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만 키우는데 너무 강함-460화 (459/641)

460화

시쿠드가 리스피롤의 환경에 나름 적응했다곤 하지만,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태생적인 한계 탓에 여기보단 바깥이 다 나은 것이 사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나가더라도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너 같은 하급 악마 정도는 모르지 않을까?"

"알고 모르고를 떠나 늘 불안함을 떨며 살아야 한다는 게 문제란 거다! 네놈은 이게 제대로 사는 것이라 생각하는 거냐?!"

"흠, 그렇다면 다시 대륙으로 데려가는 것도 가능해. 물론 네가 원한다면."

"?!!"

"너도 알겠지만 우린 무조건 돌아가야 하지. 그리고 확실하게 도와줄 뒷배도 있어. 그쪽에 이야기하면 아마 충분히 가능할 거다."

"그건……."

"왜 그래?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시쿠드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재호는 말했다.

지금까지 강경하게 나오다 갑자기 돌변하는 시쿠드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다.

리스피롤을 떠나고 싶다고 입으론 말하면서, 왠지 모르게 아쉬워하는 듯한 느낌도 든 것이다.

"너 설마……."

"크흠."

"변태였어?"

이런 청정 자연 테라피의 짜릿함에 중독되어 버렸다거나…….

"어쩐지… 예전에 나한테 두들겨 맞는 것도 흔쾌히 받아들인 이유가……."

"역시 악마네요. 알시아 님!"

티나도 맞장구치자 시쿠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무, 무슨 미친 소리냐?! 날 로두카의 미친놈들과 똑같은 취급을 하지 마라!!"

"로두카?"

"서큐버스퀸 로두카 대공을 말하는 거다. 그 여자 아래에 있는 놈들은 죄다 정신 나간 변태들밖에 없거든."

"아, 그쪽이 그런 타입의 악마들이군."

새로이 알게 된 다른 대악마의 정보.

"어쨌건 그게 아니면 이유가 뭔데?"

"이미 알아챘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새 삶을 얻었다."

확실히 리스피롤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쿠드.

그리고 새로운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난… 리스피롤의 지배자가 될 거다."

분명 재호를 따라 마계를 떠나는 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이유는 바로 그러했다.

"그렇게 새로운 힘의 축으로 마계에 나서는 것이 내 목표다."

"?"

뜬금없는 선언에 재호와 티나는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방금 들은 이야기가 그만큼 당황스럽고 터무니없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지배자? 여기서 지배자가 되어 뭐해?"

재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리스피롤은 버려진 악마들의 무덤이자 지옥과도 같은 곳.

게다가 다른 악마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장소라지만, 굳이 따지면 파이라령에 속한 곳이기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러려면 다른 대공들 수준으로 강해져야 할 텐데?"

분명 강해지긴 했지만, 냉정히 말해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또한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대악마의 손에 바로 찢길지도 모를 일.

"아니, 나는 이곳에서 깨달았다."

하지만 시쿠드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악마들이 지닌 대공들을 향한 존경과 두려움. 그것은 정신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근원적인 공포라고."

오랜 고행 끝에 그가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내게 남아 있던 대공들을 향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던 한계를 넘어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그냥 레벨업했다는 소리 아냐?"

"아니! 그렇게 간단하게 줄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쿠드의 깨달음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차원의 것이었다.

"모든 악마는 태생적으로 고정된 능력, 힘을 지니고 태어난다. 죽는 그 순간까지 정해진 목적만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우리 같은 하위 악마들이다. 오직 귀족만이 마계에서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니고 있지. 그 외의 악마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수 없다."

즉, 신분 상승 욕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시쿠드는 그 벽을 무너트리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리스피롤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꿈도 가질 수 있었으며, 성장 한계를 초월하는 것에도 성공했다.

"잠깐. 이상한데?"

이야기를 듣던 재호는 문득 든 의문에 입을 열었다.

"지나오면서 봤던 마계의 도시들을 봤는데, 거기 사는 악마들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멀쩡히 사는 것 같던데?"

"그것이 녀석들에게 정해진 운명이란 거다! 그곳에서의 삶에 만족한 채, 더 높은 미래는 조금도 꿈꾸지 못하는 것이지!"

