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길드 연합에 대한 일을 마친 뒤, 재호는 부러진 스태프를 챙겨 적탑 구역으로 향했다.
만약 빅썬더가 알았다면 거품을 물며 잔소리를 퍼부었을 테지만 다행히 지금 그는 로그아웃하고 없었다.
어설프게 다른 마법사들에게 보여 주는 것보다는 곧바로 뤼니오르를 찾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 재호.
마침 이번 일을 위해 그가 특별이 신경 써 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도 해야 했다.
“허허, 뭘 그런 것으로. 알시아 대왕 그대는 우리의 최대 고객이지 않은가?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 일이지.”
뤼니오르가 겸양을 보이며 말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재호는 잘 알았다.
‘화원에서 쓰는 마탑 지원금을 제외하면 다른 것도 없는데, 매번 레드벌룬을 통해 도움을 주니까.’
과할 정도의 호의를 받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뤼니오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엘리시아 화원에서 꽃템의 직거래를 적탑 소속 마법사들에게 해 주었고, 덕분에 마법사들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뤼니오르는 그것에 크게 만족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답할 뿐이었다.
“그래서 갔던 일은 잘 되었는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번에도 아주 난장판을 벌려 놓았다던데.”
“하하… 어쩌다 보니 일이 커졌더라고요. 드시는 괜찮죠?”
“그 친구는 예전부터 목숨줄이 질겼다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 게다가 이번에 황금매 쪽과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더군.”
“좋은 관계라…….”
아마 일방적으로 좋은 관계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대의 눈치를 보아하니 다른 이유로 찾아온 듯싶은데?”
역시나 눈치 빠르게 알아챈 뤼니오르.
재호는 그에게 무무만의 이름을 꺼냈다.
“허어- 무무만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로군. 흠… 오래되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가 시도하던 이상한 연구가 있었지.”
놀랍게도 뤼니오르는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알아챘다.
“맞아요. 초월체!”
“아! 맞아. 바로 그거야. 꽤 재밌는 발상이었지. 마나를 이용해 마법사의 약점인 신체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거였지.”
수염을 가만 쓰다듬는 그는 기억을 더 끄집어내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꽤 흥미롭기 했지만 그것이 백탑 쪽에선 그 연구를 금지시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반쪽짜리라고 하더라도 일부가 성공했다니 놀랍군.”
하지만 뤼니오르의 반응은 절대 감탄이 아니었다.
그저 무무만 개인의 업적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는 것일 뿐, 실제로는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닌 모양이죠?”
재호의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미소 지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지. 마법사의 약점이 전사들보다 떨어지는 육체 능력이라는 건,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지.”
뤼니오르가 말하는 바는 그러했다.
마법은 피지컬이 아닌 뇌지컬이 필요한 분야.
그것을 부정하고 육체 능력에 욕심을 내는 것은 잿밥에 눈독 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뛰어난 마법사는 얼마든지 강한 기사들도 상대할 수 있었다.
“애초에 육신을 마나로 구성할 정도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로 마법을 쓰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지 않은가?”
“어……. 그것도 그러네요?”
듣고 보니 맞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직접 상대해 보니 강하긴 강하던데요?”
“하지만 결국 그대가 이기지 않았나?”
결과적으론 그러했으나 무무만이 꿈꿨던 완성형 초월체였다면 달랐을지도 몰랐다.
“만약이란 없다네. 그리고 백탑에서도 괜히 반대한 것이 아니지. 그들이 앞뒤 막힌 외골수이긴 하지만 바보들은 아니거든.”
무무만은 그들을 향해 변화를 두려워하는 꼰대들이라고 폄하했으나 뤼니오르가 말하는 현실은 좀 달랐다.
“그런 파괴적인 힘을 감당하려면 결국 무언가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 과연 무무만 그자는 어땠을지……. 아주 높은 가능성으로 이 세계 밖의 힘을 빌렸겠지.”
그 말을 들은 재호는 뤼니오르의 혜안에 깜짝 놀랐다.
실제로 뤼니오르는 악마의 힘을 빌렸으니까.
