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화
슈아르 산림에 들어와 있던 가디언 길드가 폭탄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건 약 30분이 흐른 뒤였다.
그들은 최대한 조심하며 폭탄이 매설된 곳으로 추정되는 자리를 피해 도망쳤고, 그만큼 적들의 공격에 더욱 노출되었다.
"제기랄! 안 되겠어!! 난 못 참아!"
급기야 그 자리에서 당장 로그아웃을 해 버리는 사람들도 속출하기 시작했고, 진형을 벗어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퇴로를 잡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야말로 난장판.
그 과정에서 몇몇 폭탄들이 터지긴 했지만, 그들 처지에서 다행인 점은 지뢰가 있는 자리는 티가 난다는 것이었다.
"야! 거기 조심해!"
"으으으… 이 자식들 대체 언제 이만큼이나 심어 놓은 거야?!"
대부분이 흙무덤만 만들어 놓은 가짜란 사실을 모르는 가디언 길드는 잔뜩 긴장한 채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난장판을 높은 언덕에서 지켜보는 재호와 테일러, 그리고 전럭협 길드원들.
그들은 패닉에 빠진 가디언 길드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 * *
해당 사건의 영상은 금방 브이튜브와 커뮤니티를 통해 공개되었다.
현장에 있던 일반 플레이어들 화면에도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기에 대략적인 상황은 유추할 수 있었다.
-와……. 황재호 진짜 무서운 인간이네. 저 숲 전체에 폭탄을 심어 놨다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피해를 보면 어쩌려고 저런 거임?
└그런 걸 걱정하기엔 지금 슈아르 산림 안엔 가디언 길드밖에 없지 않냐?
-근데 가디언 길드는 저렇게 시종일관 두들겨 맞기만 하는데 포기 안 함?
└저렇게 되면 더 포기를 못 하지. 어떻게든 명예 회복하려고 더 뇌절할지도?
└근데 너희가 모르는 게 하나 있음. 슈아르 산림에 있는 가디언 길드는 애초에 말단 중의 말단임. 진짜 전력들은 아직 코빼기도 안 비춤.
└그런 걸로 정신승리 하기엔 인원수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가디언아?
└쪼렙 말단들뿐이란 것도 구라임. 몇 번 털리더니 300 넘는 애들도 데리고 옴.
└현장에 있던 사람들 말에 따르면 릴라펀치도 있었다는 거 같더라.
-릴라펀치? 내가 아는 그 릴라펀치? 걔도 가디언이었음?
└ㅇㅇ걔 개인 브이튜브 보면 집안 자체도 개 부자임. 뉴월드도 현질 오지게 해서 꽤 센 걸로 알고 있음.
└근데 중국에서 브이튜브 어떻게 하냐?
-그래서 릴라펀치는 어떻게 됐냐? 걔는 그래도 나름 준 랭커급이라는 소리 듣던 애 아니냐?
└(링크) 이 영상 보면 됨. 현장에 있던 갈킹이 용케 찍은 거임.
해당 영상에는 어디론가 다급하게 달리던 릴라펀치가 나왔고, 그런 그를 향해 하늘에서 미사일(?)이 떨어지는 것이 찍혀 있었다.
-알시아 미사일도 만듦?
└뭐, 비슷한 거 가지고 있긴 하지 않을까?
하지만 릴라펀치의 최후까지 찍히진 않았는데, 그 가공할 만한 폭격의 위력에 영상을 찍던 당사자도 휘말려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릴라펀치는 죽은 거임?
└모름. 갈킹도 릴라펀치가 갑자기 현장을 벗어나는 거 보고 급하게 쫓아가 봤다고 하더라.
└근데 영상만 봤을 땐 도망가는 걸로 보이는데? 엘프 화살 공격도 날아오고 하니 자기만 살려고 빤스런한 거 아님?
└일리 있네. 솔직히 걔 정도면 죽는 거 엄청 조심해야 하니까.
공개된 영상만 봤을 땐 영락없는 도망자의 모습.
티나가 워낙 먼 거리에 있었다 보니 영상에선 그녀의 모습이 잡히지 않은 게 컸다.
