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재호가 지하 동굴에 남은 건 아직 이곳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일들이 있어서였다.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일단은 내팽개쳐 두고 왔었으나, 이곳엔 수상쩍은 게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알시아!"
아비규환 속에서 용케 살아남은 올리브유가 길드원들과 함께 다가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가능해진 귓속말 덕에 급히 아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구한 그들.
페르마 사막 쪽에서 재호가 거대 몬스터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곤 길드원 몇 명이 잠시 게임을 끄고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왔다.
그 덕에 어지간한 정보는 알고 있었고, 동시에 의심도 들었다.
왜 굳이 페르마 사막으로 갔다 온 것일까… 하는 의심 말이다.
물론 자신들도 이 현장에 있었기에 얼마나 긴박한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제국의 몰락은 현실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기껏 옮겨간 곳이 왜 하필 엘리시아 화원일까?
혹시 자신들을 떼어 놓고 몰래 다른 걸 한 게 아닐까 싶었고, 뒤이은 재호의 대답에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미안해. 뼈다귀 하나씩 주려고 했었는데……. 폭발 과정에서 다 증발해 버렸어."
"그… 그게 무슨……?"
올리브유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인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자신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재호와 함께 레이드에 참가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경험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가치를 품고 있었지만, 그들의 주 목적은 쌀먹.
다들 뼈다귀 하나 받아 푹 고아 먹을 기대에 부풀어 있거늘…….
"드, 드랍된 아이템이 하나도 없다고?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몬스터를 잡으면 당연히 전리품들이 쏟아지기 마련.
게다가 어디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닌, 무려 드래곤!
드래곤에게서 나오는 소재들은 흔히들 절대 망가지지 않는다고들 하지 않는가?
하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그 점이 재호도 의아하긴 했기에 키노에게 따로 물어보기도 했었다.
-나는 그쪽으론 잘 모르지만, 아무리 드래곤의 소재들이 단단하다 하더라도 뛰어난 장인들의 손에서 가공이 이루어지지 않느냐? 장인들의 힘이 폭주하는 드래곤의 마나보다 더 세서 가능한 건 아니겠지.
더군다나 좁은 영역에 폭발하는 마나를 강제로 압축을 시키다 보니 더더욱 버틸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결과였으며 재호도 너무나 미안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다른 보상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거든."
다행히 재호는 칼리토의 저주가 풀리면서 돈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그들에게 주기로 했던 드래곤의 뼈에 해당하는 가치만큼 골드를 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 가치를 정확히 책정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아마 그건 너희들도 찝찝하지 않을까 싶은데……. 안 그래?"
"…그렇긴 하지."
스스로가 속물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약속한 것은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백지수표를 요구할 수도, 재호 쪽에서 줄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재호는 미래 투자 가치가 있는 상품을 두고 그들과 거래를 해 볼 생각이었다.
정확한 속내는 ‘이것’의 관리를 떠넘기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이었지만…….
"그래 다른 제안을 할까 해."
"다른 제안?"
"혹시 주변에 포션 같은 거 만드는 사람 좀 알아?"
재호가 맡기려는 건 바로 페르마 사막 한가운데 생긴 초고농축 마나 오아시스!
이미 불곰국 폐허에서 마나에 오염된 우물을 시음해 본 재호는 그 대단한 효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팔아먹기 좋은 고가치 상품으로서의 가능성도 품고 있음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듣는 처지에선 이게 뭔 소리인가 싶을 뿐.
재호는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해 주었고, 올리브유는 뭔 미친 소린가 싶다가 이젠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새 주변에 모여든 쌀먹 길드원들도 재호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살폈다.
"정말로… 엘릭서가 된다고?"
긴 침묵 끝에 올리브유가 입을 열었다.
"응. 원한다면 우리 대화를 영상 증거로 남겨도 돼."
재호는 자신만만한 대답이 나오자 뒤늦게 길드원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다.
"마, 맙소사! 엘릭서?! 엘릭서를 양산할 수 있다고?"
"기, 길마님! 이거 무조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드래곤 뼈다귀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엘릭서는 흔히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복용하는 것만으로 영구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이템 중 하나.
게다가 드래곤의 마나 원액!
오기크의 마나에 오염된 우물물로도 엄청난 효과를 봤었는데, 그보다 더욱 농축된 것이면 분명 훨씬 뛰어날 것이었다.
마나뿐 아니라 힘의 정수도 녹아들었을 테니까!
"단, 그걸 그대로 마시는 건 불가능해. 어쩌면 저주에 걸릴지도 모르거든."
[<오기크의 원념>]
[100시간 동안 능력치 변화가 없을 경우, 레벨업 및 칭호 효과 외의 방식으로 얻은 추가 능력치가 모두 사라지며 저주가 해제됩니다.]
[시간은 능력치 변화가 발생할 경우 갱신됩니다.]
당시 우물물을 마시면서 발현되었던 오기크의 저주.
그것 때문에 테일러는 지독하게 고생했었고, 함께 마셨던 우람은 쉬지 않고 지금도 열심히 쇠질을 하고 있을 터였다.
재호야 저주 면역도 있었고, 자신이 지닌 오기크의 정수와 공명하며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번에도 그와 같은 부작용이 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그래서 연금술 관련 클래스가 필요하다는 거구나. 그것도 드래곤의 마나를 가공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올리브유는 모든 걸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런 사람을 구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돈을 만지게 될 것은 분명했다.
