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화
[그동안 잠잠하던 고잉헬 호가 움직인다!]
고잉헬 호가 출발하자마자 쫙 퍼진 소문.
사람들의 반응은 ‘그럼 그렇지.’가 대부분이었다.
이번 사태에 재호가 관련이 있단 건 이미 진작에 예상하던 일.
이미 만빙하곡에 있거나 향하는 사람들은 환호했고, 대륙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절망했다.
‘알시아가 뜬금없는 장소에 나타났는데 왜 머뭇거린 것인가?’ 하는 후회만이 남을 뿐.
그렇게 북쪽 바다를 향해 고잉헬 호는 거침없이 달렸다.
가는 길에 심심찮게 만나는 같은 목적지의 플레이어들.
그들은 앞질러 가는 고잉헬 호를 보며 부러워했다.
"젠장……. 시베리아 바다호랑이 놈들 꿀 빠네……."
"쟤들 그래도 저기서 빡세게 일하지 않나?"
"빡세 봐야 얼마나 빡세겠냐? 전에 방송으로 보니까 그냥 단순 노동이던데."
"하긴 어차피 걔들 다 고렙들이라서 그리 힘들진 않겠구나."
"부러운 놈들! 겜 개같이 하다 한 방에 인생 역전했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고잉헬 호에 탄 시베리아 바다호랑이 길드는 평소보다 몇 배는 힘든 노동 중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가야 한다는 이유로 휴식 시간도 거의 없이 작업 중인 그들.
"헉… 헉……."
"야… 이거……."
거친 숨소리와 뚝뚝 흐르는 땀방울.
마계에 가서 레벨업까지 하고 왔다는 이들치고는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아무리 고레벨에 높은 체력,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연속되는 중노동에 노출이 되면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
"아니… 바쁘게 가야 한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지금 하는 것들 되게 쓸데없지 않냐?"
"그러니까! 왜 굳이 연료들을 다른 창고로 옮기라는 거야?! 어차피 곧 쓸 건데!"
하지만 기껏 다 옮겨 놓으면 티나가 나타나 창고를 착각했다며 다른 곳으로 또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옮기니 다시 다른 곳으로… 다시 다른 곳으로…….
"?"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
뭔가 티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아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그리고 할 거면 다 시키지, 왜 버팔로는 열외야?!"
"이거 분명 뒷거래가 있었던 거야!"
유일하게 느긋한 여행을 즐기는 버팔로 탓에 그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 일에 버팔로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을…….
"버팔로! 티나가 너 찾는다! 당장 내려와!!"
-응? 나를?
그들은 버팔로에게 귓속말을 보냈고, 잠시 후 그가 갑판 아래로 내려왔다.
"티나가 날 왜 찾아? 어디… 컥!!"
버팔로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달려든 시베리아 바다호랑이 길드원들은 창고 문을 닫곤 그를 제압했다.
"이 미친놈들아! 뭐하는 짓이야!!"
"뭐? 미쳐? 미친 건 너겠지."
그들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너 대체 뭔 짓을 한 거냐? 왜 티나는 우릴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 자식 봐라? 우리 중에 유일하게 꿀 빨고 있는 놈이 하나인데 의심받는 게 당연한 거 아냐?"
"?!"
"뭐,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의심되는 게 있긴 하지."
분명 출발하기 전, 몰래 재호를 욕하던 자신들을 상대로 버팔로는 과한 액션을 보였었다.
재호가 보이지 않을 때, 누구보다 열심히 욕하던 녀석이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옹호했던 것이다.
"내, 내가 언제 옹호했다고!"
"웃기지 마! 그때 너 알시아 발바닥도 핥을 기세였어!"
"뭐, 뭐라고?! 내가 냄새나는 그 자식 발을 왜 핥아!!"
"오호라- 냄새 심한지도 알아? 벌써 핥기라도 한 거냐?"
"아오! 좀 놔! 그깟 알시아가 뭐가 무섭다고 동료까지 죽이려 드냐?! 너넨 알시아 조지려는 시도라도 해 봤냐? 난 하기 직전까지도 가 봤다고!"
"…푸후후."
"?"
