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만 먹어요(2)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본 산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아주 예전 요리한다며 설치고 다닐때, 요리학원에서 알게된 허세준이라는 동갑내기였다.
"어? 너?"
"맞네. 박산하. 한동안 요리대회 안 보이더니?"
"이야 너 오랜만이다? 번호 바꿨냐?"
"그래."
"자식이 섭섭하게, 번호 변경하면 연락을 줘야지."
"전화 안 받은 사람이 누군데?"
"그래? 내가 못봤나. 아무튼 반갑다. 어떻게 사냐?"
"어떻게 살긴 식당 때려치우고, 이번에 호텔요리사로 들어갈까 한다."
"오, 허세갑, 호텔요리사를 하신다?"
"허세갑은 너지 인마. 식당은 어떻게 됐어?"
"그냥 한 네 번밖에 안 말아먹었어."
"뭐!? 네번이나?"
"뭘 그렇게 놀래? 다섯번째는 잘 되고 있으니까 걱정마라."
"아 자식이 놀랐잖아. 어, 저 아저씨가 째려본다. 이따가 보자?"
"그래."
허세준이 조용히 사라지자, 보조로 함께 참가한 봉만두가 산하에게 찰싹 달라붙어 속삭인다.
"형님, 저 사람 누군데요?"
"아, 나 요리학원 다닐때 동갑내기 친구. 별명이 허세갑이야."
"웬 허세갑?"
"이 자식이 이름따라간다고, 매일 허세부려서 그렇게 불렀어. 요샌 허세 좀 안 부리나 몰라."
"성격은 좋아보이는데요?"
"성격이야 좋지. 아무튼 오랜만에 보니 반........"
말을 이어가려던 산하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회자가 이쪽을 노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였다.
그때, 단상에서는 윤주상의 지루한 말이 끝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참가하신 모든 여러분들, 적극적으로 임해주시기를 당부드리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산하를 노려보는 게 아니라 졸음을 참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사회자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마이크에 대고 말한다.
"윤주상 대표님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요리대결에 들어가기 앞서 규칙 한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첫날이라 창작요리를 만들어야 하는건 다들 아실텐데요. 우리 콩만 들어가면 다 됩니다. 아시겠죠? 자 그럼 각자 배정받은 테이블로 돌아가 시작 신호를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참, 화학조미료 안 되는거 다들 아시죠? 적발시 퇴장입니다. 그리고 다 완성하신분은 종 흔드는 거 잊지마세요."
여기 진행방식이 특이하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코를 벌름거리는 봉만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윽!"
"얼른 가자."
봉만두와 함께 지정된 테이블 113번을 찾아온 산하는 준비한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형님 실력이면, 본선진출이야 식은죽 먹기겠죠?"
"내가 어떻게 아냐? 심사위원 맘이지."
"에이, 형님 자부심을 가지세요. 발효콩을 섞은 스파게티,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기본 맛이 훌륭하잖습니까?"
뭐라고 대꾸해주려던 산하는 눈을 크게 떴다.
[돌발미션 - 30분 내에 심사를 받아라.]
[보상 - 손지유의 토마토 스파게티 솜씨를 90% 구현할 수 있습니다.]
처음 과거에서 재능을 가져올때 정확한 수치가 안 나와서 모르겠지만, 80%근처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추측 중이었는데, 단번에 90%라니.
메시지를 보자마자 손을 다급히 움직이는 산하의 모습에 봉만두는 당황했다. 말도 없이 준비한 재료를 미친듯이 개봉하는게 아닌가.
"형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제한 시간 많이 남았어요."
"나는 시간이 없어. 이해 할 생각말고, 얼른 만들어서 심사위원 불러야 해."
"???"
봉만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시키는대로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스파게티를 워낙 자주 만들다보니, 두 사람의 손은 척척 잘도 맞았다. 심사위원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연재료만을 쓰는지 확인하던 그때.
산하는 스파게티 면발 위에 소스를 붓고, 미리 준비한 발효콩을 부은 다음 섞었다.
"만두야."
"네, 형."
