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공사 책임자로 패로우를 세우고 별 탈 없이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 재호는 라셀 왕국을 찾았다.
아트리우스 쪽에 엘리시아 화원의 비자 시스템 결정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투차르로 가기 전, 수도를 들러 라셀 국왕을 만나기로 했다.
리픈 강에 대해선 서면 상으로 합의를 했으나, 직접 만나 설명을 해 주는 게 예의이기 때문.
“라셀 왕 기분 많이 안 좋을 거다.”
함께 따라온 테일러가 나지막이 말했다.
“줬던 걸 빼앗았으니 당연하겠지.”
재호도 충분히 각오한 일.
“그런데 넌 왜 따라오냐?”
“응? 나?”
굳이 테일러가 올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재호가 라셀 국왕을 만난다는 소식에 냅다 달려온 것.
“흠흠, 좀 봐주라. 라셀 국왕 앞에서 어깨 힘 좀 넣게.”
“…….”
“나 그래도 라셀 왕국에서 나름 2인자로 통해. 그런데 최근 약발이 점점 떨어지는 거 같아서 재충전해야 해.”
그래서 재호 옆에 빌붙은 것이었다.
“그런 건 좀 적당히 알아서 하면 안 되냐? 땅도, 권력도 가지고 있는 놈이 왜 그래?”
“닥쳐! 그런 게 쉽게 되었으면 뉴월드에 널린 게 플레이어 귀족이었겠지! 네가 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도 다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려.”
그리고 재호가 인어들에게 볼일도 있단 걸 알게 되었으니 무조건 따라붙을 생각이었다.
“결국 잿밥 때문이었군.”
그렇게 투덕거리며 도착한 라셀 왕성에서 재호는 라셀 국왕과 독대했다.
“알시아 대왕!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이냐!”
재호를 보자마자 꽥 소리를 지르는 라셀 국왕.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망정이지, 봤다면 기겁을 할 그녀의 행동이었다.
엄연히 지금의 재호는 제국으로부터 대왕의 칭호를 허락받았으며, 따지면 라셀 국왕보다 급이 높아졌다 할 수 있는 상황.
“하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녀의 태도에도 재호는 상관하지 않고 대답했다.
“마탑 연합에서 간섭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마탑…….”
라셀 왕국 입장에서 또한 짜증 나는 존재.
한때 이곳에 있던 적탑이 왕국이 쇠하자 뒤도 보지 않고 떠나 버린 걸 생각하면 아직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런 불만을 당사자 중 한 명인 재호 앞에서 털어놓을 순 없는 일.
“그래… 마탑 하나도 아니고 연합에서 나섰다면 별 수 없긴 하지……. 하지만 알시아 대왕 그대는 분명 대안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이렇게 온 거죠. 뭐, 들어 보시면 폐하도 만족할 겁니다.”
여전히 투차르가 아트리우스와의 교류 최전선이긴 하지만 페르마 대운하가 완공되는 순간, 그것도 유명무실해질 터였다.
게임 초기부터 계속 우호적으로 지내고 있는 라셀 왕국이었기에 모른 척하기도 어려웠기에 재호는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페르마 대운하와 이어지는 바다 쪽에 슈티물 왕국에서 항구 도시 하나를 세우기로 했는데, 이참에 투차르와 슈티물의 신생 항구 도시와 직접 교역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
마치 ‘그게 대안이야?’란 표정.
“사실 라셀 왕국의 위치가 썩 좋은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왼쪽으론 험준한 산맥, 위로는 사막, 나머지는 바다.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곳이라 타국과의 교류도 어렵지만 마탑 덕분에 그나마 살 만했던 거 아닙니까?”
“…….”
가슴 쿡쿡 찌르는 아픈 이야기들에 라셀 국왕은 시무룩해졌다.
실제로 그녀는 최근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스스로 가장 큰 문제로 꼽은 건 지나칠 정도로 어린 나이.
그 탓에 내부의 귀족들을 통솔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었고, 주변국들은 제대로 상대도 해 주지 않았으니.
라셀이 재호에게 호감을 가지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트리우스와의 교류가 시작되면 자신의 입지를 조금 높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재호가 알아서 다 해 준 건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하지만 슈티물 왕국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재호는 생각보다 라셀 왕국의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레드벌룬의 정보나 테일러를 통해 듣는 이야기 등등, 수준 높은 정보들을 많았던 것이다.
“동대륙 쪽에 수많은 군소 나라들이 있지만 그래도 가장 정통성 있는 나라는 세 곳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셀 왕국, 슈티물 왕국, 그리고 엘리시아 화원.
