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천년마제
어느새 전각 안엔 수라야명의 어둠 대신, 염황폭의 화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초성패는 염황폭의 화염 속에서, 묵섬을 잡은 자신의 나찰수가 뜨거워짐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찰수는 수라마공의 극의이고, 완성된 나찰수는 더 이상 손이라 볼 수 없었다.
수라마공의 마기로 변형된 나찰수를 통해서 감각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나찰수를 만든 후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찰수를 느껴지는 뜨거움은 진짜였다.
그리고 그 통증은 점점 더 범위를 넓혀 갔다. 묵섬을 잡은 손바닥에서, 손 전체 그리고 손등에서 팔까지.
나찰수는 마치 뜨거운 불에 달구어진 묵철처럼 점점 더 검붉게 변해 가고 있었다.
‘더 이상 버, 버틸 수가 없다!’
나찰수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더 이상 이 힘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 사이, 묵섬에서 뿜어진 붉은 빛에 의해 그의 몸이 불타고 있었다. 그의 의복이 불탔고, 머리털을 시작해 그의 몸에 난 모든 털들이 타올랐다.
이윽고 수라야명에 의해 보호받던 육체가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화마가 전각 전체를 삼켰다.
단순히 이들이 싸우던 일 층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벽면을 타고 올라간 화마는 이 층, 삼 층을 넘어 전각의 꼭대기까지 치솟아 올랐다.
온통 불에 휩싸인 것이다.
쿵- 쿵쿵-
벽이 떨어져 내렸고 그리고 천장의 잔해가 무너져 내렸다.
그 뿐만 아니었다.
전각의 무게를 지탱하던 기둥들은, 장연우와 초성패의 격전에 의해 꽤 충격을 입은 상태에서 화재까지 일어나자, 지지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전각이 통째로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
염황폭이 시전되는 순간, 설검단과 천마수호대는 거리를 벌렸다.
서로에게 집중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그들이었다.
하나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기의 소용돌이를 느끼고 바로 물러난 것이다.
그렇지만 전각 안을 가득 메운 붉은빛에서 그들 또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내공을 모아 그 붉은빛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빛에 대항하는 설검단과 천마수호대의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붉은빛을 향해 내공을 끌어 올리며 맞섰던 천마수호대의 대원들이 하나둘 피를 토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에 대항하며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나마, 염왕폭의 폭발은 그 중심에 있는 초성패가 목표였다.
그 덕분에 천마수호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몸 곳곳에 불이 들러붙은 그들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설검단 또한 그 붉은빛에 대항해 몸을 지키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렸지만, 그들을 덮치는 충격 따윈 없었다.
어느새 그들의 앞에 장연우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염왕폭을 시전했을 때 일어날 여파는 이미 장연우의 계산 안에 있었다.
설검단이 그 힘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던 장연우였기에, 그들의 앞을 막아서며 이들을 향하는 폭발의 힘을 해소시킨 것이다.
콰르르르릉!
이윽고 전각을 받치던 한쪽 기둥의 힘이 다하며, 전각이 서서히 옆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어느 기점을 지나자 거대한 높이의 전각이 무서운 기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피, 피하셔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모두가 산 채로 건물더미에 묻혀 버릴 것이 분명했다. 피하자는 조홍의 말에 장연우는 조용히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 혼자뿐이라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간단한 일이었지만 설검단 모두가 이곳을 벗어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벌써 이 층을 이루던 잔해들이 눈앞까지 떨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그의 우수에서 칠무연환권 제오식 흑천수가, 좌수에선 제육식 풍룡아가 동시에 펼쳐졌다.
그간 장연우가 펼친 흑천수는, 천 개의 검은 손이라는 초식명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백여 개의 손을 만들어 냈었다.
하지만, 지금 장연우가 펼치는 흑천수는 정말 천 개의 손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수없이 늘어나, 무너지는 전각을 부숴 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부셔진 건물의 잔해들은 풍룡아의 거대한 기류에 휩쓸리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 펼친 무공의 위력이라고는 믿기 힘든 모습.
하지만 그 모습은 현실이었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내 전각은 전부 무너져 내렸고, 장연우와 설검단이 밟은 땅을 제외한 모든 곳이 그 잔해에 뒤덮였다.
그 아래 깔린 초성패와 천마수호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허억, 허억, 허억…… 무리했군.”
초식을 거두어들인 장연우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이기어검에 이어 절정의 초식인 혜성검과 염왕폭을 이어서 시전 했고, 그 후에도 무리하게 전력을 다한 흑천수와 풍롱아를 연이어 펼쳤다.
아무리 장연우라 해도 단전이 텅텅 비어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환골탈태 후 활짝 열린 모공과 혈도를 통해 빠르게 회복될 테지만, 지금 당장은 더 이상 상급 초식을 펼칠 수 없는 상태였다.
휘이이이익-
천지가 뒤집힐 듯한 착각이 일 정도의 재난이 끝난 후엔 허무할 정도로 조용했다.
하지만 그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투툭- 투툭- 탁.
가득쌓인 잔해를 뚫고 하나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 손은 잔해의 꼭대기를 짚고 몸을 밖으로 이끌었다. 이내 손의 주인의 상체가 잔해 밖으로 드러났다.
초성패였다.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장발로 휘날리던 머리카락은 전부 재가 되어 버려 대머리가 된 상태였다.
더구나 화상에 의해 피부는 검게 그을렸고,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녹아내린 그의 얼굴은 보는 이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로 괴이했다.
그는 위아래가 눌러 붙어 버린 한쪽 눈 대신, 반대쪽 눈으로 장연우를 노려보았다. 붉게 핏발이 선 그의 눈에는 분노와 회한 그리고 살기가 뒤엉켜 있었다.
“너, 이 개…… 자식…… 크읏, 크크크크크!”
