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9화 (9/445)

9화 참가번호 12번(2)

"다시 떠나도, 난 돌아가지 않아....."

와이프를 타박하던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자세를 바로했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무대 위의 저 청년이 부르는 게 분명했다.

백철우의 이 노래는 젊은날 연인과 이별하고 괴로워하며 자주 듣던 노래였다. 그때를 기점으로 콘서트를 몇번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학업이 바빠지며 끝내 마지막 콘서트를 참가 못해 후회했던 지난 날.

노랫말에 실린 뜨거운 감정, 저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깨끗한 음색. 저 청년은 가수 백철우의 환생인가.

중년인은 다시 한번 눈을 비비고 청년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보통 노래가 시작되면 덩실덩실 춤을 추던 아줌마나 아저씨도 멍하니 서서 그 노래를 듣기만 했다.

심지어 앞자리에 앉아 산하를 비웃던 남녀도 두 손을 모은채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마성의 가수 백철우가 무대를 장악하던 과거의 상황이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후회라는 잔재 속에서, 홀로 버려진...."

산하는 관객의 그런 모습에 긴장이라고는 전혀 없이 노래가 별론가 라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춤을 추던 아저씨도 멈춰섰고, 풍선을 흔들던 관객도 가만히 있어서였다.

'역시 이런데서는 안 통하나...'

차라리 트롯으로 준비해올걸 그랬나 후회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산하는 특유의 성격으로 꿋꿋하게 노래를 계속 불렀고, 이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피디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옆에 서 있던 송 작가에게 말했다.

"송 작가, 대체 저 사람 뭐야? 아는 사람이야?"

송 작가는 피디의 부름에도 아랑곳없이 입을 헤 벌린 채 노래만 듣고 있었다. 피디가 어깨를 건드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네?"

"저 사람 말이야. 아는 사람이냐고. 송 작가가 통과 시킨 그 사람이지?"

피디는 심사관으로 참가했던 사내에게서, 송 작가가 밥을 사기로 했다는 이유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때 듣기로 백철우의 노래를 부른다고 했었다.

"어, 그냥 노래가 좋아서 통과시켰죠. 모르는 사람이에요."

말을 하면서도 송 작가의 귀는 무대 위의 남자를 향해 쫑긋거렸다. 분명 이 정도 실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 장난아닌데?"

이때가 기회다 싶었던 송작가는 배시시 웃으며 피디에게 말한다.

"저 잘했죠?"

"아이고 네, 송 작가님. 큰일 하셨습니다. 또 뭔 얘기를 하려고?"

"제가 뭘요. 아무튼 잘 됐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안 그래도 시청률 떨어지는데, 저 정도면 잠깐이지만 화젯거리 되겠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나저나 진짜 잘 부른다. 원 가수보다 쪼금 못하지만. 분위기하며....뭔가 참 많이 닮았네요."

"떨어뜨렸으면 큰일 날 뻔 했네."

"그쵸? 그런 의미에서."

"응?"

"저 음악에 관심 많은데."

"뭐?"

"지금 몰래 준비하는 거 있으시다면서요?"

"그럼 그렇지, 왜 아무 말 안하나 했다.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저 귀 밝아요."

피디는 눈이 초롱초롱해진 송 작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와중에 송 작가는 다른 생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저 모창가수 탐이 난다는 그런 생각.

그 사이.

대기실에서 쉬고 있던 그은 얼굴의 사내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저 사람 뭐야? 아 쪽팔려."

우수상을 받았네, 끼가 없으면 안 되네라고 주절거렸던 과거의 자신을 때려주고 싶었다.

잠시 후.

노래가 끝나자 전에 없이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고, 앙코르 외치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산하는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한 피디는 엠씨에게 앙코르를 받아들이라고 쪽지부터 보냈다.

"자, 박산하 씨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모창 실력이 대단하신데요? 그래서 한곡 더 불러주셨으면 좋겠는데, 관객 여러분 어떠십니까?"

