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귀의선 46화>
눈을 뜬 장연우는 자신을 찔러오는 자와 눈을 마주쳤다.
탁!
흑야귀의 검이 장연우의 손에 잡혀 그대로 멈췄다. 그 상태로 장연우는 주위 상황을 돌아봤다. 황보원은 다섯 명의 흑색 무복인들에게 합공당하며 밀리고 있었고 조홍과 율검은 부상을 입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두 세가와 마인들의 시체들이 장원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시 장연우의 시선이 자신에게 검을 잡힌 채 그대로 굳어 있는 흑야귀를 향했다.
검을 잡고 있는 오른손과는 다르게 자유로운 장연우의 왼손이 주먹을 쥐자 그 중심으로 작은 돌풍이 생겼다. 그리고 그 돌풍은 점점 거세지며 장연우와 흑야귀의 옷자락을 펄럭이게 만들었다.
칠무연환권 제육식(第六式) 풍룡아(風龍牙).
장연우가 왼손을 흑야귀를 향해 뻗자, 그의 주먹에 감돌던 돌풍이 흑야귀에게 발출됐다.
그리고 그 돌풍은 마치 용이 먹이를 집어삼키듯 흑야귀를 집어삼켰다.
파파파파팍!
흑야귀를 집어삼킨 돌풍은 흑야귀의 몸을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바람의 칼날은 흑야귀의 무복을 갈가리 찢어놓았고 웬만한 검기로는 흠집도 나지 않던 흑야귀의 피부가 바람의 칼날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 돌풍은 더욱 거세졌고 흑야귀의 검은 피부에 생긴 생채기가 점점 더 멀어지며 피부가 찢겨 나갔다.
“우우우……!”
독물에 입까지 문드러져 말을 할 수 없는 흑야귀의 입에서 고통에 참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흑야귀였지만 자신의 몸을 이루고 있던 살덩이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풍은 그치지 않았다. 더욱 거세진 돌풍이 정점에 이르렀고 그 돌풍이 끝나는 순간 공중에 떠 있던 흑야귀의 몸이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
“……!”
무자비한 광경에 장원안의 모든 이들이 치열한 전투 중임을 잊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거센 바람에 난자당해 팔, 다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절명한 흑야귀가 들어왔다.
거침없고도 위력적인 공격으로 흑야귀를 쓰러뜨린 장연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황보원에게 걸어갔다.
지금 이 순간 흑월마궁의 마인들 중 아무도 장연우의 앞길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군요.”
“꽤 많이 늦었네. 이제라도 깨어나서 다행이군.”
진심이었다. 흑야귀 다섯에게 합공당하던 황보원의 모습은 이미 옷은 넝마가 되어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그의 늙은 얼굴이 더욱 초췌해져 있었다.
“얻은 것은 있었나?”
“네, 조금은…… 있었습니다.”
“그것도 참 다행이군.”
지금과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서 자신을 제외한 가장 강한 아군인 장연우가 조금이라도 깨달음을 얻어 돌아온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다른 후지기수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안 그래도 또래 후지기수들에 비해 월등히 강했던 장연우였다. 한데 거기서 한걸음 더 내디뎠다면 그 차이는 시간이 지나도 메우기 힘든 격차가 되었을 것이다.
“자네한테 등을 맡기기가 참으로 어렵군.”
“지금부터라도 앞만 보고 싸우시지요. 뒤는 안 돌아보셔도 됩니다.”
장연우가 황보원이 등을 맞대고 나란히 섰다.
사도혁은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잠들어 있던 자가 깨어났다. 그의 나이와 흑월마궁의 전력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 한명이 깨어난다고 해서 이 싸움의 행보가 크게 달라질 리 없었다.
하지만 치열한 싸움 와중에도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는 그 모습과 그런 그를 지키려는 움직임에 불안감이 더욱 커져 갔다. 그래서 깨어나기 전에 그를 처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깨어난 그는.
순식간에 흑야귀 하나를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불길한 예상은 항상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남은 여덟의 흑야귀들이 장연우와 황보원을 둘러쌌다. 각각 네 명의 흑야귀들을 상대하는 구도였지만 황보원이 느끼기엔 아까보단 상황이 훨씬 좋았다. 적어도 등 뒤에서 칼이 뻗어올 리는 없으니, 이제 정면의 흑야귀들만 상대하면 되었다.
팟.
