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쥐구멍에 볕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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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는 자취방에 돌아와 4대째 물려쓰는 칼을 한참이나 살펴보았다. 분명 환상이나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일일까?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글자가 놀랍긴 했지만,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어 확인하고 말았다.
그 결과.
[79년전으로 다가갑니다.]
글자가 새로이 나타나기 무섭게 아찔한 느낌이 들며 이상한 풍경이 보였다. 여긴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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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초가집 마당에, 높다랗게 자란 감나무가 홍시를 매달고 바람에 흔들거린다.
"어무이, 배고파요."
"원 녀석도."
중년의 여성이 배고프다고 보채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장독대로 향했다. 그곳에는 오래묵은 된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된장을 그릇에 덜고 보관해둔 채소를 가져와 된장찌개를 끓였다. 군침이 꼴깍 넘어갈만큼 맛있는 냄새에 동네 강아지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 동네사람까지 하나둘 모여들어 수군댄다.
"내 안 카나, 둘이 먹다 하나 쥑이삐도 모른다카이."
"그케 맛있나?"
"카믄, 쪼매 달라 캐바라."
"으대, 가가 보믄 클난다. 승질은 드러버가꼬."
중년여성은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보리밥을 퍼서 상위에 올려놓았다. 그 옆에는 맛있게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가 놓여있었다.
가족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자, 그녀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요리였다.
"밥 묵으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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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암전되며 낯선 풍경이 사라지고 익숙한 옥탑방 내부가 보이자, 산하는 눈만 끔뻑였다. 오춘희라면, 우리 증조할머니 성함인데.
보통은 자신 윗대 조상의 이름까지는 잘 모르지만, 산하는 잘 알고 있었다. 시골에 내려가면 할아버지가 가끔 그 맛이 그립다며 푸념을 늘어놓으시곤 했기 때문이다.
[오춘희의 대표요리인 된장찌개 요리 관찰에 성공했습니다.]
[솜씨 일부를 획득합니다.]
산하는 몇 시간동안 생각하고 살펴본 끝에 결론을 내렸다. 드디어 조상님이 내 절절한 소원을 들어주셨노라고. 그 후 된장찌개를 끓였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바로 이거지.'
사고회로는 급격히 돌아가며, 자본이 없는 가운데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아냈다. 바로 포장마차였다.
그는 곧바로 하동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동식아."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알았냐? 알바자리 괜찮은거 나왔더라. 금방 얘기해줄게. 말하면 바로..."
산하는 친구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외쳤다.
"알바는 됐고, 나 개업할거다."
"뭐? 이 미친. 급발진 그만하라고 했지?"
"급발진이 아니고 추진력이라고 하는거다. 짜식이, 그럼 끊는다."
"야! 야야, 박산하!"
산하는 하동식의 염장을 질러놓고, 미래를 향한 꿈속에서 허우적거렸다.
***
하동식은 한달음에 산하의 자취방으로 달려와 삿대질부터 했다.
"야 이 미친, 뭐라고?"
"아 귀 따가워. 왜 맨날 나보고 미쳤대, 포장마차 한다니까."
"이제 하다하다 포장마차? 뭘 팔아?"
"된장찌개랑 공깃밥."
"네가 드디어 완전히 미쳐버렸구나. 포장마차에 된장찌개? 잘도 팔리겠다. 제발 네 여동생 본 좀 받아라."
"윤정이가 왜? 걔는 걔고 나는 나지."
산하의 친구 하동식은 오늘도 올라오는 혈압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릴때부터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지 않았다면, 당장 손절했을 거다.
"야, 박산하."
"왜!"
"차라리 알바 해라. 알바. 그게 낫겠다. 오케이?"
"노케이, 그나저나 중고 포장마차는 얼마나 하냐?"
하동식은 딴소리만 해대는 산하의 질문에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아오, 속터져. 이 고집불통아. 너 생각 좀 해봐라. 다른사람들 포장마차에서 뭐 팔든?"
"떡볶이, 어묵, 꼼장어, 소주 뭐 이런거?"
"잘 아네, 차라리 팔거면 그런걸 팔던가. 난데없이 된장찌개만 팔겠다는게 뭐하자는 거야?"
"왜, 어때서. 된장찌개가 또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 아니겠냐. 보글보글 끓여서 내놓으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거야."
"그건 네 생각이고, 아무도 안 사먹어. 제발 한 우물 팔거면 바른 길이라도 가자. 차라리 돈 모아서 식당하는게 낫다. 산하야. 이 형이 이렇게 빈다. 알바 오케이?"
