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화
얼어붙은 화산이 헬릭스의 열기에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탓에 오랜 시간이 흘러 만빙하곡 아래에 잠들어 있던 화산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콰르릉-!!!
연신 내뿜는 화산은 만빙하곡 위에 있던 모든 걸 녹이고 불태웠다.
그리고 하늘로 솟아올랐던 헬릭스가 서서히 화산 위로 내려앉았다.
쿠웅-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에 파도가 높게 일어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해일을 걱정해야 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헬릭스의 존재감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쿠르르-
날개를 접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는 헬릭스.
타오르는 푸른 불꽃의 깃이 휘날렸고, 여섯 개의 샛노란 눈동자가 오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괴물이라면 으레 내지르던 괴성은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
‘의외로 시작부터 날뛰지는 않네.’
아마 헬릭스 또한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다 깨어난 탓에 잠시 상황을 파악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눈동자는 차례로 고잉헬 호, 먼바다에서 대기 중인 함대, 그리고 저 수평선 너머까지 응시했다.
‘설마 대륙까지 보는 건가?’
아무리 거대하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거리.
하지만 분명 헬릭스가 바라보는 방향은 대륙 쪽이었으니, 어쩌면 눈앞의 괴물은 그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알시아 대왕.]
"?"
그때, 재호의 머릿속으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지 말아요. 엘라스틴이에요. 정령계로 막 돌아와 눈을 떴어요.]
봉인을 해제하는 순간, 순리에 따라 정령계로 곧장 돌아간 모양.
[헬릭스는 어떤가요?]
‘아직은 얌전하네요.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됩니다. 끔찍한 불꽃의 재앙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생긴 것이나 분위기만 봐도 보통 살벌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가 먼저 움직이기 어서 전에 절 소환해 주세요.]
엘라스틴의 부탁에 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척-
선두로 나선 재호는 엘라스틴 소환을 시작했다.
[<정령왕 엘라스틴>을 소환합니다.]
[정령 교감력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정령 교감력을 마나로 대체합니다.]
[소환에 필요한 마나가 부족하여 생명력이 소모됩니다.]
엘라스틴이 경고한 대로 엄청난 자원 소모가 발생했다.
그리고 체력까지 쭉쭉 떨어지는 상황.
‘역시 죽나?!’
전사 계열 클래스와 비교해 절대 작지 않은 체력통이었음에도 정령왕을 소환하기엔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새삼 정통 정령사와 야매 정령사와의 격차가 절실히 느껴졌다.
‘지금까지 정령왕급이라고 주장하는 녀석들을 데리고 있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
-…….
정령왕‘급’이란 건 바지사장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말라 죽어 가는 중에 잘도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꼰대의 비아냥대로 이제 재호의 체력은 바닥에 다다랐다.
콰르르르-
주변 바다로부터 수십 가닥의 용오름이 일어나며 재호 앞으로 뭉쳐졌다.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은 서서히 정령계로 통하는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거의 다 되었어요!]
‘거의 다 죽었어요!’로 들리는 엘라스틴의 외침.
‘슬슬 부활을…….’
그때, 재호가 미처 간과하고 있던 스킬이 터졌다.
<생기 충전(패시브)>
[정령화장은 죽음과 대척점에 자리한 존재입니다!]
[충만한 생령이 당신을 지속적으로 회복시킵니다.]
[효과 : 최대 체력의 10% 아래로 감소 시, 매 초당 최대 생명력의 20%를 10초간 회복합니다.]
‘아, 이것도 있었지!’ 벼랑 끝에서 급속도로 차오르는 체력.
감소량보다 회복량이 아슬아슬하게 더 많은 덕분에 재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버틸 수 있었다.
‘이, 이 상태라면 어쩌면… 불로장생초를 아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리고 그 기대는 재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정령왕 엘라스틴>이 소환되었습니다.]
푸화아악-
소용돌이치던 거대한 물방울이 일순간 터져 나가며 사방에 짭조름한 비를 내리도록 만들었다.
[<정령왕 엘라스틴>을 목격했습니다!]
[명성이 크게 증가합니다.]
[정령 교감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고잉헬 호 갑판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바다 위, 먼발치의 함대에 있는 플레이어들에게도 공통적인 알림이 떴다.
-저, 정령왕!! 진짜 정령왕이 나타났습니다!!