"옳소! 한곡 더! 한곡 더!"

"흘러가는 강마다, 불러주세요!"

결국 산하는 떠밀리듯이 한곡을 더 불러야만 했다. 앙코르로 부른 두 번째 노래가 끝날 즈음에는 방청석에서 연신 12번을 연호하며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다음 참가자는 조금 기죽은 표정으로 자신의 장기와 노래를 펼쳐냈고, 시간은 흘러 수상자 발표시간이 다가왔다.

"다음은 대상, 참가번호 12번 박산하! 축하드립니다."

꽃가루가 허공에 흩날리며, 대단한 가창력으로 인기몰이를 한 산하가 대상을 차지했고, 동네노래자랑 녹화는 끝이났다.

주민들이 호응할 만한 흥과 끼가 있어야 한다는 프로그램의 원칙마저 깨져버린 순간이었다.

모두의 가슴에 신선함을 안겨주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산하는 노래자랑의 MC를 맡았던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걸 발견했다. 자신과는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제 갈길 가려던 찰나.

"박산하 씨!"

뒤를 돌아 본 산하는 설마 날 찾을 줄은 몰랐다는 듯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네, 아우 숨차."

"무슨 문제라도?"

"그 식당 어딘지 좀 알려주세요."

"네?"

"아, 다 알아들으셨으면서. 맛있어서 그래요. 사먹으러 가려고요."

"아... 그게."

얼굴 가죽이 두꺼운 산하라도, 한식 사업이라고 허풍을 쳤는데 포장마차라고 하기가 조금 꺼림칙했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에라 모르겠다고 생각한 산하가 가방에서 펜을 꺼내 메모지를 찢는다.

"잠시만요."

"네."

곧 메모지를 받아든 사내가 내용을 들여다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소 옆에 예상치 못한 글자가 적혀 있어서였다.

<......철호네 호프 옆 골목 포장마차>

"여기가..어? 어디갔어?"

쪽지만 건네주고 부리나케 도망친 산하는 눈앞을 가만히 살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제법 단단해졌습니다.]

'대체 뭔지를 모르겠네...'

***

녹화 방영 당일.

산하는 여태 연락 한번 없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만 갈뿐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 되기만 했다.

'안 받는다 이거지?'

그러면 다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던 산하가 톡을 날렸다.

[동식아, 나 아무래도....]

한참이나 조용하던 톡방에 단답형의 대답이 떠올랐다.

[뭐.]

[아냐, 미안하다.]

한참 조용하던 산하의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다.

'동식아, 넌 내 손바닥 안이야.'

씩 웃던 산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거기서 나가래?"

"아니."

"그럼?"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지?"

또 속았다고 생각하자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한 동식이 버럭 소리쳤다.

"미친,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진짜야. 나 오늘 티비에 나온다. 꼭 봐라."

"뭐?"

"동네노래자랑 참가했어."

"장난 치지마. 노래방 가자고 해도 빼던 놈이 무슨 동네노래자랑?"

"못 믿어도 꼭 봐라."

"안 봐."

통화가 툭 끊어졌고, 산하는 다시한번 씩 웃었다.

'네가 안 보고 배기냐?"

***

동식은 씩씩거리며 이를 갈다가 심호흡을 몇 번 하고나서 업무에 집중했다. 다음 변론기일에 어떤식으로 반론을 펼칠지에 대한 고민중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소파 옆의 티비가 신경쓰였다.

'내가 한 두번 속냐?'

그때, 동료 변호사가 들어오며 동식에게 말을 건다.

"하 변, 주말인데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나야 마누라 보기 싫어서 나왔지만."

"아니요. 그냥 조금 골치아픈 사건이라서요."

"하긴, 오늘 뭐해?"

"늘 똑같죠."

동료 변호사가 잔 꺾는 시늉을 한다.

"어때?"

"좋죠."

"알았어. 이따 보자고."