"어… 그런 거야?"

"인간, 특히 임모탈리언인 너희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나조차도 이곳에 처박혀 썩어 들어갈 때까지 전혀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으니."

난생처음 느껴 본 생소한 감정…….

시쿠드의 말투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변화 또한 그런 이유였다.

하급 악마 따위가 감히 대공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쿠드는 그게 가능해졌다.

재호 입장에서야 ‘고작?’ 싶어도 악마로선 절대 그렇지 않은 일.

"뭐, 일단은 이해한 걸로 치자고."

재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시쿠드가 자신을 도와주기로 했다는 것.

"내 결정은 좀 더 고민해 본 뒤에 확실히 하겠다.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기엔 내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지 아직 미지수이니."

여차하면 대륙으로 도망가겠다는 소리였다.

"우리가 언제까지고 마계에 머무는 건 아니야. 가능하면 결정을 빨리 내려 줬으면 좋겠는데."

"걱정하지 마라. 내 자격을 확인할 방법은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그걸 도와달라 하려던 참이니. 그럼 네가 뭘 원하든, 무조건 협조해 주겠다."

"일단 들어나 보자."

잠시 심호흡을 한 시쿠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울트모스!"

"울트모스?"

"리스피롤 최강의 마수인 그 녀석을 잡는 걸 도와주면 된다."

몬스터를 잡는 일이라면 오히려 쉬운 느낌이었다.

"후후, 과연 그럴까? 내가 괜히 ‘최강’이라는 칭호를 붙였을까?"

시쿠드의 계획은 울트모스를 잡은 뒤, 그 마수가 지닌 정수를 자신이 흡수해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가 과연 대공들과 맞상대를 할 수 있을지 대충 확인은 되겠지. 어떠냐?"

[*퀘스트*]

[마계에서 오랜 친구(?)인 악마 시쿠드를 만난 당신.

현재 그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것으로 비상하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며, 당신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퀘스트 목적 : 1. 울트모스 사냥.

2. 울트모스의 정수를 시쿠드에게 제공.]

[보상 : 조건 없는 부탁을 1회 수락.(*주의 : 부탁이 100%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퀘스트 알림도 떠오르며 시쿠드가 공식적으로 제안해 왔다.

단, 보상 부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그게 무조건 재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시쿠드의 능력 밖이면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뭐, 그 정도는 어쩔 수 없는 패널티다 싶기도 했다.

"좋아. 받아들이지."

재호는 시쿠드의 퀘스트를 수락했다.

마침 현재 파티 구성원 자체가 레이드를 치르기에 최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처음에 말하려고 했던 네 목적은 뭐냐? 뭔가 원하는 게 있으니 거래를 제안했던 것 아닌가?"

"뭐, 별건 아니고. 이곳에 있는 특이한 꽃들을 알고 있으면 좀 알려 달라고."

"……."

시종일관 재호를 상대로 거세게 몰아붙이던 시쿠드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재호의 요구 조건보다 자신의 요구가 너무 과한 느낌이 든 탓이었다.

"아, 설마 이걸로 ‘어떤 부탁이든’이라는 조건을 퉁 치려는 건 아니지?"

"…그래. 아무리 악마라고 해도 그렇게 치졸해지고 싶진 않다."

다행히 시쿠드 역시 순순히 받아들였다.

* * *

시쿠드의 안내를 받아 리스피롤의 다양한 꽃들을 찾아다닌 재호.

시쿠드는 예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얼빠진 재호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똑같군. 그렇게 강해졌는데도 아직 꽃 타령이냐?"

"정령화장이 괜히 정령화장이겠어?"

재호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리고 네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변한 거야. 그렇게 친절하던 녀석이 어떻게 이 정도로 깡패가 된 거야?"

"…지금까지 내 겪은 일들을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해 줘야 하냐?"

"아, 그럴 필요는 없어."

재호는 얼른 잘라 냈다.

시쿠드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굴러다닌 만큼 주변 지리에 상당히 빠삭했다.

게다가 식생들에 대한 제법 훌륭한 지식을 자랑하기도 했고…….

