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만 키우는데 너무 강함-496화 (495/641)

496화

재호의 불로장생초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모자라 젊음을 되찾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건강해진 황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불멸의 삶을 살 것이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즉, 제국의 영광을 이끌어 갈 후계자를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황태자 경쟁은 1황자 헤라리, 그리고 5황자 젠트르노로 좁혀진 상황.

그리고 이번 광룡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재호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젠트르노 황자 쪽이 많이 유리해졌다.

그랬는데 재호가 레이드 준비를 위해 마계로 떠난 사이, 헤라리 황자가 끼어든 것이다.

황제는 과감함은 여기서 드러났다.

‘이 정도로 중요한 사태에선 어지간하면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헤라리 황자에게 기회를 준 걸 보면 이번 일 또한 황태자 검증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헤라리 황자가 실패한다면 어쩌려고?’

잠시 그런 생각을 했던 재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작전을 준비하고 증명해 보였겠지. 단순히 기회를 주겠답시고 제국을 날려 먹을지도 모를 위험한 일을 맡기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헤라리 황자가 준비한 계획은 무엇일까?

자신이 준비한 테라핀보다 더 괜찮은 계획이 있을 수가 있나?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상황에서 재호가 끼어들어도 괜찮냐는 것.

"그들에게 준 기회를 방해할 순 없지. 적어도 하루는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군."

황제는 헤라리 황자에게 재호가 오기 전까지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결국 그들에겐 오늘이 투룬아르 레이드 마지막 기회.

정말 보통 배짱이 아니었다.

* * *

전 세계인이 즐기는 뉴월드에서 유명인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흔히 뛰어난 게임 실력만 있으면 유명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건 최상위권의 랭커들이나 가능한 일.

그게 아니라면 아예 지독한 관종이 되어 이슈와 논란 사이를 줄타기하거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있었다.

어디까지나 똑같이 뉴월드를 즐기는 사람들이나 알 정도의 유명세였으니까.

어쩌면 재호 또한 단순히 실력만 대단했다면 지금과 같은 인지도를 쌓을 수 없을 터였다.

넘사벽 수준의 실력에다 의도하지 않은 지독한 관종끼.

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기에 가능한 일.

물론 당사자는 자신이 관종이라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만큼 뉴월드에선 오로지 실력으로 뜨는 건 어려웠고, 그 말인즉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현재 투룬아르 레이드에 참가하게 된 쌀먹 길드도 그런 이들이 모인 길드였다.

길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생계형 플레이어들이자 해결사 길드로 활동하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의뢰를 완료하는 그들은 나름 이쪽 업계에선 유명한 이들이었다.

밥그릇이 달렸으니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할 수밖에 없는 일.

그리고 길마 올리브유가 따 온 이번 작업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다른 곳도 아닌 제국의 의뢰였으니까.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길드원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지금까지 플레이어 중, 황궁에 내로 진입한 사람은 재호 말고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

물론 그들이 직접 황제를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이 레이드만 무사히 마치면 황제와 만나는 건 물론, 그들의 쌀먹 게임 라이프에도 새로운 시대가 열릴지도 몰랐다.

목표 대상이 드래곤이란 걸 들었을 땐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무려 대륙 5대 교단이 지원하는 작전이니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레이드 첫 사전 탐사에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사전 탐사 중, 그들은 드래곤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전멸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의 조사와 녹화 영상을 분석한 끝에 그들은 동굴 위, 무언가 어둠 속에 숨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런데…….

"드래곤이 아닌데?"

어렴풋이 보이는 형체는 드래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쩐지……. [그림자 술래]라고 알림이 뜨는 게 뭔가 했더니……."

미리 들었던 것과 달리, 드래곤이 아닌 것으로 추측되는 상황.

그 소식을 전달받은 5대 교단 역시 당혹감을 드러냈다.

"드래곤이 아니라 다른 몬스터가 있단 말인가?"

[그림자 술래]가 사실 미쳐버린 투룬아르라는 사실은 오직 재호만 알고 있었다.

그건 알드리온 덕분에 알게 된 것.

암만 봐도 드래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생김새와 이름 탓에 그들이 오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더 자세히 조사해 주는 게 좋겠군. 그 몬스터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곳에 있는지. 지금까지 왔는데도 고작 그 정도 알아낸 건 조금 아쉽긴 하군."

교단 쪽의 요구에 그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한번 진입하면 사실상 죽지 않는 이상 빠져나오기 힘든 장소.

최소 절반은 희생시켜야만 남은 사람들이 겨우 나올 정도였다.

그런 걸 알면서도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쌀먹 길드 입장에서 결코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결국 우린 그냥 제물 아냐?!"

"희생은 다 하고 단물은 저놈들만 쏙 뽑아 먹겠다는 거잖아!!"

터져 나오는 불만들.

지금까지 그들이 몇 번이나 들락날락하며 죽어 나가는 동안, 교단 쪽에선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죽으면 영원히 끝인 NPC들이었으니 몸을 사리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패턴 파악을 위한 도구로만 쓰고 있으니 기분이 나쁜 것이다.

"올리브유 님! 우리 이러다 물먹고 끝나는 거 아니죠?"

누군가 길마를 향해 물었다.

"저는 이번 일 한다고 진행 중이던 작업도 중단하고 왔는데, 일 꼬이면 골치 아픈데요……."

"저 여기서 레벨 또 떨어지면 미뤄 둔 퀘스트 진행하는데 문제가……."

길드원들의 불안 가득한 항의에 올리브유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쌀먹 길드의 특성상, 모든 플레이는 그들의 생계와 연결되었다.