여덟의 흑야귀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장연우의 흑천수와 황보원의 북풍삼십장이 펼쳐지며 달려드는 흑야귀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흑야귀들은 검을 휘둘러 진입을 방해하는 권격과 장법을 해소시켰지만 그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흑야귀들은 더욱 거세게 검을 휘두르며 이 둘과의 거리를 좁혀 왔다.
생생한 장연우와는 다르게 황보원은 여러 부상과 내공의 소모가 심했다. 그런 탓에 아직 흑야귀들과의 간격이 꽤나 있는 장연우와는 다르게 황보원 쪽의 흑야귀들은 북풍삼십장을 걷어내고 어느새 황보원의 지척까지 이르렀다.
세 명의 흑야귀들이 황보원의 장력을 해소하는 사이 자유로워진 한 흑야귀가 날카롭게 황보원의 목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 순간 장연우가 뒤돌아 등천포를 날렸다. 황보원의 귀 옆을 스쳐 뻗어진 등천포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뻗어오자 황보원을 찌르고 들어오던 흑야귀의 심장에 적중했다.
쾅!
순간 장연우의 흑천수에서 자유로워진 흑야귀들을 향해 황보원이 재빨리 자리를 바꿔 장력을 날렸다. 자연스럽게 장연우도 황보원이 있던 쪽으로 자리를 바꾸며 남은 세 흑야귀들에게 주먹을 날려댔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합격술.
마치 오랜 시간 맞춰 온 것처럼 둘의 움직임은 서로의 움직임에 부드럽게 반응했다.
장연우의 권강에 부딪친 세 명의 흑야귀들이 뒤로 한참 밀려났다. 권강을 날린 반탄력으로 순간적으로 뒤로 몸을 날리자 흑야귀들과의 거리가 꽤나 벌어졌고 그 속도, 기세 그대로 황보원과 손을 섞고 있는 흑야귀 쪽으로 몸을 날렸다.
뒤쪽에서 내공을 응집하며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장연우를 느낀 황보원은 장연우가 큰 공격을 준비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황보원 또한 그에 맞게 북풍신장의 절기인 북풍구멸장(北風九滅掌)을 전력으로 뻗어냈다.
허공을 격하며 아홉 개의 손바닥이 흑야귀들을 향해 쏘아졌고 그 뒤를 바짝 붙으며 쇄도하는 장연우의 양손에 두 개의 풍룡아가 생성되었다.
콰아아아아앙!
흑야귀들이 전력으로 북풍구멸장을 받아내자 폭약이 터지듯이 허공이 터져나갔다. 황보원이 전력으로 내지른 만큼 그것을 받아낸 흑야귀들이 받은 충격이 컸는지 순간적으로 주춤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을 비집고 들어간 장연우의 풍룡아가 두 명의 흑야귀를 찢어놓았고 손에 강기를 둘러싼 주먹으로 장연우가 남은 두 명의 흑야귀를 난타했다.
퍼퍼퍼퍼퍼퍼퍼퍽!
짧은 순간에 장연우의 주먹은 서른 번 이상 흑야귀를 난타했고, 장연우에게 밀려났던 후방의 세 명의 흑야귀들은 다시 황보원이 뒤돌아 막아서고 있었다.
퐁룡아에 당한 흑야귀 둘은 넝마가 되어 쓰러졌고 주먹에 난타당한 두 흑야귀는 온몸이 함몰되어 기괴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전력을 비교했을 때 꽤나 치열한 싸움이 되어야 했지만 장연우와 황보원이 순간적으로 펼친 절묘한 합격술에 순식간에 넷의 흑야귀가 무너진 것이다.
장연우와 황보원의 비무.
장연우에게 큰 깨달음을 가져다 준 것뿐만 아니라, 서로의 무공을 겪었던 경험이 이 중요한 순간에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엄청난 결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사도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가세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무리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해도 최선을 다했어야했다.
이제 남은 흑야귀의 숫자는 셋이었다. 승산이 없었다. 아니, 혹시나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이들을 전부 죽인다 해도 이미 너무 잃은 것이 많았다.
흑야귀를 무려 일곱이나 잃었으니, 살아 돌아간다 하더라도 궁주는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사도혁이 죽일 듯한 눈으로 장연우를 쏘아보았다.
“말해라. 넌 누구냐? 대체 왜 너 같은 자가 여기 있는 것이냐?”
“억울한가?”
“뭐라?”
“지금 이 상황이 억울한지 물었다.”