결국 이리 될 것을 과거 백탑은 알고 있었다.
재호가 백탑과 사이가 좋지 않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악인인 것은 또 아니었다.
이 세계에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을 불러올지도 모르는데, 무무만이 그 연구를 더 진행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기에 연구를 금지시키고 기록을 삭제했던 것이다.
‘하긴 거기서 하던 짓거리를 보면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긴 했지.’
어쨌든 재호가 방문한 건 무무만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한 게 아니었다.
“이것 좀 봐 주실래요, 뤼니오르 씨?”
재호는 무무만의 부러진 스태프를 내밀었다.
“음? 이건… 혹시 무무만의 스태프인가?”
보자마자 알아챈 그는 눈을 빛내며 받아 들었다.
“왠지 여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제 능력으론 알 방법이 없더라고요.”
“허허, 그렇지. 아무리 뛰어난 야장들이라 해도 마법사의 스태프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지.”
뤼니오르는 허공에서 웬 작은 외눈 안경을 불러내더니 눈에 걸쳤다.
“보자……. 일단 부서진 면을 보아하니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 같군. 마력의 잔향을 보아하니 스태프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버티지 못한… 음? 오호라…….”
한참 보던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놀라워했다.
“대단하군. 이건 단순히 부러진 게 아니었어.”
“부러진 게 아니라고요?”
“그렇다네. 전혀 달라. 쉽게 말하자면 봉인이라고 할 수 있겠군.”
전혀 예상 못 한 이야기에 재호도 덩달아 놀랐다.
“부러진 상태가 봉인된 거라니…….”
어처구니없는 신 개념 봉인 방식이었다.
“허허, 나도 이런 건 처음 보는군. 하지만 이 마나의 흐름을 보면 확실해. 이 스태프가 이 힘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려 마나의 순환을 끊어 버린 것으로 보이네.”
“…….”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마법의 세계.
“그 말은 스태프가 살아 있기라도 하단 건가요?”
“표현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아무튼 이 스태프에는 강대한 힘이 멈춘 채 봉인되어 있어. 하지만 쓸 수 없는 힘이지. 이 정도라면 사용자를 파괴시킬 수도 있을…….”
그 순간 뤼니오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상태로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야 알겠군.”
뤼니오르는 말했다.
“왜 무무만이 초월체를 꿈꿨는지.”
거기까지 말하니 재호도 눈치껏 알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 스태프를 쓰려고……?”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뤼니오르는 굳은 얼굴로 부러진 스태프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이건 보통 물건이 아닌 듯하군. 혹시 괜찮으면 내게 조사를 맡겨 볼 생각은 없는가?”
[*퀘스트*]
[무무만의 스태프에는 무언가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뤼니오르는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길 바라며 당신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습니다.]
[수락 시, 스태프의 비밀을 알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절 시, 스태프를 돌려받습니다.]
퀘스트라고 뜨긴 했지만 성패나 보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저 수락 또는 거절의 선택지만 제공될 뿐.
‘이런 건 처음 보네.’
단순 대답만을 원하는 퀘스트.
심지어 거절을 하더라도 다른 패널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시스템 알림이 뜬 걸 보면 뭔가 큰 비밀이 있다는 뜻이지.’
이것이 다른 사건의 시발이 되리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재호는 당연히 수락했다.
뤼니오르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NPC 중 하나였으니까.
* * *
무무만의 스태프에 대해선 일단 뤼니오르에게 맡겨 두었다.
하지만 아직 재호는 이번 원정에서 얻은 미스터리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그것을 위해 찾아간 곳은 이제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엘리시아 화원 기사단 건물.
그곳에 있는 악마 기사단장 패로우를 찾았다.
“패로우! 있냐?!”
“음? 폐하?”
다행히 패로우는 대운하 감독을 위해 공사 현장으로 막 나가려다 재호와 만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것 좀 봐.”
재호는 바로 룬가 왕국의 황고 도박장에서 얻은 정체불명의 장치를 꺼냈다.
[???]로 표시되는 괴물건을 본 패로우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지더니 재호에게 기대감을 심어 주었다.