-맙소사! 뉴월드 오픈 이래 새로운 역사를 황재호 선수가 다시 한번 써냈습니다!
한발 늦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대륙 쪽 사람들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
"젠장!! 저기 있는 놈들만 알림 뜨는 거야? 우리는!"
"어, 어느 방향이야? 저기 아냐? 나 저쪽 보고 있잖아!!! 왜 알림 안 뜨냐고!!"
하지만 그들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죽는 게 확실한 최전방보단 후방에 남아 안정적인 전투를 택한 그들.
아무래도 퀘스트를 내건 왕국의 병력이 전부 대륙에 있기 때문이었다.
높은 보상을 받으려면 그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는 게 유리할 테니까.
하지만 정령왕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론으로만 들었던 미지의 존재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린다?
당연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들 발을 동동 구르는 그 시각.
촤아-
주변에 어지럽게 흩날리던 물방울들이 사라지며 엘라스틴의 본모습이 말끔히 드러났다.
반투명하게 반짝이고 찰랑이는 물의 거인.
그런데 그 영롱하게 신비로운 피부가 보이는 건 얼굴이 전부였다.
그녀는 정령이라고 볼 수 없는 묵직한 갑옷을 입고, 몽둥이에 가까운 삼지창으로 무장을 한 상태였다.
"……."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정령왕의 본모습.
특히 먼저 봤던 엘라스트라와도 너무 달라 더욱 당황스러웠다.
-대왕! 무사하군요!
낭랑하던 목소리가 더 헷갈리게 만든 점도 있었다.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옥구슬 같은 목소리.
쿠웅-!
하지만 바닥에 가볍게 내리찍은 삼지창에 일어난 해일을 보면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갔다.
-헬릭스……. 그 오랜 시간 봉인되었음에도 그 기세는 여전하군요.
고개를 돌려 헬릭스를 노려보는 엘라스틴이 씹어뱉듯 말했다.
-대왕. 난 대륙에 오래 머물 수 없어요. 내가 날뛰면 날뛸수록 대왕에게도 부담이 가겠지만, 역 소환되기 전까지는 부탁 좀 할게요.
"상관없어!"
재호는 잠시 불로장생초를 벗고 마나 회복 효율을 올려 주는 꽃템으로 바꿨다.
재호 입장에서도 최대한 엘라스틴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쿠르르르-
헬릭스는 화염 날개를 크게 펼치며 몸을 서서히 띄웠다.
녀석도 엘라스틴이 구면이며 강대한 존재라는 걸 아는 모양.
-어딜!
쿠웅-!
힘껏 내디딘 엘라스틴의 왼쪽 발이 만빙하곡의 반쯤 녹은 얼음 대지를 박살 냈다.
그 상태로 미끄러지듯 돌진하며 삼지창을 힘껏 내질렀다.
푸화아악-
먼 거리에서 휘둘렀음에도 창은 액체가 되어 헬릭스를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발과 함께 헬릭스가 앉았던 화산 봉우리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고, 흘러나오던 용암은 허공에 흩날리던 형태 그대로 얼어붙었다.
콰앙! 콰과광-!!!
매 폭발의 순간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버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풍경.
헬릭스 역시 보고만 있진 않았다.
오른쪽 날개를 가로로 휘두르자 시뻘건 불길이 엘라스틴을 뒤덮었다.
-그 어떤 불꽃도 날 침범할 순 없다!
그 자신감 넘치는 외침대로 그녀는 파도를 타며 불꽃을 뚫고, 그리고 얼려 버렸다.
그러며 다시 돌진!
정령이라고 하기엔 믿기 어려운 적극적인 육탄전을 보여 주었고, 그때마다 재호의 마나는 쭉쭉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는 일.
"우리도 지원한다!!"
재호의 외침에 마침내 고잉헬 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급가속하며 바다로 뛰어든 고잉헬 호는 엘라스틴과 헬릭스의 전장이 된 만빙하곡 주변을 돌며 포격을 준비했다.
단순 포격은 헬릭스에게 피해를 거의 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특별히 준비한 것이 있었다.
철컥-
갑판 후미에 설치된 본 적 없는 낯선 대포.
그곳에 앉은 티나는 헬릭스를 향해 조준한 뒤 밸브를 열었다.
푸화아악-!!