"살아남으려면 먹어야 했으니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건 오직 나 혼자만의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니다. 스승님이 없었더라면……."

"아, 그래. 스승님이란 악마는 어디에 있어?"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

"앗……. 미안해."

사과할 일이 아닌 것 같았지만 재호는 일단 사과했다.

"대단한 분이셨지. 수백 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나 먼저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모든 걸 내게 물려주셨다. 마지막으로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울트모스의 실체와 힘을 내게 확인시켜 주셨지."

꾸욱-

시쿠드는 자신의 꽉 쥔 주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그분의 유지를 이어 리스피롤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이끌 신흥 강자가 되려는 것이다. 내 안에는 그분의 의지도 함께하고 있다!"

참 여러 의미로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시쿠드였다.

정령화장의 친구라며 막무가내로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으니…….

"울트모스는 어떤 몬스터야? 강해?"

"강하다. 바깥에선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리스피롤 내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고대 마수지. 예로부터 악마들의 손에서 벗어난 탓에 원시적인 형태를 그대로 지닌 괴물들이 득실대는 이곳의 진짜 왕……. 그 힘은… 적어도 대륙의 드래곤 정도는 될 것이다."

"드래곤?"

정확한 비교가 되진 않겠지만, 엄청나게 강하다는 뜻이리라.

"잠깐!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드래곤이란 존재는 단순히 마수와 비교할 수 있는……."

그때 시쿠드의 비교에 알드리온이 부연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재호가 그를 다시 주머니로 눌러 넣었다.

"비유잖아 비유. 말도 안 되게 강하다는 소리겠지."

"솔직히… 정령화장 너도 엄청나게 강해진 것이 느껴지고, 옆의 엘프는 내가 본 어떤 엘프들보다도 강하다. 하지만 울트모스를 상대하긴 쉽지 않을 것 같군."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기 다른 일행들도 와 있거든."

"음? 다른 사람도 있다고?"

재호와 티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시쿠드.

"든든한 사람들이니 믿고 맡겨도 돼."

재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이후 다시 일행들과 합류했을 때 시쿠드는 그 말의 의미를 확실히 깨달았다.

"저, 저게 무슨……. 크아아악!!"

다른 사람보다 스트로앤 주교를 본 그는 경악을 넘어 고통에 몸부림쳤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신성력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허허, 오랜만에 몸 좀 풀다 보니 제가 어떤 상태인지 잠시 잊었군요."

그는 다시 신성력을 갈무리했고 그제야 시쿠드는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미, 미친놈……! 대체 마계에 뭘 들인 거냐? 거의 신의 화신체 정도 될 것 같은데!!"

"오, 바로 알아보네?"

실제로 스트로앤 주교는 아나볼릭 교단의 최종 병기와 같은 존재.

"저만한 존재가 마계로 넘어오는 건 절대 불가능할 텐데 대체 어떻게……."

"마왕의 힘을 이용했거든. 안 그래도 그 탓에 마왕이 생사가 오락가락한다는 것 같더라. 우리도 일이 꼬여 여기까지 오게 된 거고."

"??"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은 시쿠드.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재호의 한마디를 설명할 만한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여기 있는 전원이 함께 마계로 넘어온 사람들이야."

"끄응……."

시쿠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면면을 살폈다.

확실히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들.

특히 몇몇은 유독 강해 보였는데, 빅썬더나 진아가 그러했다.

"그러고 보니… 저 두 명도 신을 따르는 자들이었군."

시쿠드는 스트로앤 주교에게 가려졌던 완식과 진아의 신성력을 뒤늦게 알아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선이 향한 곳은 의외로 구면인 사만다.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긴 하군."

그런데 의외로 재호와 달리 사만다에겐 쓴소리를 딱히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말해 주는데 대륙에서 너 죽을 때, 사실 나보다 사만다가 딜 더 많이 했을걸?"

재호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엄연히 자신은 운 나쁘게 막타를 쳤을 뿐이었단 것을…….

하지만 별로 의미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것보다 네놈에게 지져지는 게 더 고통이었다는 걸 명심해라."

"크흠……."

본전도 못 찾은 재호는 슬그머니 물러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