“그, 그건 어디서 난 겁니까?!”
“이게 뭔지 알겠어?”
“모르겠습니다만?”
“…근데 그 반응은 뭐야?”
“아……. 거기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마기를 느꼈습니다. 뭔가 묘한 느낌이 드는군요. 그런데 일단은 다시 넣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서 패로우가 뒤쪽의 훈련장을 가리켰다.
“헉?!”
잠시 망각하고 있던 이 상자의 기능.
“끄으으-”
“히, 힘이…….”
축 늘어져 바닥을 기고 있는 훈련 기사들의 모습에 재호가 아차 싶었다.
여기에 영향을 안 받는 건 자신과 악마인 패로우뿐이었다.
결국 사람이 없는 곳을 피해 사막으로 나왔다.
쿵-
바닥에 내려놓은 커다란 장치를 패로우가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확실히 마계의 장치입니다. 아마 이 장치를 만든 곳을 나타내는 문양이 있을 겁니다. 그것만 알아내면 이게 어떠한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도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패로우는 눈을 부릅뜨고 표면에 어지럽게 음각된 문양을 살폈다.
“음음, 이건? 오호… 그렇지. 아! 이거군. 아, 아닌가?”
중얼거리며 육면을 모두 살핀 패로우가 마침내 무언가를 알아냈다.
“여기 이 문양 보이십니까?”
“…전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데도 그게 문양인지 확인이 불가능했다.
“이건 로두카 대공의 상징입니다.”
“로두카?”
“마계의 일곱 대공 중 한 명이자 색욕의 대악마입니다.”
“뭐? 대악마가 연루되어 있다고?”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
하지만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닙니다. 이건 로두카 대공의 이름을 걸고 만든 물건입니다.”
즉, 로두카 브랜드라는 소리였다.
“제가 느낀 이상한 느낌의 정체는 아무래도 쾌락인 모양입니다. 단, 사람한테는 조금 다른 효과를 일으키는 것 같군요.”
“…….”
거기까지 들은 재호는 불쾌한 표정으로 슬쩍 거리를 벌렸다.
“…징징이 너도 나한테서 좀 떨어지면 안 될까?”
-?
자신의 고정석이던 앞주머니를 알드리온에게 빼앗겨 어깨에 앉아 있던 징징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미안한데……. 방금 들었잖아. 악마들한테는 좀 거시기하다고.”
-???
“이해 못 한 것 같은데…….”
-아니. 이해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건 너무 어처구니없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흠흠.”
미친놈을 보는 듯한 징징이의 시선을 재호는 헛기침으로 넘겼다.
“어쨌든 색욕의 악마라니까 그렇다고 쳐. 이걸 대체 왜 거기 뒀을까?”
무무만의 일기장엔 이 장치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어쩌면 그 역시 잘 몰랐을지도…….
“쾌락을 느끼게 만드는 물건이라……. 정말 사악하군요.”
“그게 왜 사악해?”
“왜 쾌락을 느끼게 만들겠습니까? 쾌락을 느끼지 못하는 놈들이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솔로들을 향한 기만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래. 알았어. 그런데 애초에 악마 자체가 태생적으로 사악한 놈들 아냐? 엿 먹이려고 태어난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허, 마계도 엄연히 악마 사는 곳입니다. 설마 악마들끼리 매일 서로를 찔러 죽이면서 살진 않을 것 아닙니까? 거기서도 나름의 삶이 있습니다.”
재호는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정보는 없어?”
“정확한 건 이 물건의 원래 주인이나 다른 악마라면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전문가도 아니니 여기까지가 한계로군요.”
“쯧, 아쉽… 지는 않네. 생각해 보니 충분한 것 같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재호는 손가락을 튕겼다.
“이거 로두카와 관련이 있다는 건 확실하지?”
“그건 확실합니다.”
“좋아. 고마워.”
“음? 해결된 겁니까?”
“아직은 아니지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있어.”
어쩌면 이쪽으론 악마인 패로우보다 더 잘 알 수도 있을 만한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