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1장로와는 제법 안면이 있었다.
직접 싸워 본 적도 있었고, 키노와 함께 전투에 나선 적도 몇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전설 NPC라는 것 말곤 전혀 없었다.
‘그래도 강하긴 진짜 강하지.’
그 정도의 전투력을 가진 NPC를 무한정 대여한다?
“좋아. 함께 노력해 보자고!”
거절하기엔 너무 강력한 지원이었다.
이런저런 부차적인 문제들이 생길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후후, 잘 생각했느니라.”
화르륵-
키노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바닥에서 솟아오른 검은 화염.
그 안에서 1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었겠지? 앞으로 너는 정령화장을 돕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줄칸과 동년배로 보이는 일장로는 재호를 향해도 다시 허리를 숙였다.
“기오스입니다.”
[독사과 흑마법사단의 1장로가 당신을 따릅니다.]
전설 NPC나 되면서 명령 한 마디에 바로 복종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키노의 장악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거겠지.’
무력뿐 아니라 리더쉽 또한 대단하다는 뜻.
만약 정말로 흑마법사 탑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탑주가 되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럼 부탁하느니라. 그리고 나 또한 이곳에서 떠나 거점을 옮길 것이니 앞으로는 만나고 싶으면 북쪽의 숲으로 찾아오거라.”
“응? 북쪽 숲이라면 엠베이 숲?”
“제법 재밌어 보이는 연구 대상들이 많더구나.”
“뭐… 그쪽에서 관심을 보일 만한 것들이 좀 많긴 하지. 그래도 아무나 막 잡아가서 피 뽑지는 마. 아, 그리고 거기 내가 심어 놓은 악마초들도 몇 개 있는데 뽑지 말고.”
“오호, 그것이 악마초들이었구나.”
“?!”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이 그 악마초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악마 혼혈이지만 마계의 식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니 묘한 호기심과 동질감을 느낀 모양.
“함부로 뽑으면 안 돼! 구하기 더럽게 힘든 것들도 있다고!”
재호가 얼른 덧붙였다.
내가 쓰지 않더라도 남 주기는 아까운 법!
“후후…….”
하지만 재호에게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키노는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불안한데.”
키노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쓸데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이야 생기지 않겠지만…….
“음? 폐하! 그 옆에 불길한 기세를 흘리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때 키노가 사라지는 것에 딱 맞춰 도착한 스트로앤 주교와 사제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마법사입니다.”
“마법사 말입니까? 그런데 어찌 저토록 사특한 기세를…….”
흑마법사 특유의 기질은 아무래도 신성력과는 상극인 모양.
스트로앤 주교만이 아니라 다른 사제들 또한 긴장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저들이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게 만들려면 사실대로 말해 주는 게 좋을 듯싶었다.
“실은 흑마법사입니다.”
“으음?! 그랬군요. 어쩐지…….”
납득한 표정의 스트로앤 주교.
왠지 재호와 아는 사이만 아니었다면 당장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 경계를 늦추셔도 됩니다. 우연히 지나가다 이쪽에서 싸움이 벌어진 걸 보고 왔다더군요.”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더 이상 경계하진 않겠습니다. 자네들도 거기까지 하게.”
그의 명령에 다른 사제들도 긴장을 풀었다.
그리곤 시작된 본격적인 야단법석.
“폐하! 축하드립니다! 아니, 감사드립니다!”
“아아! 아나볼릭 님께서 직접 강림하셨다니!”
“안타깝습니다! 그 빌어먹을 놈들만 아니었더라면 직접 두 눈에 담을 수 있었을 터인데……!”
방금까지 심각하던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요란을 떨어 댔다.
“자, 잠깐!”
근육질의 남자들이 재호 주변에서 악악-거리며 소리치는 건 그리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이, 일단 돌아갑시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재호가 소리쳤다.
* * *
시간은 거슬러, 아나볼릭 강림 이전.
바깥에서 전투가 벌어진 사이, 그것을 꽃매미단의 신호로 이해한 수민과 크로킹 일당은 탈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다행히 정말 성소 내부엔 다른 흑마법사들이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내부 인원은 키노가 재호에게 말했던 엠베이 숲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겼던 것.
쿠르릉-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한 구조물들.