분노한 듯하다가 갑자기 실성한 듯 웃는 모습을 보며, 율검은 고개를 갸웃했다.
‘미친 건가?’
하기야 저런 상황에 처하고도 제정신이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 같기도 했다.
이내 그가 건물 잔해에서 완전히 몸을 밖으로 빼냈다. 그의 검고 붉게 탄 나체가 드러났다.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조홍과 율검 등은 처음으로 마교의 인물에게 동정심이 들기까지 했다.
팟-
건물 잔해를 뚫고 묵섬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 이기어검을 체득한 후, 장연우는 묵섬의 고유한 기운을 더욱더 섬세하기 느낄 수 있었다.
잔해에 갇혀 시야에서 벗어났지만, 장연우는 묵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묵섬은 장연우의 손으로 날아와 잡혔다.
비록 단전의 내공은 고갈되었지만, 이미 폐인이 된 초성패를 벨 수 있는 조금의 내공은 남아 있었다.
“저번과 상황이 뒤바뀌었군, 하지만 난 당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확실하게 죽습니다. 아까 당신이 말한 대로, 다시 살아나고 싶어도 살아날 수 없게 시체마저 남기지 않을 것이니.”
“……그래 내 삶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
의외로 순순히 최후를 받아들이는 초성패의 모습은 장연우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은 오히려 장연우의 기분을 꺼림칙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광을 너에게 주진 않겠다.”
초성패에게서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또한 남아 있는 내공 따윈 전무했다. 장연우의 염왕폭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남은 한 방울의 마기 까지 전부 끌어 모아 스스로를 방어했기 때문이다.
모든 마기를 소모한 그가 지금 기운을 내뿜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선천지기를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결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저항?’
하지만 그가 취한 행동은 그 둘 모두 아니었다. 그가 뿜어낸 무형의 기운이 한쪽을 뒤덮은 잔해들 사이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잔해가 걷히며 하나의 신형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저 청년은?”
그는 만년빙옥 안에 잠들어 있던 교주라는 이었다.
본래 그는 전각 최상층에 있었다. 전각이 붕괴되며, 그의 신형은 전각과 함께 이곳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를 감싸고 있던 만년빙옥은 전부 깨져서 흩어져 버린 상태였다.
그의 신형이 완전히 외부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추락해, 잔해에 깔려 있었던 것이 거짓말인 듯 멀쩡했다.
주변 상황과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그의 몸은 자잘한 상처하나 없이 깨끗했다.
곧이어 초성패가 공중에 떠서 잠들어 있는 청년의 신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안 돼!”
그 모습을 본 장연우 또한 동시에 몸을 날렸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차이로 장연우가 당도하기 전, 초성패의 몸이 먼저 청년의 신형에 닿았다.
그 순간, 기파가 일어났다.
그리고 초성패의 몸을 이루던 모든 것이 청년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지근거리까지 도달한 장연우가 목표를 바꿨다.
초성패가 아닌, 교주를 향해 묵섬에 모든 힘을 담아 휘두른 것이다.
캉!
청년의 목을 가르던 묵섬이 그의 몸에 닿자마자 엄청난 반탄력에 의해 튕겨 나왔다.
'……이 무슨!'
그리고 더욱 거세진 기파에 의해 장연우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부디 대업을 이루소서. 천세 천세 천천세……."
그것이 초성패의 마지막 말이었다.
몸을 이루던 모든 선천지기와 피, 수분이 청년에게 흡수되며 초성패의 몸은 미라와 같이 말라 갔다.
이윽고 그의 모든 기운이 청년에게 흡수되었고, 초성패의 마지막 생명의 불씨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청년의 몸을 감싸던 기파는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소용돌이 치며 주위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장연우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거대한 기의 흐름에 몸을 떨었다. 상단전이 열리며, 자연의 기를 느낄 수 있게 된 장연우는 알 수 있었다.
이 일대를 가득 메우던 자연의 기가 남아나질 않았다. 청년은 마치, 아귀처럼 이곳의 기를 삼키고 있었다.
‘이런 건 처음 본다.’
장연우는 대자연의 기를 빌릴 수 있을 뿐이지, 저 청년처럼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라 하여도 지금과 같은 거대한 기운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면, 육신이 붕괴되고 정신마저 무너질 것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자신의 그릇을 자랑이라도 하듯, 거침없이 주위의 모든 기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점점 그의 존재감이 실체화되고 있었다.
만년빙옥에 잠들어 있을 땐 느끼지 못했던 존재감.
이것은 장연우가 누구에게도 느끼지 못했고, 앞으로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의 것을 넘어서는 존재감이었다.
이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이 힘을 소모해서가 아니다. 최선의 몸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한들 마찬가지다. 장연우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인간이 아니다……!’
장연우는 동시에 설검단을 향해 외쳤다.
“도망쳐!”
“예?”
설검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장연우를 보았다.
도망치라니. 장연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설검단이었다.
그에게 도망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설검단의 기대를 넘어서는 판단력과 신위로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 자였다.
그러니 설검단은 방금 들은 말이 현실인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연우의 입에서 또 한 번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도망치란 말이다! 지금 당장!"
그때였다.
공중에 떠 있던 청년의 발아래의 잔해들이,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하늘로 떠올랐다.
잔해들은 무너지기 전, 전각의 높이까지 하늘로 치솟다가 어느 순간 그 자리에 멈추었다.
그리고…….
번쩍-
감겨져 있던 청년의 눈이 뜨였다.
-설검단은 네가 책임지고 도주 시켜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교관님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일단 너는 설검단과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에만 집중해라. 나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장연우에게 전음이 전해져오자, 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연우처럼 청년의 주위에 감도는 기를 정확히 읽지는 못했다.
하나 건물 잔해들이 하늘로 역행하는 경이로운 모습과 장연우의 반응만 보더라도 지금 닥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장연우의 전음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조홍이 움직였다.
