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음식은 추억이다(2)
"네, 할아버지, 윤정이 왔어요."
윤정은 손녀답게 귀여운 표정까지 지어가며 재롱을 피웠다. 돌변한 여동생의 모습에 산하는 입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으며 할아버지에게 인사했다.
"할아버지, 저도 왔습니다."
"오냐, 다들 오느라고 고생 많았다. 은심아, 애들 왔다."
요리하다 말고 뛰쳐나온 박은심이 윤정과 산하를 반겼다.
"산하랑 윤정이 왔구나. 윤정이는 더 이뻐졌네?"
"고모, 저는요?"
"응? 산하 너는 여전하네."
"고모!"
"뭘 바라는거야. 얼른 들어가. 고모가 맛난 거 해줄게."
윤정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 고모 보조할게요."
"그냥 들어가 쉬어."
"아니에요. 고모."
담소를 나누며 개량된 부엌 내부로 사라지는 둘을 바라보던 박노인이 산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산하야."
"네, 할아버지."
"이리 좀 앉아보거라."
박태산이 평상을 가리켰고, 산하는 그러겠노라고 답하며 그곳에 앉았다.
"별일 없지?"
"네, 할아버지."
다음 말에 뜸을 들이던 박노인이 주름진 입가를 움찔거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제 관둬라."
청천벽력같은 할아버지의 말에, 산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네?"
"이 할애비가 네게 헛된 꿈만 심어준 것 같더구나. 과거에 얽매여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법이다."
"할아버지, 왜 갑자기...."
"개천에서 용나던것도 예전에나 가능했던 일이야. 네 아비를 보아라. 현실에 순응하고 그리 살아야한다."
"할아버지 늘 꿈에 관해 얘기해 주셨잖아요. 왜 갑자기..."
"소식은 들었다. 네 번째 식당 문 닫았다며? 그쯤 했으면 되었다. 하나라도 젊을때 네 살길 찾아야지. 아범이 답답해 하더구나."
"아버지가 부탁하셨어요?"
"그것보다는 내 생각도 같다. 뒤를 돌아보니 회한 뿐이더구나. 부질없어. 이루지 못할 것에 너무 매달리지 말아야한다."
설마 이런말을 들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산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토록 찬란했던 박씨 집안은 무너졌지만, 대들보는 살아있는 줄 알았다.
그 대들보마저 무너져 내리려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제가 택한 꿈입니다. 딱히 과거때문에, 그리고 할아버지 때문에 고른 건 아니에요. 전 요리가 좋습니다."
"섭섭해도 내 말 듣거라. 앞날을 생각하라지 않느냐. 좋아하는 일과 잘 하는 일은 구분해야 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산하는 마음 한구석이 시려오는 걸 느꼈다. 한 나라로 보자면 그리 큰 기업은 아니었지만, 일개 개인이 세웠다기엔 거대했었다.
그 기업을 일군 거인이 지금 초라한 모습으로 내게 말하고 있다. 꿈을 그만두라고.
"할아버지 그렇게는 못 합니다. 전 반드시 이루고 말겁니다."
"네 나이가 내년이면 서른이다. 현실을 직시하거라. 부모 생각도 해야지. 할애비가 해줄 말은 이것뿐이다."
천천히 일어선 박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등허리를 두드리며 집 내부로 사라졌다. 우두커니 앉아있던 산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신차려, 박산하.'
고작 이런 말 한마디에 흔들릴 것 같으면, 결과없는 꿈을 붙잡고 지금까지 오지도 못했다. 산하는 결심을 다지며 오래전 과거를 떠올렸다.
집안이 망해버린 후 어머니는 우는 날이 많았고, 아버지는 술과 한숨으로 날을 지새우곤 했다.
그 당시 그의 형 박제동은 좋은 대학을 나와 안정적으로 살아가기를 택했고, 여동생 윤정은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오로지 산하만이 어릴적부터 바라왔던 꿈을 좇았다. 헛된 망상이라 하여도 좋고, 시간 낭비라 하여도 좋았다.
세월 흘러가면 스러질 목숨, 꿈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릴적부터 할아버지와 대화하며 남다른 철학을 가졌던 산하는, 그렇게 꿈을 가졌고 이루기 위해 매진해왔다.
이제와서 할아버지가 흔들어도 바뀌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결심만 더 단단하게 굳어졌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능력마저 생긴 마당이었다.
'할아버지 살아계신 동안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산하의 눈이 굳은 의지로 반짝 빛났다.
한참 후, 땅거미가 질 무렵.
다리를 툭툭 두들기던 박은심이 윤정과 수다를 떨다 말고 일어섰다.
"왜 이렇게 시간이 잘 가나 몰라. 또 밥할 시간이네."
"고모, 다리 많이 불편하세요?"
