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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6화 (6/445)

6화 음식은 추억이다(1)

"아들, 뭐하고 있었어?"

"그냥 이것저것요. 무슨 하실 말씀 있으신 것 같은데요?"

"그래, 너 요즘 한가하지?"

"아니요, 이제 엄청 바빠질 예정입니다. 오늘도 정신 없었어요."

"너를 어쩌면 좋니. 엄마한테는 사실대로 말해도 돼."

"아니 엄마. 그게 아니라 진짜 바빠요."

"됐고, 이번 주말에 윤정이 시간 난다니까, 같이 할아버지댁에 한번 가봐. 알았지?"

"할아버지요?"

"그래, 요즘 도통 식사를 못 잡수신다더라. 가서 얼굴도 보여드리고, 말동무도 해드려."

잠시 생각하던 산하가 대답했다.

"네 그런거면 다녀와야죠. 안 그래도 통 연락을 못 드렸네요."

"그래, 간김에 구경도 좀 하고. 이만 끊는다."

"네, 엄마 들어가세요."

통화가 끊긴 스마트폰을 잠시 바라보던 산하가 고개를 들었는데.

"놀래라. 아저씨 여기서 뭐하세요?"

뒷짐을 진 채 산하를 노려보다시피 하던 맹철호가 씩 웃었다.

"너."

"네?"

"장사 좀 하더라?"

"전 또 무슨일 있으신 줄 알았네요. 제가 장사를 좀 하죠. 놀라셨어요?"

"그런데 왜 말아먹었어?"

"아저씨!"

"아, 알았어. 나도 맛은 봐야 할 거 아냐. 왜 난 안줘? 봉만두가 좋아? 내가 좋아?"

떼를 쓰는듯한 맹철호의 항의에 산하는 멍청해졌다.

"네?"

"누가 좋으냐고? 어째서 봉만두는 주고 난 안줘?"

"아, 그건 만두가 쳐들어와서 훔쳐먹은거나 다름없어요."

"그래? 아니 그래도 말이야, 개업을 했으면 땅주인한테 한 그릇 상납하고 그래야지. 이래서 되겠어?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데."

산하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두손을 나팔모양으로 모아 소리쳤다.

"동네사람들, 맹철호 아저씨가 갑질해요."

"뭐, 인마?"

"농담이에요. 손님은요?"

"오늘은 몇팀밖에 없어."

"그럼 거기 주방에서 만들어 드릴게요."

"좋지. 따라와."

산하는 맹철호의 뒤를 따라가며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

.

.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시작한 두 번째 식당, 그 식당을 폐업했다. 산하는 그때도 친구에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터덜터덜 얼마나 걸었을까.

버스비마저 악착같이 아끼던 산하는, 자취방 맞은편 건물 호프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껴 뭐해...'

오늘 같은 날, 고작 몇천원 버스비가 아까워 벌벌떠는 자신이 싫었던 산하는, 대뜸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저씨, 여기 오뎅탕이랑 소주 하나 주세요."

그래봐야 빈털터리, 나름 저렴한 안주를 시켰다.

"예, 소주 종류는 어떤거로 드릴까요?"

"아무거나 주세요."

"예, 금방 나옵니다."

인상좋아보이는 주인 아저씨가 곰살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산하는 그 표정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걸 느끼며 앉아있다가 따뜻함에 몸이 노곤해지며 문득 졸고 말았다.

어쩌면 정신적 피로가 누적됐는지도 모른다.

한참 후.

산하가 눈을 떠보니 군데군데 앉아있던 손님은 다 나가버렸고, 혼자 남아있었다. 그때 호프집 주인 아저씨가 다가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깨어나셨네. 고단했던가 봐요?"

미안한 표정을 짓던 산하는 시간부터 확인했다.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이었다. 내가 이렇게 많이 자다니.

"죄송합니다."

"뭘요. 잠꼬대 하시던데."

"제가 뭐라고 했나요?"

"빌어먹을, 다음엔 안 망해. 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산하는 고개부터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영업 방해했네요. 이만 일어날게요. 오뎅탕이랑 소주 얼마죠?"

"드시지도 않았는데요 뭘. 거기 그냥 앉아봐요. 안주 금방 데워올테니까."

"네?"

"어디 가지말고 거기 딱 있으세요."

급히 주방으로 들어가 부산을 떨던 주인 아저씨는 금세 여러가지 안주와 술을 내왔다. 그는 앉자마자 잔을 내밀었다.

"자, 한잔받아요."

"......"

"아, 뭐해요? 한잔 받으라니까."

.

.

