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끝까지 행복한 날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파이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지금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중, 성으로 손님이 찾아왔음을 느꼈다.
"이건……."
자신의 성 외곽에 자리한 터미널 쪽에서 감지된 강대한 마력에 파이라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폈다.
‘역시 꼬리가 밟힌 것인가?’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재호 일행은 이곳과 거리가 제법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보내 놓은 것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재호 앞에서 보이던 어설픈 모습은 싹 지워 버린 그는 접견실에서 기다리는 손님을 찾아갔다.
"오셨습니까?"
파이라가 나타나자 먼저 예를 갖춘 상대.
"오랜만이군, 바브롬."
손님은 다름 아닌 재호 일행을 추적하던 마왕성의 장군 바브롬이었다.
끝내주는 파이라에서 신나게 퍼마시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한 모습이었다.
"역시 마왕 때문에 찾아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물론. 나뿐 아니라 다른 녀석들 모두 똑똑히 느꼈겠지.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가? 마왕은 괜찮은가?"
파이라는 모른 척하며 물었다.
"현재 확실히 확인된 건 없으나, 마왕성 내에서는 누군가 마왕님의 힘을 이용해 차원을 넘은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바브롬은 확인된 사실을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파이라에 대한 의심을 품고 온 상황이니 은근슬쩍 그를 떠보려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그런 일이 가능한가? 다른 차원의 종족이 넘어왔다고? 감히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마왕의 코앞으로 차원을 넘어올 생각을 한단 말인가!"
분노를 터뜨리는 파이라의 연기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천계? 아니면 대륙인가? 어떤 놈이든 내 눈에 띈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대공. 저는 넘어왔다고 이야기하진 않았습니다."
"…아, 그런가? 마왕의 힘을 썼다면 당연히 이리로 넘어왔다고 생각했거늘."
파이라는 얼른 말을 덧붙였지만, 바브롬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건 똑똑히 보였다.
‘젠장. 약삭빠른 녀석.’
그 와중에 더 불편해질 만한 이야기를 꺼낸 바브롬.
"만약 이 일에 연루된 동족이 있다면,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영원한 고통을 남겨 줄 것입니다. 그것이 설령 귀족… 혹은 대공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그렇지!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날 찾아온 것인가?"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수상쩍은 자들의 행적이 이곳으로 이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뭣이?"
‘젠장! 역시군.’ 겉과 속이 다른 파이라의 반응.
재호 파티의 구성은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었으니 금방 추적당하는 게 당연했다.
"혹시 수상쩍은 자들을 감지하지 않으셨습니까?"
"글쎄. 전혀 느끼지 못했군.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은 성의 최외곽이며, 부끄럽게도 최근 나는 상태가 별로 좋지도 않았으니 말이야."
자존심까지 죽여 가며 파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그렇다면 실례지만 제가 대공의 성을 조금 살펴보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그 말은 꼭 날 의심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코르바 쪽의 증언에 따르면……."
"시끄럽다!"
불쾌함을 가득 담은 파이라가 소리쳤다.
"아무리 최근 내가 힘을 많이 잃었다지만 엄연히 마계의 대공! 설마 마왕의 장군들은 이젠 날 무시해도 되는 존재라고 결론을 내린 것인가?!"
조금 전까지는 연기였다면 이번 분노는 진심이었다.
만약 파이라가 원래의 힘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바브롬은 절대 이런 식으로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무리 마왕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자신에게 바브롬이 저런 행동을 보이는 건 엄연히 선을 넘은 것.
그 사실에 파이라는 진심으로 분노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분노를 잠시 거두시고 냉정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바브롬은 단호하게 나섰다.
"자네야말로 냉정하게 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어쩌면 이번에 넘어온 자들이 예상보다 간교할 수도 있다는 것을!"
파이라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마계의 내분을 노리고 게 아닌가 의심이 드는군. 또한 마계에 대해 잘 아는 녀석이거나, 그 정도 존재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게 분명… 음?!"
그 순간, 파이라와 바브롬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성내 터미널 쪽에서 또 다른 거대한 마력이 감지된 것이다.
‘이건…….’
파이라가 다른 행동을 하기도 전에 막 파이라의 성에 도착한 자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파이라!]