영월 상단의 밖을 향해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자, 설검단이 그를 뒤따르며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눈을 뜬 청년은 정말이지 오랜 만에 맡아보는 공기를 만끽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행인지, 그는 멀어지는 설검단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 그는 깨어난 자신의 몸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자신의 두 손을 확인한 그는 감회가 새로운 눈으로 자신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좋구나.”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또 다른 존재인, 장연우를 응시했다.
“네가 나를 깨운 것인가? 넌 내 후손인가?”
"……."
자신의 물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장연우를 그는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그에게 마공을 익힌 흔적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넌 교인이 아니구나? 그럼 날 깨운 것은 누구지?”
장연우가 손가락으로 한 쪽에 널브러진 초성패의 시신을 가리켰다.
스윽하고 시신을 한번 본 청년이 입을 열었다.
“수라마공을 익힌 저 아이가 내 후손이군.”
청년의 행동에 장연우는 강한 의문을 느꼈다.
마교의 교주라는 저 청년은 부 교주인 초성패를 처음 보는 듯했다.
그리고 후손이라니? 청년은 얼핏 보기에도 초성패의 손주뻘도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데 오히려 초성패를 향해 후손이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장연우는 강한 괴리감을 느꼈다.
“당신은 마교의 교주가 아니었나? 한데, 왜 그를 모르는 것이지?”
“글쎄…… 본래 수라마공의 주인은 초용비 그 아이였는데, 생판 모르는 아이가 수라마공을 익힌 것을 보면 시간이 꽤 흘렸나 보군.”
장연우는 초용비란 이름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초용비.
이백 년 전, 마교의 마지막 발호 때, 마교의 부교주였던 인물이 바로 초용비였다. 한데, 청년은 마치 초용비를 잘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럼…… 설마?’
장연우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청년에게 물었다.
“당신은…… 천년마제(千年魔帝)?”
“오, 넌 날 기억하는가?”
청년은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장연우를 보며 기쁜 기색을 내비췄지만, 장연우의 심정은 전혀 반대였다.
천년마제.
그는, 이 백 년 전 중원을 향해 발호한 마교의 십사대 교주였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십사 대의 마교주가 아니었다. 그는 마교가 발호하기 전부터 무려 삼백 년 전부터 그곳의 교주였다.
보통 삼백 년이란 시간이라면, 교주가 다섯 번에서 열 번은 바뀌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긴 시간 죽지도, 늙지도 않으며 마교를 지배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혹자는 그것이 마교에서 만들어 낸 거짓 역사란 말했다.
또 누군가는 이백 년 전 마교를 상대로 중원을 지켜 낸 무림인들이, 자신들의 공을 미화하고자 상대를 강하게 포장시켰다는 의견도 있었다.
때문에 지금 와서는 천년마제에 대한 소문을 거짓이라 치부되고 있었다.
그런 탓에 장연우는 스스로가 천년마제라 인정하는 청년을 보며 그의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갈등되었다.
천년마제는 마교의 교주 자리에 만 삼백 년을 올라 있던 자였다.
그렇다는 것은 그의 나이가 삼 백을 훌쩍 넘었다는 뜻이다. 한데, 말이 안 되는 것이 벌써 그것이 이백 년 전이었다.
‘그럼 오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인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의 말이 사실이고 그가 정말 천년마제라면 그의 나이를 오백에서 육백 세로 추정해야 했다.
그러니 장연우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니, 장연우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사람이 육백 년 가까이 살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자를 찾긴 힘들 것이다.
“근데 넌 본 교의 아이도 아닌 데, 왜 본좌가 깨어나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지?”
장연우에게 물으면서도 그의 대답이 필요 없다는 듯, 천년마제의 머릿속에 이 자리의 여러 정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수라마공을 익힌 초용비의 후손이 죽은 사인(死因)은 자신의 흡기공(吸氣功)에 의한 것이지만, 그전에 이미 회생 불능의 심각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건물더미에 묻힌 스무 명의 무인들. 천년마제는 그들이 당대의 천마수호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는 그 모든 이들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해 보였다.
“네가 그랬군? 본좌가 깨어나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어. 그렇지?”
“그렇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신이 깨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 군……."
“겁도 없이 순순히 인정하는군? 하지만 상관없다. 설령 네가 본교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너의 죽음은 정해져 있었다. 네가 겁도 없이 본좌를 당신이라고 칭한 순간부터 말이야.”
두두두두두-
땅이 울린다.
그리고 다시금 전각의 잔해들과, 크고 작은 주위의 돌덩이들이 하늘로 떠오른다.
엄청난 기의 흐름에 의해, 주변의 모든 사물이 장악된다.
장연우는 다시 한 번 느껴지는 상대의 거대한 힘에 긴장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몸 안을 관조했다.
천년마제와 대화를 나누던 잠깐 시간 동안 몸 안에 내공이 조금은 축기되었다.
그렇지만, 상대에게서 일어나는 기운에 대항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그의 단 한 번의 공격조차 받아 내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상대의
기운에 비해 자신에게 남은 내공은 미약했다.
그런 장연우의 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천년마제의 주위에 떠오른 돌덩이들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마교의 교주들에게만 내려오는 절대의 신공.
수천 종에 이르는 모든 마공들을 아우르는 절대자의 무공 천마신공(天魔神功)의 초식들 중 하나인 암천겁화(暗天劫火)였다.
그리고 떠올랐던 돌덩이들이 운석우처럼 장연우를 향해 쏟아졌다.
장연우는 그 수많은 암천겁화의 운석우들을 막아 낼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 초식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버티지 못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장연우는 자연에 존재하는 기를 빌려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 또 한 스스로의 몸 안에 어느 정도 내력이 남아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남은 내력으로 펼칠 수 있는 공격은 딱 한 번.
