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독학으로 배웠어요(2)
어차피 얼굴도 숨겼겠다, 자신감이 넘쳐흐르던 산하는 가진 실력을 마음껏 뽑아냈다. 그에 발맞춰 채팅창의 대화가 점점 줄어들다가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 와, 고음부 안정적인거 봐.
-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숨겨?
- 이 정도면 현직 가수아님?
- 어디 예능 몰래카메라 인가?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던 산하가 노래 마지막 부분에서 약간 허스키하면서도 매력있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러자 여성으로 추정되는 네티즌의 글이 마구 쏟아졌다.
- 와! 멋지다. 매력쩔어.
- 오빠! 마스크 좀 벗어봐요.
- 구독 꾹 눌렀어요. 저 오늘부터 팬 할래요.
- 이 사람들이, 마운틴 고릴라 사실 추남임.
- 뭐라구요? 저리 꺼져요.
채팅방이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어갈 즈음 산하의 첫 노래가 끝났다.
"이거 참 어려운 노래네요. 물 좀 마시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음 이탈 하나 없었으면서, 쳇!
- 고릴라는 사기꾼이었다. 속보!
- 아 슬슬 구독취소 할랬는데, 마운틴R 미쳤네.
- 저도 독학하러 갑니다.
***
오랜시간 보컬트레이너로 일해 온 설치환은 친구에게서 대단한 음치가 출현했다고 전해들었다. 그래서 구경이나 할겸 인터넷 라이브 방송에 접속했었다.
그게 벌써 일주일 전.
그 당시만 해도 엄청난 음치의 노래를 듣자마자 도저히 고칠 수 없을것 같아 고개를 절레 절레 저을 지경이었는데, 이제 뭔가 달라진 BJ의 노래에 설치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오랜시간 일해왔기에 일부러 그러는건지 실력인지 나름 잘 안다고 자부하던 그였는데, 이제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귀가 괴로울 정도로 못 부르던 남자가 갑자기 평범하게 노래를 불러서였다.
이제 자신의 실력도 녹이 슬었나 생각할 무렵, 이 인간이 민세욱의 노래를 한다는 게 아닌가.
"와, 미쳤네."
안정적인 고음이 받쳐주지 않으면 불러봐야 욕먹기 십상인 노래를 부르겠단다. 특히 노래의 한 소절은 고음을 길게 뽑아내면서도 감정을 제대로 실어야 하기에, 트레이닝 받지 않은 일반인은 쉽게 따라부르기 힘든 노래였다.
호흡과 발성, 표현법을 전문적으로 배운 가수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부를 수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 들었던 노래실력은 진정한 평범함이었는데,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호기심이 생긴 설치환은 스피커 볼륨을 키웠다.
"나 홀로 쓸쓸히 떠난 여행, 모닥불 타오르던 그 밤...."
설치환은 도입부부터 어제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목소리에 매력적인 개성까지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정말 채팅방의 대화처럼 급속도로 진화해서 자신도 모르게 숨겨졌던 재능이 폭발한건지 감쪽같이 속인건지 알길이 없었던 설치환은 괜스레 죄 없는 키보드만 내리쳤다.
"대제 뭐하는 인간이야...?"
심지어 고음부에 이르자, 도대체가 더 이해할 수 없게 돼 버린 그는 자신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
멘트를 날리고 노래부르기를 반복하던 산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채팅창을 확인했다.
- 야, 생목 싸우자!
- 와 나처럼 못 부르길래 동지 만난 느낌이었는데, 이 사기꾼 새끼.
- 오빠! 최고.
- 쩐다. 님 일부러 그러는 거임?
- 와, 잘부르시네요.
반응을 대충 확인한 산하는 컴퓨터를 꺼 버리고 문단속을 한 후 집으로 향했다. 이제 한달이 다 되어가기에 슬슬 인터넷방송도 때려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을 끝내고 천천히 걸어가며 동네에 새로 생긴 상점은 없나 구경하던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야.'
인터넷 방송을 끝내고 나면 자정이 다 되어가기에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연락 올 사람이 없었던 산하는 동식을 떠올리며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박제똥>
남들과 다르게 불만을 담아 저장해놓은 형의 이름을 본 산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인간이 뭘 잘못먹었나 싶어서였다.
일년이 가도 전화 한통 없는 사람이 왜 전화를 했나 궁금해진 산하는 통화 부분을 터치했다.
"여보세요."
"어....나다."
"그건 알아."
"이 자식이 형....아니다. 저기 말이야."
