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다큐멘터리 효과(8)
"듀엣이요?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민채은은 산하가 무어라 말을 더 내뱉기도 전에 조건부터 쏟아냈다.
"바쁘다고 하셨죠? 다른건 신경 안 쓰시게 해드릴테니까 녹음만 해주세요."
"네?"
"원하시는 날에 최소한의 시간만 뺏을게요. 기자에게도 안 새나가게 하고, 무대도 안 서셔도 되고, 물론 계약이나 저작권도 투명하게."
노래부르기 전만 해도 조금은 건조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던 민채은의 태도는 180도 달라져있었다.
이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울 법도 하건만, 산하는 집안일부터 시작해 개인적인 일까지 무수히 많은 사건을 겪으며 성장해왔다.
그러다보니 풍랑에도 큰 흔들림없는 대형 선박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민채은에게 답변한다.
"녹음만이면 괜찮겠네요. 사실 거절해야하나 고민중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뭐 하자는 사람이 많아서."
피처링도 함께 요구하라는 눈짓을 보내던 민채은의 매니저가 찔끔하며 먼산을 바라봤고, 자신의 매니저를 슬쩍 째려보던 그녀가 산하에게 환히 웃어보인다.
"그럼 수락 하시는거죠?"
"네."
"고맙습니다."
"뭘요, 저한테도 좋은 일인데요."
[누군가에게 특별한 도움을 주자, 첫번째 미션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당황한 산하가 눈앞을 자세히 살폈고, 뭔가 이상한 그의 태도에 민채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
허름하지만 이 동네에서는 맛집으로 점점 유명해지고 있는 산하네 요리 전문점 내부.
윤새봄은 오전부터 떡국을 끓이는 산하에게 물었다.
"그거 이제 메뉴에 올리시게요?"
"아니, 아직."
"연습이에요?"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답변이 왜 이렇게 순두부같아요?"
"순두부?"
"흐물흐물 하다구요."
"봄봄봄, 넌 표현도 참 재밌게 한다."
"제가 원래 한 재미해요."
"너도 봉만두 닮아가냐? 하여간에 그놈은 전염력이 강해."
"아니거든요? 그럼 그거 왜 끓이시는데요?"
"일단은 연습이라고만 해둘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야채를 다듬으러 가버리는 윤새봄,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산하는 떡국을 그릇에 담아내고 한번 맛을 봤다.
확실히 비빔국수보다도 인기가 조금 떨어지리라고 생각될 만큼 담백한 맛이었다. 팔아봐야 다른 부메뉴에 비해 주목 받기에는 부족하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열심히 끓이는 이유가 있었다.
메시지에서 말하기를, 미션을 완료하면 떡국 요리가 한층 강화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떡국의 맛을 자체적으로 어느정도 끌어올려놓으면, 그 위 단계로 강화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연습의 원동력이었다.
"봄봄봄, 떡국 먹을래?"
야채를 다듬던 윤새봄이 얼굴을 들며 베시시 웃는다.
"제 것도 있어요?"
"그럼, 너 주려고 끓인건데."
감동한 표정의 새봄.
"진짜요?"
"아니."
다람쥐처럼 볼을 부풀리는 윤새봄을 보며, 산하는 크게 웃었다.
"웃지 마세요. 마음 상했어요."
"그래서 안 먹을거야?"
"먹긴 먹어야죠. 먹는 게 남는거니까."
"옛다."
"잘 먹겠습니다."
***
민채은과 정식 계약을 완료하기 전, 산하는 오전부터 하동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동식아."
"왜? 오늘은 좀 한가하냐?"
"아니 그건 아니고, 너 뭐해?"
산하의 태도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동식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왜? 또 뭐? 너 무슨 사고쳤어?"
"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그래? 나 계약서 써야하는데, 좀 봐줘라. 내가 보기엔 문제 없어보이는데, 그래도 확실히 해야하니까."
"그럼 그렇지. 무슨 계약서? 너 뭐 이상한데 가입하려는 거 아니지?"
"어허, 이 자식이 날 뭐로 보고."
"뭐로 보긴, 고집불통으로 보지. 어딘데?"
"나? 네 사무실 근처."
"야, 인마. 내가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고 대뜸 찾아오기부터 해?"
"난 감이 왔어. 동식이 너는 사무실에 있겠지."
"점쟁이 같은 소리 하고있네."
