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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만 키우는데 너무 강함-508화 (507/641)

508화

황제의 엘리시아 화원 투어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화원 내부를 돌아다닌 뒤, 그는 옥한돌 회장의 별장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해가 진 후에 엘리시아 화원의 진짜 모습까지 알차게 구경을 마친 황제.

"허허- 대단하군! 정말로 경이로워!"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국 내의 엄청난 위험을 겪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황제는 즐거워했다.

아니, 어쩌면 이 혼란한 마음을 엘리시아 화원을 통해 치유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국의 밀키웨이 정원이 왜 엘리시아 화원에 발끝도 못 쫓아간다는지 알 것 같군! 이대로 돌아가 제국의 정원을 본다고 한들, 잡초로밖에 안 보일 것 같군."

소싯적엔 그 역시 제법 세상 구경을 했었지만, 단연코 지금 보는 풍경만큼 아름다운 장소를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황제가 된 이후에는 더더욱…….

"알시아 대왕! 혹시 원정 조경 관리도 가능한가?"

황제는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황성에 그대로 옮겨 두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황성 내에 말입니까?"

재호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무려 황제의 꽃집 의뢰!

어마어마한 요청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으나…….

"아니, 아니지. 그래선 안 되지."

갑자기 황제가 먼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대왕의 자격을 인정한 그대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를 뻔했군."

"…예?"

"이 정도로 대단한 정원을 만들려면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터. 한데 그저 내 욕심만으로 그것을 탐할 순 없지."

"아, 아뇨. 얼마든지 가능한……."

"게다가 엘리시아 화원의 상징과 같은 이 풍광을 함부로 탐할 수는 없지. 내가 사과하겠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황제에게 재호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네.’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황제의 배려가 고마운 일이기도 했다.

분명 황제의 부탁을 받으면 적당히 해선 절대 안 될 터였다.

심지어 엘리시아 화원 이상으로 정성을 들여야 할지도 몰랐다.

‘그만큼 엘리시아 화원만의 특별함이 희미해질지도 모르고…….’

어차피 재호의 지속적인 관리가 없으면 절대 그리되진 않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자신이 직접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 주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신이 안 된다면 최소한 메이라도 가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그만큼 재호의 활동에 제약이 많이 생기는 건 자명한 일.

‘다행이네.’

재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후로 잠시 대화는 끊어졌다.

황제는 말없이 엘리시아 화원의 풍경을 찬찬히 살폈다.

"참 아쉽군. 이것이 내 마지막 외출이라고 생각하니 말이야."

한참 시간이 지나 나온 혼잣말.

황제는 함부로 황성 밖을 나서서는 안 된다.

아무리 최강의 호위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주 사소한 위험조차도 제국의 안위가 출렁였고, 그런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황제의 자리였다.

"아마 지금쯤 황성에서도 난리가 났을 것 같군."

황제는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 *

해가 떨어졌음에도 황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재호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더니 다시 나오지 않는 황제.

당연히 황궁에서는 난리가 났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특히 최근 반복적인 지진으로 인해 황성 내 불안감은 최고치를 찍고 있었으니…….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또 다른 기회였다.

헤라리 1황자를 위시한 정치 세력은 황제가 사라진 하수로 앞에 모여 그곳을 막은 호위 기사들을 향해 거세게 반발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폐하께서 아직 나오지 않으신단 말인가!"

"단장! 이런 의심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폐하를 향한 그대의 충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

그들은 호위 기사들을 자극하는 말을 쏟아 내며 거세게 항의했다.

"단장. 그만 우리를 안으로 보내 주는 것이 어떻소? 이 이상은 나도 인내해 줄 수 없다네."

헤라리 황자는 얼굴을 굳히며 호위 기사단장을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 안으로 들어가신 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네. 게다가 지금 이 사태가 흘러가는 걸 보면 알시아 대왕이 수상쩍은 것은 명백한 사실! 그런데도 폐하를 지켜야 할 최강의 검이 이대로 지켜만 보고 있겠다는 건가?!"

