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이게 아닌데(3)
이장이라는 사람이 노래를 하면 협조하겠다고 하자, 젊은 청년이 그러겠다고 나서는 장면이 보였다.
김대환은 이장의 그 익살스럽고 장난기 많은 모습이 제법 재미있어 보여 채널변경을 보류했다.
그런데 젊은 사람이 무슨 판소리를 부른다고 하는게 아닌가.
전혀 예상치 못한 흐름에 김대환이 당황할때, 청년의 춤사위인지 뭔지 모를 몸짓이 눈에 들어 왔다.
뭔가 품격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던 그때, 산하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 년 만에...."
첫 소절부터 심상치 않은 느낌에, 김대환의 귀는 쫑긋하고 시선은 티비에 집중되었다.
장단도 없이 불러내는 민요는 몸짓과 어우러져 상당한 조화를 보이고 있었다.
오래전에 겪었던 설움이 한번에 복받쳐 올라오는 것처럼, 김대환은 너무 슬퍼지는 느낌에 넋을 놓고 TV화면을 바라보았다.
노래가 계속 흘러나옴에 따라 먹먹해지는 가슴은 가슴인데, 또 어디선가 치밀어오르는 이 감동은 무엇인가.
뒤로 흘러갈수록, 소름이 끼칠 지경인지라.
어느새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만 그는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그때였다. 어두운 갈색빛의 나무문이 삐걱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무릎은 툭 튀어나오고 윗도리는 구멍 난 체육복을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수염은 깎지않아 덥수룩하고, 머리는 떡을 져 있었다. 얼른 눈가를 훔친 그가 아들을 타박했다.
".....이게 노숙자야. 거지야?"
"아버지 일 하느라 바빠서 그래요."
"핑계는, 난 장시간 야근할때도 잘 씻고 다녔어."
"전 몸이 연약하잖아요. 많이 쉬어줘야 해요."
"뭐? 연약해? 그 몸으로? 말도 안 되는 핑계말고 부지런하게 좀 움직여."
김대환의 아들은 우람해 보이는 오른팔을 굽혀 알통을 만들어 보이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근 손실 와요."
"아우. 이걸 그냥. 나 혼자 살게 장가 좀 가라."
"그러고 보니까, 저 장가 안 가서 우셨어요?"
얼른 자신의 눈가를 옷소매로 훑은 김대환이 아들을 째려본다.
"뭐 인마? 누가 울었다고 그래? 하품한거야. 하품."
"아..."
"그나저나 너 저기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인지 좀 알아봐라."
"누구요?"
"저기 저 사람. 노래 하고 있잖아."
"뭐하시게요?"
"그냥 해달라면 좀 해 줘라.."
어깨를 으쓱한 김대환의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저 씻고 나와서요."
욕실로 들어서던 김대환의 아들은 멈칫했다. 방에 있을때부터 가슴이 먹먹한것이 이상하게 슬프더니 눈가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 손등으로 슥 닦은 그는 놀라버렸다.
'내가 울어?'
***
산하는 계속해서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보며 쾌재를 불렀다. 시청자도 미션에 해당되어서 그런지 거저먹는 중이었다.
설마 안 되면 길거리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때였다.
화사한 분홍색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새봄이, 생각중인 산하의 눈앞으로 고개를 살짝 들이밀었다.
"사장님, 무슨 생각하세요?"
"응? 아냐. 아무것도. 퇴근하자."
"네."
새봄은 산하가 다큐를 촬영할 예정이라는 것만 알지, 이미 촬영했다는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휴일에 촬영한것도 그 이유중의 하나이지만.
그는 자신의 부모님과 비슷하게 남들에게 자랑을 잘 안 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다큐 첫 방영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은 산하는, 가게 문단속을 마친 후 봉만두와 윤새봄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들 내일 보자."
"아니, 형님 저랑 같이 가실거면서 왜 이러세요?"
"새봄이만 따로 가는데, 외로울 거 아냐. 기분 좀 내는거지. 자 봉만두 손 들고 흔들어 봐."
"......"
할말을 잃어버린 만두는 우두커니 서 있었고, 새봄은 킥킥대며 웃었지만 속으로는 감동받았다.
장난이긴 하지만, 이런 배려를 받을 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젠 가야 할 시간.
새봄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저 가볼게요. 내일 봐요."
산하는 가끔 만두와 새봄의 과거를 확인하곤 했다.
영 엉뚱한게 나올때도 많았지만, 제법 쓸만한 정보도 나오는 편인지라, 새봄이 외로움에 시달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갑자기 잊고 있었던 뭔가가 생각나 손을 짝 하고 마주쳤다.
"아, 맞다. 오늘 회식하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몇 걸음 걷다말고 뒤돌아 보는 새봄의 얼굴이 밝아졌다.
"회식이요?"