"사실은 조금전에 네 톡에 올라온 프로필 사진 보고 알았다. 역시 동식이는 바보야."
"이게 진짜. 잔머리는 잘 굴러가. 그래서 정확히 어디?"
"1층 카페."
"알았어."
금세 달려내려온 하동식은 유리벽 너머로 친구 얼굴이 얼핏 보이자, 전혀 안 뛰어온 척 숨을 고른 후 카페안으로 들어섰다.
"동식아, 여기."
"음료는?"
"주문해놨지. 우리 동식이는 두유에 투샷으로."
"잘도 기억하네. 그래서 무슨 계약?"
"어? 잠시만 커피 나왔다."
곧장 음료를 가져온 산하가 친구에게 한 잔을 건넨다.
"자식이 궁금하게, 대체 뭔데?"
산하는 가져온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자마자 테이블 위에 탕 하고 내려놓았다. 엉겁결에 봉투를 집어든 동식이 불안한 마음으로 서류를 꺼내 살펴보았다.
"이게...뭐, 민채은? 이거 뭐야?"
부엉이처럼 커져버린 친구의 눈을 바라보던 산하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뭐긴 계약서지. 대상은 1인 기획사. 독소조항 없는지 잘 봐봐. 나 노예는 싫거든."
"이 미친, 여기 적힌 민채은이 내가 아는 그 민채은이야? 네가 민채은을 어떻게 알아?"
"어쩌다보니. 나한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지 뭐냐."
"그런 멍멍이 소리를 내가 믿을 것 같아?"
"어허, 동식아. 멍멍이라니. 변호사라는 놈이."
"변호사고 뭐고, 너 대체 뭐 하고 다니는거야? 식당은 때려쳤어?"
"이 자식이 재수없게, 잘 되는 식당을 왜 때려쳐. 그냥 훗날을 위한 부업이지."
"부업은 개뿔, 진짜 어떻게 된건데?"
궁금해하는 친구에게 산하는 뺄건 빼고 요약해서 알려줬다.
"와, 그게 말이 되냐? 네 모창이 그 정도야? 동네노래자랑 정도 실력으로는...."
"자식, 친구나 돼서 이 형님 실력도 몰라보네."
"하여간에 허풍은, 알았어. 일단 보고 말하자."
한참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펴보던 동식은, 이 분야를 잘 아는 동료에게 전화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더니 전화를 끊고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야, 이거 너한테 유리하거나 아주 공정하게 돼 있는데? 수익 분배도 그렇고. 이런 스타가수가 왜 너한테 이런 조건을 걸어? 뭐가 아쉬워서?"
"그래? 역시 민채은이네. 이리 줘."
"뭐? 벌써 가게?"
"가야지. 이 몸이 요즘 바쁘시다. 동식아 된장찌개 먹으러 와라. 너는 특별히 줄 안 서도 된다."
"안 먹어 인마."
"너 안 먹는다고 했다?"
산하의 으름장에 찔끔한 동식이 먼산을 바라보며 말한다.
"잘 못 들었겠지."
***
박산하라는 남자가 계약을 끝내고 사라진 빈자리를 바라보던 민채은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서윤!'
누구에게나 애타는 사연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듯, 민채은에게도 사연이 하나 있었다.
바로 동료가수와의 적대관계.
그녀가 지서윤과 척을 지게 된건 데뷔하고 일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 당시만해도 민채은의 인기는 급격히 치솟았고, 지서윤이라는 가수의 인기는 흐릿하기만 했다.
지서윤은 민채은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늘 비교받는 것에 매우 화가 나 있었다. 그 감정은 영 이상한 방향으로 표출되었다.
분장실에 나타난 지서윤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더니, 민채은에게 반가운 척 인사했다.
"반가워요? 민채은 씨?"
"네, 저도 반가워요."
"아침 프로그램 보니까 외할머니하고 둘이서 살았다면서요?"
왠지 공격적으로 보이는 지서윤을 보며 민채은은 당황했다. 이 여자 뭐 하자는 거지?
"갑자기 그건 왜?"
"민채은 씨, 신파극 찍고 인기 오르니까 좋아요?"
"그게 무슨 뜻이죠?"
지서윤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와 딱 민채은에게만 들릴만큼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촌뜨기가 분수를 알고 나대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재수 없게. 착한 척은."