그의 호통에 기사단장의 무감정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폐하의 명령입니다. 그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헛소리! 그렇다면 대체 왜 황성의 결계까지 거두어 버린 것이란 말인가!"

"저는 폐하의 명에 따랐을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단장!"

헤라리 황자는 성큼 앞으로 다가갔다.

"난 위대한 미드스트 제국의 1황자. 황제 폐하께서 총애하는 적자이자 곧 황태자가 될 이 몸이네! 그런 나를 언제까지 창피하게 만들 셈이지?"

헤라리 황자는 은근슬쩍 자신을 황태자로 자칭했다.

이 혼란한 상황 속, 주변에서 지켜보는 수많은 이들 앞에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각인시키려는 행동이었다.

"음? 대체 언제 황태자가 결정되었습니까?"

"?"

그때, 뒤쪽에서 들려오는 재수 없는 목소리에 헤라리 황자는 미간을 구겼다.

"젠트르노……."

고개를 돌리자 여유롭게 뒷짐까지 진 채로 다가오는 젠트르노 황자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혹시 폐하께서 따로 말씀이라도 하셨던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형님이 스스로 황태자라 칭했다는 것일 텐데……. 과연 그 사실을 폐하께서 알게 되신다면 뭐라 하실지 진심으로 궁금하군요."

"너 이 자식……."

"아니면 내심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되는군요. 가령 폐하께 어떤 문제가 생겼을 거란……."

"그 입 다물어라!"

젠트르노 황자에게 정곡을 찔린 듯, 헤라리 황자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젠트르노 황자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넌 모를 거다. 난 저 아래 알시아가 주장한 드래곤 따위는 없단 사실을 알고 있다!"

그가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은 오직 하나의 정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알시아의 함정이라며, 황제와 제국은 그 함정에 빠져 버렸다는 것을……!

"넌 폐하가 걱정되지도 않는단 말이냐?"

"아무 일도 없을 거란 걸 알기에 걱정할 필요도 없는 거죠."

헤라리 황자의 물음에 젠트르노 황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호라……. 너야말로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전혀 모릅니다. 그저 알시아 대왕을 잘 알고 있으며, 그라면 절대 폐하께 어떠한 위해를 가하지도 않을 거란 걸 알 뿐입니다."

"흥!"

확신에 찬 그의 말에 헤라리 황자는 콧방귀를 꼈다.

"네가 그렇게 믿는 알시아가 폐하와 함께 들어간 뒤, 지금까지 돌아오고 계시지 않고 있다. 그 누구도 그것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란 걸 알고 있지. 그런데도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나?"

"……."

그 지적에 대해선 젠트르노 황자도 할 말은 없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그는 오직 재호를 전적으로 믿고 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너 역시 자신은 없는 것이겠지."

비웃듯이 말한 헤라리 황자는 다시 기사단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단장. 다시 말하겠네. 지금 당장 제국을 위해 내 말을 따르게."

"저희는 오직 황제 폐하의 명령에만 따릅니다."

기계처럼 반복된 멘트.

"지금처럼 폐하의 안위가 걱정되는 상황에서 그 정도 융통성은 발휘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씀을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헤라리 ‘황자’님."

그는 ‘황자’에 은근히 힘을 주며 말했다.

"황제 폐하는 제게 명령을 내리셨고, 저희는 그것을 수행할 뿐입니다. 대륙 그 누가 오더라도 황제 폐하의 명령은 거스를 수 없습니다."

"거참 답답하군. 알시아 그자의 수작인 게 분명한 상황인데도 이럴 텐가?"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변함이 없는 우직한 대답에 결국 헤라리 황자는 폭발했다.

"좋다! 그렇다면 내가 강제로라도 확인하겠다!"

지금까지 서로의 체면을 위해 사렸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헤라리 황자는 막을 테면 막아 보란 듯,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화려한 검을 뽑아 들곤 앞으로 향했다.

아무리 명령이라고 한들, 자신이 이 정도로 거칠게 나온다면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내린 판단.

