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재호와 파이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휙휙 오고 가자 눈만 좌우로 굴리는 시쿠드.
그리고 어느 정도 대화가 정리되는 것 같아지자 재호에게 슬쩍 물었다.
"저… 다른 건 시키는 대로 한다지만… 시험이란 건 뭡니까? 전혀 못 들었던 것 같은데……."
"아, 이야기 안 했었나?"
"…일부러 안 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핫! 미안. 까먹었나 보다."
재호는 시치미 떼며 말했다.
"뭐, 별건 아니고. 탐욕의 신? 그런 양반이 내놓은 자격시험이 있대. 그걸 통과해야 탐욕의 대공이 될 자격을 얻을 수 있대."
"…아주 중요한 이야기 아닙니까?"
시쿠드는 불만을 표출했지만 이미 재호는 방금 새롭게 든 의문 탓에 듣지 못했다.
"그런데 파이라.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무엇이 말이냐?"
"지난번 대공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온 대화를 보면 너흰 신을 혐오하는 것 같던데……. 왜 대공의 자격은 신의 시험을 통해서 얻는 거야?"
그런 모순적인 상황을 방금 깨달은 것이다.
"쯧. 신이라고 다 같은 신인 줄 아나? 일곱 대공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일곱 신들은 대륙의 위선적인 놈들과 다르다. 마계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도록 다른 신들에게 맞서 준 위대한 마신들이지."
마신!
단어의 어감만 놓고 본다면 엄청나게 나쁜 놈 같았다.
"말이 나온 김에 추가 설명을 해 주자면, 마신들과 가장 격렬하게 싸운 것이 바로 아나볼릭이다. 그렇기에 마계에서는 아나볼릭이라고 하면 치를 떠는 것이지."
플레이어들이 알기 힘든 신화 속 비사.
특히 대륙엔 아나볼릭 신에 대한 기록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마 저런 이야기는 아나볼릭 교단 내에도 전해졌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칼리토 일이 잘 풀리더라도 스트로앤 주교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냐? 그 정도로 원한이 깊은 관계라면 말이야."
"글쎄. 사실 나도 불안하긴 하지만……. 이쯤 되면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흘러가는 대로 계속 돌진할 수밖에."
"흠… 그것도 맞는 말이네."
재호는 동의하며 파이라와 함께 시쿠드를 돌아보았다.
"?"
그는 자신에게 닥칠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다."
파이라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이 부디 성공하길 빌 수밖에."
"맡겨 놓아도 되지? 나는 나대로 바쁠 것 같으니까."
재호도 준비해야 했다.
칼리토를 찾아가기 위한…….
* * *
탐욕의 대공 칼리토.
그는 이름값을 충실히 이행하며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대공들이 주춤하는 사이, 분노의 대공 파지크 다음으로 강한 영향력을 자랑할 정도로 권세를 키우는 데도 성공했다.
사실상 현재 마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권력가.
하지만 옥좌에 턱을 괸 채로 앉은 칼리토의 표정은 승승장구하는 요즘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뿐만 아니라 근래 칼리토의 기분은 줄곧 그러했으니,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로두카.’
그는 또 다른 대공의 이름을 찬찬히 곱씹었다.
대공 중, 유일하게 마계의 시작과 함께 한 역사 그 자체인 존재.
무력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에 비해 아주 높진 않았다.
애초에 서큐버스를 비롯한 몽마들은 힘자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로두카는 무력으로 따질 수 없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왕이 명실상부 마계를 이끄는 대표라면, 로두카는 흔히 여왕처럼 인식되곤 했던 것이다.
심지어 현 일곱 대공 중, 무려 네 명이 그녀의 자식이었으니…….
아무리 악마들은 핏줄 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해도 무시하기 힘든 상징성이었다.
그 탓에 칼리토는 로두카를 향한 뒤틀린 탐욕을 품고 있었다.
‘언제쯤 너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냐.’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특별한 것은 모두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칼리토가 지닌 가장 강력하고 탐욕의 근원은 바로 그것이었다.
무한한 아름다움!