회복된 조금의 내공을 바탕으로 주변의 기운이 묵섬을 향해 몰려 들었다.
그리고 이기어검이 펼쳐졌다.
쏟아지는 암천겁화 사이를 뚫고 묵섬이 천년마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부딪치지 않고 서로를 향해 지나치는 초식.
천년마제의 주변에 다다른 묵섬을 보며, 장연우는 다시 한 번 염왕폭을 시전했다.
번쩍- 쾅!
날아오던 검에 서린 붉은 기운이 갑작스레 폭발하는 모습을 보며, 천년마제는 폭사하는 빛을 억눌렀다.
그 사이, 그가 쏟아 낸 암천겁화는 장연우의 몸을 유린하고 있었다.
쾅쾅광쾅광-!
전신에 부딪치는 크고 작은 돌덩이들. 그것은 그저 돌덩이가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겁화의 힘은 장연우의 몸을 부숴 나갔다.
“컥……."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전신을 가격하자, 장연우는 정신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점점 잃어가는 의식의 끝자락을 잡고 천년마제의 모습을 확인했다.
묵섬에서 폭사하는 염왕폭의 붉은빛이 천년마제의 기운 아래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역시 역부족인 것인가.’
쾅쾅꽝쾅쾅-!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몸을 두드리는 암천겁화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장연우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파묻혔다.
털썩-
천 년마제는 염왕폭이 만들어 낸 거대한 후폭풍을 제어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두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폭사되어 날아왔다.
어느새, 천년마제의 근처까지 다가온 두 줄기의 빛은 바로 두 사람의 신형이었다.
그리고 두 사내가 동시에 거대한 기운을 뿜어냈다. 따로 두고 보아도 천지를 개벽할 만한 위력을 담은 두 기운이 동시에 천년 마제를 엄습했다.
때 아닌 급습에, 천년마제 역시 그들을 향해 엄청난 양의 기운을 폭사시켰다. 모래알 같이 많은, 원형 강기들이 천년마제의 주위에 생성되며 그들을 쏟아졌다.
천마신공 초식 중 하나인 천폭우(天暴雨)였다.
갑자기 등장한 두 사내와 천년 마제가 뿜어낸 거대한 기가 충돌하며, 빚어 낸 광경은 엄청났다.
어느새 천년마제의 발아래로 떠올라 있던 잔해들은 물론이고, 충돌의 여파가 전달된 주변의 전각까지 가루가 되어 휘날리고 있었다.
엄청난 기세로 처음 공세를 펼치던 두 사내의 다음 공격은 없었다.
천년마제와의 단 한 번의 충돌 이후, 그들은 정신을 잃은 장연우를 챙겨, 이곳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을 천년마제가 아니었다.
“올 때는 마음대로 왔겠지만, 가는 것은 그렇지가 않지.”
천년마제가 달아나는 그들을 쫓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음?"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귀공자의 얼굴을 한 그의 미간에 처음으로 주름이 잡혔다.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 몸을 날리려 했지만, 굳어 버린 듯한 몸의 거동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아직, 육신이 덜 깨어났군.”
그의 육신은 이백 년간 잠들어 있었다.
그 오랜 시간 단 한 번의 음직임도 없이 만년빙옥 안에 멈춰 있던 육신이었다.
그 덕에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적응할 기간이 필요하겠군. 그 놈들이야 다음에 처리하면 되겠지.”
천년마제는 놓쳐 버린 장연우나 달아난 두 사내에 대해서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고,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 자신을 위협할 만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떠나서 마지막 순간 나타난 두 사내가 펼친 무공은 신경 쓰였다.
“천수여래장(千手如來掌)과 태극혜검(太極慧劍) 이라……."
두 사내가 펼친 무공은 태산북두, 중원 무림의 두 기둥인 소림과 무당의 절기 중에 절기였다. 천년마제는 두 사내의 얼굴을 돌이켜 보았다.
“극성의 천수여래장과 태극혜검을 펼치는 자들이라? 어떤 놈들인지 알아볼 필요는 있겠군.”
굳이 자신의 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신교의 발호에 대항하는 무리들 중 가장 선두에는 항상 소림의 땡중들과 무당의 말코들이 있었다.
“그럼 천천히 유희를 즐겨볼까?”
천년마제는 급하지 않았다. 그는 몸이 완전히 깨어날 때까지 다시 찾은 생을 즐기며, 조금씩 무림을 농락해 나갈 생각이었다.
설검단을 이끌고 영월 상단을 벗어난 조홍은 장연우가 남아 있는 곳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의 폭풍을 느꼈다.
그곳에서 휘몰아치는 엄청난 양의 기의 여파는 너무나도 흉포하게만 느껴졌다.
그 기운은 조홍과 같은 무인이 아니라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순간, 조홍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되돌아가야 하나.’
조홍이 느낀 기의 주인은 장연우가 아니었다.
낯설고도 파괴적이며 아득한 기운의 주인은 떠나기 전 잠깐 느꼈던 마교 교주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운을 상대로 홀로 남겨진 장연우가 걱정되었다.
자신과 설검단이 강해지려고 했던 이유는 장연우의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한데, 아무리 장연우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그를 혼자 남겨두고 도망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판단 또한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일개 설검단원이 아니었다. 설검단의 대주로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장연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모두에게 허무한 죽음을 강요할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이고 있는 조홍에게 한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시주들은 방해만 될 뿐이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교주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네. 그러니 뒤를 맡기고 망설이지 말고 이곳을 벗어나게나.
예상치 못한 전음에 조홍은 음성의 주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자신과 설검단 외에 주위에 그 어떤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음성은 있으나 주인이 없는 상황.
그렇다는 것은 음성의 주인이 조홍이 알아첼 수 없을 정도의 고수라는 얘기였다.
