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난데없이 불어닥친 황사 바람.
재호는 급히 마탑을 빠져나와 꽃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보이는 거리도 갑작스러운 모래바람에 난리가 난 상황.
전부 팔을 들어 입과 코를 막고 있었는데, 그만큼 숨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 있는 재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꽃집으로 향했다.
‘…태연히 다니는 건 한국인들뿐이려나.’
아니, 어쩌면 중국인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꽃집에 도착하니 역시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이 지독한 모래바람이 당장 꽃들을 시들게 만들진 않겠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알시아 님!"
꽃집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꽃들의 상태를 살피던 메이는 재호가 돌아오자 반색하며 소리쳤다.
주변엔 엘프들과 다른 꽃집 직원들을 진두지휘해 꽃들을 보호 중이던 메이.
엘리시아 화원의 2인자다운 든든한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웬 모래바람이……."
습관적으로 재호에게 원인을 묻는 메이.
"나도 몰라!"
하지만 당연히 재호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꽃집 상황은 어때?"
"다행히 큰 피해는 없어요. 정령들이 놀라긴 했지만, 신목님의 힘 덕분에 곧 안정을 찾을 것 같아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물론 사막이니 모래폭풍이 있을 순 있겠지만, 화원 쪽에선 한 번도 없었잖아요."
메이의 말처럼 엘리시아 화원은 신목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축복받은 땅으로, 그 어떤 자연재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면 인위적으로 발생한 현상이 아닌가란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한 흐름.
‘가디언 길드?’
먼저 떠오르는 건 그들이었으나,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이런 엄청난 일을 해내는 건 말도 안 되었다.
"…잠깐만. 설마?"
그 순간, 재호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떠올랐다.
"이거 가디언이랑 녹탑 합작 아냐?"
바람과 관련된 것이니 어쩌면 녹탑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이만한 현상을 사람이 할 수 있을까요?"
메이는 쉽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지만, 이곳 뉴월드에선 또 모를 일이었다.
"뭐, 아직 다른 증거는 없으니 알아보긴 해야겠지. 어쩌면 과민반응일 수도 있고."
그저 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어쩌면 우려대로 며칠이 지나도 황사는 사라지지 않았다.
-너네 엘리시아 화원 난리 난 거 봤냐?
└거기 갑자기 왜 그러냐?
└천벌 받은 거지.
└천벌은 무슨 천벌. 그냥 사막에 모래바람이 부는 건 당연한 일이지.
└엘리시아 화원에선 당연한 게 아니니까 이런 소리들이 나오는 거 아니겠냐?
-엘리시아 화원 고증 챙기는 거냐? 한국이 저렇다며?
└에이, 솔직히 저 정도는 아니다. 저거보다 더 심하지.
└? 저거보다 더 심하면 살 수가 있음?
└황재호나 메이 같은 애들 봐라.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히 다니잖아. 현실에선 마스크 쓰고 다니는데 저기선 태연히 다니는 거 보면 현실이 더 심하겠지.
└솔직히 저 정도는 아니다. 저건 자연재해 수준인데?
-그런데 저거 갑자기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냐?
└나 엘리시아 화원에 있는데, 소문조차 안 돎. 대체 뭔 일인지……. 엘리시아 화원이 좋아서 왔는데 요즘 진심으로 떠나야 하나 고민이다.
└ㅇㄱㄹㅇ나도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괴롭더라.
└저렙들은 안 그래도 사막 디버프 땜에 괴로운데 먼지 땜에 더 뒤질 거 같음.
이 이상 현상을 두고 커뮤니티에서도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덤.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던 엘리시아 화원이었는데, 경치는커녕 일상생활조차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먼지로 인해 실제로 디버프가 발생하는 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불쾌감과 답답함은 디버프나 다름없었다.
재호는 슬슬 조처해야겠다고 결심하곤 먼저 신목을 찾았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면 그녀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글쎄. 대기의 흐름에서 이상은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렇다는 건 역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황사라는 것.
[그나저나 메케하고 호흡이 답답한 것이 안나르의 눈물을 마시고 싶구나. 기왕이면 파랑상추도…….]
물론 그 정보를 얻는 대가로 까다로운 주문을 받긴 해야 했지만 말이다.
동시에 엘리시아 화원의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페르마 사막을 수색했다.
이 모래바람의 출처라고 해 봐야 사막밖에 없을 테니…….
그리고 마침내 수상쩍은 흔적을 포착해 냈다.
"이건……."
재호는 페르마 사막 서쪽에서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물론 엘리시아 화원으로 오는 NPC들이 잠시 휴식을 위해 머문 장소일 가능성도 있긴 했다.
"하지만 여기서 화원까지 그렇게 멀지 않은데……."
하루를 여기서 머물고 가야 할 정도의 거리가 아니라는 점이 수상쩍었다.
"알시아 님! 여길 보세요!"
그때, 주변을 살피던 티나가 재호를 불렀다.
"여길 중심으로 양쪽 땅의 형태가 달라요."
"어?"
티나의 말대로 모래의 형태가 달랐다.
한쪽은 자연스럽게 쌓여 있지만, 반대쪽은 바람을 따라 쓸린 듯이 결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뭔가 수작질을 하긴 한 모양이네."
몸을 일으킨 재호는 고개를 돌려 엘리시아 화원이 있는 방향으로 쳐다봤다.
"모래바람은 여전하고……."
그렇다면 아직 어디선가 모래바람을 보내고 있다는 뜻.
그럼에도 사람이 이동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들 사막 서쪽으로 수색을 집중해 줘."