그러고도 한참이 지났다. 인터넷에서 방송시간을 확인하던 동식은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정신차려, 또 속을래?'

원수같은 친구놈을 욕하며 서류를 작성하던 동식은 집중이 되지 않았고, 결국 티비를 켜고 말았다. 이미 방송은 끝나가는 중이었다.

호들갑을 떨던 엠씨가 차례로 수상자를 발표한다.

그런데.

"다음은 대상, 백철우의 다시 떠나도를 부른, 참가번호 12번 박산하! 축하드립니다."

한 사내가 꽃다발을 목에 걸고 상패를 거머쥐고 있었다. 뭘 잘못봤나 싶어 눈만 끔뻑이던 동식이 중얼거렸다.

'저게 진짜 미쳤나...'

***

녹화 방송이 송출되고 난 후.

시청률은 동시간대 타 방송사 프로그램을 살짝 상회하며 10.2%를 기록했다. 송 작가와 한 피디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아자자!"

"송 작가, 됐어. 국장님 잔소리 지겨웠는데."

"그럼 아시죠?"

"알긴 뭘 알아. 이거 봤어?"

"뭘요?"

"사람들 반응 괜찮더라고."

한 피디는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여주었다.

<백철우 모창 끝장남, 지릴수도 있으니 주의 할 것.>

- 이 사람 매일 호들갑만 떨고, 메모 딱 돼 있어요. 다들 밥 주지 마세요.

- 맞아요. 누르면 지는 거.

- 눌렀는데, 오늘은 사실임. 기저귀 차러갑니다.

- 백철우가 누구임?

- 애들은 가라. 백철우를 모르냐? 나 스무살인데도 안다.

- 오 죽인다. 동네노래자랑 대회 클라스 맞음? 할매, 할배들 멍때리는거 봐.

산하의 노래솜씨는 몇몇 커뮤니티에서 작은 화제가 되었고, 한 피디가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하는 오늘도 어김없이 포장마차 주변과 길가를 쓸고 닦으며 장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바닥에 버려진 꽁초를 보며 맹철호처럼 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인간들이 말이야. 왜 길바닥에...."

"어쭈? 박산하. 너 왜 나 따라해?"

이미 다가오는 걸 눈치챘던 산하가 배꼽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주인어른. 쇤네가 마당을 열심히 쓸어놨습니다요."

맹철호는 산하의 장단에 맞춰 뒷짐을 지고 근엄하게 말했다.

"어흠, 돌쇠야. 여기가 아직 더럽구나. 곤장이라도 맞고 싶은게냐?"

"재미없네요. 청소하는데 방해되니까 저리가세요."

"뭐, 인마? 이게 어른을 가지고 놀아."

헤실헤실 웃기만 하는 산하를 보던 맹철호가 피식 웃어버렸다.

"하여간에 너도 나름 고집으로는 난놈이야. 포기를 모르는 놈. 그래도 이번에 빛을 보긴 보려나 보네."

"그쵸? 열번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니까요."

"그거 여기다 쓰는 거 맞냐?"

"대충 맞긴 하잖아요."

그때, 휴대폰 가게를 운영하는 배 사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박 사장, 박 사장! 나 다 봤어."

"네?"

"어디서 모른척이야? 대상 탔잖아. 대상. 나한테 참가한다고 말을 해야지. 응원도 가고 그러지."

멀뚱거리며 산하와 배 사장의 대화를 듣던 맹철호가 버럭 소리지른다.

"나도 좀 알자!"

"맹 사장 몰랐어?"

맹철호가 억울하게 소리쳤다.

"뭘? 대체 뭘? 내가 뭘 몰라?"

"박 사장 이번 동네노래자랑에서 1등 먹었잖아."

어딘가 화가난 맹철호가 산하를 향해 눈을 부라린다.

"뭐? 이게 무슨 소리야? 산하 너 말해 봐."

"별건 아니고요. 살림살이가 궁핍해서 상품권타러 다녀왔어요."