조홍은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으나, 그의 음성에 악의가 없다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짧은 음성이었지만 그것에서 상대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음성은 따뜻하고 곧았으며, 무언가 항거할 수 없는 힘을 담고 있었다.
그 힘은 강제적인 힘이 아니라,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말을 신뢰하고 스스로 따르게 만드는 힘이었다.
마인이나 악인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흉내 내고자 하더라도 흉내 낼 수 없는 선(善)의 향기.
더군다나, 마인이라면 교주에게 위협이 될 수 없는 자신들을 그 안으로 유인하면 했지, 도주를 종용할 리 없었다.
결국 조홍은 그 음성을 믿기로 했다.
“그를 부탁드리오!”
조홍은 정체를 찾을 수 없는 상대를 향해 전음을 보내는 대신 허공에 대고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설검단은 이상한 듯 쳐다보았지만, 이어지는 조홍의 이동 명령에 움직임을 재개했다.
장연우와 약속된 장소가 없었기에, 조홍이 설검단의 다음 행보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조홍이 정한 목적지는 운남의 끝자락, 바로 정사 연합과 마교의 격전지인 그곳이었다.
당장에 마교 교주를 상대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그곳이라면 충분히 자신들이 힘을 보태고 활약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한 것이다.
***
영월 상단에서 이백여 리 떨어진 산중의 작은 초가집.
그곳에서 중후한 나이의 두 노인이,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는 한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절한 사내는 장연우였다.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는 두 노인. 그들은 정파 무림의 거대한 두 거목이었다.
그들 중 하나는 딱 보아도 승려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좌수에 끼고 있는 염주와 하얗고 수북한 수염은, 불심이 깊은 고승의 면모를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장연우를 구하기 전 조홍을 향해 전음을 전한 이도 바로 그였다.
그의 정체는 바로 태산북두 소림의 전대 방주이자 중원 전체를 대표하는 십대 고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손꼽히는 삼무신 하나이자, 소림의 백팔 절예의 대부분을 익히고 있다고 알려진 소림의 전설.
혜왕승(惠旺僧) 천효였다.
장연우를 내려다보는 그의 두 눈에는 깊은 감탄이 어려 있었다.
“천년마제의 천마신공을 맨 몸으로 받아내고도 멀쩡하다니, 직접 본 장 시주는 상상 이상으로 놀라운 인물이구려.”
천년마제가 펼친 천마신공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천효의 입장에서는 암천겁화에 적중되고도 온전한 장연우의 육체는 이론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분명 암천겁화에는 스치기만 해도, 재로 산화될 정도의 거대한 화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장연우는 암천겁화의 충격으로 인해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지만, 깨끗하고 윤택한 피부에는 그 어떤 상처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건…… 환골탈태를 한 것이오.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높은 성취를 이룬 것이오.”
그것은 굳이 암천겁화에도 상처 입지 않은 육신을 보기 전에 알고 있었다.
장연우가 천년마제로 펼친 마지막 초식은 이기어검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목격한 천효는 그간 장연우에 대한 판단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기존의 계획을 뒤엎고 장연우를 구출한 것이다.
그리고 장연우를 바라보는 또 한 쌍의 시선.
그가 장연우를 바라보는 시선은 혜왕승과는 조금은 달랐다. 물론 그 안에 기대와 감탄도 있었지만, 그것과 같이 섞여 있는 감정은 원망과 증오였다.
그 미묘한 감정을 느낀 천효가 애써 웃음지으며 그를 불렀다.
“단 시주,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그는 사파의 손에 의해 자라났고, 천군성에 속했던 그가 소림과 무당의 제자들과 싸운 것은 그에게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그를 미워하지 마십시오.”
단 시주라 불린 인물은, 천효와 함께 정파의 두 절대고수라 일컬어지는 무당의 등편선(登榧善) 단무현이었다.
삼무신 중 두 좌를 차지한 혜왕승과 등편선이 바로 그들의 정체였다.
호사가들은 얘기했다.
전신마군이 사파의 최고수였고, 천군성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이 둘과 같이 삼무신이라 불리었지만, 실제로 이 둘에게 비견할 수 없다고.
실제로 이 두 사내는, 전신마군으로서 보여준 초성패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고수였다.
그렇지만 초성패 역시, 진실된 힘을 숨겨 왔었기에 그의 성명절기라고 할 수 있는 수라마공을 펼치는 마인으로서의 초성패와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천년마제의 힘을 감당하기 감당할 수 없었다.
하나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 둘이 무림의 최고수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도 장연우의 존재와 그가 가진 힘은 놀라웠다. 그렇기에, 천년마제의 앞에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그를 구출해 낸 것이다.
천효의 말에도 단무현의 눈에 담긴 감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과거 장연우와 귀면피풍대에 의해 많은 정파인들이 희생당했다.
물론 문치우와 같은 이들은, 이제 무림을 위해 마교와 싸우는 장연우를 쉽게 인정했지만, 그와 단무현의 입장 차이는 꽤나 달랐다.
비록 큰 틀에서 같은 정파인들이 장연우와의 싸움에서 당했다고는 하나, 문치우가 이끄는 검각이 그에게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렇기에 장연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단무현은 아니었다.
단무현은 무당의 사람이었고, 장황평 전투에서 그의 제자이자, 당대 장문인인 운연을 비롯해 수 많은 무당의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장연우에 의해 죽음에 이른 이들과 실질적인 인연이 닿아 있는 것이 바로 단무현이었다.
“혜왕승께서는 이자가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그날 장황평에서 죽은 소림의 제자가 무당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는데 말입니다.”
단무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파 무림의 상징인 소림이 그 날 이후 봉문할 정도로, 장황평에서 입은 피해는 무당에 비해 적지 않았다.