"별거아냐. 나이들면 다 그래. 보자 오늘 저녁은 뭘 해준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산하가 벌떡 일어섰다.
"고모, 제가 된장찌개 끓여 드릴게요."
"응?"
"편히 쉬세요. 우리 왔다고 점심때도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셨잖아요. 저녁은 남은거랑 된장찌개 해서 간단히 먹어요."
"그럴까?"
"네, TV보면서 쉬고 계세요."
"올, 오빠가 웬일?"
"웬일은 무슨."
부엌으로 들어간 산하는 들고나온 나무함에서 애지중지하는 조선식칼을 꺼냈다. 시골 내려가면 할아버지 해드리려고 미리 준비해 온 참이었다.
그 먼 옛날 증조할머니가 하던 것처럼, 장독대로 다가가 된장을 푸고 텃밭에서 채소를 뽑아 다듬었다.
돌아오니 이미 육수물은 끓고 있었다. 된장을 푼 다음 재료를 손질해 집어넣고 한소끔 끓이자 군침돌게 하는 맛이 시골집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여 기력이 없던 박노인이 누워있다말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이 된장찌개 냄새는 꼭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예전의 그 냄새가 아닌가.
이 냄새와 맛이 그리워 곳곳을 다녀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독보적이었던 어머니의 맛.
박 노인은 나이답지 않게 흥분하고 말았다.
'대체 어디서...'
문을 열자마자 냄새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곧바로 알아챘다. 부엌에서 이 추억의 냄새가 진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딸 은심이 이런 재주를 가지고 있었나.
박 노인은 왠지 모를 두근거림에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전에 없던 시장기가 돌고 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 진지 잡수세요."
은심의 외침에 박노인은 여전히 두근대는 마음으로 대청마루에 다가갔다. 그곳에는 점심때 남은 다른 반찬이 있었고, 그 중앙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가 놓여 있었다.
"냄새 좋구나."
"그렇죠, 아버지? 산하 솜씨가 제법이네요."
"산하?"
"네, 이거 산하가 끓였어요. 얼른 앉으셔서 맛 좀 보세요."
조금 당황스러웠던 박 노인은 천천히 밥상머리에 주저 앉아 된장찌개를 바라보았다. 어찌 손자가 끓인 된장찌개에서 이런 추억의 향이 날까.
의문을 품던 그는 그릇에 덜어낸 된장찌개 맛을 보았다. 그 순간 어머니의 맛이 기억났다. 아무리 밥맛이 없어도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멀건 된장찌개 하나면 뭐든 맛있었고, 꽁보리밥 두 공기는 뚝딱이었다.
의문을 풀 사이도 없이, 그는 전에 없던 식탐이 일어남을 느끼며, 된장찌개에 밥을 쓱쓱 비벼먹었다.
은심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놀라는 한편, 걱정했다. 손주가 끓여준거라고 억지로 맛있는 척 하시는 건 아닌가.
"아버지, 천천히 드세요. 탈나요."
박노인은 딸의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밥을 입안으로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그것은 잊고 싶지않던, 희미해져가는 추억의 맛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한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딸 박은심과 손녀 박윤정이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왜 그리 쳐다봐? 얼른들 먹어."
"네, 아버지."
"예, 할아버지."
박노인의 뒤를 이어 맛을 보던 은심이 맛있다고 감탄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어디서 먹어본 것 같은데..."
"네 할머니 맛도 몰라?"
박태산이 지나가듯 읊조렸고, 은심이 손을 짝 하고 마주쳤다.
"맞다!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산하야 비법이 뭐야?"
비법을 말해줄 수 없는 산하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만들었는데요?"
"그래? 진짜 맛있네. 좀 배워야 겠는데?"
윤정은 할아버지와 고모가 지칭하는 증조할머니의 맛이 어떤지 궁금해졌다. 그저 그런 일상에서 맛보던 된장찌개 맛이 특별해봐야 얼마나 특별하겠나. 심지어 네번 말아먹은 오빠가 끓인거다.
후릅-
그녀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확장되었다.
"와, 맛있다."
"그렇지 윤정아? 네 오빠 솜씨 좋네."
"오, 생각보다 기특한데, 우리 오빠."
"스읍, 이게 어디 오빠한테. 할아버지 혼내주세요."
"치..."
그 사이에도 박노인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된장찌개를 탐하고 있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제법 단단해졌습니다.]
산하는 새롭게 나타난 메시지를 보며 호기심이 생겼다. 뭔가 발전한다는 의미 같긴 한데, 구체적인 걸 모르니 조금 답답했다.
'설마...'
***
다음 날 오후.
"할애비땜시 욕봤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또 올게요. 진지 거르지 마시고요."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오냐. 우리 강아지들 조심히 올라가거라. 아 참 산하야."