"오 형님 회식이라고 하셨어요?"
"그래, 우리 곧 이사하잖아. 확장이전 기념 회식."
봉만두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양 손으로 가게문을 가리킨다.
"형님 다시 들어가시지요."
"찬성."
"회식 하는데, 여길 왜 다시 들어가?"
"회식은 맛집에서 해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크, 좋구나."
화를 내는 척 하던 산하는 호탕하게 웃었다.
"자식들, 내 요리가 그렇게 좋단 말이지? 좋다. 만두 너는 가게 문 열고 세팅 좀 해봐. 난 새봄이랑 장보고 올게."
"옛썰! 철저하게 준비해놓겠습니다. 동식형님도 부를까요?"
"좋지."
콧노래까지 부르던 만두는 잽싸게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 회식 준비를 시작했고, 산하는 새봄과 함께 트럭에 올라탔다.
"오늘은 시간이 좀 나시나봐요? 새봄님?"
그녀는 희고 가느다란 검지와 엄지의 간격을 살짝 벌리며 말했다.
"쬐금?"
"쬐금이면 다시 내려야겠네."
당황한 새봄이 얼른 간격을 크게 벌린다.
"많이 나요. 이만큼 많이. 출발!"
왠지 모르게 신나보이는 그녀의 과거를 확인한 산하.
[17분전, 윤새봄은 퇴근시간이 되자 조금 슬퍼졌다.]
"그래 가자. 오늘 이 사장이 거하게 쏜다!"
"아자!"
어두웠던 방안에 불이 켜진것처럼, 새봄은 그렇게 좋아했다.
한참 후.
지글지글 고기 굽는 냄새가 산하의 식당 내부에 울려퍼질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양복차림에 서류가방을 든 산하의 친구 하동식이었다.
"여어, 동식아! 왔냐?"
"형님 오셨어요?"
"동식 오빠, 어서오세요."
동식이 가만히 서서 숨을 들이켠다.
"와, 냄새 좋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회식이냐? 내가 또 연락 받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다는 거 아니냐."
"우리 가게 이전하잖아. 이제 여기 있을 시간도 얼마 안 남아서, 기념 파티?"
"아, 그거였구나. 난 또. 산하 너 이 가게에 정 많이 들었다며?"
"그래도 뭐 어쩌냐. 평생 여기서 장사 할 순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 아무튼 이것도 먹자!"
동식이 감추고 있던 한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종이 박스에 포장된 양주 한병이 들려있었다.
"오, 형님. 그거 어디서 나셨어요?"
"그냥 선물 들어온 거."
"최곱니다. 빨리 앉으세요."
"이야, 동식이 이거. 어디서 뇌물 받은 거 아냐?"
"에라이 박산하야, 내가 그런 걸 왜 받아? 캬! 된장찌개도 있네. 이 회식 자주 좀 하면 안 되냐?"
"너도 취직할래?"
".....농담이지? 나보고 여기서 서빙하라고?"
"아니. 나 돈 좀 더 벌면 법인도 세울건데. 회사 커지면 변호사 정도는 있어야지."
"뭐라는 거냐?"
사전예고없는 발언에 새봄과 만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법인요?"
"사장님 웬 법인이요?"
자아도취에 빠진 표정을 짓던 산하가 턱을 쓰다듬으며 세 사람과 눈을 한번씩 마주쳤다.
"이 몸이 그릇이 너무 커서 법인 정도는 세워줘야, 아 이 자식이 제법 큰 물에서 노는구나 하는 거거든."
동식이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 잔에 술을 따르더니 산하에게 내민다.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한잔해."
"이 자식들이 나 진심인데. 나중에 회사커지면, 동식이 너는 내 밑에 바지 사장, 새봄이는 비서실장, 만두는 영업사원. 오케이?"
봉만두가 음식을 먹다 말고 사레가 들려 기침을 여러번 하더니, 억울하다는 듯 항의한다.
"형님! 저는 왜 영업사원입니까?"
대답없이 손가락을 네모로 만들어 봉만두 얼굴쪽으로 향한 채, 카메라 촬영각도를 잡는 시늉을 하던 산하가 말했다.
"이거 봐. 영업 잘 뛰게 생겼잖아."
이내 실내에는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왔고, 어쩌다보니 같이 웃던 만두가 산하에게 말했다.
"......형님 미워할겁니다. 그래도 영업부장 정도는 주셔야죠."
"그래 인심썼다. 너 영업부장해라."
"앗싸! 잠깐만......나 왜 좋아하고 있지. 깜빡 속았네.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회사."
"유령회사라니. 곧 생긴다니까."
"그렇다면! 대표님, 제가 한잔 따르겠습니다."
"좋다. 영업부장 잘 따라봐."
"둘이 잘 논다."