“음? 뭐, 뭐야?!”
“위에서 뭔 짓거리를 하는 거지?”
꼭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리니 지하에 있는 입장에서 겁이 나는 게 당연한 일.
“상관없어!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맞는 말이야! 가자!!!”
그들은 출구를 찾기 위해 서둘렀지만, 절대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곳엔 아직 키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왜 텅 빈 성소에 키노만 있었던 것일까?
“다들 어딜 가는 거니?”
“?!!”
“헉!”
부러질 듯 돌아간 고개.
그리고 그들은 위압감을 뿌리며 선 키노를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공포로 새겨진 그녀의 고혹적인 미소.
“후후, 보아하니 오늘 성소가 빈다는 걸 미리 알아낸 모양이구나. 다들 이리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걸 보니.”
“…….”
“큽…….”
뭐라고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상대는 괴물 그 자체.
자신들이 모두 달려들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었으니까.
“다들 걱정 말거라. 어차피 너희들만 남겨 둔 건 다 이유가 있으니.”
더 이상 그들에겐 관심이 없다는 듯, 잘 손질된 자신의 손톱을 이리저리 살피는 그녀.
“그, 그게 무슨 말이냐……!”
가까스로 용기를 낸 수민이 물었다.
“간단한 말이니라. 너희는 더 이상 활용 가치가 없다는 뜻이지.”
즉, 그녀가 이곳에 혼자 남아 있던 건 폐기 처분을 위해서였다.
그녀의 생명과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생명력은 쭉쭉 빨리고 있었지만, 누적 한계치에 다다라 더 이상 가치가 없어졌다는 등의 복잡한 사정…….
하지만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었다.
너무 오래 잡혀 있었으니 시스템상의 구조가 시작된 것.
“우, 웃기지 마!!”
하지만 그들은 납득할 수 없었다.
자력 생존 탈출이 코앞에 두고 죽으라고?!
지금까지 죽고 싶어도 못 죽었는데, 이용만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린 살아서 나갈 거다!!!”
“우아아!!”
[사망했습니다.]
잔인한 현실.
결국 그들은 모두 죽어 탈출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타이밍 나쁘게도, 신의 강림을 직접 경험하는 것도 놓치게 되었고…….
* * *
아나볼릭 강림!
난데없는 깜짝 이벤트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상했다.
보나마나 황재호와 관련이 있는 일일 거라고.
-뻔하지 않냐? 애초에 그 근육 변태들이랑 교류하는 건 황재호뿐이잖아.
└그치. 근데 뜬금없이 왜 아나볼릭 교단이지? 거기 교세도 한참 떨어지는데.
└야, 여기에 제대로 된 정보를 아는 놈이 하나라도 있겠냐?
-이거 봤냐? 아까 갑자기 켜진 방송인데 난데없이 알시아랑 싸우더라. (링크)
└응? 이건 또 뭐임?
└엥? 진짜네? 덕수르트 방송이잖아.
└덕수르트가 누구임? 첨 들어 보는데.
└개인 방송 가끔 하는 사람인데 개고수임. 별로 유명하진 않음.
-덕수르트 이 사람 보니까 준 랭커네. 383렙이구만.
└ㅋㅋㅋ와 요즘은 383도 준랭커 취급하냐? 현실감각 어디?
└근데 왜 싸우는 거임?
└그냥 방송 켜지더니 대뜸 싸우던데?
-나 방송 다 봄. 세 줄 요약해 줌.
1. 황재호가 덕수르트 일당한테 습격당함.
2. 덕수르트 놈들이 황재호 거의 다 잡음.
3. 갑자기 아나볼릭 교단 나타나서 도망침.
└전후사정은 모조리 생략되어 있네.
└애초에 전후사정에 대한 내용이 없음. 그냥 서로 싸우다 도망침. 시간대를 보면 그 직후에 아나볼릭 강림이 일어난 거 같음.
└아깝네. 계속 있었으면 방송에도 잡혀서 떡상했을 텐데.
-야! 니들 여기서 떠들 때냐? 형은 당장 아나볼릭 교단 가입하러 간다!
└미친놈. 거길 왜 가냐?
└신이 나타났으면 앞으로 아나볼릭 교단이 1티어 되겠지.