“…엘리시아 화원을 정통성 있다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느냐?”
“뭐, 세세한 건 적당히 넘어가자고요. 어쨌건 세 나라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
“모두 동대륙의 가장 끝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죠.”
재호가 떠올린 구상은 동대륙 트라이앵글.
즉 라셀 왕국과 슈티물 왕국, 그리고 엘리시아 화원까지 하나의 거대 연합국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미래에는 이 동대륙의 작은 나라들도 이 연합국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 계획은 단순히 라셀 왕국을 달래기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만든 계획이죠.”
“먼 미래라면…….”
“마탑이 왜 제국이나 교단들을 상대로는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거겠습니까? 바로 덩치가 크기 때문이죠.”
그러니 새로운 동대륙 연합체를 만들어 외부 간섭에 최대한 영향을 받지 않을 힘을 얻는 것.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십대 초반의 어린 왕을 상대로 하기엔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다행히 라셀 국왕은 바보가 아니었다.
“흐음……. 나쁘지 않은 것 같구나.”
그건 확실히 라셀 국왕의 왕권 강화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동쪽을 지배하는 왕들의 합의로 손을 맞잡는다면 휘하의 귀족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투차르의 일도 아예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아트리우스와의 교류를 위한 항구는 각 나라마다 하나씩, 총 세 개가 되는 겁니다. 그걸 슈티물 왕국 쪽에도 조건으로 걸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비자 관리소는 엘리시아 화원 하나가 되겠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교류를 통해 발생할 막대한 부가 가치들은 손해를 충분히 메우고도 남으리라.
“어때요? 괜찮지 않아요?”
재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진행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이냐?”
“일단 아트리우스 쪽과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어야 하겠죠. 이번 방문이 그걸 위한 것이기도 하고.”
라셀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만 하도록. 왕실 쪽에서 전적으로 지원을 해 줄 테니.”
“하하, 감사합니다.”
그렇게 라셀 국왕과의 자리가 마무리되고 성을 떠나나 싶었으나…….
[라셀 왕국의 수호신 <프란케어>가 당신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왕성을 떠나기 전에 떠오른 알림.
“?!”
“왜 그래?”
재호가 멈칫하자 함께 걷던 테일러가 물었다.
그에겐 들리지 않은 걸 보면 프란케어는 재호에게만 말을 걸어온 것.
“이상하네. 예전에 여기 잠입했을 땐 우리 둘 다 말을 걸더니.”
“누구?”
“프란케어.”
“그게 누구야?”
“…….”
아무래도 이 꼴이라 무시한 거 아닐까 싶었다.
[라셀을 구원해 준 이방인이여. 그대에게 경고한다.]
“음?”
설마 라셀 국왕을 너무 호구처럼 이용해 먹기만 한 것 때문에?!
[대륙의 흐름이 불안하다. 머지 않은 시기에 큰 위험이 다가올지도 모르니…….]
[*퀘스트*]
[라셀 왕국의 수호신 프란케어는 대륙의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끝?”
퀘스트인데 이렇게 끝?
“뭔데?”
옆에 있던 테일러에게 재호는 퀘스트를 보여 주었고, 그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이, 이거…….”
“응? 설마 뭐 아는 게 있어?”
의미심장한 테일러의 반응에 기대를 가졌지만.
“생각났다! 프란케어! 어떻게 난 모른 척 할 수 있냐! 그래도 나 여기 제법 자주 왔는데!! 우리가 남이야?!”
아쉽게도 전혀 다른 이유였다.
“근데 무슨 소리야? 대륙에 위험이라니?”
“그야 나도 모르지. 뭐,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건…….”
라셀 왕국의 수호신이 경고를 한 걸 보면 동대륙 쪽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게 아니면 단순 대륙 전체에 대해 모든 수호신들이 경고를 했을지도 모르고.’
다만 라셀 국왕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프란케어가 보기에 라셀 국왕은 아직 이런 무거운 짐을 지기엔 모자라드는 뜻이려나.”
“그야 당연하지. 네 덩치만 봐도 너한테 부탁할걸?”
“…….”
테일러의 쓸데없는 소리는 무시한 채 재호는 투차르로 향했다.
* * *
투차레아 백작에겐 사실 따로 논의할 것도 없었다.
그는 이번 일에 대해 딱히 권한이랄 것도 없었고, 이미 라셀 국왕 선에서 정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재호 또한 투차레아 백작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온 것이었고.
촤아- 촤아-
테일러가 열심히 노를 저어 바다 한가운데로 나온 조각배.
“이쯤이면 되냐?”