제법 큰 비스킷에 발효콩 스파게티를 조금씩 얹어내는 만두의 손길이 분주한 가운데, 뒤이어 치즈가루와 콩가루를 솔솔 뿌려낸 산하는 시간을 확인했다.
[2분 남았습니다.]
얼른 테이블 한편에 놓여있는 작은 종을 든 산하가 마구 흔들었다. 그러자 심사위원 한명이 놀란 표정으로 다가오며 묻는다.
"벌써 다 하셨어요? 시간 많이 남았는데."
"네, 심사부탁드립니다."
"확실하신거죠?"
"네."
이런식으로 대충 빨리 할거면 대체 여긴 왜 참가했나 싶었던 심사위원은 일단 동료들을 불렀다.
곧 여러명의 심사위원이 113번 팀으로 모여들었는데, 테이블 구석위에 놓인 팻말에는 요리 제목이 적혀있었다.
"여기 뿌린건 뭐죠?"
"볶은 콩가루랑 치즈입니다."
이것저것 간단하게 물어보던 심사위원은 각자 맛을 봤다.
"음, 이거 괜찮은데요? 비스킷 발효콩 스파게티라..."
"생각보다 좋네요? 조화도 있고."
"나쁘지 않아요."
자신들끼리 수군대던 심사위원이 각자 들고온 서류에 점수를 매겼고, 뒤이은 일반심사위원의 평도 나쁘지 않았다.
[손지유의 토마토 스파게티 솜씨를 90% 구현할 수 있습니다.]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봉만두는 궁금증을 토해냈다.
"형, 대체 왜 그렇게 서둘렀어요? 더 맛나게 할 수 있었는데."
"화장실이 급해서."
"네!? 그럼 왜 이러고 계세요. 제가 치울게요. 얼른 다녀오세요."
"그럴래? 땡큐!"
산하는 급히 화장실 가는 척 하면서 눈앞의 메시지에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원래도 스파게티는 맛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미션으로 이제 더 맛있게 만들 수 있게 되다니.
아직 대회는 안 끝났지만, 벌써 대상이라도 탄 기분이었다.
한참 후, 본선 진출자 100명이 가려졌다. 산하도 그 백명의 대열에 끼었고, 봉만두는 볼록한 배를 탕탕 두들기며 산하를 응원했다.
"형님 북소리 들리십니까? 이게 바로 진군가..."
"닥쳐."
그때, 차량을 향해 짐을 옮기던 산하에게 허세준이 다가온다.
"여어, 축하한다. 통과할 줄 알았어."
"그래 고맙다. 너도 축하해."
"그래, 나도 고맙다. 언제 술한잔 해야지?"
"그래야지. 전화 번호 뭐냐?"
"잠깐만."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내일 보자."
"오케이."
***
맑던 하늘에 구름이 조금씩 몰려오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시간이면 새봄이 산하의 식당에서 하하호호 웃으며 일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부터 며칠간은 그가 요리대회에 참가해 식당문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집을 나와 정처없이 방황하는 중이었다.
새봄은 노란 우산을 쓴 채 공원 벤치에 비닐을 깔고 앉아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걸 바라보았다.
그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별로 없었다.
친구라고 만나봐야, 돈, 남자, 차 이야기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온통 관심없는 얘기.
그나마 요즘은 식당 사장님 덕분에 마음 둘곳이 생겼는데, 오늘도 내일도 쉬는 날.
'괜히 말했나.'
그녀는 바닥에 톡톡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고, 촉촉하게 젖은 나무 이파리를 발견했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어린아이처럼 바라보던 새봄은 그곳으로 다가가 이파리 하나를 뜯어내며 중얼거렸다.
"한다. 안 한다. 한다. 안 한다. 한다..... 안 한....다."
마지막 이파리가 안 한다를 알려주자 새봄은 울상이 되었다. 산하에게 한번 연락해 보려던 그녀는 마음을 접고 다시 벤치로 가 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을까. 지나던 사람이 그녀의 미모에 깜짝놀라 한눈을 팔고 있던 때였다.