박제동이 계속해서 뜸만 들이기에 답답해진 산하가 물었다.
"왜? 뭐?"
"네 형수님이..."
"형수?"
"임신중이잖냐."
"그래서?"
"지금 네 된장찌개가 먹고 싶으시단다."
"뭐?"
"혹시 괜찮으면 만들어 줄 수 있냐? 부탁한다."
평생 형에게서 부탁이라는 말은 커녕 구박만 받았던 산하는 이런게 천지개벽이구나 싶었다.
"다시 말해봐, 형 뭐라고 했어?"
"....다 들었잖아. 아무튼 되겠냐?"
"뭐, 어렵지는 않지."
"그래? 그럼 조리에 걸리는 시간만 말해주면 가지러 갈게."
"아냐 그냥 택시타고 가서 끓여줄게. 형수님이 드시고 싶다는데, 끓여드려야지."
"그, 그럴래? 고맙다. 재료는 뭐 필요해? 사다놓을게."
"됐어. 가는 길에 가져갈게."
잠시 후 가게와 자취방에 들러 된장과 조금 남은 재료를 가져온 산하가 택시를 잡아탔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잠깐만에 도착한 대단지 아파트 근처에서 내려 전화를 걸었다.
"어, 형 나야."
"잠시만."
짧은 전화 통화를 끝낸 산하는 보안문을 통과하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이내 낯설게 느껴지는 현관문 앞에 선 그가 초인종을 눌렀다.
슬그머니 열리는 문 사이로 산하의 형 박제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왔냐? 밤중에 미안하다."
"됐어. 형수님은?"
"힘들어서 누워 있어."
"왜?"
"입덧이 심해져서 통 아무것도 못 먹거든."
"아직도 해?"
"그래, 요새 밤새 구역질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더라."
형 박제동의 얼굴을 관찰한 산하는 그가 전과 달리 유난히 수척해 져 있음을 확인했다.
"알았어. 드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만들게."
"그래, 고맙다. 내가 뭐 도와줄일은?"
"됐어."
"이리 줘."
산하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받아 든 박제동이 조금 민망한 기색으로 돌아섰다. 그가 동생에게 부탁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당황스러움도 함께였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현직 식당 사장답게 재빠르고 능숙한 솜씨로 된장찌개를 만들어 낸 산하가 식탁 위에 냄비를 올리자, 박제동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 여보? 일어나 봐. 된장찌개 먹고싶다며?"
"귀찮아요. 생각 없어졌어요. 막 잠들었던 참인데..."
"그래도 먹어야지. 저녁도 굶었잖아."
"아이 참...."
귀찮은 기색으로 일어나 거실로 나온 박제동의 와이프는 산하를 발견했다.
"도련님? 도련님이 이시간에 여길 어떻게?"
"당신이 먹고 싶다길래, 연락 했어."
남편과 도련님의 사이를 알고 있던 박제동의 와이프는 믿을 수가 없었다. 데면데면하면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날이 서 있던 두 사람이기에, 어디가서 인스턴트 된장찌개나 사왔겠거니 했는데.
"여보? 못 먹겠어?"
그러고보니 된장찌개 냄새를 맡았는데도 구역질이 안난다며 신기해하던 산하의 형수는 얼른 식탁에 앉아 된장찌개를 바라보았다.
밥도 갓 지어내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련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니에요. 잘 드셔야 할텐데. 전보다 많이 마르셨네요."
"남들도 임신하면 다 그러는데요. 괜찮아요."
미안해진 박제동의 와이프가 산하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후 된장찌개 국물을 떠 먹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와! 도련님. 매번 무슨 마법을 부리시는거예요?"
"네?"
"너무 맛있어요. 전보다 더요."
입덧으로 고생하던 와이프가 아무런 거부감없이 된장찌개를 떠 먹자 박제동이 화색을 띠며 다급히 말했다.
"여보, 괜찮을때 얼른 먹어둬."
"알았어요. 진짜 맛있다. 이거 정말 먹고싶었는데."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산하의 형수는 무려 밥을 세 공기나 먹고 배를 쓰다듬었다.
"아, 배부르다. 도련님, 진짜 감사해요. 아참 시간이... 죄송해서 어떡하죠?"
"괜찮습니다. 맛있게 드셔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언제든 말만 하세요. 제가 못오면 퀵으로 배달이라도 해드릴게요."
"그게...."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다 한가족 이잖아요. 그럼 저 이만 가볼게요. 쉬세요. 나오지 마세요."