순진하기만 했던 민채은은 당황해서 어버버거렸다.
"그게 무슨?"
"그것도 못 알아들어? 내 앞 막지 말라고."
이 당시만해도 민채은은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곡을 받아서 부르는 가수였다.
하지만 어느날부터인가 유명 작곡가 중에서는 곡을 주려는 사람이 없어졌고, 받더라도 좋은 노래는 없었다.
그 이면에 지서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은 있었지만,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몸 담았던 작은 기획사는 힘도 없었다.
결국 민채은은 자신이 원하는 곡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또 의외로 소질이 있어 두 번째 앨범으로 히트를 쳤다.
그 후 부터였다. 두 사람의 감정골이 깊어지고.
지서윤과 민채은의 음원차트 맞대결이 시작된것은.
'너한테는 안 져. 아니 못 져.'
오래전, 자신을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외할머니까지 욕보였던 그녀에겐 죽어도 지기 싫었다.
하지만 벌써 연속으로 다섯번째 지고있는 상황.
민채은은 눈에 힘을 주며 소파 팔걸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번엔 할 수 있어.'
이제는 스타가수가 되다보니 곡을 주려는 작곡가도 많아졌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반드시 자신이 작곡한 곡으로, 남의 곡을 받아서 부르는 지서윤을 이기고 싶어서였다.
***
윤새봄과 함께 시장을 다녀온 산하는 택시에서 하차 후, 트렁크에서 짐을 내렸다.
함께 짐을 내리던 새봄이 조용히 속삭인다.
"벌써 줄이에요."
"그러게, 잠깐만 저게 누구야?"
"네? 어? 황 피디님이다."
택시가 떠나가자, 다른 손님과 섞여 줄 서 있던 황수호 피디가 두 손을 마구 흔들었다.
"여어, 저 왔습니다."
"거기서 뭐하세요?"
"뭐하긴요. 식당에 밥 먹으러 왔죠."
"진짜요?"
"그럼요. 제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아이고 배고파. 언제 문을 여나."
마치 통곡하는 듯한 황 피디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말투에 함께 줄 서 있던 손님들이 큭큭대며 호응했다.
"우리도 배고파요. 사장님. 반차내고 왔다고요. 사람 살려."
"으윽, 나의 배고픔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오늘 오전부터 문을 열어보심이 어떠십니까? 장군."
손님들의 유치한 대사에 손발이 오그라들었던 산하도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를 따르라!"
손님 중 한명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진짜요?"
"아시면서."
".....사장님 실망입니다."
제법 친해진 단골손님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한 산하가 손수레를 끌고 가게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쪼르르 따라 들어온 윤새봄이 조용히 말한다.
"황 피디님은 또 사장님 꼬시려고 그러는 거 같죠?"
"뭘 꼬셔."
"저번에 떡국먹으면서 들었는데, 새로 기획한 거 있대요."
"그래서?"
"사장님 노리는 거 같아요."
"내가 무슨 사냥감이냐?"
"사냥감 맞는 거 같은데요? 저기 눈빛 보세요. 황 피디님 무서워."
가게 밖 황수호 피디는 싱긍벙글 넉살 좋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마주 흔들어주던 산하가 말을 이어간다.
"찰거머리가 따로 없다니까. 종갓집 소개해주셔서 모른척 할수도 없고."
"그러게요. 그나저나 우리 휴가는요?"
"보시다시피 손님이 여전하네요?"
"그럼 못 가요?"
"아니, 가긴 가야지. 우리가 일하는 기계도 아니고, 남들 쉴때 잠시 쉬어야 힘내서 또 일하지."
"그거 참 맞는 말씀이시네요. 언제 가는데요?"
"다음 주?"
"아자! 휴가다."
***
비슷한 시각.
대표실에 앉아있던 곽기훈은 답답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창가 화분에 물을 주었다. 실내공기 정화를 위해 들여놓은 스파트필름 잎사귀 너머로 오가는 차량이 보인다.
그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던 그가 애타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마운틴R 채널의 주인을 아직도 찾지 못했기에, 곽기훈은 오늘도 찾을 방법을 궁리중이었다.
그때였다.
대표실 입구에서 다급한 노크소리가 울려퍼졌고, 곽기훈이 들어오라고 하자 이 팀장이 구르듯 뛰쳐들어왔다.
"대표님, 좋은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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