갑자기 피식 웃음을 흘리는 그들의 모습에 버팔로는 멈칫했다.
끼이이-
그때, 창고 문이 열리며 나타난 뾰족한 귀의 주인.
"헉?!"
그 상대를 본 버팔로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 다 들었지? 이 자식도 우리랑 별반 다를 거 없다고!"
시베리아 바다호랑이 길드원들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티나에게 말했다.
"넌 속은 거다!"
"아, 아냐! 오해야! 이 자식들이 몰아붙이니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거라고!!"
버팔로는 필사적으로 발악했지만, 티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려 창고를 떠났다.
"……!!"
털-썩.
그 행동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된 버팔로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후후……. 어서 삽 들라고?"
"우린 ‘동료’잖아?"
뛰어난 동료애를 보이며, 그렇게 그들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 * *
고잉헬 호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만빙하곡에 가까워질수록 바다를 막는 얼음덩어리들이 많아졌지만, 고잉헬 호를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바다든 육지든 가리지 않고 운항이 가능한 만능 선박인 고잉헬 호를 얼음으로 막을 순 없었다.
그렇게 저 멀리, 마침내 만빙하곡에 보이기 시작할 때쯤, 청탑에서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청탑을 지킬 것이네."
바로 탑주 아이시클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홀라스 장로."
아이시클은 대표로 찾아온 노인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이라면 날 반대하리라 생각하긴 했어요. 하지만 조금은 상황 판단을 할 줄 알 거라고 기대했는데 아닌 모양이군요."
"글쎄. 적어도 청탑을 버리고 도망가려는 무능한 탑주라면 반대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그는 포장하는 것도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시클은 당황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찾아올 것을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구려."
"뻔하지 않나요? 오히려 생각보다 늦으셨군요."
능청스러운 대답에 홀라스 장로는 미간이 구겨졌다.
"그렇다면 말이 잘 통하겠군."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탑주는 한번 결정을 내린 이상, 절대 굽히지 않는다는 것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제안 하나를 하고자 하네."
"제안이라…….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일단 들어나 보죠."
그녀가 말한 것처럼, 표정에선 일말의 기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들은 제안이란 것도 최악이었다.
"탑주를 따르는 이들을 데리고 떠나는 건 막지 않겠네. 하지만 그대는 청탑의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떠나게. 청탑은 우리가 지키겠네."
기도 안 차는 소리에 그녀는 콧방귀를 꼈다.
"아뇨. 탑주로서 난 청탑의 유산이 불길 속에서 사라지는 걸 지켜만 볼 수 없어요."
"정녕 알시아 대왕과 그 흑마법사를 믿는단 말인가? 악마를 데리고 와서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르는데?"
"직접 봤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당신이 실망스럽군요. 아니, 믿지 않는 건가요? 당신의 눈이 엘라스트라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진 않을 텐데요?"
"껄껄껄- 글쎄. 과연 그게 중요할까 싶군."
홀라스 장로의 말처럼 지금 상황에선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저렇게 모른 척하며 청탑의 마법사들을 선동하는 건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모든 게 사라진 뒤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설마 그 책임을 탑주인 내게 떠넘기는 하책을 쓰려는 건 아니겠죠?"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진 뒤, 감정이 격해진 사람들에겐 새로운 리더와 공공의 적이 필요한 법이죠."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적의 탓에 음모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했다.
"욕심에 청탑의 역사를 지워 버리려 하는군요. 하지만 당연히 나는 그걸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어요."
청탑 내의 모든 마법사가 홀라스 장로파에 가담한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며 5대5라고 할 수 있는 수준.
즉, 서로 강하게 맞서기로 한 이상 청탑이 쪼개지는 건 확정이었다.
그리고 아이시클은 그런 걸 전혀 겁내지 않는 스타일이었고…….
"좋아요. 어디 어떻게 흘러가나 한번 두고 봅시다."
그녀는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후회할 것이네. 지금 지금부터 우리는 적이나 다름없으니."
홀라스 장로는 확실히 선전포고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아! 혹시나 해서 하나 이야기해 주자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알시아 대왕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지만… 아마 그가 오기도 전에 모든 일은 끝날 것이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로서도 그자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니 서둘러야겠지."