꿀-꺽.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군침.
"하지만……."
진심으로 하고 싶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때까지 버티기엔 우리가 여유롭지 않으니까……."
다름 아닌 바로 주머니 사정.
"흠흠, 길마님.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듯한데요."
"응?"
길드원들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그… 원래 다들 진짜 힘은 숨겨 놓기 마련이잖아요?"
"주식 좀 팔고……."
"나도 적금 곧 만기고……."
다들 믿는 구석은 둔 채로 지금까지 앓는 소리를 해 왔던 것이다.
즉, 애초에 재호의 대리 금융 영업은 필요가 없었다.
"……."
길드원들을 향한 약간의 원망이 담긴 올리브유의 눈빛.
하지만 덕분에 이 새로운 사업에 한 발 걸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 * *
자세한 계약 내용은 다음에 나누기로 했다.
하지만 재호는 쌀먹 길드가 마나 오아시스를 전적으로 관리하는 걸 요청할 생각인 만큼, 그에 합당한 비율을 제시할 계획이었다.
"이제 내가 알고 싶은 건 석판인데……."
재호는 올리브유에게 받았던 쪽지를 꺼냈다.
[조.이.주.용.함.심.정.저.]
적힌 내용은 그러했다.
하지만 이것만 봐선 알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상황.
"혹시 다른 정보는 더 없었어?"
재호의 물음에 올리브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사라진 이후로 더 조사해 봤는데……."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미 수색 지역을 살피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은 투룬아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죄다 돌가루가 되어 버려서 확인할 수 없어."
그렇다고 부서지 돌가루를 하나하나 맞춰 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보면 글자를 순서대로 맞추는 것 같은데……. 감도 안 오네."
올리브유는 난감하단 듯 중얼거렸지만, 재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볼 다른 방법이 또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좀 다녀올게."
"응? 어딜?"
[꿈의 경계로 진입합니다.]
주변이 안개로 가득 차며 흐릿해지며 재호는 다른 세계로 넘어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타난 제국의 5대 황제 프로판.
"…투룬아르가 떠났군."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그 목소리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으니… 누구보다 투룬아르의 숭고한 정신을 잘 알고 있기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물론, 스스로를 희생적인 위인으로 포장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물론, 투룬아르도 이 순간을 위해 너무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다오. 그중에는 이유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대부분이었지. 아마 역사 속 나는 제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되었을 것이오."
"바로 잡길 원합니까?"
재호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며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제국이 무사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오. 그리고……."
그는 주변에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다른 사람들의 실루엣을 돌아보았다.
"음?"
그런데 그들의 분위기가 이전에 봤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증오를 시각화한 것처럼 보였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전부 그 억울한 죽음을 경험한 이들이지. 그리고 그들은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오."
프로판은 씁쓸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굳이 투룬아르의 제물을 자처하며 이 깊은 지하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유를 알겠소?"
그는 재호에게 불쑥 물었다.
"글쎄요?"
"나는 죗값을 치러야 하고, 이들은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오. 물론 그때는 이런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다시 말해 프로판 황제는 자신 탓에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스스로 투룬아르의 제물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단, 미쳐 버린 투룬아르가 사람들을 석상으로 만들어 죽지도, 살지도 못한 끔찍한 상태로 만들었을 거란 건 그 역시 예상 못 했던 일이었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영원할 것 같던 저주의 끝이 마침내 도래했으니……. 고통받은 이들을 위해 이제는 내 영혼을 내놓을 차례지."
그리 말한 프로판 황제는 재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선 안 되는 존재가 황제였지만, 그에게선 그런 오만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두려움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복잡한 모습.
"제국이 앞으로도 빛날 수 있음을 확인했으니……."
그렇게 스스로 만족하고 몸을 돌렸다.
"잠시! 가기 전에 하나 물어볼 게 있습니다."
"음?"
재호는 바깥에서 보았던 석판의 존재에 관해 물어보았다.
"석판이라……. 바깥의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 난 모르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오. 다만……."
그는 뭔가 있다는 듯, 미간을 살짝 구기며 기억을 더듬었다.
"투룬아르가 잠시 정신이 돌아왔을 당시, 내게 말한 적이 있다오."
끊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
"옵티마."
"음?"
뜬금없는 이름이 등장했다.
"옵티마?"
"그 이상은 모르겠다오. 난 그저 신의 도움을 바란 그의 간절함 정도로 이해했었으니……. 하지만 수상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는 걸 보면 어쩌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그 정도라오."
그 이야기를 들은 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돌아선 프로판 황제는 천천히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재호는 전대 황제의 최후를 존중해 주기 위해 <꿈의 경계>를 해제했다.
어쩌면 지금부터 끔찍한 광경이 펼쳐질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스스스-
주변 풍경이 또렷해지며 현실로 돌아온 재호.
"돌아왔……."
그런데 나오자마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과 마주했다.
쿠르르-
동굴 가득 세워져 있던 석상들이 잘게 부서지며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게 뭐야?!"
"뭐지? 함정 같은 거라도 발동된 거 아냐?!"
사람들은 난리가 났지만, 재호는 어렴풋이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투룬아르도 없고, 프로판 황제도 최후를 맞이했으니 더는 이 공간 자체가 유지될 이유가 없는 거겠지.’
그렇게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광룡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 재호는 모르고 있었지만, 황태자 경쟁 역시 끝에 다다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