이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솔아이가 그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쯧……. 좋지 않은 타이밍의 불청객이군.’
파이라는 얼굴을 잔뜩 구겼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이- 파이라!"
어느새 반대편 통로에서도 그를 찾는 이가 나타난 것이다.
절대 이 자리에 나타나선 안 될 사람이…….
‘아, 알시아!!!’
파이라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며 악마 또한 핏기가 사라질 수 있단 걸 보여 주었다.
주륵-
파이라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굵은 땀방울.
천하의 대악마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절대 일어나선 안 될 만남이 이루어졌다.
"어?"
파이라를 찾아온 재호는 파이라 앞에 있는 심상치 않은 두 악마를 보곤 멈칫했다.
‘뭐지? 이 불편하고 어색한 분위기는…….’
파이라에게 테일러의 소식을 전해 주려고 찾아온 재호.
왠지 아주 좋지 않은 타이밍이란 느낌이 물씬 들었다.
"음? 저자는……."
역시나 재호를 보자마자 뭔가 이상함을 느낀 솔아이와 바브롬.
아무리 재호가 악마 뺨칠 정도로 험악하게 생겼다지만 본판은 엄연히 인간…….
솔아이나 바브롬은 고작 외모에 현혹될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상대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의 위대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둘은 그 눈썰미 때문에 도리어 혼란을 느껴야 했다.
‘뭐, 뭐지?’
‘저자는 인간인가, 악마인가……?’
그들이 이토록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바로 재호 역시 반쪽은 악마이기 때문이었다.
애매하게 뒤섞인 두 정체성이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재호의 구성성분 중 일부는 심지어 드래곤!
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구성성분이 그들이 재호를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크, 크흠……."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파이라가 헛기침으로 주의를 돌리고자 했으나…….
"파이라!"
그보다 먼저 소리를 꽥 지른 솔아이.
"소, 솔아이! 일단 내가 먼저 말하겠다!"
이제는 연기를 할 생각도 없는 것인지, 파이라는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였다.
누가 봐도 무언가 숨기려는 게 있는 자의 모습이었고, 그 꼴을 본 재호는 다 조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러면 다 티 나잖아!’
어쩌면 이미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저런 식으로 어처구니없이 행동하는 건 최악이었다.
‘하지만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모르면서 내가 멋대로 끼어들 수도 없고.’
재호와 파이라, 둘 다 땀이 뻘뻘 흐르는 그때.
"설마 성공한 거냐?!!"
솔아이는 테일러에 이어 또다시 급커브를 틀었다.
"으응? 뭐, 뭘 말이냐?"
"끝까지 모른 척할 거냐? 저건 키메라가 아닌가!!"
"……."
"……."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둘은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핑계를 대어야 할지 고민하던 것도 모두 부질없어져 버렸으니…….
"그, 그래! 드디어 성공했지!"
어쨌든 솔아이가 오히려 변명거리를 만들어 준 상황이기에 파이라는 얼른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
"맙소사! 인간과 악마… 거기다 드래곤까지 섞어 버리다니. 정말 무시무시한 괴물을 만들어 냈군."
"키메라라니……. 이론으로만 듣던 괴생명체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솔아이와 바브롬은 재호에게 다가와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추가 의문을 제기했다.
"음? 이건 정령들 아닌가?"
"잠시……. 파이라 님. 이 키메라가 입고 있는 이상한 치마에 든 건 뭡니까?"
바로 꼰대, 징징이, 그리고 알드리온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나선 것!
재호가 지닌 소환수들이나 미니 드래곤은 키메라가 가지고 있을 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징징이야 악마꽃 정령이니 그렇다고 치지만, 꼰대나 알드리온은 절대 마계에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솔아이나 바브롬 입장에선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건……."
둘의 의심 담긴 눈동자에 파이라는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순발력으로 받아치기엔 벅찬 상황의 연속.
힘을 잃은 대악마로선 심신이 전부 지치는 일이었다.
"…내가 소환했다!"
결국 파이라의 한계를 느낀 재호가 직접 끼어들기 시작했다.
"대륙과 마계, 그리고 드래곤을 아우르는 궁극의 생명체가 바로 나다. 그러니 각각을 대표할 수 있을 만한 생명체를 부리는 것이야 당연하지."
"?!"