"……."
침묵하는 아이시클의 반응에 만족하고, 흐뭇하게 웃으며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음?!"
"?"
그리고 그 앞에 막 도착한 재호가 있었다.
* * *
도착한 재호는 곧장 티나와 함께 청탑으로 향했다.
시니스 장로에게 받았던 인장도 있었기에 내부의 도움 없이 마탑 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집무실까지 도착했지만, 다른 사람과 대화 중이란 안내에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 나오려던 홀라스 장로와 만났다.
‘저 사람은……?’
지난번 회의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표정이 이상한데?’
재호를 보자마자 잔뜩 일그러지는 얼굴.
그리고 어깨 너머로 보이는 아이시클의 비틀린 미소까지 보자 무슨 상황인지 대략적으론 이해가 되었다.
‘언쟁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곳을 포기하고 도망가기로 결정한 만큼 내부에서도 많은 반발이 있을 거란 걸 재호도 예상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상반되는 표정을 보면…….
‘내 이야기도 나온 모양이네.’
그러니 앞에 선 장로의 얼굴이 저 모양일 터였다.
"알시아 대왕……. 정말 빠르게 왔구려."
홀라스 장로는 씹어뱉듯 말했다.
"또 그 흑마법사가 도와준 것이오?"
목소리 톤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경멸.
"배 타고 왔죠. 탑주님께 계획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허허, 듣지 못했소이만……."
"그래요? 이상하네요. 분명 장로님들에겐 모든 소식이 다 전해졌을 텐데 말이죠."
재호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왜 너는 모르냐는 뜻.
그가 아이시클 장로와 적대하는 걸 알고 있다고 은근슬쩍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숨은 의미를 이해한 홀라스 장로의 표정은 더욱 구겨졌다.
"흠, 아무튼 탑주를 만나러 온 것 같으니 난 이만 가 보겠소."
한참 높게 위치한 재호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이야기하기도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던 홀라스 장로.
그는 까닥 묵례한 뒤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흥. 들어오세요."
아이시클도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재호를 맞이했다.
"영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죠?"
재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우려하던 대로 청탑은 쪼개지게 생겼네요."
아이시클도 이미 각오했던 일.
하지만 문제가 되는 건 사람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청탑 내에서는 여러 파벌이 있고, 그 파벌에 속한 마법사들이 서로 다른 행동으로 이번 사태에 대응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다만 청탑의 모든 기록물과 시설을 옮길 수 없는 건 곤란해요."
그건 청탑의 역사 그 자체.
그걸 잃어버리게 된다면 청탑의 뿌리가 흔들리게 될지도 몰랐다.
"홀라스 장로는 선전포고하더군요. 절대 그것들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말이죠. 아마 시간이 갈수록 청탑 내에서는 무력 충돌이 발생할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방법은 없어요?"
"글쎄요. 이제 고민해 봐야죠."
이러나저러나 보통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훔치는 건 안 됩니까?"
"훔쳐?"
재호의 주장은 단순했다.
어차피 괜히 물건들을 챙기다 걸려 싸움이 날 거면 차라리 몰래 챙기면 되지 않냐는 뜻.
"현실적으로 모든 걸 다 챙기는 건 어렵습니다. 중요도를 따져서 선별해 그것만이라도 확실히 챙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군요.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거 아실 텐데요? 이곳은 마탑이에요."
"뭐, 나름 이쪽으로 활동 좀 했던 실력 좋은 친구가 있거든요."
좀 덜떨어지긴 하지만 재호가 아는 이들 중, 잠입 실력만큼은 독보적인 친구.
바로 테일러!
아마 이번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그는 당장이라도 신이 나 나설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이 아니에요. 아직 청탑의 이전지를 확정 짓지 못했거든요."
대피할 계획은 세워 놓았지만, 어디로 갈 것인지는 아직 논의 중이었다.
"아! 안 그래도 오는 길에 생각해 봤습니다."
그 고민을 들은 재호.
"혹시 사막은 어때요?"
그리곤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아이시클에게 미친 질문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