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수면 아래로 잠수한 고잉헬 호.
곧이어 남겨진 해적선들 위로 포탄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폭음과 흩날리는 파편들.
"으아아악!!"
"뭔데?! 왜 우릴 공격하는데!!"
배에 타고 있던 이들의 혼란스러운 비명이 육지의 선장들에게까지 들려왔다.
"이 더러운 자식! 결국 뒤통수를!!"
"죽여!!"
더 이상 동맹은 없었다.
배가 없는 해적은 해적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건 바로 말굽섬에 정박된 롱클린의 해적선들을 탈취하는 것!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말굽섬을 드나들 수 있는 통로는 오직 하나인데, 결국 재호가 용납해 주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이곳에서 멀쩡히 나갈 확률은 극도로 낮을 테니까.
‘그러나 알시아는 롱클린 때문에 온 것일 거다!’
‘롱클린을 붙잡아 알시아에게 넘기고 우린 보내 달라고 하자!’
하지만 롱클린을 상대로 산 채로 붙잡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최상위권은 아니라지만 엄연히 고레벨 플레이어인 롱클린이었고, 해적 플레이어 중에는 단연코 최고 레벨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아무리 저레벨 NPC라고 하더라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해적은 그를 보호하고 있었으니 성공을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해야 한다!"
"뚫어! 롱클린을 잡아라!!!"
그렇게 육지에서 한바탕 벌어진 사이, 잠수한 고잉헬 호는 은밀히 선착장으로 향했다.
파괴된 해적선들의 잔해나 포탄들이 갑판을 두드렸지만, 미리 펼쳐 놓은 단단한 상갑판 덕분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어, 엄청난데요? 이 정도 포격이면 아무리 고잉헬 호라고 해도 반파 당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여전히 상공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탄탄보의 귓속말을 받은 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무리는 하지 않길 잘했네."
아무리 내구성이 뛰어나고 자가 수복이 가능한 괴물 배라고 하더라도 단시간에 큰 피해를 받으면 침몰할 수도 있었다.
퉁-투둥-
머리 위를 뒤덮은 철판에서 끊이지 않는 충격음.
그 소리가 서서히 줄어들 때쯤, 고잉헬 호의 무한궤도가 낮아진 수심 탓에 바닥에 닿았다.
그건 곧 육지와 가까워졌다는 뜻.
구웅-
배를 그대로 정지시킨 후, 재호는 소수의 전력을 이끌고 배를 나섰다.
배를 다시 수면 위로 노출해 봐야 자칫 집중 공격의 대상만 될 위험이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해적들끼리 싸우는 중입니다. 롱클린도 그 사이에 있고요.
공중에서 망원경을 이용해 전투 중인 이들의 면면을 확인한 탄탄보가 정보를 전해 주었다.
"좋아. 방향을 알려 주면 그쪽으로 이동할……."
막 도착해 일행이 뭍으로 나오는 순간, 롱클린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던 해적들과 딱 마주쳤다.
"헉?! 적이다!"
"이쪽에도 적이 나타났다!!"
물에서 올라올 만한 사람이라고 하면 결국 저쪽에서 두들겨 맞는 해적들밖에 없으니 곧바로 적으로 판단한 그들.
그대로 달려들려던 그들은 수면 위로 머리만 나온 재호를 보곤 흠칫하며 멈췄다.
"서, 설마……?!"
재호의 분위기는 평범한 해적 NPC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과했고, 특히 이런 해적 졸개들에게 효과적인 칭호도 갖고 있었다.
[<바다 상남자> 칭호 효과로 인해 해적들의 적개심이 줄어듭니다.]
[<바다 상남자>]
[해적들이 당신의 용기에 존경과 찬사를 보냅니다.]
[해적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음?"
예상 못 한 해적들의 반응에 재호는 수면 아래에서 준비 중이던 연장(?)들을 잠시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재호를 보면서 적개심을 태우긴커녕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으니…….
"뭐야? 쟤들 왜 저래? 안 덤벼?"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버팔로도 해적들의 이상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조져 버릴까? 솔직히 별로 세 보이지도 않는데."
"…아니, 안 그래도 될 것 같아."
어렴풋이 이 상황을 파악한 재호.
‘해적들의 충성심이란 결국 사람이 아니라 힘에 충성하는 것.’
특히 이런 말단 해적들은 더했다.
해적단에 대한 충성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존재들.
‘아마도 롱클린은 해적단을 똑바로 장악하는덴 실패한 모양이네.’
이 정도 규모의 해적단을 플레이어 한 명이 장악하는 건 당연히 어려웠다.