.

예전의 추억에 빠져있자니, 맹철호가 버럭 소리지른다.

"아, 안 오고 뭐해?"

여전히 성질 급한 맹철호의 행동과 말투에 산하는 피식 웃어버렸다.

"어쭈, 웃어? 너 내일 벌칙으로 두 번 청소해."

"예, 예, 건물주님. 지금 갑니다. 청소는 두 번 못해요."

"에라이, 박산하야. 이게 갈수록 능글맞아져."

내부로 들어선 산하는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재료는요?"

"다 알면서 뭘 물어봐. 있는 거 대충 꺼내서 만들어 봐. 맛 없기만 해봐라."

"맛 없으면 어쩌시려고요?"

"봉만두처럼 만들어준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맹철호는 산하의 익살맞은 표정에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난 손님때문에 잠시 나가있을테니까. 천천히 해."

"네, 아저씨."

주방을 빠져나가는 맹철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산하는, 곧장 영업용 대형 냉장고를 열어 된장찌개에 쓸만한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차돌박이가 눈에 띄었다. 실험을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산하는 그것마저 꺼내서 요리를 시작했다.

딱 한가지, 된장만큼은 포장마차에서 쓰다 남은, 어머니 장순희여사표 집된장이었다.

잠시 후.

보글보글 끓어오른 된장찌개 냄새가 주방을 넘어서, 맹철호의 가게 전체로 희미하게 퍼져나갔다. 오랜만에 대학동창과 만나 술을 한잔하던 사내가 코를 킁킁거렸다.

"야, 냄새 안나냐?"

"냄새? 뭔 냄새?"

"된장찌개 냄새. 오 냄새 좋다. 술 막 당기는데."

"메뉴판에 없는데? 하여간에 냄새는 기가막히게 잘 맞아요."

"신메뉴인가보다."

"너, 지금 맥주에 된장찌개 먹으려고?"

"아니 소주도 시키려고, 사장님?"

맹철호가 손님에게만 짓는 곰살맞은 표정으로 얼른 달려갔다.

"네, 손님 필요하신거 있으신가요?"

"된장찌개랑 소주 한 병 주세요."

"네? 된장찌개는 우리 가게에서 안 파는데..."

"에이, 다 알아요. 신메뉴 개발중이신거죠? 일단 주세요. 맛없어도 아무말 안할게요."

"그게..."

망설이던 맹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간은 조금 걸릴겁니다."

"네, 괜찮아요. 저희 시간 많거든요. 천천히 마시고 있을게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방에 들어선 맹철호가 곰살맞게 웃었다. 산하는 그 미소에서 뭔가를 감지했다.

"아저씨, 차돌박이 써도 괜찮은거죠?"

"응? 웬 차돌박이?"

"이거 냉장고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꺼내 썼는데..."

"어? 아. 내가 아무거나 쓰라고 했잖아. 그런데 말이다."

이게 아닌가, 그럼 뭐지라고 생각하던 산하가 궁금해하며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손님이 된장찌개가 드시고 싶으시다네."

"예? 그거 메뉴에 없잖아요."

"어쩌냐, 손님이 왕인데. 달라면 줘야지. 손님중에 개코가 있나봐. 귀신같이 알아맞히더라고."

"뭐, 그럼 아저씨 드실 거 가져다 드리면 되겠네요."

어색하게 웃던 맹철호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한다.

"이런.... 어쩔 수 없지. 그럼 손님 가져다 드릴테니까, 산하 너는 한 뚝배기만 더 끓여봐."

"이렇게 부려먹으시면 노동청에 신고할겁니다."

"신고해, 하나도 겁 안나. 나 건물주 맹철호야."

껄껄 웃던 맹철호가 된장찌개를 들더니 잽싸게 밖으로 도망졌고, 산하는 다시 된장찌개를 끓여야만 했다. 예전에 받은것에 비하면 이정도야 뭐.

그런데.

된장찌개가 다 끓어갈즈음 맹철호가 돌아와 코를 만지작 거리는게 아닌가.

"아저씨 또 왜요?"

"그게 있잖아. 산하야. 미안한데....다른 손님도 달라시네?"

"네?"

"처음 주문한 손님이 연신 맛있다고 난리치니까, 다른 손님도 혹해서 여기저기서 달라고 하잖아. 그래서 말인데...."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저는 이만."

"야, 박산하. 의리없게 이럴거냐? 이래서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라더니."

"내일부터 갈색으로 염색할게요."

"에라이 이놈아. 한번만 부탁하자. 한 뚝배기에 3천원씩 줄게. 오케이? 그냥 연장근무 한다고 생각해."