하지만 그건 황제 호위 기사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아직 자격이 없는 그가 알 수 없는 건 당연하긴 했지만 말이다.

챙-

검을 마주 뽑아 들고 헤라리 황자를 막은 호위 기사단장.

"?!"

생각도 못 한 대응에 헤라리 황자가 움찔했다.

"감히… 내게 검을 뽑아 든 것이냐? 황제의 피가 흐르는 이 내게?"

"더는 접근하지 마십시오."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애초에 답을 바라고 한 질문도 아니었지만.

한편, 헤라리 왕자를 지지하는 다른 대신들은 그 상황에 난리가 났다.

감히 황실을 수호하는 기사가 황가의 핏줄을 향해 검을 겨눴으니 말이다.

"어허! 지금 당장 검을 거두시오!!"

"제아무리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건 선을 넘은 행동이오!"

뒤에서 들려오는 격한 반응들에 헤라리 황자는 씩 미소 지었다.

"들리시오? 저 아우성들이?"

헤라리 황자는 다시 한 걸음 내디디며 말을 이었다.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이 드는군. 그러니 이만 고집을 내려놓고……."

"훗날? 네가 말하는 훗날은 무엇을 뜻하지?"

"그야 당연히 내가 황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려던 헤라리 황자는 멈칫했다.

방금 자신을 향한 목소리가 호위 기사단장의 것이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저벅- 저벅-

분명 가벼운 발걸음일진대…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만드는 기이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호위 기사들 너머,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익숙한 얼굴…….

"헙?!"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헤라리 황자와 기사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헐레벌떡 무릎을 굽혔다.

헤라리 황자는 너무 놀란 탓이었고, 기사들은 아직 헤라리 황자가 검을 꺼내 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 앞에서……!

챙그랑-

뒤늦게 검을 떨어트린 헤라리 황자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뒤늦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바, 방금은 제 실언이었습니다!!"

없던 일이라며 잡아떼는 건 불가능했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권력을 향한 욕심을 드러냈으니 말이다.

"……."

황제는 착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좋던 기분은 싹 날아가고, 한없는 실망감만이 가득 들어찼으니…….

게다가 단순히 헤라리 황자 한 명의 난동을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가 끌고 온 다른 대신들은 이 사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나, 이젠 아니게 되었다.

‘할 일이 잔뜩 생겨났군.’

황제는 반나절의 짧은 휴가가 끝났음을 확실히 느꼈다.

* * *

다시 키노의 도움을 받아 황성으로 돌아온 재호.

황제는 먼저 자리를 떠났고, 재호는 안에서 마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남았다.

다행히 황제는 그 사정을 이해해 주었다.

제국을 크나큰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은인이니 그 정도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이제 제국은 엘리시아 화원과 혈맹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가까운 관계가 되었으니 말이다.

더할 나위 없는 해피엔딩.

"그런데 네 표정은 왜 그러느냐?"

키노의 물음에 재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투룬아르를 그렇게 죽도록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나 싶어서."

혹시 진작 <교만의 거울>을 썼었다면…….

"그건 쓸데없는 가정이니라."

키노는 딱 잘라 말했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서도 네 저주 따위 콧바람으로 튕겨 내던 녀석이다. 그런데 멀쩡한 상태에서 그것이 통했으리라 생각하느냐?"

키노는 냉정히 말했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에라도 정신을 차리게 해 준 걸 녀석은 고마워하겠지."

"그 말이 맞다. 투룬아르 님은 너무 늦어 버렸다. 그나마 작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도록 해 준 게 다행인 일이지."

알드리온도 재호를 격려해 주었다.

"어? 어어, 그래……. 위로해 줘서 고맙다……."

재호는 키노와 알드리온에게 대답했다.

-…….

-…….

하지만 재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두 정령의 눈은 잔뜩 가늘어져 재호를 흘겨보고 있었다.

‘좀 더 일찍 정신을 차렸으면 이곳에 있던 석판에 대해 직접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차마 둘에겐 이야기할 수 없는 속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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