당당한 재호의 발언에 세 악마 모두 당황했다.
‘미친 거냐?!’
단, 뒤에서 입만 뻐끔거리며 소리치는 파이라는 앞의 둘과는 조금 다른 이유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NPC를 상대로 거짓말을 수없이 해 온 재호는 파이라와 달리 여유가 있었다.
솔아이와 바브롬의 수준을 생각하면 거짓말이 쉽진 않겠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그들이 먼저 재호를 키메라로 인정을 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만약 재호가 먼저 자신을 키메라라고 우겼다면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남이 강제로 주입하는 정보와 스스로 확신을 가진 정보의 단단함은 차원이 달랐으니까.
자신들이 먼저 결론을 내려 버린 튼튼한 거짓이 있었으니 재호의 거짓말이 훨씬 잘 먹힐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다면 그 조그만 것이 드래곤이란 소리냐? 하지만 드래곤이라기엔 너무……."
"딱 보면 모르나? 너희들 눈엔 이게 정상적인 드래곤으로 보이나 보지?"
재호가 알드리온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꾸-욱.
은근슬쩍 녀석의 등을 찌르며 허튼소리는 말라는 신호도 보냈다.
"……."
하지만 알드리온은 이 어처구니없는 연기에 장단을 맞춰주고 싶지 않았는지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차라리 잘됐네.’
알드리온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이 상황에선 훨씬 이득이었다.
"흐음……. 자세히 보니 드래곤치곤 존재감이 희미하군."
"대공께서는 드래곤을 실제로 본 적이 있으십니까?"
바브롬의 물음에 솔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현 인간들의 대륙에선 가장 강한 생명체라고 할 수 있겠지."
마왕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아홉 장군은 마계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대공들보다 대륙에 대한 정보나 지식은 빈약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과거 봉인을 당해 자유롭게 활동하는 건 불가능한데……."
"그럼 이 드래곤은 뭡니까?"
"…파이라! 설마 대륙에 넘어가 있을 때, 장막 밖으로 나갔다 온 거냐?"
"장막 밖?"
바브롬뿐 아니라 재호도 그 이야기에는 솔깃했다.
‘장막?’
왠지 지금까지 플레이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단 직감에 재호는 귀를 활짝 열었다.
"중간계는 다른 차원과 달리 엄청나게 큰 규모를 자랑하지.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줄곧 침범을 시도하며 노리는 곳은 흔히 대륙이라고 부르는 곳. 바로 인간들이 가장 많이 살아가는 장소다."
"?!"
언젠가 재호도 가진 적 있던 의문.
왜 천사들이나 악마들은 다른 대륙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는가?
‘악마들이 노리는 곳도 오로지 인간들의 대륙뿐이니까.’
디노스 섬의 경우, 악마들의 흔적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후로는 악마들이 간섭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마도 장막이란 게 그 의문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하지만 파이라가 솔아이의 이야기를 단칼에 헛소리로 일축했다.
"난 장막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또한 그건 실제 드래곤이 맞다. 내가 라셀 왕국에 있을 당시, 그곳의 수호신으로 자리하고 있던 녀석을 확보한 것이지."
꽤 괜찮은 거짓말을 떠올린 파이라에게 재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어가기 위해 재호와 파이라가 확실히 힘을 합치기로 무언의 합의가 된 것이다.
"드래곤의 상태를 보면 알겠지만, 그 녀석의 일부 힘은 키메라를 만드는 데 소모되었다."
"흠… 그래서였군."
이해된다는 듯 솔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파이라 네놈의 감각은 역시나 최악이군."
"뭐?"
"이 키메라의 모습을 봐라. 미학적으로 하나도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지 않나? 그리고 굳이 2족 보행 형태를 택할 필요가 있었나? 이러면 힘을 제대로 다루기에 불리할 텐데……. 애초에 이 얼굴은 2족 보행형 신체와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고. 뭐, 네 감각이면 어쩔 수 없다곤 생각하긴 하지만 나라면 이러진 않았을 거다."
꾸깃-
솔아이의 광역 공격에 재호와 파이라의 미간이 거칠게 압축되었다.
‘깔 거면 파이라만 까지, 난 왜 건드려?’
…라고 재호는 불만을 품었지만…….
사실 파이라만 깐 것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