재수 없는 투차레아 백작을 보는 거였으면 테일러가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을 거였다.
“응,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재호는 품에서 <아트리우스 산호구>를 꺼내 사용했다.
쏴아아아-
서서히 일어나는 소용돌이.
“오오!!”
테일러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기다렸다.
5분… 10분…….
“뭐냐. 왜 안 와?”
조금 김빠진 테일러의 목소리.
“기다려 봐. 공간이동이랑 달라서 시간이 좀 걸려.”
게다가 아트리우스는 완전 반대편 바다에 있는데다 대륙을 크게 돌아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릴 터였다.
그렇게 한참 기다려 마침내 아이쉬가 나타는 건 약 20분 뒤.
“친구!”
철썩-!
아이쉬가 수면 위로 솟아오르며 재호와 포옹했다.
여전히 적극적인 그들의 우정 표현.
“잘 지냈어?”
“하하, 물론이지! 요즘 그대가 말한 [víːzǝ]를 준비하느라 다들 바빴지.”
그러면서 아이쉬는 미역 같은 종이를 재호에게 건넸다.
그리고 재호 역시 자신이 준비해 온 문서를 건넸고.
“그럼 각자의 내용을 검토해서 다시 보자고.”
“좋네! 그럼 이만!”
첨벙-
다시 소용돌이 너머로 사라지고 바다는 자시 잠잠해졌다.
“…끝이야?”
당황한 테일러의 물음.
“그러면?”
“아니… 아트리우스로 간다거나 같이 낚시라도 하거나… 뭐 그런 거 안 해?”
“아니? 어차피 너 인어 보고 싶다고 했잖아. 봤으면 됐지.”
“…….”
아이쉬의 꼬리도 못 본 테일러.
“돌아가자.”
힘없이 노를 젓는 테일러의 어깨가 물 아래로 잠길 정도로 축 처졌다.
* * *
어두운 밤하늘 아래, 파랗게 빛나는 사막의 모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고요한 대지를 수십 명의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들의 얼굴엔 검은 바탕에 붉은 점이 찍힌 가면에 씌워져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꽃매미단!
재호와 엘리시아 화원을 미워하는 이들의 연합체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은 등장과 동시에 사라지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엘리시아 화원을 습격하던 날, 갑자기 나타난 전설 NPC 키노에게 수뇌부들이 잡혀 버린 것이었다.
그 이후로 꽃매미단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몇 달 만에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다시 엘리시아 화원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건 미친 짓이란 거 이젠 잘 알았다.
“오늘이야말로 간부들을 구출하고 다시 비상하는 날이다!!”
바로 여전히 붙잡혀 있는 수뇌부들을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급조된 단체라기엔 상당히 끈끈한 결속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현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을 다시 뭉치게 만들어 준 것은 돈!
다른 건 몰라도 꽃매미단의 간부들이 돈 하나는 많았으니까.
손꼽히는 최상위 프로게이머 이수민.
크로킹을 위시한 전 불곰 길드 간부들.
거기다 아직 화원에 잡혀 있는 피스앤러브의 트리플체인까지.
특히 트리플체인의 길마인 하우스 동준은 일성 그룹의 사람이기도 했고.
그들의 경제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외부 용병까지 끌어들여 이번 작전을 준비했다.
단, 키노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흑마법사 키노는 자신들의 힘으로 절대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지난 몇 달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눈을 피해 탈출하는 걸 목표로 삼고 기다렸다.
절대 실수 없이 탈출할 수 있을 순간을…….
그것이 바로 오늘 밤!
“대체 뭔 짓을 꾸미는 건진 모르겠지만, 정보대로면 오늘 키노와 장로 모두가 자리를 비운다.”
수민은 크로킹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일반 흑마법사들 또한 보통 수준은 아니니 각오해야 할 거다.”
“흥, 난 크로킹이다. 여기 붙잡혀 피를 빨리고 있다 하더라도 전투 감각은 언제나 날카롭게 벼려져 있지!”
“후후, 기대하지.”
신호는 구출을 위해 사막을 찾은 꽃매미단원이 주기로 했다.
키노와 흑마법사들이 이곳을 완벽히 벗어난 걸 확인하는 순간, 탈출을 시작하는 것으로.
만약 지상의 꽃매미단 쪽에서 흑마법사들의 이동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면?
그러면 계획은 말짱 꽝이 될 수도 있었다.
“괜찮을 거다. 그만큼 돈을 많이 뿌렸으…….”
크로킹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려던 순간.
꾸우웅-
갑자기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작됐군.”
“후후, 우리도 움직여 볼까?”
수민과 크로킹이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