-알겠습니다!
-저희도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사막에 흩어졌던 인원이 모이기 시작했고, 포위망은 점점 좁아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뭔가를 발견하게 되나 기대되는 순간.
-알시아 님! 모래폭풍이 옅어지고 있어요!
화원에 남아 있던 메이의 귓속말이 도착했다.
그렇다는 건 먼저 눈치채고 도망갔다는 뜻.
‘뭐, 엘리시아 화원 내에도 첩자 한 명 정도는 있었겠지.’
충분히 예상한 범주의 일.
-알시아 님!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이어 전럭협 길마 브리즈에게서도 새로운 귓속말이 도착했다.
-회원 중 한 명이 멀리서 수상쩍은 무리의 사람들을 목격했답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는데, 아무래도 텔레포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즉, 마법사들로 추정된다는 이야기!
"진짜로 녹탑인가……."
추측이 사실로 굳혀지는 듯싶었다.
"이건 엘리시아 화원을 향한 선제공격이에요!!"
티나는 씩씩대며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잡아 찢어 버리고 싶은 듯,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것이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재호 역시 그러고 싶었다.
"날 건드리는 건 못 참지만, 꽃집을 건드리는 건 더더욱 참을 수 없지."
"맞아요!"
재호는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아마 높은 확률로 가디언 길드일 거야.’
이쯤 되니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하려면 제법 큰 규모의 집단이어야 할 텐데, 현재 재호에게 그렇게 적대할 만한 곳은 가디언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녹탑을 꼬드겼는지는 따로 확인해야 할 듯싶었다.
-근데 언제는 미리 알고 적이 생겨났었던가?
-아니었을걸?
꼰대와 징징이의 말은 못 들은 척하고 재호는 화원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움직여야 할 순간이었다.
* * *
사막 너머로 멀어지는 재호.
그리고 그런 재호를 멀리서 지켜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크크……. 멍청한 자식. 시뻘게져서 콧김 뿜어 대는 꼴을 보니 속이 시원하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역시나 가디언 길드.
"역시 샌더스트 님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돕는 건 녹탑의 샌더스트였다.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뒤에 선 다른 마법사들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저기… 8장로님. 대체 왜 저희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맞습니다. 엘리시아 화원은 저희와 우호적인 국가 아닙니까? 왜 이런 짓을……."
마법사들이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쯧쯧, 우매한!"
그것을 꾸짖는 건 샌더스트가 아닌 다른 노인 마법사였다.
"녹탑을 위해서 응당 해야 할 일이거늘."
"3, 3장로님……."
이 일을 벌이는 건 샌더스트의 단독 행동이 아니었다.
3장로 푸스로더, 6장로 윈드밀, 7장로 스패로우.
그리고 플레이어 장로인 샌더스트와 10장로 아나키스트까지…….
그렇게 총 다섯 명이 엘리시아 화원을 공격하는 데 힘을 합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 탑주 프링은 전혀 알지 못했다.
"탑주는 녹탑의 번성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현재의 안녕만 신경을 쓸 뿐."
"맞는 말씀이오. 우리 녹탑이 더 강해질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나서지 않으니……."
녹탑의 장로들은 서로의 시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이 옛날의 탑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 수밖에……."
그들의 충격적인 계획은 이러했다.
"어떻게든 엘리시아 화원과 녹탑주가 충돌하도록 만들어야 하오."
그건 바로 두 집단의 분쟁 조장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녹탑의 장로들이 샌더스트와 함께한 건 아니었다.
굳이 거대한 엘리시아 화원을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디언 길드의 지령을 받은 샌더스트는 머리를 영리하게 썼다.
먼저 그는 녹탑의 장로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동시에 개개인의 성향을 파악했고, 현 녹탑의 운영 방식에 불만이 있는 자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의외의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건 바로 녹탑주 프링의 과거.
물론 재호가 들은 [프링vs스토믹]에 대한 것은 몰랐다.
하지만 프링의 마법 실력은 알려진 것 이상이며, 과거에는 엄청난 폭군이었단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샌더스트 입장에선 쉽게 떠올릴 수 없는 프링의 과거.
하지만 중요한 건 장로들이 과거의 탑주 프링을 그리워한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때의 모습 그대로였다면… 적어도 녹탑이 황탑과 비슷한 취급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이처럼 장로들은 더 강한 녹탑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가장 필요한 건 탑주 프링의 심경 변화와 각성.
그래서 샌더스트는 제안했다.
탑주 프링과 재호의 충돌을 유도하자고…….
"그럼 조금만 더 힘내시지요."
샌더스트는 마법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색조들에게 슬쩍 모습을 노출하기도 했으니, 아마 엘리시아 화원에서는 분명 녹탑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으니 당장은 어쩔 수 없겠죠."
심증만을 가지고서 녹탑에 들이닥칠 가능성은 적었다.
미치지 않은 이상 말이다.
"우리는 알시아가 더는 참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인내를 잃고 녹탑으로 쳐들어가도록 말이죠."
그의 말에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녹탑의 영광을 위해!"
"샌더스트 장로. 훗날 그대는 우리 녹탑의 축복과 같은 존재로 기록될 것이오!"
장로들의 칭찬에 샌더스트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 모든 것은 조국을 위한 일이다. 이 멍청한 것들아.’
그저 자신은 겸사겸사 녹탑을 이용하는 것일 뿐.
하지만 일이 잘 풀린다면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탄탄대로가 열리는 것이었으니까.
단,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재호는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란 전제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이미 화원으로 복귀하자마자 녹탑을 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