"포장마차 오케이. 보자, 내 돈이 얼마 남았더라."
산하가 스마트폰을 이용해 은행 앱에 접속했다.
"이 벽창호야. 와 미쳐버리겠네. 너 당분간 나한테 연락하지마라. 왜 오라고 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놔."
잔액을 살피던 산하는 고개도 들지않고 대답했다.
"오라고 안 했는데. 네가 온거야."
하동식은 뻔뻔한 친구의 말에 부들부들 떨다가 몸을 홱 돌렸다. 그제야 산하는 고개를 들었다.
"가냐? 야! 밥 먹고 가. 내가 된장찌개 끓여줄게. 기똥차게 맛있어."
"안 먹어 인마."
"후회할텐데, 야! 진짜 후회한다니까. 진짜 안 먹냐?"
"아, 안 먹는다고."
"나중에 달라고 하기 없기?"
"너나 많이 먹어. 디룩디룩 살이나 쪄버려라."
"야, 잠깐!"
"뭐, 왜?"
"여기 이거 보이냐?"
산하는 식칼을 들어서 보여주었다.
"그게 뭐?"
"4대째 내려오는 보물 한번 보라는거지."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던 하동식은 옥탑 현관문을 쾅 닫은 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승용차를 몰고 사라졌다. 산하는 친구의 뒤를 따라나가 그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미안하다 인마, 이번엔 진짜야. 두고 봐.'
산하는 옥탑방으로 다시 돌아와 조선식칼을 잡아서 이리저리 살폈다. 이제 글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은은한 빛이 흘렀다. 이건 나만 볼 수 있는가보다.
***
조금 쌀쌀한 아침.
호프집을 운영하는 맹철호는 부지런하게 가게 앞을 쓸고 있었다. 밤새 버려진 담배꽁초하며 오물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이, 인간들이 말이야. 왜 이렇게 길바닥에 쓰레기를 버려. 에이 정말."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산하가 플라스틱 양동이에 든 물을 ㅤㅊㅘㄱ 뿌리고, 오물이 묻은 길바닥을 빗자루로 깨끗하게 씻어냈다.
"너 뭐하냐?"
"아저씨 좋은 아침입니다."
"이거, 이거 수상한데. 나 돈 없다."
"에이, 아저씨는. 제가 언제 돈 빌리는 거 보셨어요?"
"돈은 안빌렸지만 술은 많이 빌렸지."
"아저씨와 나눈 인생술이었잖습니까? 그걸 값어치로 환산하시다니요."
"너도 봉만두 닮아가냐?"
"왜 저를 그놈한테 가져다 붙이세요."
"어째 오늘 말하는 게 비슷해 보여서 그랬지. 그래서 말해 봐. 들어는 줄게."
"저기...."
산하가 낯짝이 두껍긴 하지만, 그래도 염치는 조금 있었다. 질질 끄는 그 모습에 맹철호가 버럭 소리질렀다.
"아우 속 터져. 빨리 말해봐."
성질 급한 맹철호가 당장 얘기 안 하면 쫓아버리겠다는 듯 으르렁 거렸다. 산하는 때가 무르익었다 싶어 얼른 내심을 토해냈다.
"저기 옆에 포장마차 사업 좀 할게요."
산하가 랩을 하듯 재빨리 내뱉은 말에, 맹철호가 눈을 두어번 끔뻑이더니 가게옆 작은 공터를 가리켰다. 승용차 한 대 주차하면 꽉 찰만한 크기였다.
"저기서?"
"네."
"포장마차를?"
"네."
"네가?"
"네!"
"불가."
산하가 두 손을 모으며 불쌍한 새끼고양이 표정을 지었다. 눈빛마저 달리하더니.
"아저씨, 한번만요. 우리 인연이 보통 인연입니까?"
그 시선을 회피하던 맹철호가 먼산을 보며 말했다.
"산하야, 그래도 상도덕은 있어야지. 업종이 겹치잖아. 술도 팔고 꼼장어도 팔면 난 어쩌라고. 안 그래도 요즘 매출 줄어서 거시기하구만. 미안한데. 그건 좀..."
"전 술은 안팔고 딱 하나만 팔겁니다. 그럼 됐죠?"
호기심이 생긴 맹철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뭐 하게? 분식?"
"된장찌개요."
"뭐? 내가 잘 못 들은거지? 된장찌개? 술도 없이 그거 달랑 하나?"
"잘 들으셨네요."
맹철호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눈물이 찔끔 날만큼 크게 웃었다.