그러니 저들의 불안은 단순히 예민함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괜찮을 겁니다. 설령 교단 쪽에서 알짜만 빼먹는다고 하더라도, 저희 공로를 무시하진 못 할 테니까요. 이 퀘스트를 해결하기만 한다면 모든 손해는 충분히 메우고도 남을 거예요."

올리브유는 이를 꽉 물고 말했다.

"하지만 드래곤을 처치한 뒤, 드랍되는 소재들을 교단에서 독차지한다면 저흰 사실상 여기서 벌어들이는 게 전혀 없지 않나요?"

그들은 돈이 될 만한 걸 얻어야 한다.

보통의 플레이어들과 달리, 단순히 레벨을 올리고 칭호를 얻는 것만이 최우선은 아닌 것이다.

"더 큰 돈을 벌기 위한 토대로도 충분해요! 그러니까 다들 조금만 더 힘냅시다!"

올리브유는 애써 힘차게 외쳤다.

자신도 지금까지 손해가 상당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무려 제국의 퀘스트다.

포기할 수 없었다.

거기다 자신들에게 손을 내민 건 제국의 1황자!

제국 내부의 사장은 모르지만, 그가 장남이라면 차기 황제로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지 않을까?

‘비록 1황자의 얼굴 역시 보진 못했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황실에 인연이 만들어지는 건 물론, 영상을 통해 쌀먹 길드를 제대로 광고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계속 죽는다면 그것도 의미가 없겠죠……."

"……."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모두 침묵했다.

이런 식으로 레벨이 계속 떨어지면 아무리 일이 잘 풀리더라도, 훗날 올 큰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저희 많이 밝혀냈잖아? 오늘은 확실히 실마리를……."

"올리브유 님!"

그때, 쌀먹 길드를 찾는 교단의 사제.

"무슨 일이죠?"

올리브유가 그를 향해 물었다.

"바, 방금 황명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황명?!"

황제의 명령!

지금까지 어떠한 언질도 없던 황제가 직접적으로 뭔가 지시를 내렸다고?

"뭐? 황명?"

"헐, 뭐지? 설마 우리한테 관심을 보이는 건가?"

황명이라는 한마디에 한참 우울하던 길드원들도 기대로 부풀었다.

어쩌면 이 답답한 상황을 해결해 줄 만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알시아 대왕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네?"

"알시아 대왕 말입니다, 알시아! 모르십니까?"

"아, 아뇨. 당연히 알죠."

뉴월드를 하는 사람 중, 알시아란 세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녀가 이해 못 하는 건 왜 갑자기 알시아의 이름을 꺼냈냐는 것이었다.

"그게……."

사제는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저희들의 드래곤 토벌 기회는 알시아 대왕이 돌아오기 전까지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예?"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올리브유.

전혀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이 사건에 알시아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고.

"본래 제국에서는 이 중대사를 해결할 적임자로 알시아 대왕을 지목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쪽에서 토벌 준비를 이유로 한참 사라진 적이 있었는데, 1황자께서 그 기회를 잡은 것이었습니다. 단, 알시아 대왕이 돌아온다면 이후 토벌 작전은 오직 알시아 대왕에게만 맡긴다는 것이 황제 폐하의 조건이었습니다."

"……."

올리브유는 충격에 말문이 막혔다.

"그, 그럼 저희는……."

지금까지 죽은 것 말고는 한 게 없는데?

희생한 것에 비해 얻은 건 하나도 없는 상황.

"거,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 기회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니."

사제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저희들의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이 이번에 확실히 조사해 주시지 않으면……."

힐끔 올리브유를 쳐다보는 사제의 눈빛엔 원망이 담겨 있었다.

‘이만큼이나 시간을 줬음에도 아직 해결을 못 해?’라는 노골적인 눈빛.

울-컥.

순간 지금까지 잘 참았던 올리브유는 사제의 얼굴을 힘껏 갈겨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무리 죽어도 부활한다곤 하지만, 어쨌든 죽음은 죽음.

자신들에게도 리스크는 컸다.

그런데 그런 구렁텅이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밀어 넣었으면서 저런 태도로 나오고 있으니…….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이곳은 엄연히 황성 내부였으며, 상대는 5대 교단의 사람.

건드렸다 피를 보는 건 자신들이었다.

"하하, 그럼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저희도 진입해서 결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를 꽉 물고 돌아선 올리브유.

그녀의 두 눈은 더러워서라도 반드시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 의지만으로 극복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벽이었다.

* * *

"다행히 실패했다네."

젠트르노 황자에게 소식을 전해 받은 재호.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와의 독대에서 교단 쪽 소식과 본격적인 토벌 명령을 받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한 게 교단 쪽에선 기껏 기회를 잡아 놓곤 지상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데?"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교단들의 태도에 재호는 괜한 의심이 들었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다른 변수가 생긴 것인지 걱정된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있겠느냐?"

황제가 준비해 준 화려한 별장의 객실.

키노는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익숙한 모습으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어차피 네가 실패하면 제국은 무너지겠지. 우리는 적당히 싸우다 도망친다는 선택지도 있느니라."

"무서운 소리 하지 마. 그랬다간 내 꽃집이 활활 탈지도 모르니까."

"후후-"

키노는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앞에 놓인 차를 음미했다.

"확실히 황제가 너를 상당히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건 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이 정도의 고급 차를 내어준 걸 보면 알 수 있지."

그렇게 말해도 재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현실에서도 차나 커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거늘, 가상 세계의 차를 알 리가 없었으니까.

"마음에 들었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도 믿음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은 해 주어야겠지."

달그락-

차를 내려놓은 키노.

"어디 한번 시작해 보자꾸나."

마침내 투룬아르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