전화가 걸려오자 휴대폰을 꺼내 누구인지를 확인한 새봄은,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아버지였다.
그런데 또 전화가 걸려오는게 아닌가.
그냥 꺼버릴까 싶어 전화를 꺼내 본 새봄은 눈을 토끼처럼 떴다. 사장님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그녀는 노란 우산이 바닥으로 뒹구는 것도 상관않고, 얼른 전화부터 받았다.
"여보세요?"
"봄봄봄."
왠지 다정하게 들리는 애칭에 새봄은 생긋 웃었다.
"왜요?"
"실험상대가 필요하다."
"네?"
"스파게티 먹고갈래?"
"진짜요? 어디서요?"
"어디긴 식당이지. 시간없으면 말고."
"시간은 없지만, 정 원하신다면 가드리죠."
"오, 윤새봄 이제 막 나가는데? 원하신다면?"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온 새봄은 조금 까칠한 척 대답했다.
"자꾸 그러시면 안 가요?"
"아닙니다. 새봄님. 얼른 오세요."
"그런데 대회 결과는요?"
"당연히 본선 진출이지. 그럼 이따보자."
"네, 축하드려요. 금방갈게요."
"금방 오지말고, 조심해서 와."
"네!"
벤치에서 폴짝 뛰듯이 일어선 새봄은 얼른 버려져있던 우산을 주워들고 활짝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얼른 대로변으로 빠르게 뛰어간 새봄은 손을 흔들었다.
"택시!"
한참 후.
새봄이 가게안으로 들어서자 산하가 손을 두어번 휙휙 흔들었다.
"봄봄봄, 왔네."
"만두 오빠는요?"
"걔는 오늘 할일 있다고 먼저 가더라. 너 바쁜데 부른 거 아니지?"
"네, 아니에요. 그런데 웬 스파게티요?"
"내가 계룡산에 들어가 수련을 좀 더 하고 왔다는 거 아니냐."
"뻥쟁이."
"의심 하지마. 다쳐. 잠깐만 기다려."
잠시 후, 하얗고 이쁜 접시에 토마토 스파게티를 담아낸 산하가, 새봄이 앉아 기다리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먹어 봐. 얼마나 맛이 괜찮아 졌는지 평가할 것!"
"좋아요. 제가 신랄하게 평가해드릴게요."
새봄은 스파게티를 돌돌말며 생각했다. 조리법에 무슨 변화라도 줬나.
입안에 그 스파게티를 집어넣은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급히 씹어삼킨 새봄이 묻는다.
"사장님, 여기 뭐 넣으셨어요?"
"왜?"
"전보다 엄청 맛있어졌어요. 진짜 맛있다. 우리 스파게티집만 해도 장사 잘 되겠어요."
"우리?"
"사장님과 알바생을 합해 우리, 뭐 그 정도?"
"좋다 말았네."
"네?"
"여기 정식직원 한다는 느낌이었는데. 아, 봄봄봄 치사하네. 자꾸 튕기는 건가."
"뭐, 열렬히 원하시면 생각 좀 더 해보고요."
"얼른 먹기나 해. 너는 내가 반드시 스카웃한다."
"왜요?"
"그냥, 이것도 인연인데, 오래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아서."
겉으로는 아닌 척 했지만, 새봄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날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눈앞의 맛있는 스파게티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맛있어...정말.'
한참 후, 재미나게 담소를 나누던 새봄은 떠나가고, 가게 문단속을 하던 산하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소환하라 추억의 가수를 담당하는 한정규 피디였다.
"네, 한 피디님. 오랜만입니다."
"1위 축하드립니다. 이거 너무 늦었나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다름이아니라 혹시 시간 조금 나시면, 언제고 좋습니다. 1위 기념으로 민채은씨랑 같이 게스트 한번만 해주십사 해서..."
"그게, 시간이 될지 모르겠는데, 웬만하면 참가할게요."
"이야, 긍정적인 답변 감사합니다! 전 거절당하는 줄 알았어요."
"뭘요. 홍보 많이 해주셨잖아요. 그러니 가야죠."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아우, 무서워라."