"산하야, 정신차려. 무슨 된장찌개만 포장마차에서 팔아? 아무도 안 사먹어. 아니지 술 취하면 한 두 사람 미친척하고 사먹긴 하겠다."
"아저씨, 시작하기도 전에 저주를 퍼부으시다니. 저 이제 단골 끊습니다."
"요놈아, 하나도 겁 안 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쳐?"
"....아저씨 한번만 허락해 주세요. 돈 좀 모이면 다른데로 옮길게요."
"하... 정말, 젊은놈 부탁이라 안 들어줄수도 없고, 망할게 뻔한데 대체 왜 이러는거야?"
"이번엔 반드시 성공합니다. 믿어주세요."
맹철호는 결의에 찬 산하의 눈빛을 보며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술은 안 팔거지?"
"네, 절대 안 팝니다."
"맹세해."
"나, 박산하는 포장마차에서 절대절대 술을 팔지 않겠습니다."
"그럼 해."
"진짜요?"
"그래, 저기 내 땅인 거 알지?"
"네, 이용료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이용료는 됐고, 아침에 여기 청소나 좀 해. 요즘 아침마다 삭신이 쑤셔서 못해먹겠다."
맹철호는 산하가 미안해 할까봐, 굳이 없는 변명까지 만들어냈다. 산하도 그걸 눈치챘지만 모른척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저씨, 존경합니다. 이 은혜는 대를 이어서라도 보답할게요."
"이봐, 봉만두 같은 소리하고 있네."
"....."
"잘해, 그래야 나도 보람이 있지. 망해 나가기만 해봐라. 확 그냥."
"예,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산하 네가 정말 성실해서 봐주는거야."
맹철호는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민망한 듯 콧잔등을 긁었다.
"그런데 아저씨..."
"응?"
"전기랑 물도 좀 땡겨 주시면....."
"에라이!"
***
산하는 허락을 받자마자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포장마차를 구입했고, 배달 온 용달차가 호프집 앞에 정차하자 골목옆 작은 공터를 가리켰다.
"아저씨, 저기 내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산하는 단돈 30만원에 구입한 중고 포장마차를 쓰다듬었다. 이제 그릇이나 밥솥과 같은 여러 물품만 준비하면 영업개시다.
맹철호가 이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산하야, 정말 할거냐?"
"아저씨, 이미 포창마차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렇긴 한데... 에이 모르겠다. 언제 개업해?"
"저쪽 중고매장에서 그릇이랑 밥솥이랑 의자 같은거 구입하고, 또 뭐더라 아! 천막도 만들어야죠. 만들어서 시식도 해봐야하고, 이것도 의외로 준비할 게 많네요."
"내가 뭐 좀 도와줄까?"
"에이, 벌써 큰 도움 주셨잖아요. 아저씨 주차자린데..."
"그거야 요즘 집에 놔두고 다녀서 상관은 없는데, 알았다. 열심히 해."
"네, 아저씨."
"이왕 할거면 개업도 더 빨리하고, 지금 너무 느려."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건 당신 성질이 급해서 그렇죠."
"엥? 당신은 왜 나왔어? 손님은?"
"파리날리는데 손님은 무슨, 그러게 저녁 장사만 하자니까요."
"이 시간에도 애주가는 우리 호프집을 애타게 찾을거야. 그리고 몸뚱이 멀쩡해서 둘 다 놀면 뭐해?"
"멀쩡할때 놀면 좋죠. 좀 놀아봐요."
"크흠, 안 돼. 사람이 일을 해야 밥을 먹지."
"하여간에 당신은 고리타분해요. 내가 눈이 삐었지. 저런 인간을..."
"뭐야?"
"아, 몰라요. 그런데 산하야. 정말 된장찌개 파는거야?"
"네, 사모님. 나중에 맛보러 오세요."
"발상이 신선하네. 화이팅이다."
"역시 사모님, 감사합니다."
잠시 후.
산하는 포장마차 내부를 대충 정리한 후 중고물품 가게로 향했다. 꽤 큰 매장 내외부에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죄다 식당에서 나온 중고물품이었다.
"아이고 오서오세요. 뭐 필요하십니까?"
"제가 포장마차 할 계획인데요."
"아하, 그거라면 세트로 나온 물건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아, 그게 제가 하는 포장마차가 조금 색다른 걸 팔아서요. 일단 뚝배기 그릇부터 보여주세요."
"뚝배기요? 알겠습니다."
가게 주인이 이내 그릇이 가득 담긴 상자를 산하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산하는 그 외에도 여러 물품을 주문하다 말고, 구석에 먼지가 쌓인 채 은은하게 빛나는 한가지 물건을 발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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