재호가 만났던 ‘진짜’ 대해적들도 선원을 이만큼이나 데리고 있진 않았었으니까.
즉, 지금 눈앞의 해적들은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책임져 줄 수 있는 강자라면 얼마든지 갈아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아무나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아니었다.
시베리아 바다호랑이 길드원을 먼저 발견했을 때 해적들이 보인 반응은 지금과 전혀 달랐으니 말이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재호는 뭍으로 완전히 걸어 나오며 물었다.
"우, 우리가 어떻게 알아!"
하지만 전신을 드러낸 재호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해적들은 이미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알시아다. 바다에서 먹고사는 녀석들이라면 내 이름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알시아? 알시아… 헉?!"
모를 수가 없었다.
짠물 좀 먹었다 하는 이들에게 ‘알시아’라는 세 글자는 공포 그 자체니까.
무려 대해적 다섯 명을 물고기 밥으로 만든 극악무도한 존재.
물론 그 과정이 순수 재호의 힘만으로 오롯이 해냈다고 보긴 어려웠으나, 바다 위의 실체 없는 소문엔 그 정도 디테일이 담기진 않았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는 그야말로 바다 위의 전설처럼 해적들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던 것.
"맙소사……. 알시아가 실존하는 거였어?"
"음?"
해적들의 넋 나간 중얼거림에 재호는 당황했다.
"거, 거짓말이 아닐까?"
"아니야. 저 위엄과 바닷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있는 모습을 봐."
마치 재호를 가상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 분위기.
‘설마 내가 했던 일이 해적들 사이에선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건가?’
아무리 바다 위에서는 소문의 전달력이 대륙보단 약하다고 하더라도 좀 심했다.
"그, 그러고 보니 배도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어!"
"헙?! 그렇다면 진짜로……!!"
소문으로만 듣던 전설의 존재가 진짜란 사실에 해적들이 받은 충격은 생각 이상이었다.
[해적들이 당신의 진가를 알아봅니다.]
[현재 당신을 향한 해적들의 존경심은 최대치입니다.]
[가려져 있던 당신의 바다 위 업적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롱클린 님이 해적왕인 줄 알았는데……."
"어,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지금까지 속았던 거라고?"
"그… 정말 알시아 님이 맞으십니까?"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의 해적들.
"그렇다."
"정말로 바다 위 적폐, 대해적들과 저주받은 해적왕 앙굴라를 담가 버린 뒤, 미련 없이 해적왕의 자격을 버려 버리고 떠난 그 알시아가 맞습니까?"
"해적왕의 자격을 버려……?"
앞의 말은 사실이었으나, 후술한 내용은 금시초문이었다.
애초에 당시 해적왕의 자격을 얻었다는 알림을 받은 적도 없었고.
‘당시에 투아디 녀석 덕분에 너무 날로 먹은 느낌이 강해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곰곰이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던 재호는 한 가지 가능성을 얻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당시에 고블린 대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내 자격을 전대 대왕이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었지.’
바로 고블린 대왕 투아디가 재호의 예술적인 폭발에 감명받고 죽음 직전, 재호를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앙굴라는 그런 게 없었다.
그냥 폭발에 휘말려 찍소리도 못한 채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즉, 재호에게 자격은 있으나 인정은 받지 못한 상태라는 것.
재호가 쌓아 올린 업적은 그렇게 바다를 표류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저 녀석들 반응을 보면 당시 일이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인 탓에 소문처럼 퍼져 나갔던 모양이네.’
재호는 이 복잡한 상황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플레이어들이야 재호의 영상을 통해 사건의 앞뒤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으나, NPC들은 소문 말곤 정보랄 게 없었으리라.
그래서 반쯤은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
‘당시 현장에 있던 해적들은 대부분 죽은 것도 원인 중 하나일 거 같군.’
어쨌든 결론적으로 말해, 해적들이 롱클린을 해적왕이라 생각하고 따르는 이유도 하나로 귀결되었다.
"혹시 롱클린이 그 일들을 자기가 했다고 주장했냐?"
"그, 그렇습니다. 그가 대해적의 증표 또한 갖고 있으니……."
플레이어 개인이 이만한 규모의 해적들을 긁어모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
그건 바로 업적 사기였던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그건 재호의 책임도 일부 있었다.
‘아참. 당시에 해적들 앞에서 테일러를 사칭하기도 했었지?’
정보의 신빙성을 떨어트릴 만한 짓을 스스로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가 해적들의 눈앞에 나타난 이상, 그 사기 행각은 바로 들통이 나 버렸다.
