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귀의선-22화 (22/81)

<검귀의선 21화>

“저 안으로 들어가시오.”

중년 사내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없이 초가 안으로 들어갔다.

초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한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시구려. 허허, 오편 의뢰는 참으로 오랜만이군.”

금액도 금액이고 살귀문의 수준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삼, 사편짜리 의뢰만으로도 어지간한 무인들은 전부 죽일 수 있었기 때문에 오편 의뢰는 꽤 드물었다.

의뢰를 받는 사람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었지만 중년 사내는 알 수 있었다. 평범함 속에 가려진 노인의 살기와 무서움을.

노인은 중년 사내가 건넨 한 장의 쪽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설씨세가 무술 교관 장연우라…… 이름도 없는 자에게 오편의 의뢰라니 조금 과하지 않소?”

쉬운 의뢰에 큰돈을 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일이겠냐만은 오랜 세월 살수계에 몸담아 온 노인은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 없이 이런 큰돈을 쓸 리가 없었다. 상대방이 뭘 모르는 멍청이라서 그런 것이라면 좋겠지만 이런 거금 청부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상대방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초절정에 이른 고수요.”

“호…… 초절정이라? 그럼 이런 금액을 지불할 만하지. 한데 못 들어 본 이름인데?”

아무리 무인들이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더라도 초절정의 무인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렇지만 노인에게 장연우란 이름은 생소했다.

“세상에 드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았소. 그를 쉽게 봤다간 일을 그르칠 것이오.”

“그건 걱정 마시오. 우리 살귀문은 아주 작은 의뢰에도 절대 방심하지 않소.”

말 안 해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이 드넓은 중원에서도 한 분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집단이라는 것을, 당연히 일을 대충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중년 사내는 불안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이들이 혹시나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것은 장연우를 실제로 보고 겪어 봤기 때문에, 그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불안감이었다.

노인은 한 번에 그런 중년인의 기색을 알아봤다.

‘딱 봐도 보통 인물이 아닌데, 이런 자가 저런 모습을 보인다라…….’

“청부는 접수되었소. 이제 돌아가서 그자가 죽었다는 소식만 기다리시면 될 거요.”

말을 들은 중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초가집 밖으로 나갔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중년 사내가 도착한 곳은 용검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의 인피면구가 벗겨졌다.

드러난 얼굴은 아까 본 중년인의 얼굴보다 훨씬 늙은 오진태의 얼굴이었다.

살귀문의 청부 성공 확률은 구 할이 넘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편 아래의 청부일 때의 확률이었다. 오편 의뢰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심지어 재작년 섬서 일대를 주름잡던 초절정 고수인 사악마도(肆惡魔刀) 흥광이 이 살귀문의 오편 청부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네놈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오진태가 기대감에 가득 찬 물음을 던지고 있을 무렵 초가집 안에는 앞서 앉아 있던 노인과 그의 앞에는 호공서가 앉아 있었다.

“오편 의뢰는 참 오랜만입니다. 누구를 보낼까요? 문주님.”

호공서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아무리 오편 의뢰라지만 의뢰자가 직접 살귀문주를 만날 수는 없었다. 오편 의뢰는 연통을 통해 본단으로 알리는 것이 순서였지만 수많은 살귀문의 지부 중에 마침 소주 지부에 살귀문주가 방문했던 탓에 곧바로 살귀문주에게 연결시킨 것이다. 물론 살귀문주도 인피면구를 착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공서의 물음에 노인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율검은 어디에 있나?”

“예? 율검이요? 율검을 보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호공서는 놀라움이 가득한 얼굴로 살귀문주를 쳐다봤다. 율검은 살귀문 내에서도 최고의 살수였다. 아무리 오편 의뢰라지만 강호에 이름 하나 없는 사내 한 명을 처리하는 데에 율검을 부르는 것은 과해 보였다.

“풍귀나 오추 정도를 보내도 되지 않겠습니까?”

호공서의 입에서 나온 살수들도 최고의 자리는 율검에게 빼앗겼지만 수위를 다투는 실력자들이었다.

“아니, 오히려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의뢰네. 강호에 이름난 고수들이야 그 실력이나 성정을 예상할 수 있지만 아무 정보도 없는 청부 대상은 각별히 조심해야지. 강호에는 우연이나 공짜는 없네. 오편 의뢰를 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게야.”

평생을 살수계에서 살아온 살귀문주의 감이 그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번일은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라고.

“그래도 율검은…….”

“잔소리 말고 지금 당장 율검 호출하게. 그리고 장연우란 사내에 대해서 알아봐. 사소한 것들까지 놓치지 말고.”

살귀문주의 단호한 말에 호공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율검을 호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   *   *

“오라버니!”

설도희의 우렁찬 외침에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던 모두의 시선이 설도희에게 집중됐다.

“오라버니라니? 도희야 난 네 오래비를 낳은 기억이 없다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설황희의 얼떨떨한 표정을 모른 채 한 채, 설도희는 두 손 들린 가득 찬 바구니를 앞으로 꺼내 보였다.

“여기 부엌간에서 간식을 얻어 왔어요. 모두 이것들 드시고 하세요. 연우 오라버니도요!”

연무장에 있던 모두가 뜨악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그중에서 으뜸은 단연 설황희였다.

“도, 도희야?”

그러면서도 설황희는 장연우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장연우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속으로는 오히려 흐뭇했다. 어리고 발랄한 특히나 얼굴도 예쁘장한 소녀가 오라버니라고 불러 대는 것이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문득 설도희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이 자식에서 오라버니라니. 이거 완전 특급 진급이군.”

“그건 잊어요! 다 지난 일로 사내가 좀생이처럼…….”

“하, 오라버니로 승진하자마자 다시 좀생이로 좌천됐군.”

