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울지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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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가을바람을 어떻게든 견뎌내려는 듯 파르르 떨리던 단풍잎이, 줄 끊어진 연처럼 툭 떨어져 휘날리던 도로 위.
산하의 트럭 만물이가 나타났다. 앞 좌석에는 새봄이 같이 타고 있었는데, 그녀는 차창에 얼굴을 붙이고 단풍구경하기 바빴다.
"새봄아, 그렇게 좋아?"
"그럼요. 너무 이뻐요."
"집에 허락은 확실히 받아온거야?"
"네! 서면으로 통보까지 했어요."
"서면 통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 멱살잡혀 끌려가는 거 아니지?"
"사실은..."
"?"
"우리 아빠가...."
"아빠가?"
"속았죠? 걱정마세요. 아무 일 없어요."
언젠가부터 귀여운 장난을 치기 시작한 새봄을 바라보던 산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외로운 마음이 많이 가신걸까.
표정에도 제법 여유가 많아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계속해서 차를 몰아 작은 콘크리트 도로로 진입했다.
굽이지고 경사진 도로를 계속 올라가자 농막 크기의 작은 건물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문을 열고 나온 관리인에게 확인을 받고 계속 차를 몰아 들어가자, 새봄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가을옷을 조금씩 갈아입기 시작한 야영장 잔디밭에, 텐트 몇동이 듬성듬성 설치 돼 있었다.
본래 명절연휴만 되면 전국에 산재한 캠핑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지만, 산하가 예약한 곳은 캠핑족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물론 산하가 이곳을 찾아낸 건 아니었다. 그는 얼마전 이곳을 알려준 사람에 대해 떠올렸다.
"캠핑? 이야 박산하. 출세했네. 전에는 가자고해도 안 가더니. 캠핑을 다 간다고?"
"아저씨. 혹시 숨겨둔 캠핑장 없으세요?"
"맨입으로?"
"된장찌개 일일 자유이용권."
"오케이! 최근에 오픈한 캠핑장인데, 올해 꼭 가봐. 내년에는 아마 자리 없을 걸?"
"아저씨도 가보셨어요?"
"당연하지. 거기 물 맑고, 공기좋고, 지금 가을이라 더 좋겠네."
"어딘데요?"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거기가 어디냐하면...."
마치 국가적인 비밀이라도 되는 양 숨죽여 이야기하던 맹철호의 진지한 얼굴을 떠올리던 산하는 다시 한번 웃고 말았다.
"사장님, 아까부터 왜 그렇게 웃으세요?"
"그냥 좋아서."
그 말을 살짝 오해한 새봄이 볼을 사르르 붉혔다.
그 모습을 보지도 못한 산하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킬 때, 뒤이어 승용차를 주차한 하동식이 기지개를 켰다.
"동식아 죽이지?"
"인정, 예약 잘 했네."
"거봐. 이 형님만 믿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거야."
"예, 박산하 씨.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친구와 농담 주고받기를 끝내고.
알록달록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한 산과, 시리도록 맑고 높은 가을하늘을 감상하던 산하는 마음이 넉넉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한가 싶어 옆을 보니, 윤정은 여기저기 구경하기 바쁜데 만두가 안 보이는게 아닌가.
"야, 동식아. 만두 어디갔냐?"
"아까 입구에 간이 화장실 봤지? 배아프다면서 거기로 뛰어갔다."
"이것저것 많이 주워 먹는다 했다. 그런데 새봄이는...."
저편으로 고개를 돌린 산하는 그녀를 발견했다.
언제 나타난 강아지인지 모르겠지만, 새봄은 하얀 새끼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맞춤을 하고 있었다.
다들 어딘가 행복해보이는 표정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곧장 트럭 짐칸에서 새로 장만한 텐트와 취사도구를 꺼냈다.
그걸 보던 동식도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조금 낡은 텐트를 꺼내왔다.
"어딘데?"
텐트 몇 동 외에는 조용한 캠핑장을 살펴보던 산하는, 외곽에 죽 늘어서있는 나무데크를 가리켰다.
"17번이면 저쪽 같은데. 잠깐만 있어봐. 확인하고 올게."
"오케이."