그렇기에 마계의 시초부터 절대적 미의 기준이 되어 온 로두카는 억겁의 시간 동안 채우지 못한 갈증 그 자체였다.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그런 뒤틀린 욕망을 품는 건 비정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마계였고 칼리토는 탐욕의 대공.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대악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여기까지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강력한 탐욕 때문이었으니…….
하지만 현재 상황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듯, 그는 로두카를 손에 넣지 못했다.
그리고 이젠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마계의 지배자가 되자.
그런 결심을 확실히 내린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최근이었다.
파이라와 디아키가 각기 인간들에게 털리고, 마왕까지 역소환당해 돌아오는 걸 본 이후였으니까.
그런데 최근 마계의 동향 조금 이상했다.
갑자기 마왕에게 생긴 변고.
원래라면 칼리토 입장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만큼 오랜 세월, 바라 마지않던 목표가 가까워졌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전혀 계기가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사태였고, 가뜩이나 자신이 조바심을 내던 중이라는 게 찝찝했다.
또한 파이라령 쪽에서도 뭔가 이상한 기류가 보인다는 첩보도 있었고…….
‘알시아……. 그놈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도 불안하다.’
그가 자신을 배신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저주로 유지되는 모래밖에 없는 대지 위엔 그가 일궈 놓은 모든 것이 있었으니 말이다.
‘내 단말을 끊으려면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진 존재여야 할 터인데…….’
추측되는 건 역시 대천사.
지난번 대륙에 잠시 간섭할 당시, 강대한 신성력이 다가오는 걸 느끼기도 했었다.
‘…별 일 없을 거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거늘.’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 순간.
"음?"
그의 감각에 걸리는 기묘한 느낌에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 느낌…….
"알시아……?"
체면도 잊은 채, 칼리토는 자리를 벌떡 박차고 일어났다.
* * *
드디어 재호는 칼리토를 만나기 위해 나섰다.
감옥에 갇힌 테일러가 딱히 뭘 할 필요도 없었다.
시쿠드를 다음 탐욕의 대공으로 어떻게든 밀어 보기로 한 이상, 빨리 움직이는 게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었으니, 테일러의 존재는 칼리토가 모르는 게 차라리 낫지.’
그래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먼저 나선 것이었다.
이번에도 옆에는 불댕댕이를 머리에 얹은 티나가 동행했다.
대악마를 상대로 그런 어설픈 눈속임이 통하진 않겠지만, 상대가 칼리토이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어차피 파이라와 마찬가지로 알 것 다 아는 상대였으니 말이다.
파아앗-
터미널을 통해 칼리토의 성안으로 도착한 재호.
그리고 그곳에서 묵묵히 기다렸다.
칼리토라면 자신이 나타난 걸 알아챘을 테니…….
저벅- 저벅-
아니라 다를까 곧 재호의 비슷한 체구의 악마 하나가 재호 앞에 나타났다.
무표정한 얼굴이었기에 의중을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그래도 재호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이야기하는 악마를 보며 재호는 멈칫했다.
‘…이상한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악마가 왜 저렇게 잘생겼지?’
쓸데없는 의문이…….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눈앞의 악마는 지나치게 잘생긴 게 사실이었다.
단순히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을 뛰어넘은 그 무언가… 어떤 생명체가 보더라도 멋지다고 생각할 만큼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평소 아름답기로 유명한 엘프들과 지낸 재호조차 그렇게 느낄 정도면 절대 평범한 악마가 아니었다.
"그럼 이쪽으로……."
안내를 위해 몸을 돌린 악마.
"?!"
악마의 등 뒤에는 검고 우아한 날개가 달려 있었다.
다른 악마들과는 비교될 정도로 윤기가 넘치는 날개가…….
‘날개마저 잘생겼네.’
그런 생각을 하며 뒤따라 걷기 시작한 재호.
그렇게 약 10분 정도 이동한 끝에 악마는 걸음을 멈췄다.
그가 선 곳 앞엔 황금으로 만들어진 대전의 입구가 있었다.
‘장난 아니네.’