“아, 정말!”

설검단의 눈에는 장난치는 두 사람이 마치 남매처럼 비춰졌다.

외동딸로 자라 온 설도희는 형제자매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물론 설인영이라는 존재 덕분에 외로움이 덜했지만, 때때로 듬직한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겪고 난 후 맞고 들어온 자신을 대신해 나서서 복수해 준 장연우의 모습은 설도희가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오라버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바구니 안에는 주먹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설도희는 하나씩 설검단에게 주먹밥을 배급하고는 마지막 남은 주먹밥을 장연우에게 건넸다.

‘묘하게 큰데?’

그곳에 있는 모두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설도희가 장연우에게 건넨 주먹밥은 크지 않은 듯 미묘하게 다른 주먹밥보다 조금 더 컸다. 물론 설황희의 것보다 더.

설검단원들은 재밌는 상황에 설황희를 보며 키득거렸다.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설마 내 딸이 그 속담에 해당될 줄이야. 하늘도 무심하시지…… 오늘따라 먼저 간 마누라가 그립구나…….”

놀려 대는 설검단을 향해 뱉은 말이었지만 설황희의 내심은 안도했다. 그라고 설도희의 마음을 왜 모를까. 설도희 본인보다 딸에게 더 관심이 많은 설황희였으니…….

장연우는 의지하고 따라도 될 인물이었다. 설도희뿐만 아니라 설씨세가의 모두가.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장연우를 의지하고 따르게 된 것이, 그녀가 의지하게 된 사람이 장연우라는 것이.

“그런데 왜 내 주먹밥은 크기하고 모양이 좀 다른 거지?”

예리한 장연우의 눈에는 크기뿐만 아니라 미세하게 모양이 다른 것 또한 포착됐다.

“오라버니 건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한번 먹어 봐요!”

“부엌간 시녀가 아니라 네가 직접?”

“네! 오라버니 것만요!”

자랑하듯 외치며 기대로 가득 찬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설도희의 시선을 회피한 장연우는 근처에 앉아 있던 조홍에게 말했다.

“바꾸자. 내 거랑.”

“거부하겠습니다. 모험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이건 명령이다.”

기대에 찬 눈빛이 사나워지며 설도희가 빽하고 고함을 질렀다.

“아! 이 사람들이 쫌!

설인영은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오늘은 장연우와 함께 연호문에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일전에 소정연 총회에서 연호문 문주 위송과 한 약속을 오늘 지키는 것이다.

비록 술 약속이긴 했지만 연호문 문주 위송은 생전 설인영의 아버지인 설위건과 각별한 사이였고 현재는 소정연 내에서 유일하게 설씨세가에 우호적인 문파가 바로 연호문이었다.

“저번에 보니 술을 곧 잘 드시더군요.”

“엇? 아니에요! 술은 잘못 마시는 편이에요.”

“그런가요? 조홍 부교관이나 감 총관님보다 가주님이 더 잘 마시는 것 같던데요.”

“여인에게 술을 잘 마신다는 말은 칭찬인가요? 아님 욕?”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술을 잘 마신다는 얘기지.”

하긴 말에 담긴 의도에 따라 칭찬이 될 수도 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장연우에게는 아무 의도가 없었다.

들판에 핀 꽃들에 설인영의 시선이 돌아갔다. 벌써 장연우가 설씨세가에 찾아오고 두 개의 계절이 지나갔다. 이제는 겨울을 지나 온 세상이 푸르러진 봄이 왔다.

“장 교관님은 혹시 정인이나 좋아하는 분이 있나요?”

설인영의 물음에 앞서가던 장연우의 걸음이 멈칫하며 돌아섰다.

장연우와 설인영의 눈이 마주쳤다.

‘지금 내가 뭘 물어본 거야! 미쳤지, 미쳤어! 남녀가 둘만 있는데 그런 질문을 하다니?’

봄 날씨에 취해서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묻고 보니 자신이 장연우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다. 설인영이 민망함에 급하게 말했다.

“저기…… 그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보는 거예요! 뭐, 별로 크게 궁금한 건 아니니까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절대, 궁금하지 않아요!”

“누가 뭐랍니까?”

설인영은 다시 한 번 더 후회했다.

‘아, 너무 횡설수설했어. 내가 말하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잖아. 오해하면 안 되는데…….’

“딱히, 없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한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장연우는 다시 앞을 보고 걸어 나갔다.

그런 장연우를 따라 걷는 설인영의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가벼워보였다.

장연우와 설인영은 그렇게 한 시진을 더 걸어서 연호문에 도착했다.

“하하하! 어서 오시게 설 가주, 장 교관! 이렇게 본문을 찾아줘서 영광일세! 흐하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다시 본 위송은 여전히 호탕했다.

“장 교관. 저번 임시 총회에서의 일은 정말이지 호탕했네! 그 백 년 묵은 불여우 같은 늙은이들이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다니. 하하! 정말 멋졌어! 하하! 아, 내가 너무 밖에 오래 세워뒀군 자! 들어가자고 우리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네.”

위송에 따라 내원 안으로 들어가고도 가장 심처에 있는 건물에 들어섰다.

그곳은 문주와 그 가솔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꽤 넓은 방에 갖가지 음식들과 술이 차려져 있었고 그 주위로 한 명의 중년 여인과 일남 이녀의 젊은 남녀가 앉아서 그들을 맞이했다.

“하하! 자, 여기부터 소개하지 여기는 내 사랑스러운 마누라일세!”

“주책 맞게, 왜 그래요! 만나서 반가워요.”

위송의 아내 주씨에 인사에 장연우와 설인영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여기는 내 아들인 위양 옆에는 그 부인 성우희일세. 그리고 저기 보이는 저 절세미녀는 내 금지옥엽 막내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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