“제가 부처님도 아니고, 장 시주가 원망스럽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악인이 아닙니다. 그는 그날 그저 생존을 위해 싸웠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찾아와, 그의 수하들을 모두 죽인 신군맹과 구대문파의 정예들이 악인이었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장 시주는 앞으로 무림에 닥쳐올 큰 재앙을 막아낼 수 있는 인재입니다. 죄 없이 죽어갈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장 시주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단무현은 천효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효를 도와 장연우를 구출해 낸 것이었다.
“으음-”
그때 장연우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자, 천효와 단무현의 시선이 장연우에게 모아졌다.
“깨어나려나 봅니다. 허…… 그 천마신공을 받아내고도 벌써 정신을 차리려 하다니……”
천효가 잠시 중얼거리는 사이, 장연우가 상체가 벌떡하고 일으켰다. 그리고 낯선 두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지? 분명히 나는……’
장연우의 기억은 정신을 잃기 전에서 멈춰 있었다. 자신의 공격이 실패하고, 상대의 마공에 당한 후 의식을 잃었다.
그런데 자신이 깨어난 곳은 산중의 초가였고, 마교의 교주 대신 낯선 두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에는 정신을 잃은 자신이 마교의 인물들에게 잡힌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교 교주가 굳이 자신을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옭아매는 어떠한 금제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장연우는 자연스럽게 두 노인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에 게는 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에게 느껴지는 것은 순수하고도 맑은 선기(善氣)였다. 그것을 느낀 순간 장연우는 눈앞의 두 노인이 절대 마교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 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들이 마교주를 상대로 자신을 구해냈다는 이야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교주의 가공할 무공이 떠올랐다. 그러자 더욱 궁금증이 가시질 않았다.
세상의 어떤 이들이 있어서, 그 마교주를 상대로 자신을 구해낼 수 있었단 말인가? 장연우는 의문을 가득 품고 두 노인을 향해 물었다.
“두 분께서는 누구십니까?”
***
터벅- 터벅-
천년마제는 마치,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곤명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백 년이 흘렀단 말이지? 그만한 시간이 흘렀어도, 세상은 여전하군.”
이백 년전 마교는, 중원 무림의 거센 저항에 서장으로 밀려났지만 천년마제는 십만대산에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을 택했다.
그는 인간의 선천지기를 흡수 해, 생명을 늘리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삼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그였지만, 그렇다고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선천지기를 홉수해 수명을 늘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마교는 중원 무림과의 싸움에서 대부분의 힘을 소모한 상태였다.
그에겐 중원을 정복하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고, 다시 마교가 힘을 축적하기까지는 꽤나 많은 세월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만년빙옥에 자신을 봉인해 스스로의 시간을 멈추는 것이었다.
마교가 다시 힘을 축적할 시간 동안 백 년이건 이백 년이건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을 멈추고, 잠들어 있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 시간 동안, 그의 명령에 의해 새로운 마교주는 선출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발호할 수 있는 힘을 키워낸 마교는 당대에 이르러 천년마제를 깨워 냈다.
천년마제는 곤명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잠들어 있었던 시간과 현 무림에 대한 정보를 얻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후손이자, 현 마교의 전력이 정, 사파 연합의 무인들이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굳이 다른 경로를 통하지 않더라도, 이미 운남 전역을 비롯한 무림 전역이 그 이야기로 떠들썩했으니, 천년마제가 그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곤명은 며칠 전과 분위기가 많이 변해 있었다.
마교 본대가 출정하고 정파와 일전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어느 정도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천년마제를 부르는 한 목소리가 있었다.
“저, 저기……."
천년마제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쫓아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곳에는 예쁘장한 여인 한 명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채 서 있었다.
딱 보아도 곱게 자란 여염집 규수와 같은 기품이 몸에 배어 있었고, 귀여운 얼굴과는 대조되는 풍만하고 날씬한 몸을 가진 여인 이었다.
여인은 천년마제의 시선이 몸에 닿자, 부끄러운지 빨개졌던 얼굴이 이제는, 불이 붙은 듯 붉었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천년마제는 씨익 웃었다.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오백 년 이상 살았지만, 겉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탓이었다.
오히려 옥면이라 칭할 수 있는 아름다운 얼굴과 티 하나 없이 말끔한 피부는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었다. 여인의 반응에 재미를 느낀 천년마제는 마치, 이제 갓 약관에 든 청년을 가장해 대꾸했다.
“절 부르셨소. 소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천년마제의 모습은 무례하지 않으면서 기강이 차 있는 반듯하게 자란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 그게…… 실례지만……."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며 말을 더듬고 있는 여인은 가까스로 용기를 내고 있었다.
‘차 한잔하자고 하겠지.’
“시간이 되시면 저랑 차라도 한 잔……."
너무도 예상대로의 전개였지만, 천년마제는 당황한 척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혈류를 조절해 의도적으로 두 볼을 붉게 만들었다.
“큼큼, 차…… 말이오? 조, 좋습니다. 저기 마침 객잔이 보이는 구려. 저곳으로 가시죠.”
“예……."
객잔을 향해 앞장서서 걷는 천년마제를, 얼굴 붉어진 여인이 총총걸음으로 뒤따랐다.
***
장연우가 복잡한 시선으로 눈앞의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
혜왕승 천효와 등편선 단무현. 지난 긴 무림의 역사 속에 중원 무림에 가장 출중한 고수들을 빈번하게 배출해 낸 것이 바로 소림과 무당이었다.
그만큼 소림과 무당의 무공은 익히는 자의 재능에 따라 끝도 없이 성장할 수 있을 만큼, 깊이 있는 신공절학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도 소림과 무당에는 그곳을 대표하는 천재들이 있었다.
천효는,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혜왕승이라 불렀지만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구주신승이라 불리며 칭송받았다.
무공과 마찬가지로 불법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그는, 민간을 떠돌며 불법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 후로 일반인들은 물론, 소림에서조차 그의 행적을 알지 못했다.