└대가리는 폼이냐? 그걸 다른 교단들이 냅두겠냐?
└응~아냐~ 이제 아나볼릭이 1티어야~
언제나 그렇듯,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지만 제대로 된 정황을 하는 이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증명해 주듯, 엘리시아 화원에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아나볼릭 교단 주변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진정하고 줄을 서시오! 지금 교단에서도 파악 중이니……!”
아나볼릭 교단의 피게르 대주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몰려든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야간 상체 훈련도 중단한 상황.
‘허허,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정황으로 보면 아직 야간 구보에서 복귀를 하지 않은 스트로앤 주교와 관련이 있을 터.
그가 복귀해야 제대로 알 수 있을…….
“어?! 저기 알시아다!!”
그 순간, 누군가의 외침에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사막 쪽에서 걸어오는 재호와 아나볼릭 교단 사제들.
그 사이에 시커먼 옷을 입은 누군가가 보이긴 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진 않았다.
당장 중요한 건 그런 엑스트라가 아니었으니까.
“알시아 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혹시 신의 강림에 대해 아는 게 있으세요?!”
“3대 몇 칩니까?!”
쏟아지는 질문을 뚫고 아나볼릭 교단으로 들어선 재호.
“폐하! 스트로앤 주교!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으음? 그러고 보니 자네의 몸에서 흐르는 그 넘치는 신성력은…….”
피게르 대주교의 물음에 스트로앤 주교는 빙긋 미소 지었다.
“대주교님! 기뻐하십시오!”
피게르 대주교는 스트로앤에게 사막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모두 들었다.
그 뒤에 보인 반응은 다른 사제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오!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감격한 피게르 대주교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대주교님!”
“허허… 미안하군. 내가 추태를 보였어. 하지만 살아생전 아나볼릭 님의 강림을 직접 경험할 줄이야…….”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님에도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런 순수하고 신실한 신앙심에 아나볼릭이 응답한 것일 터.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대주교님.”
재호는 피게르 대주교를 불렀다.
“아나볼릭 님은 저한테 부탁을 하나 했습니다. 이미 스트로앤 주교님에겐 이야기를 했지만…….”
다시 한번 아나볼릭의 말을 전했고, 모든 걸 들은 피게르 대주교는 또 눈물을 흘렸다.
“아나볼릭 님께선… 늘 저희를 걱정하고 보고 계셨군요. 아! 죄송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주책이군요. 크흡…….”
“괜찮습니다.”
눈물을 훔치는 사소한 행동에도 전완근이 요동치는 걸 보고 있으면 나이 탓을 하는 게 웃기기만 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재호는 조심스레 물었다.
“교세를 키워 기존 주류 교단에 들어서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재호가 만나 본 다른 5대 교단들은 보통 꽉 막힌 존재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무력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
그건 곧 엘리시아 화원과의 충돌이라 할 수도 있었다.
“허허, 걱정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피게르 대주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들은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
울끈-
“단지 교세를 키우기 위해 의미 없는 살생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습니다.”
불끈-
상당히 거슬리는 가슴 근육의 움직임.
“종교의 진정한 가치는 만민의 안식과 마음의 평화를 제공함에 있습니다. 그 가치를 좇다 보면 대륙의 모든 이들이 저희를 인정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 아나볼릭 교단의 진심이긴 할 것이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정신을 재호는 몇 번이나 보았으니까.
다른 5대 교단과 비교한다면 아나볼릭 교단은 생긴 것과 다르게(?) 진정한 평화 교단.
단,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나볼릭의 요구는 그들의 마음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나볼릭 교단의 세를 넓히라는 소리로 들렸으니 말이지…….’
굳이 이들에게 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긴 했다.
그래서 재호도 말을 아꼈고.
‘냄새가 나.’
나름 뉴월드의 고인물인 재호는 확신했다.
‘또 나만 발바닥 불나도록 뛰어다니게 될 미래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긴 했다.
늘 그런 식으로 게임을 해 왔으니.
한동안 한적하던 재호의 퀘스트창이 묵직해지면서, 뉴월드의 큰 굴레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 위스트넌 대륙에서 뭉친 삼총사, 베어고릴즈, 다키스트, 골드투스 또한 다른 큰 굴레를 굴리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