“억울하다라…… 그래, 다 이긴 싸움인 줄 알았건만, 네 녀석이 망쳐 놓았으니 기분이 좋진 않군.”
“내가 살아 보니, 싸움이라는 것이 항상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더군.”
사도혁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놈이 저런 말을 내뱉으니 내심 어이가 없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살긴 당신보다 덜 살았어도 꽤나 거친 삶을 살았거든.”
“좋아. 인정하지. 네 녀석이 대단한 것도, 덕분에 내가 꽤나 지금 억울하다는 것도.”
사도혁이 몸을 두르고 있던 흑포를 집어 던지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겠군. 대신 너 하나만은 데려가야겠다. 피할 텐가?”
일대일로 겨루자는 의미였다. 장연우를 고개를 흔들며 사도혁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아니.”
“크하하! 남자답고 좋군!”
그 말을 끝으로 장연우와 사도혁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사도혁의 전신에 짙은 마기가 흘렀다. 잘 정제되어 있는 순수한 마기.
사도혁이 익힌 혈수마공(血水魔功)은 마교에 원류를 둔 절정 마공이었다.
장연우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도혁의 짙은 마기를 보았다. 깨달음을 얻기 전 칠무연환권이었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거칠게 쏘아 오는 마기를 보면서 장연우는 승리를 확신했다.
사도혁의 전신에서 뿜어 나온 여덟 개의 혈수마공의 기운이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각기 다른 방향과 움직임을 보이며 장연우에게 밀려 들어왔다.
장연우가 내공을 끌어 올렸다. 칠무연환권의 마지막 초식.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사용할 수 없었던 초식이다. 이론상으로만 존재했던 초식이 처음 장연우의 손에 의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칠무연환권 제칠식(第七式) 월하일섬(月下一閃).
장연우의 손에 보름달 같은 찬란한 빛이 서렸다.
그 빛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름답다.’
그 둥근 구체가 장연우의 손을 떠나 허공에서 사도혁의 검은 촉수와 맞부딪쳤다.
마치 밝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 듯 밝고 둥근 구체에 닿은 검은 기운이 공중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순식간에 검은 촉수를 지워내며 날아간 둥근 구체의 종착점은 사도혁의 심장이었다.
푸학!
말끔하게 심장을 뚫고 나간 둥근 구체가 사라지자, 그곳에는 몸에 큰 구멍이 뚫린 사도혁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있었다.
“가…… 강환……?”
털썩―
마지막 말을 끝으로 사도혁의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그곳의 모두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장연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황보원이 남은 세 명의 흑야귀들에게 몸을 날리며 두 세가의 무인들에게 외쳤다.
“잔당들을 소탕해라!”
8장 치료와 기연
소주 일미객잔(一味客棧).
“그 소식 들었소?”
“무슨 소식 말인가?”
“지난밤에 송수장원에서 큰 싸움이 있었다는구려!”
“큰 싸움?”
“아니, 글쎄! 송수장원에 황보,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얼마 전에 들어왔잖소? 그런데 그들이 온 이유가 마교의 잔재 중 하나인 흑월마궁이 이곳 소주를 넘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오!”
“그게 정말인가?! 그, 그래서! 그 싸움은 어찌 되었나? 설마 흑월마궁이 이긴 것은 아니겠지?”
“결론만 말하자면 오대세가에서 파견된 인물들이 이겼다고 하오. 그런데 흑월마궁의 전력이 어마어마해서 토벌하러 온 파견대가 오히려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는 것이오!”
“허어, 그런데 어찌 이겼단 말인가?”
“글쎄, 그 순간! 설무룡(雪武龍)이 가세하면서 한 번에 전세를 뒤집었다고 하오! 그 마인들의 우두머리 또한 설무룡에게 일수(一手)에 당했다지!”
“호오…… 그거 참 엄청나구먼! 그런데, 설무룡이 누군가?”
“아니, 이 사람 참! 설무룡도 모른단 말이오? 요즘 소문 자자한 설씨세가는 아시오?”
“알지, 그럼! 사마패를 물리치고, 소정연을 모아 흑사연 또한 물리친 가문 아닌가?”
“설무룡 장연우! 그가 바로 그 설씨세가의 인물이오! 사마패와의 싸움도, 흑사연과의 싸움에도 그가 중심에 있었다니깐!”
소주 이곳저곳에서 지난밤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중심에는 설무룡이라는 소주의 새로운 협객의 이름이 칭송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