그 탓에 릴라펀치가 티나를 상대하기 위해 자리를 벗어난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영상에 나온 미사일 폭격이 엘프의 공격이라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 릴라펀치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가디언 소속 랭커의 현실]
[가디언 길드가 말단 초보 길드원들만 보내는 이유.]
[…….]
왜곡된 정보를 토대로 온갖 조롱성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가디언 길드에서 해명할 수도 없었다.
해명하는 순간, 길드의 최상급 플레이어가 엘프는 구경도 못 하고 두들겨 맞아 죽었단 것이 드러날 테니…….
그러나 가디언 길드의 불명예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슈아르 산림 곳곳에 깔린 재호의 지뢰 탓에 전투는 이전보다 더욱 어려워졌고, 사실상 고립된 채로 사방에서 두들겨 맞기 시작한 것이다.
명예작하기 딱 좋은 샌드백이란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대륙에서 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문제라면 지뢰들 탓에 그런 이들도 접근이 곤란했다는 것 정도.
-야, 근데 지뢰 파서 우리가 써도 되지 않냐? 알시아가 심은 거면 고블린들이 만든 걸 텐데, 그럼 완전 A급 아니냐?
└너 천재냐?
하지만 지뢰를 써 먹어 보겠다고 파헤쳐 보던 사람들은 진실을 깨달았다.
-야! 지뢰 그딴 거 없다!
└응? 그게 뭔 소리?
└말 그대로임. 지뢰 같은 거 없음. 그냥 이때까지 가디언 길드가 쉐도우복싱한 거임.
└그럼 폭발한 건 뭐임?
└아, 정확하게는 지뢰가 있긴 함. 그런데 그건 가디언 길드 진영 주변에 몇 개 정도만 설치된 거 같고, 나머지는 대충 흙만 파 뒤집어 놓은 거임. 지뢰같이 생겨도 작동 안 되는 짭도 많고.
충격적인 진실은 곧 가디언 길드에도 전해졌고, 길드원들을 동원해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가디언 길드. 그들은 지금까지 대체 무엇과 싸운 것인가?]
위대한 가디언 길드의 자존심에 아물지 않을 깊은 상처가 생겨나 버렸다.
그렇게 인내심이 바닥난 가디언 길드는 결단을 내렸다.
랭커급 길드원 총동원령!
인구수에 비례하는 고레벨 길드원들의 숫자.
그만큼 랭커급 플레이어들도 많았고, 이번에야말로 슈아르 산림과 재호를 완전히 밀어 버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을 가로막는 플레이어들을 모두 뚫고, 고블린 군락 주변에 설치된 ‘진짜’ 폭탄과 함정들도 몸으로 뚫고 도착한 적진.
텅 비어 아무도 남지 않은 바로 그곳에 만신창이가 되어 도착했다.
그런 그들에게 남은 건 지독한 자괴감뿐이었다.
* * *
가디언 길드와 몇 번의 전투를 치러 본 오크들은 왜 재호가 가디언 길드와의 충돌을 말렸던 것인지 이해했다.
"취익- 대륙의 모든 기사를 합한 것보다 많을 거라고 소리가 허풍인 줄 알았더니 사실이었어."
오크들이 생각한 것보다 지나치게 큰 가디언 길드의 규모에 오크들도 질려 버린 것이다.
그간 일어난 전투에선 운 좋게 다들 큰 부상 없었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힘들어질 것임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오크들은 결단을 내렸다.
"우리도 페르마 사막으로 가겠다."
전투 종족으로서의 자긍심은 이 정도면 충분히 지켰다고 그들은 받아들였다.
내심 오크들은 재호가 도와준다면 가디언 길드를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취이- 개죽음당할 거면 고향이고 나발이고 없지!"
그들의 용기와 각오에 받았던 감동은 싹 씻겨 내려가 버렸다.
어쨌든 오크들의 변심 덕분에 재호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오크들이 죽는 건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페르마 사막으로 완전히 이주하게 된 슈아르 산림의 오크들.
재호는 그들이 거주할 만한 장소로 여러 곳을 고민했었는데, 고블린들의 강력한 추천에 따라 도마뱀 시티 옆으로 결정했다.
오크들이 가까이 있어야 자신들의 연구(?)가 더 편하다는 고블린들의 주장 때문이었다.
"취익- 그런데 저건 뭐냐? 이상한 동상들이 있군."