끝내 미안해하는 형수를 뒤로한 채 현관문을 나서는 산하의 옷깃을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산하야."
"어?"
"여기 차비."
차비라기엔 제법 두툼한 봉투를 보게 된 산하가 씩 웃었다.
"됐어. 가볼게."
멀어져가는 동생을 멍하니 바라보던 박제동이 내밀었던 봉투를 슬그머니 내리며 중얼거렸다.
'고맙다 산하야...'
***
이제 제법 친해진 윤새봄이 산하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얼굴이 왜 그래요? 밤새셨어요?"
"봄봄봄."
"또 그렇게 부르신다."
"부르기 좋잖아. 봄봄봄 봄이 왔어요. 그러면 출근한거고."
"......뭐래요."
"아무튼 밤샌것까진 아니고, 조금 뒤척여서 그래. 이제 일은 할만하지?"
"네, 재밌어요."
[7분전, 윤새봄은 선물을 어떻게 돌려주나 고민했다.]
과거를 살펴본 산하가 장난스럽게 묻는다.
"선물 받는 재미?"
"그건 그냥 손님이 던져두고 가신거에요. 다음에 오시면 돌려드리려고요."
윤새봄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아 이제 선물주는 손님까지 생겨났다. 그녀의 인기와 산하의 요리가 합쳐진 효과는 정말 엄청났다.
그 때문에 손님이 더 많아졌고 알바나 직원을 추가로 구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새봄아."
"네?"
"너 정식으로 취직할래?"
"여기요?"
"그래."
"글쎄요."
"뭐야, 거절?"
"사장님 하는 거 봐서요."
"이게 이젠 날 놀려? 일 시켜달라고 따라다닐때는 언제고."
혀를 쏙 내밀며 웃기만 하는 윤새봄에게 산하가 물었다.
"그나저나 피곤하지? 사람 더 뽑아야겠다."
"아니요, 조금 더 해보고 뽑으세요. 아직은 혼자 할만해요."
"그래?"
"네, 일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그래, 그럼. 조금 더 해보고 뽑자. 어차피 재료 떨어지면 마감하니까. 나 뭐 좀 보고 있을테니까. 오픈전까지 쉬어."
"또 그거 보시게요?"
윤새봄이 가리킨 손 끝에는 보컬트레이닝과 관련된 책자가 놓여 있었다.
"응."
"어디 노래 대회라도 나가시게요? 제가 귀가 좀 민감한데 한번 불러보세요."
"뭐?"
"듣고 어떤지 평가해 드릴게요."
"됐거든? 봄봄봄 가서 졸기라도 해."
"뭘 졸아요. 한번 불러보세요. 들어 드린다니까요."
"됐다고. 저리가."
"치!"
샐쭉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윤새봄을 슬쩍 바라본 산하가 책자를 집어들고 펼쳤다. 신비한 능력에만 기댈게 아니라 머리로도 자세히 알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그 능력의 영향을 받는건지, 내용이 머리에 속속 들어와 박혔고 이해가 빨랐다.
신이 난 산하는 책자를 더욱 빨리 넘기며 몰두했고, 이걸 지켜본 윤새봄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읽긴 하는거야?'
***
[일정한 방송분량을 채웠습니다. 이제 현직 스타가수에 가깝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수치를 재산정합니다.]
[현직 스타가수를 뛰어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본인 노력의 결과로 인해, 미션으로 완성한 목소리의 87%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자체적인 인터넷방송 종료로부터 며칠을 남겨 둔 산하가 메시지를 훑어본 후 멘트를 날렸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부를 노래는 여러분의 마음을 치유해드리기 위해 백철우님의 기운내라 그대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 와 이 인간 봐라. 이제 금지곡까지 건드리네. 그 정도 실력으로는 무리임.
- 최근에 제대로 부르는 사람 딱 한명밖에 못봤다. 제육볶음이라고.
- 제육볶음이 누구야?
- 아직 그 정도 실력으로 부르기는 넘사벽 노래 아닌가?
- 이 인간 또 진화하는 거 아니지? 설마.
- 사람의 탈을 쓴 고릴라여. 지금 뭐라는 거야?
이제 산하를 조롱하거나 폄하한다기 보다는 설마설마 하는 기색의 네티즌이 설전을 이어갔다. 그 채팅방은 쳐다도 안보던 산하가 눈을 감은 채 마음을 가다듬고 첫 음절을 내뱉었다.
- 2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