농담을 주고 받던 산하는 이내 전화를 끊고 희미하게 웃었다. 날이 갈수록 자신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
다음 날이 밝아왔다.
오늘 대회는 지정요리였는데, 종목은 순두부찌개였다. 기본재료는 주어지고, 첨가할 재료는 각자 준비물로 가져와야했다.
산하가 오늘도 미션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그때, 봉만두가 그에게 말을 건다.
"그러고보니, 이거 형님 세 번째 망한 식당에서 파시던거죠?"
"시꺼 인마. 망한얘기 그만해."
"지금은 성공하셔서 얘기하는 거죠. 크, 대박 신화 박산하!"
"신화는 무슨, 오늘은 딱 스무명 뽑는 거 알지? 보조 잘 부탁한다?"
"네, 형님 제가 또 척이면 착 아닙니까?"
그때 대회를 시작한다는 사회자의 발표가 있었다.
[돌발미션 - 심사위원이 매워서 혀를 내두르게 만들자]
[보상 - 과거에서 얻은 요리 중 하나에 특별한 효과를 랜덤으로 첨가한다.]
산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탈락이고 자시고 요리대회는 자주 열리니, 당장은 미션이 중요했다.
한치의 고민도 없이 미션수행을 결정한 산하는 검지 손가락으로 재료가 담긴 박스를 가리켰다.
"만두야, 거기 청양고추 다 줘."
봉만두는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부엉이처럼 뜨고 되물었다.
"네!?"
"다 주라고."
"여기 이걸 다요?"
"그래. 캡사이신 구할데없나. 하바네로나 쥐똥고추도 좋은데."
"형님 대체 왜 그러세요? 어제는 배 아파서 그러시더니..."
"그런게 있어 인마. 가만 있어 봐."
청양고추를 쪼개서 살짝 맛을 본 산하가 기분좋게 웃었다.
"오 좋아. 이번 청양 많이 맵네. 넉넉하게 가져오길 잘 했지 뭐냐."
"형님 뭐 하시게요?"
"기다려봐. 화끈하게 만들어보자."
"네?"
그 후 산하는 순두부찌개에 소량 집어넣으려던 청양고추를 마구 때려넣고 눈물이 쏙 나올만큼 맵게 만들기 시작했다.
옆에서 요리를 보조하던 봉만두가 맛을 보더니 콜록대며 생수를 들이켰다.
"아우, 형 맛있긴 맛있는데, 너무 매워요."
"오늘 요리 콘셉이니까 걱정마라."
"이러다 떨어져요. 다시 만들면 안 돼요?"
"안 돼!"
단호하게 말한 산하는 곧바로 종을 들고 흔들었다.
곧 다가온 심사위원 중 남성 한명이 처음으로 맛을 봤는데,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콜록거리며 기침을 계속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것이, 산하를 원망하는 눈빛이다.
"아우 매워. 물!"
그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사이, 뒤이어 맛을 본 여성 심사위원이 연신 맵다고 하면서도 수군거렸다.
"이거 엄청 매운데, 맛있게 맵네요. 그쵸?"
"그러네요. 칼칼하니 아주 괜찮아요."
대체 이딴걸 어쩌자고 만들었냐는 표정의 심사위원 한명과, 아주 맵고 화끈하게 잘 만들었다는 나머지 심사위원.
그들이 점수 매기는 걸 바라보던 봉만두가 산하에게 속삭였다.
"형, 생각보다 반응이 안 나쁜데요? 전 욕 얻어먹을 줄 알았는데. 하긴 매운것만 빼면 맛있긴 해요."
"내 생각에는 화학조미료를 다들 못 써서 자극적인 맛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니면 운좋게도 매운걸 좋아하시거나."
"오, 그거 말 되네요? 그런데 그 대표인가 뭔가하는 사람은 심사위원이라더니 오늘도 안 나오네요?"
"결선에 나온다던데?"
"그래요?"
탈락할 각오를 하고 만들었던 산하는 기분이 조금 얼떨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행복해하며 눈앞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특별한 효과를 첨가 할 요리를 고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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