‘진짜’만이 가질 수 있는 숨겨지지 않는 패기와 위엄을 해적은 느낄 수 있었으니까.
[축하합니다! 당신은 새로운 해적왕이 되었습니다!]
[모든 해적 NPC들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당신은 공식적으로 대해적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단 대해적의 자격을 부여하는 순간, 해적왕 지위에 대한 도전권을 부여하게 됩니다.)]
[<포세이돈의 보살핌>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가호가 당신이 탄 배에 내립니다.]
[지속 효과 : 당신이 탑승한 모든 종류의 선박은 항해 속도와 선회력이 증가합니다.]
[사용 효과 : 당신이 탑승한 모든 종류의 선박이 파도의 힘을 받아 항해 속도와 선회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해적왕 고유 스킬입니다.]
[<마크베이와의 도박>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폭발의 신 마크베이와의 내기를 제안합니다.]
[내기에 승리 시, 화약을 사용한 모든 공격이 두 번 발동됩니다.]
[해적왕 고유 스킬입니다.]
어쩌면 진작 얻었어야 것들.
그것이 마침내 재호의 손에 들어왔다.
"오오오! 해적왕이시여!!"
털썩-
도미노처럼 줄줄이 무릎을 꿇는 해적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베리아 바다호랑이 길드는 넋이 나갔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 이번에도 흘러나왔다.
"게임 진짜 쉽게 하네……."
* * *
롱클린과 임시 해적 연합의 전투.
이미 연합의 의미는 무색해졌지만, 어쨌든 이 난전 속에서도 롱클린은 공통의 목표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롱클린은 점점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이, 이상해.’
이 상황에 롱클린은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왜 지원이 안 오지?’
자신이 온 바다를 돌아다니며 긁어모은 수많은 해적.
그들의 지원이 끝없이 이어져야 하거늘,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멈춘 상태였다.
"하하하! 당황한 표정이 뻔히 드러나는구나, 롱클린!"
"네 졸개들도 다 도망친 모양인데?"
"낄낄낄. 해적이 다 그렇지! 뒤질 것 같으면 일단 도망치고 보는 게 진짜 해적이라고!"
그만큼 흥이 오른 임시 해적 연합 선장들.
그리고 자신들 또한 ‘해적다움’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무조건 내가 잡아야 한다.’
‘롱클린을 잡아야 알시아와 거래가 가능해질 거다!’
사실 죽이려고 했으면 이 전투는 진작 끝이 났을 터였다.
생포를 목적으로 싸우다 보니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던 것.
"롱클린! 넌 내 거야!!"
"응- 아냐. 내 거야!
삐이이이-
그때, 별안간 섬 전체에 울려 퍼지는 풀피리 소리.
그 불길한 소리에 일순간 전투는 멈추었다.
"뭐야? 무슨 소리야?"
롱클린의 말에 선장들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섬에서 난 소리인데 네가 모르면 어쩌자는 거냐?"
"푸하하!! 아무래도 네가 생각한 거랑 다른 일이 일어난 난 모양이지?"
그들은 비웃었으나, 곧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섬의 주인도 모르고 자신들도 모르는 소리라면… 결국 남는 세력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둥-둥-둥-
구구구-
북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전해지는 엄청난 진동.
그리곤 곧 섬 중심 쪽에서 전투 현장으로 몰려오는 엄청난 수의 해적들이 보였다.
"헉!"
생각보다 더 엄청난 규모에 당황한 선장들.
반면 당황했던 롱클린의 표정은 금방 밝아졌다.
"이 자식들! 극적인 연출도 적당히 해야지 이렇게 피 말리기 있어?!"
그는 엄청난 지원군의 등장에 반색하며 소리쳤다.
"으하하! 어떠냐? 이게 바로 해적왕의 위엄이다!!"
두 팔을 번쩍 들며 한순간에 역전된 분위기를 만끽하는 롱클린은…….
와락-
갑자기 다가온 해적에 팔이 꺾이며 제압당했다.
"켁?! 뭐, 뭐하는 거야?!"
이 정도 제압을 푸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에 충격에 받은 그는 그대로 멍하니 돌아보았다.
"닥쳐라! 이 가짜 해적왕!!"
"?!"
"감히 우릴 속여?!"
충격적인 발언.
그리고 주변을 포위한 해적들 사이가 양옆으로 갈라지며 진짜 해적왕이 나타났다.
"해적왕 알시아 만세!!"
만-세-!!!
섬을 쩌렁쩌렁 울리는 해적들의 외침에 롱클린과 선장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진짜… 해적왕……?"
그들로선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