그러자 포탄 대신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물줄기!
헬릭스와 싸워야 한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재호는 도마뱀 시티의 드렐리어에게 꺼지지 않는 불을 끌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드렐리어에게 요청했었다.
화염 그 자체라는 헬릭스를 상대로 폭발성 공격을 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
그 결과, 새로이 얻은 무기가 바로 티나가 쏘는 물대포였다.
불과 상극인 건 당연히 물!
마침 섬에서의 전투이니 물 공급은 어렵지 않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에도 문제점은 있었다.
그 정도로 위험한 괴물이라면 물을 뿌린다고 해서 과연 대미지를 줄 수 있을 것인가?
거기다 화약을 쓰지 않고서 비행 몬스터를 상대로 사거리가 충분할 것인가?
"이 몸이 누구인가?! 드렐리어야 드렐리어!! 물과 친하진 않지만 기술 연구 면에선 얼마든지 "
하지만 드렐리어는 사거리 한계를 극복한 고압축 물대포를 어렵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아이시클 또한 빙결 마법을 이용해 특수 냉각 장치를 설계해 준 것.
그렇기에 현재 발사되는 물줄기는 닿는 것을 모두 약하게나마 얼려 버릴 정도의 한기를 품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헬릭스에게 조금은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황재호 선수의 고잉헬 호를 보십시오! 소방차… 아니, 소방배라고 해야 하나요?!
-육지에서도 움직일 수 있으니 차로 하죠!
-도대체 원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저 정도로 강력한 물대포를 어떻게 쏠 수 있는 것인지 미스터리입니다!
그건 갑판 아래, 최상위 플레이어들의 펌프질 덕분이었다.
푸슉- 푸슉-
갑판 아래에서 시베리아 바다호랑이 길드원들이 쉴 새 없이 펌프질하고 있었다.
선체 아래에 설치된 대형 펌프로 바닷물을 끌어올린 것으로, 시간이 충분치 않아 자동화를 구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인력을 이용한 무식한 방식을 채택한 것.
"헉-헉- 빌어먹을……! 너희만 아니었음 내가 이 짓거리를 할 일은 없었는데!!"
펌프질 중인 버팔로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크크… 지랄하지 마! 너만 꿀 빠는 거 우리가 보고 있을 줄 알아?"
"이 이기적인 자식들!!"
"뭐? 누가 이기적인데!"
서로 다투다 잠시 펌프질이 느슨해지는 순간…….
쾅쾅-!
"아래 뭐하는 거야! 물줄기가 약해지잖아!!"
바로 위에 앉아 있는 티나의 불호령이 아래로 터져 나왔다.
그들이 일하는지 농땡이를 치는지는 물대포의 물줄기를 보면 금방 티가 났기 때문이었으니…….
"크흑! 정령왕이 나왔다는데… 우린 보지도 못하고!!"
누구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직 정령왕은 구경도 못 한 그들.
하지만 바깥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여유롭게 올라가 구경할 새는 없었다.
-물대포가 실제로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헬릭스가 거슬려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방송 해설자의 말대로 헬릭스의 시선이 고잉헬 호를 이따금 향하는 걸 보면 성가셔 하는 건 명백했다.
-날 앞에 두고서도 한눈을 팔 여유가 있구나, 헬릭스!!
콰아아앗-
엘라스틴의 일격이 헬릭스의 가슴을 때렸고, 연이어 고잉헬 호에서 뿜어내는 물줄기를 자신이 조종하더니 방금 때린 곳에 다시 꽂아 넣었다.
지금까지의 전투만 보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전황.
-설마… 이렇게 하다 황재호 선수 선에서 정리되는 건 아니겠죠?
-하하… 그런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랬다간 지금 모인 수십만 명의 사람들과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재호 입장에선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보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라스틴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경고한 것엔 이유가 있었으니까.
쿠르르르-
갑자기 전신의 화염이 더욱 거세진 헬릭스.
번-쩍.
또 하나의 태양이 떠오른 듯, 붉은 섬광이 일순간 모두의 눈을 멀게 만들어 버렸고 엘라스틴 또한 뒤로 크게 밀려났다.
하지만 인벤토리에 없는 게 없던 재호는 이미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도, 도망치자!!!"
재호는 다급하게 외쳤다.
하늘을 뒤덮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운석을 발견하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