단무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굉장한 무공광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무공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볼 때,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기 때문에, 그는 무당 안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며 지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떠난다는 말과 함께 행선지를 남기지 않고 무당을 떠난 그였다.
지금 단무현이 장연우에게 분노와 원망을 느끼는 것도 그 탓이었다. 장연우에게 죽은 무당의 제자들 중 단무현이 직접 가르침을 내리고 훈련시킨 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황평 전투가 일어나기도 훨씬 이전 모습을 감춘 천효와 단무현.
만약 신군맹과 천군성의 싸움.
또는 장황평 전투에 그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당연히 그때의 자신으로서는 이들 중 한 명도 감당할 수 없었고, 훨씬 더 압도적인 차이로 귀면피풍대는 패배했을 것이었다. 애초에 이 둘이 있었다면 전쟁이 안 일어날 리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지금은 감사함을 표현하는 게 먼저였다.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께 진 빚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어떻게 이곳에 계신 겁니까?”
천효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일단 본 승이 다시 묻겠소, 장 시주. 천년마제와 부딪쳐 본 소감이 어떠시오?”
느닷없는 질문이었지만, 장연우는 그때의 순간을 되돌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벽이 느껴지더군요. 인간으로서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오. 그는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반인반마와 같은 존재이지요.”
“반인반마라니요?”
“이백 년 전, 마교가 마지막으로 발호했을 때, 전 무림의 힘을 모아 그들을 막아선 것은 당대 소림과 무당의 장문인이셨던 본인의 태사부님과, 저기 단 시주의 태사부셨소. 그때 이미 천년 마제의 나이가 삼백을 훨씬 넘어 있었소.”
놀라운 말이었다.
하늘이 인간에게 허락한 수명은 육십에서 팔십이었고, 수많은 사람들 중 가끔 장수하는 이들도 백세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한데, 인간이 삼백 년을 넘게 살다니?
그리고 그로부터 이백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가 그리 긴 세월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선천지기를 흡수하는 마공과 더불어 그의 기이한 신체 때문이라 전해지오.”
“기이한 신체?”
“사부께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태사부께서도 그의 신체를 어떠한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고 하오. 다만 저주받았음과 동시에 축복받은 신체라고 하오. 삼백 년 전 사로잡은 한 마교인의 진술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가끔 지독한 고통에 시달린다고 했소. 하지만 그 고통이 끝나면 엄청난 힘을 얻었다고 하더이다.”
‘고통 후에 얻어지는 힘?’
장연우는 이 부분이 묘하게 마음에 거슬렸다.
“어찌 됐건,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수하들을 전부 잃은 상황에서 혼자서 무림을 장악하는 건 무리였소. 때문에 그는 숨어 들었지만, 태사부께서는 그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소. 그리고 본인의 사부를 통해, 그리고 본인을 통해 그가 다시 나타날 때를 대비하게 하셨소. 그러던 어느 날, 불법을 전파하며 중원을 떠돌다 아주 우연치 않게도 마교의 흔적을 마주치게 되었소. 그리고 그 흔적을 따라가, 마교가 준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소. 그때부터 단 시주와 함께 마교의 행적을 쫓은 것이.”
흔적을 쫓아 서장으로 잠입한 천효와 단무현은 마교가 부교주의 통치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천년마제는 삼백 년 전,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어딘가에 몸을 봉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가 깨어나기 전, 천년마제를 찾기 위해 천효와 단무현은 서장의 전역을 샅샅이 뒤졌다.
위험을 무릅쓰고 마교의 본단까지 침입했었던 그들이었지만, 천년마제를 봉인한 만년빙옥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그것은 본단이 아닌 십만대산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긴 시간 헛수고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궐마대가 십만대산에서 가져온 천년마제의 육신이, 영월 상단에 있다는 정보를 얻은 것이었다.
이후 곧바로 달려온 그곳에서, 깨어난 천년마제와 싸우는 장연우를 목격하고 구해 낸 것이다.
“그를 상대할 방법은 찾으셨습니까?”
장연우의 물음에 천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초 우리의 목적은 그가 깨어나기 전, 잠든 육체를 찾아서 죽이든지, 그럴 수 없다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 영영 잠들어 있도록 봉인할 계획이었소. 하지만 그가 깨어난 이상, 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전무하오. 그는,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반로환동과 금강불괴를 이룬 괴물이니. 일단 멀리서 그의 행보를 주시해야 하오. 그의 행보가 어떻게 이어질지에 따라, 우리의 대응도 달라질 것이오. 그가 중원을 노리고 들어온다면 최후에는 목숨을 걸고 그를 막아야 하겠지만……."
천효의 말에 문득 장연우는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해 냈다.
“지금 정무맹의 문 맹주님과 천군성의 염 맹주님이 이끄는 정, 사파 무림인들이 운남에 들어와 있습니다. 아마 곧 마교와의 일 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럼?”
“아마 지금쯤 그에 대한 소식은 온 저잣거리에 퍼져 있을 것이고 그 사실이 천년마제의 귀에 들어 갔을 겁니다. 그는 아마 그 격전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럼 큰일이 아니오? 정무맹과 북천맹은 아직 천년마제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모를 터, 만약 천년마제가 격전지에 도착한다면……!”
“그들은 모두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퇴각시켜야 합니다.”
***
“하아, 기분 좋군.”
천년마제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는 곳은, 여인과 향한 객잔의 위층에 있는 객실이었다.
천년마제가 벗어 놓은 옷을 하나하나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여인의 나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죽어 있었다. 혁리우와 초성패가 그랬던 것처럼 미라와 같이 메마른 모습으로.
“선천지기는 처녀의 것이 신선하고 맛있지만 뭐,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선천지기는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소모되는 기운이었기 때문에, 나이가 든 노인들은 이 선천지기가 약했다.