"그런거라면 또 생각해봐야죠."

"옳지, 그럼 부탁한다. 추가 뚝배기 두 개다?"

맹철호가 휘파람까지 불며 매장으로 향한다. 대체 한 그릇에 얼마를 받으신거지, 수상해, 차돌박이도 들어갔는데, 등의 잡생각을 이어가던 산하는 다시금 된장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다 끓여진 된장찌개를 맹철호가 서빙하고 난 후였다.

호프집 주인아저씨는 이제 헤실헤실 웃기까지 하며 주방으로 들어온다. 황당해진 산하가 외쳤다.

"또요?"

"우리도 달라는 걸 어쩌냐. 산하야 파이팅! 그래, 인심썼다. 뚝배기당 4천원으로 하자. "

"......"

이날 산하는 세상에 뭐 이런일이 다 있느냐고 신기해하며, 밤 늦게 재료가 똑 떨어져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수고했어. 여기 받아."

"에이, 아저씨 농담이었어요. 무슨 돈을 주세요."

"무슨 소리,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했지?"

"그건 그런데..."

"잔말말고 받아."

흰 종이봉투를 억지로 산하의 주머니에 넣어준 맹철호는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또 못먹었네."

"그러게요. 내일 드시면 되죠."

"그래, 얼른 올라가."

"네, 내일 봬요."

***

며칠 후.

산하는 평일 장사를 그럭저럭 잘 끝내고, 여동생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저 멀리 긴 생머리를 질끈 묶은 여동생을 발견한 산하가 외친다.

"윤땡아!"

황급히 소리난 곳을 돌아보던 박윤정이 입모양으로 말한다.

"닥쳐."

재빨리 다가간 산하가 큰소리로 말했다.

"너 오빠한테 그게 할말이야. 할아버지한테 다 일러준다?"

"아, 몰라. 누가 이름 놔두고 그렇게 부르래? 소리 좀 죽여."

"윤땡이가 뭐 어때서. 너 중학교 다닐때 땡땡이 많이쳤잖아. 아버지가 지어주셨으면 소중히 불러야지."

박윤정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

"아, 오빠!"

"짜식, 부끄럽냐? 그러게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지. 이런 줄도 모르고 동식이는..."

"바보 멍충탱구리."

"뭐래. 더멍충탱구리가."

"너 싫어."

"나도 싫어."

"타기나 해. 짜증나."

"잘 지냈냐?"

"아, 몰라."

***

시골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낡은 집 한채, 그곳 마당에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이 담장너머로 저 멀리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머리칼에 눈이 내려앉은것 같은 그의 이름은 박태산이었다.

지금보다 젊은 날 중견기업의 창업주로 살았으나, 지금은 그저 시골에서 박노인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런 그는 과거의 아픈 기억에 빠져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일궈낸 식당에서 시작했던 사업은, 시간이 흐르며 점점 커져만 갔다. 박노인의 수완도 수완이지만 운도 잘 따라주어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박노인은 중견기업에 만족하지 않고, 재벌그룹의 규모로 키워내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기가 안 좋았다. IMF가 터진것이다. 그래도 운은 박노인의 편이었는지, 큰 기업이나 은행이 도산할적에도 잘 버텨냈다.

그 큰 격랑을 아슬아슬하게 이겨내고나자 더 큰 위기가 찾아왔다.

안 그래도 재정이 상당히 부실해진 참이었는데, 이물질 파동, 횡령, 노조의 반발, 언론의 집단공격,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리기 위한 정치권의 파상공세등은 견딜수가 없었다.

박노인의 운도 거기서 다한것인지, 식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며 다른 사업으로 뻗어나가던 중견기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얼마 후 타 그룹에, 그것도 헐값에 매각되었다.

결국 오랜세월 키워낸 기업의 끝은, 약간의 빚이 전부였다.

빚더미에 앉지 않은게 천만다행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그의 자식들은 졸지에 가난해졌다. 특히 가업을 이으려고 열심히 일했던 아들 박상태에게, 박태산은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오춘희마저 떠올린 박노인은 중얼거렸다.

'그때가 그립구나...'

그런 박노인을 뒤에서 바라보던 딸 박은심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보름넘게 식사를 제대로 안해서 그녀에게는 큰 걱정이었다.

오늘도 이것저것 만들어서 드려는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은심은 부엌으로 돌아갔다.

한참 후.

낡은 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린다.

박노인은 또 바람이 불어 문이 열렸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간만에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돈다.

"우리 강아지들 왔나?"

- 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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