"뭐, 인마? 너 딱 기다려."

스마트폰을 꺼내 다시보기 결제로 방송을 휙휙 넘기며 살피던 맹철호가 화를 버럭낸다.

"야, 인마. 박산하!"

"저 고막나가요. 이제 장사해야 하니까 비켜주세요."

"너 왜 나한테 안 알려줘?"

"알려드렸으면, 현수막에 피켓에 도시락까지 싸들고 와서 저를 쪽팔림의 지옥으로 몰아넣으셨을 테니까요."

"뭐!? 나 그런 사람 아니다?"

"맞는데요?"

"아니라니까."

"저 2년전 요리대회 참가했을때, 아저씨 기억안나세요?"

어딘가 어색한 표정을 짓던 맹철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발뺌한다.

"어? 어.... 몰라 기억안나. 아무튼 너 섭섭하다. 두고 봐. 방 빼."

"못 빼요. 절 밟고 가세요."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배 사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신의 가게로 돌아갔다.

***

산하의 모창이 반짝 화제가 되었다가 시들해지던 어느 날.

"하, 고것 참..."

마당에 핀 노랗고 하얀 봄꽃을 바라보던 산하의 아버지는 입맛을 다셨다. 봄이라 그런지 입맛은 없는데 유독 생각나는 음식이 있었다.

얼마전 아들이 끓여 준 된장찌개였다.

'그거 한입만 먹었으면...'

중얼거리던 박상태는 자신의 볼을 찰싹 때렸다.

'내가 뭐라는 거야.'

그 모습을 보게 된 산하의 어머니 장순희가 고개를 갸웃한다.

"당신 왜 자해를 하고 그래요?"

"어? 어 아냐. 웬 모기가 있길래."

"모기? 세상에 모기가 아직 있어요?"

"그러게...이놈의 모기 어디 맛 좀 봐라."

박상태는 슬그머니 서랍장 위에 놓인 모기약을 꺼내 칙 하고 뿌렸다. 마누라가 사라지자 모기약 뿌리기를 그만 둔 박상태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어떻게 얻어먹지...?'

한참이나 생각하던 박상태가 손을 짝 하고 마주쳤다.

'그렇지.'

"여보!"

"왜요? 바빠요. 와서 빨래나 좀 널어봐요."

예전같으면 알아서 하라고 외쳤을 박상태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슬그머니 세탁실로 가서 마누라 옆에 찰싹 붙는다.

"이야, 오늘 빨래가 많네. 당신 몸 상하겠어."

장순희가 남편을 벌레보듯 본다.

"당신 왜 그래요? 뭐 잘 못 먹었어요?"

"뭐야?"

"아니 그렇잖아요. 뭐 좀 해달라고 하면, 알아서 해. 나도 바빠라고 하던 양반이."

장순희의 흉내에 박상태가 민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이 그럴수도 있지. 늘 똑같을수야 있나. 이리 줘."

잠시 후 부부가 함께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와중, 박상태가 지나가던 강아지 귀엽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그나저나 이 자식은 뭐 하나 몰라."

"누구요? 산하?"

"그 놈말고 내 골치 아프게 할 놈이 더 있어?"

"집에 손 벌리는것도 아닌데 너무 그러지 말아요. 다 같은 자식인데."

"누가 뭐래?"

"뭐라고 했잖아요."

"어허, 아니라니까. 그건 그렇고. 언제 한번 집에 오라고 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박상태를 바라보던 장순희가 혀를 찬다.

"언제는 집에 발도 들이지 말라더니."

"네 번이나 말아먹고 불쌍하잖아. 고기라도 먹여서 보내."

"정말이죠?"

"그래."

"딴말하기 없어요?"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알면서 그래."

괜히 빨래를 팡팡 펴 널면서 화풀이하던 박상태가 와이프 몰래 중얼거린다.

'다음이 문젠데...'

- 1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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