"네, 할아버지."
뭔가 할말이 있는 듯 입을 우물거리던 박노인이 손을 휘휘 젓는다.
"아니다. 얼른 가 보거라."
"네."
산하와 윤정이 골목길로 나서자 고모 박은심이 따라나섰다.
"고모도 그만 들어가세요."
"산하야."
"네, 고모."
"미안한데, 네 할아버지 말이다."
"네, 말씀하세요."
"원체 밥을 잘 안드시는 양반이잖니. 그 된장찌개 만들어서 택배로 부쳐주면 안 될까? 나는 해봐도 그 맛이 안나네."
"에이, 그거야 쉽죠. 전 또 어려운 일인 줄 알고."
"그래, 고맙고 미안하다."
"아니에요. 저 남 아니고 할아버지 손주잖아요."
"그건 그렇다. 네 덕분에 한시름 놨어. 된장찌개 정말 맛있더라. 어제도 너무 먹어서 배 나온 것 좀 봐."
"날씬하신데요?"
산하의 대답에 이어 윤정이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너무 먹었어. 점심을 된장찌개랑 두 그릇이나 퍼먹다니. 내 다이어트 돌려줘."
"동생아,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냐?"
"뭐래, 난 이미 수박이거든? 말을 안해서 그렇지, 인기 많아."
"아, 그러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아, 진짜!"
박은심이 다투는 두 조카에게 말했다.
"그만 싸우고 얼른 가. 버스시간 늦겠다."
"네, 고모."
"고모 건강하세요."
"그래, 조심히 가."
서울로 돌아가는 길, 박윤정이 산하에게 말했다.
"오빠, 제법이더라?"
"그렇지? 이제야 내 솜씨를 인정하네."
"그 솜씨로 식당은 왜 말아먹었대?"
"이게 진짜!? 너 이제 내 된장찌개 못 먹는 수가 있어?"
윤정이 여우처럼 사르륵 웃었다.
"오라버니, 화 푸세요."
"아, 징그러. 꺼져."
"뭐래. 오빠나 꺼져."
산하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 음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왜 할아버지는 그토록 어머니의 맛을 그리워 했는가. 요리에 대한 확신이 점점 더 강하게 드는 순간이었다.
***
평일 오전, 포장마차.
"캬, 맛 죽이네. 이걸 이제야 먹어보다니."
"그러게요. 아저씨 별일 없었죠?"
"별일이랄게 있어? 어제 홀에서 구토한 손님 빼고는 별일 없었어."
"그거 큰일인데요?"
"뭘, 한 두번 겪어보나. 그러려니 하는거지. 아참 지나가던 사람이 물어보긴 했다."
"뭘요?"
"여기 언제 오픈하냐고."
"그래서요?"
"나도 모른다고 했지."
"전화라도 주시지."
"그러게 말이야."
불퉁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맹철호를 보며, 산하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저씨, 저한테 뭐 화나신 거 있으세요?"
"있지."
"뭔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잘 몰랐더란 말이지."
"무슨 말씀이세요?"
"노래 말이야. 왜 숨겼어?"
"숨긴게 아니라 부를 일이 없었죠."
"말은 잘해요. 배도 부르고, 간다. 대박나라. 여기 오천원."
"에이, 아저씨 그냥 가세요."
"쓰읍, 내가 뭐라고 했어?"
"알았어요."
오천원을 받아든 산하는 멀어지는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에 잘못보면 성질이 더러워 보이지만, 인정많고 속깊은 아저씨였다.
그때, 휴대폰 가게를 운영한다는 배 사장이 내부로 들어섰다.
"이야, 드디어 열었구만.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지 뭐야. 박 사장 1인분 부탁해."
"아침 안 드셨어요?"
"말도 마. 오늘 마누라랑 아침부터 대판 했거든."
"아...."
"오늘은 좀 맵게 해줘."
"네, 청양고추 많이 넣어드릴게요."
잠시 후 산하가 끓여낸 된장찌개를 받아든 배 사장이 밥을 슥슥 비비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참, 그거 들었어?"
"뭘요?"
"동네노래자랑, 여기로 온다는데?"
"그래요? 재밌겠네요."
"박 사장이 한번 나가 봐. 괜찮을 것 같은데?"
"제가요?"
"그래, 모창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야."
"에이, 전 장사해야죠."
"1등 상금이 오백만원 상품권이야. 난 박사장이 될 것 같은데?"
어쩌면 가게를 얻는데 보탬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고민 좀 해봐야 겠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건데."
휴대폰가게 사장은 연신 맵다며 땀을 흘리더니, 맛있게 삭삭 긁어먹고 사라졌다. 아직은 한가한 시간.
턱을 쓰다듬던 산하가 중얼거렸다.
'한번 나가 봐?'
- 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