯 가지인데 벌써 20%인 걸 보면 전체 종류가 많지는 않은 모양.
그래서 조금씩 욕심이 나고 있긴 했다.
“나도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 볼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엘프들, 특히 티나를 단단히 교육시켜야 했다.
안 될 것 같으면 도망친다.
내가 죽어도 절대 눈 뒤집고 달려들지 않는다.
욕심은 절대 금물.
세 가지 행동 강령을 완벽히 외우도록 만들었다.
“여기는 절대 지금 우리 수준으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냐. 그건 저기 폐인들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지.”
재호는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전 불곰 길드원의 새 길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절대로 무리하면 안 돼. 나야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만 너희는 아니니까. 특히 티나 너.”
“네!”
그저 안쪽으로 탐험을 떠난다는 사실에 들뜬 그녀는 씩씩하게 말했다.
“아! 그리고 절대 담보 높게 잡지 말고!”
사실상 지금 파티의 최강 전력인 엘프들의 힘을 깎아 버리는 건 지나친 모험이었다.
“네에…….”
헌데 불과 몇 초 사이, 힘이 쪽 빠진 듯한 티나의 대답과 모습에 재호의 얼굴이 굳었다.
“…….”
이미 저질러 버린 일, 괜히 따져서 피곤해지지 말자고 생각했다.
“어? 알시아가 간다고?”
“야! 우리도 갈래!”
“나도!”
“너두?”
재호 섬 안으로 깊이 진입한다는 소식에 너도나도 따라나섰다.
그리고…….
“지금이다! 지금이 타이밍이야!”
“떡상 가자!”
“이번에 확실히 복구한다!”
대박을 꿈꾸는 중독자들도 과감한 투자를 선택했다.
“알시아라면 다르다!”
그렇게 믿고서…….
* * *
재호는 섬 안쪽으로 들어가며 발견되는 몇몇 새로운 꽃들을 하나하나 채집했다.
일행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따금 튀어나오는 촉부리 펭귄들을 처리했고.
케엑-!
꽥!
당연하게도 촉부리 펭귄을 상대하는 건 아주 손쉬웠다.
이미 지금까지 물릴 정도로 상대한 몬스터이기도 했고, 엘프까지 합류한 지금은 전혀 어려울 게 없었다.
“문제는 여기부터야.”
완식이 유난히 안개가 짙어지는 경계에서 말했다.
“저 안으로 진입하면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나타나는데 아직 제대로 공격 한번 먹이지도 못했어.”
최상위 수준의 플레이어들이라기엔 솔직히 아쉬운 실적.
그나마 확인한 거라면 어마어마한 공격력 정도였다.
“진아는 최대 15분 정도 버티긴 했었어.”
완식의 말에 진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느 순간,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일격에 즉사했고. 뭔 공격에 맞은 건지도 모르겠더라.”
“그래?”
재호는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촉부리 펭귄이 출몰하는 바깥 지역에선 더 이상 다른 꽃을 찾기 어려웠다.
물론 숲을 빙 돌아 섬 반대 해안도 살펴보면 또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확실한 경계가 존재한다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결국 안으로 가 봐야 새로운 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시스템 상의 전투력만 따지면 재호보다 훨씬 높은 이들이 손도 못 댄 적이라면 분명 어마어마하게 강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라고 그걸 모를까?
그럼에도 재호에게 기대하는 건, 늘 경이로운 발상과 전략으로 적들을 공략해 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수치화할 수 없는 탈인간급 피지컬 또한.
‘가나?’
‘제발 가 줘!’
‘우리 레벨을 구해 줘!’
스윽-
마음의 소리가 닿은 것일까.
마침내 재호가 안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스아아아-
온몸을 휘감는 짙은 안개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
“조금 진입하면 첫 공격이 올 거야.”
완식의 경고를 되새기며 걸음을 옮기는 재호.
쫑긋-
그리고 평소 이름값 못하던 엘프들의 귀가 이번엔 큰 활약을 했다.
“알시아 님! 조심하세요!”
티나의 외침과 동시에 재호의 본능도 위험을 감지했다.
콰아앙-!
안개를 뚫고 내리찍힌 거대한 기둥.
그리고 이미 몸을 날려 피한 재호는 자신의 무기들을 꺼내 양손에 쥐었다.
“나타났다!!”
“저놈이야!!!”
쿠르르-
다시 안개 위로 사라지는 기둥.
하지만 재호가 느낀 본능은 저게 아니었다.
또한 엘프들이 들은 것 역시.
쐐애애액-
재호의 뒤통수로 검은 섬광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