"?!"
그때, 도마뱀 시티를 구경하던 오크들이 광장 가운데 세워진 동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재호와 블랙 드래곤 오기크의 사투를 표현한 문제의 동상.
그리고 최근 투룬아르와의 전투 동상도 최근 완성되었는데, 그건 기존 동상보다 훨씬 끔찍했다.
거미처럼 길고 많은 투룬아르의 다리를… 재호의 등에다 달아 놓은 충격적인 디자인.
처음 이걸 봤을 때, 재호는 기겁을 하며 당장 부숴 버리려고 했었다.
도무지 연관성을 알 수 없는 흉측한 디자인의 동상.
그나마 다행이라면 새 동상 역시 재호의 얼굴 고증은 개나 줘 버렸다는 것 정도…….
배경지식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재호라는 걸 절대 알 수 없었다.
"취이-! 알시아! 그대였군!"
"오오- 대단하군!"
하지만 그런 기대를 비웃듯, 오크들은 단번에 재호를 알아보았다.
"…대체 어딜 보고 이게 나라는 거야? 하나도 안 닮았잖아."
"취익- 분명 얼굴은 닮지 않았다. 하지만 이 동상엔 혼이 담겨 있다. 그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혼이!"
"……."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장 인터넷에 ‘황재호 동상’이라고 검색하면 놀리는 것밖에 없거늘.
"으하하- 생긴 것과 안 어울리게 미학에 대해선 제법 아는군!"
그때, 오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지 어디선가 드렐리어가 나타나 소리쳤다.
"취이- 이래 봬도 우리 오크족은 미학의 종족이다. 멋진 게 아니면 쓰지 않지."
고블린의 기계공학 장비를 주렁주렁 단 채로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는 전투 종족이라며?!’
어쨌든 고블린까지 껴서 서로의 예술적 감각에 대해 심각한 토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오크들의 정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아마 말이 잘 통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엘리시아 화원에는 새로운 종족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이로써 이종족 컬렉터다운 재호는 또 하나의 업적을 세웠다.
[엘리시아 화원의 소문이 대륙의 이종족들에게 퍼져 나갑니다.]
* * *
엘리시아 화원의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디언 길드 내부는 심각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농락을 당한 가디언 길드였고, 그 모든 것이 숨길 수도 없게 완전히 공개되어 버린 탓이었다.
많은 간부가 잘린 것은 물론, 더 강력한 통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가디언 길드는 전략의 방향성을 수정했다.
지금처럼 고립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대륙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이다.
"룬가 왕국의 동맹국을 만들어야 한다!"
피로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한편에선 이미 가디언 길드는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는데, 룬가 왕국을 계속 고집할 필요가 있는가에 의문을 품기도 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지극히 옳은 이야기였으나, 피로크가 억지로라도 룬가 왕국을 계속 쥐고 있으려고 했기에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피로크가 룬가 왕국에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만약 룬가 왕국마저 잃어버린다면 사실상 피로크가 세운 업적이라곤 하나도 없게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룬가 왕국을 지켜야 했다.
"이 넓은 대륙의 모든 왕국과 귀족들이 전부 알시아를 좋아하지는 않겠지. 그 소외된 녀석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다!"
진즉 해야 했을 외교를 이제야 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희로선 그들을 설득할 방법이……."
설득이라고 돌려 말했지만, 속뜻은 동맹으로 끌어들일 만한 매력적인 카드가 없다는 뜻.
"왜 없어. 그 어디도 가지지 못한 강점이 있잖아."
"?"
가디언 길드에 그런 게 있었던가 싶은 간부들.
"인력."
바로 압도적인 머릿수.
동맹들에게 플레이어로 이루어진 군대를 지원해 주는 걸 카드로 내미는 것이다.
피로크는 그것이야말로 가디언 길드의 최고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엘리시아 화원의 영향력이 크다 하더라도 물리적으론 한계가 있다. 코딱지만 한 꽃집 주변이 전부지, 대륙 구석구석을 모두 챙기진 못한다. 그리고 그 빈틈을 우리가 공략하는 거다."
"대, 대단하십니다!"
"정말 훌륭한 계획입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게 들렸다.
단, 같은 시각에 엘리시아 화원에서 진행 중인 초대형 이벤트만 아니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