그 후로도 밤이 깊어질때까지 산하의 식당은 불이 꺼지지 않았고, 하하호호 웃는 소리가 어둠으로 쓸쓸해지려던 골목을 가득 채워주었다.
노란 가로등불빛이 그 따스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
나이 70이 다 되어가는 판소리 보존협회 회장 강정열은 알게모르게 인망이 높았다. 그러다보니 따르는 사람도 많았고, 인맥도 대단했다.
오죽하면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는 자들이 그에게 인사를 오겠는가. 이 사실을 모르는 졸부 몇명은 까불다가 된통 당한적도 몇 번 있었다.
그만큼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권력을 쥘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쪽에 통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권력과는 별 상관없는 판소리에 푹 빠졌고, 이제는 회장직까지 맡아 우리 문화 살리기에만 앞장서고 있었다.
그런 그가 모니터 화면속에서 재생중인, 어떤 국악인의 판소리 장면을 살펴보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인물이 없어. 인물이....'
그때 강정열의 친우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어, 너 이 시간에 웬일이냐?"
"왜? 나는 일 있어야만 전화하냐? 좋은 소식 알려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좋은 소식?"
"그 뭐냐, 교육방송에 향토음식을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이 있던데."
"너 아직도 그런 거 찾아보냐?"
"아,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라 이놈아. 그리고 내가 찾아본 게 아니고, 제자 한놈이 알려 준 거야."
"변명 하기는, 뻔하지. 거기 나온 음식 먹으러 가자고? 너 인마 우리 나이랑 체면도 있는데, 식탐 좀 줄여."
"이걸 그냥. 그게 아니라. 너 돌아가신 이장춘 선생님 존경하지?"
강정열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인간문화재로까지 지정되었던 이장춘 선생이 제자를 남기긴 했는데, 다들 스승의 발끝도 못 따라가는 솜씨여서였다.
생각할때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배우려는 문하생만 많았어도, 재능있는 제대로 된 제자 한명만 들이셨어도 이토록 안타깝지는 않았을텐데.
이게 다 고리타분한 취급을 받는, 발전없는 판소리 때문이라며 구시렁거리던 그가 친구에게 답했다.
"당연하지. 왜?"
"왜 이렇게 까칠해. 내가 아까 말한 프로그램에, 이장춘 선생님 판소리 실력에 버금가는 젊은친구가 나와서 연락했더니만. 특히 감정표현 부분은 이장춘 선생님 뺨 때릴정도야."
"뭐? 그게 무슨 헛소리야? 뺨을 때려? 돌아가신 선생님 제자들도 반쯤 겨우 따라할까 싶은데. 버금가기는 개뿔. "
"이놈아. 좀 믿어봐라. 그럼 난 알려줬으니까 끊는다."
"뭐?"
통화가 종료되어 깜빡이는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다보던 강정열은, 돋보기 안경을 고쳐쓰고 두 검지손가락을 사용해 독수리타법으로 타자를 쳤다.
토도독 소리와 함께 검색창에 향토음식을 찾아서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거짓말이기만 해봐라."
눈 앞에 없는 친구에게 으름장을 놓은 그가 다시보기 목록에 나타난 영상을 바라보았다. 갓 시작한 프로그램인지 달랑 한편이 전부였다.
'어디...'
큰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친구가 그렇게까지 말했으니 뭔가는 있겠다 싶어 집중하던 강정열.
이내 그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이럴수가....'
이장춘 선생보다 조금 못하긴 하지만, 젊은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이라니.
그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자신의 볼을 매만졌다. 이장춘 선생의 문하에 있던 제자는 대부분 알고 있는데, 저 청년은 대체 누구인가.
혼자 배웠다고?
'천재! 소리꾼 천재가 나타났구나.'
속으로 크게 외치던 강정열은 곧장 교육방송국의 모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시오? 나 강정열이올시다."
"아이고, 선생님. 어쩐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안 그래도 안부인사 한번 드리려고 했습니다."
"잔말은 필요없고, 향토음식을 찾아서. 거기 나오는 젊은이 좀 만나게 해주시오."
"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허, 이리도 답답해서야 원."
"???"
같은 시각.
황수호 피디는 국장과 독대중이었다.
"어때? 영 뻔한 포맷에 예능 조금 합쳐보니까 안 되겠다 싶지?"
"에이, 국장님 이제 고작 한편 찍어서 송출했는데. 저 기죽이지 마세요. 일단 한번 지켜 보시라니까요. 시청률 잘 나올겁니다."
"너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어. 내가..."
그때 국장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황 피디. 너, 거기 도망가지 말고 딱 있어. 나랑 오늘 결판 짓자."
"네, 어디 안 갑니다."
왠지 모르게 당당해진 황수호를 흘겨보던 시사교양국 담당CP가 전화를 받았다.
"그래, 장 피디
- 4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