재호는 사방에서 번쩍이는 엄청난 광채에 눈을 살짝 찡그렸다.
대륙의 황제도 이 정도로 화려한 대전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딱 하나, 규모 면에선 여기에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비슷한 장소가 있긴 했다.
‘브레잘이 있던 코페이 왕궁.’
브레잘이 괜히 칼리토와 계약을 한 게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마왕성이나 파이라의 성처럼 극혐 인테리어가 아닌 게 어디야.’
찐득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재호는 이 장소가 마음에 들었다.
"저 안으로 가면 되나?"
그리 물으며 재호가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척-
갑자기 악마가 재호를 막아섰다.
"신고 있으신 신발은 벗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천장이 선명하게 비칠 정도로 번들거리는 황금 바닥을 보곤 이해했다.
슥-
재호는 순순히 신발을 벗었고 티나는 못마땅해하면서도 자신의 가죽신을 벗었다.
"이러면 돼?"
하지만 여전히 악마는 비키지 않았다.
딱-
그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고, 어디 있다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양쪽에서 날개 달린 다른 악마들이 나타났다.
재호 쪽엔 여성체, 티나 쪽엔 남성체 악마가 섰는데, 둘 다 엄청난 미남 미녀였다.
묘하게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를 걸 보며 재호는 그들의 정체를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다.
"서큐버스랑 인큐버스인가?"
"맞습니다."
재호의 물음에 안내를 맡은 악마가 대답했다.
앞에 있는 악마도 비슷한 날개를 가진 걸 보면 그 역시 인큐버스인 모양.
저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건 그렇고… 뭘 하려는 거야?"
"주인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최선의 청결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주인님?"
칭호부터가 다른 대공과는 남달랐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턱-
양쪽에서 나타난 악마들은 챙겨 온 보석 의자와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는 대야를 놓았다.
그 안에서는 투명한 액체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데운 물로 보였다.
"편안히 앉아 계시면 저희가 발을 씻겨 드리겠습니다."
"……."
쉽게 말해 냄새나는 발론 절대 들어올 수 없다는 뜻.
재호는 슬쩍 티나를 돌아보았다.
보아하니 양쪽에 선 악마들이 발을 씻겨 줄 셈으로 보였는데, 악마의 손길을 그녀가 절대 용납할 리 없었다.
"안 돼! 어디서 악마 따위가 내 몸에 손을 대?"
‘역시…….’ 재호는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여러분들도 저희와 같은 악마가 아니십니까?"
티나의 불만을 들은 악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들의 눈엔 재호와 티나(불댕댕이를 머리에 얹은)도 악마로 보였기에 그녀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나만 들어갔다 올 수도 없고.’
그것 역시 티나가 절대 용납하지 않을 일.
"…다른 방법은 없어?"
재호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우린 남이 내 몸에 손을 대는 걸 싫어해서 말이야."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악마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씻으시면 되겠지요."
"…헉?"
재호는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천재네?’
그런 간단한 방법을 생각도 못 한 게 우스웠다.
챠악- 챠악-
재호는 발을 물에 담그고 씻기 시작했다.
‘의외로 평범한 물이네.’
독이라도 탄 것 아닐까 했지만 아무런 디버프가 발생하지 않았다.
‘참… 게임 속에서 별짓을 다 하네.’
그리 생각하며 티나를 슬쩍 돌아본 재호.
티나는 악마들이 퍼 온 맑은 물을 똥물 보듯이 했지만 결국은 발을 담그고 씻기 시작했다.
챡- 챡-
하지만 재호와 달리 거의 물을 찍어 바르는 수준.
그래도 티나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제대로 씻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악마들은 그걸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괜찮아, 티나. 이상한 거 아니니까."
"으으……."
재호의 격려에 결국 티나는 발을 푹 담갔고, 그렇게 세족을 마쳤다.
"이러면 돼?"
재호의 물음에 악마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앞장섰다.
"그럼 주인님께 모시겠습니다."
맨발로 들어선 재호와 티나.
그리고 긴 황금 대전을 지나 마침내 칼리토와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