그리고 반대로 어린아이들이나,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선천지기는 매우 강했다.
천년마제는 이 여인을 처녀인 상태로 선천지기를 흡수할까하다가, 생각을 바꿔 처녀성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 후 그녀의 선천 지기를 흡수했다.
물론 처녀의 상태에서 선천지기를 흡수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양과 높은 질의 기운을 선사했지만, 그와 다른 즐거움을 얻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혁리우와 초성패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한동안은 다른 기운을 흡수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양의 기운이 몸 안을 감돌고 있었다.
천년마제는 오랜만에 유희에서 큰 여흥을 선사해 준 여인의 시체를 뒤로 한 채, 객실을 빠져나왔다.
“그럼 이번엔 다른 즐거움을 찾아가볼까?”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몇 가지 일들 중에 하나는 살인이었다.
오랜 시간 죽지 않은 불사의 몸으로써, 필멸자들의 죽음을 바라
보는 것은, 자신이 인간의 운명을 거스르는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누군가에게 죽음을 내리는 순간.
마치, 스스로 신이 된 듯한 희열이 온몸을 감쌌다.
“몇이나 되려나?”
신교의 전력을 상대하러 온 이들이었으니 그 숫자가 적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현 무림의 정, 사파 맹주들 또한 함께하고 있었다.
평생 얼굴 한 번 안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두 인물이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은 천년마제에게도 호재였다.
“한 자리에 모여 있다니. 번거롭지 않게 해 줘서 고맙군.”
정, 사파 맹주를 한자리에서 동시에 죽일 수만 있다면 무림을 지배하는 과정이 꽤 단축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살인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고, 또한 제법 경지를 밟은 자들의 기운 또한 흡수할 수 있으니 이야말로 일거삼득이 아닌가?
터벅- 터벅-
탓-
파파파파팟-
서서히 걸어 나가던 천년마제가 순간 땅을 박찼다.
영월 상단에서 천효와 단무현의 협공을 받았던 때와 달리, 굳어 있던 그의 몸의 근육과 장기들이 깨어나며, 어느새 그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동안 자신을 묶어 두던 잠든 육체가 깨어나자, 허공을 가르며 나아가는 천년마제는 한 마리의 새와 같은 속도로 자신을 기다리는 먹잇감들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시가 급한 듯 일어나서 움직이려는 장연우를 천효가 말려 세웠다.
“그 상태로 움직이려는 생각이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장연우는 외상은 없었지만, 분명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그것을 치료하지 않고 다시금 내공을 사용한다면, 내상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런 상태로 싸움터로 향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급한 마음은 알겠으나, 지금은 내상을 다스릴 때이오. 더구나 이곳에 장 시주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소? 그리고 굳이 우리가 그곳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정무맹과 북천맹 무인들에게 퇴각해야 한다는 사실만 전하면 되지 않소?”
휘륵- 휘륵-
말을 마친 천효가 입으로 기이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저 먼 하늘에서 거대한 매 한 마리가 천효를 향해 날아왔다.
푸드득- 푸드득-
천효의 곁에 다다른 매가 날갯짓으로 속도를 줄이다가 그의 팔위에 안착했다.
천효의 매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매들과는 조금 달랐다.
우아한 깃털과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고, 날아오던 속도 역시, 보통 매들에 비해 훨씬 빨랐다.
“음, 종이와 먹이 없구려.”
그러던 천효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사람 머리통만한 돌덩이를 주워들었다.
삭- 삭-
그리고 손날로 돌덩이의 위아래를 가로로 잘라 내자, 이내 얇디 얇은 석판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땅에 떨어져 있던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 든 천효가 석판 위에 글을 세기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로 돌 위에 글자를 음각하는 모습은, 신기에 가까웠다.
범인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하였겠으나 그것을 지켜보는 남은 두 사람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찌이익-
옷소매를 찢어 석판을 매의 다리에 묶은 천효가 말을 이었다.
“다 됐소. 마교와 정무맹, 북천 맹의 격전지는 어디오?”
“영인(永仁)입니다. 하지만 그 매가 어찌 그곳을 찾아간단 말입니까?”
보통 전서를 주고받을 때 쓰는 전서구들은, 특별한 위치를 기억하고 그곳을 오고간다. 한마디로 어느 위치에 전서를 보내기 위해 선 그곳을 오가는 훈련을 한 전서구만이 전서를 보낼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 천효는 마치 매가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묻고 있었다.
“평범한 매가 아니오. 비응(妃鷹)이라고 부르는 영물이오. 본 승의 의지에 따라 이 아이는 목적지를 찾아갈 것이외다.”
전서구들과 달리 그때그때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 아니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마교인들 또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 어떻게 정무맹, 북천맹 쪽으로 전서를 전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비응이 그들과 안면을 튼 사이도 아니고,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 속에서 자칫 마교 쪽에 전서를 전달한다면 큰일이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비응이 영물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소. 일반 매들과 달리 비응의 기감은 특출 나오. 웬만 한 무림인들보다 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하오. 비응은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 가장 맑은 기운이 큰 자를 찾아가 이 전서를 전할 것이오.”
그렇게 말한 천효가 비응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사람과 동물의 언어는 다르다.
하지만 천효는 비응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것은 언어를 뛰어넘는 의지의 영역이었다.
천효는 비응이 찾아가야 할 목적지와 전서를 전해야 할 인물을, 의지를 통해 전달하고 있었다.
곧 비응이 천효의 팔을 떠나,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내상을 추스르시오.”
천효가 말하자, 장연우는 가부좌를 틀며 지금껏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단무현을 보았다.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는 그를 보며, 장연우는 그가 깊게 쌓은 도가의 가르침 안에서 자신에 대한 분노를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 장연우로서는 굳이 그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이내, 장연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