한참 후.
여럿이 힘을 합쳐 텐트 두 동을 설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해가지더니 캄캄해졌다. 산속에서 찬바람이 밀려내려오자 산하는 불을 피우기 위해 트럭에서 장작을 가져왔다.
이곳은 딱히 화로대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땅을 깊고 동그랗게 파 놓고, 외곽에는 돌무더기를 둘러놓아서 그 안에 불을 피우도록 해놓았다.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던 산하가 콜록거리며 불을 피우던 그때였다. 모두들 눈을 반짝이며 산하만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그건 제가 할게요. 된장찌개 부탁드립니다."
"그래, 산하야. 된장찌개가 중하지. 뭐가 중하냐?"
"오빠, 오빠는 그냥 요리만 하고 쉬면 된다니까."
"사장님 잡일, 힘든 일은 우리가 다 할게요. 그저 요리만."
"이 된장찌개의 노예들, 그렇다면 내가 또 끓여줘야지."
산하는 뒷일을 일행에게 맡긴 후, 곧장 도마를 꺼내들고 재료를 썰기 시작했다. 언제 해도 즐거운 요리, 그 중에서도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를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하얀 솜뭉치같은 새끼 강아지 여러마리가 냄새를 맡고 우르르 몰려와 산하의 발치에서 헥헥거렸다.
"어머, 애들 봐. 귀여워."
윤정이 달려들어 한마리를 안으려 했지만, 강아지들은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오로지 산하만 바라봤다. 정확히는 된장찌개였다.
강아지들이 된장찌개를 탐내고 있자니, 이곳의 주인이면서 관리를 겸하는 아저씨가 다급히 뛰어왔다.
그의 얼굴은 구레나룻을 비롯해 턱까지 온통 검은 수염으로 덮혀 있었다.
"아이구, 이 녀석들이. 죄송합니다. 한창 천방지축으로 날뛸때라서..."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귀여운데요."
"그래도 방해될겁니다. 얼른 데려갈게요."
그때였다. 털보의 배에서 천둥치는 듯한 꼬르륵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는 민망한 듯 하하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거 부끄럽게. 그럼 맛있게들 드세요."
강아지를 잡으려고 움직이는 그를, 산하가 불러세웠다.
"식사 안 하셨으면 한 그릇 드시고 가세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손님께 민폐를...."
"괜찮습니다. 오늘 넉넉하게 준비했거든요. 고기도 좀 드세요."
연신 맛있는 냄새가 피어나는 된장찌개 냄비를 힐끔거리던 털보는 손을 슥슥비볐다.
"그럼 성의봐서 된장찌개 맛만 보고 갈게요."
그는 미안한 듯 일회용 용기에 밥과 된장찌개를 아주 조금 덜어서 먹는 시늉만 했다.
일행들은 그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화장실 들어갈때와 나올때가 다른것처럼, 털보의 표정은 돌변했다.
"아니..이게 무슨..."
마치 국을 들이마시듯 밥과 비빈 된장찌개를 단숨에 먹어버린 그가 산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기....혹시."
산하는 그의 속내를 짐작하고 흔쾌히 말했다.
"더 드세요. 아직 많아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맛난 된장찌개는 처음이네요."
잠시 후, 밥을 잔뜩 얻어먹은 털보는 정말 미안한 기색으로 산하와 그의 일행에게 말했다.
"이거 참, 얻어먹어서 미안하니까 제가 잠시 차 한잔씩이라도 대접할게요. 괜찮으시면 저쪽으로..."
털보의 안내에 따라 캠핑장 한편의 목조주택 건물내부로 들어선 일행은 벽에 걸린 온갖 약초와, 곳곳에 전시된 담금주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우와. 대박."
"저거 산삼 아니에요?"
"약초꾼이셨어요?"
"그냥 취밉니다. 취미. 자자 여기들 앉으세요."
그때, 산하는 말도 없이 현관에 놓인 신발장 위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곳엔 작고 가느다란 대나무 막대기 하나가 엷게 빛을 내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끝 부분은 주먹처럼 뭉툭하고, 가느다란 부분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는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잠시 기다렸다가, 털보 아저씨가 차 내오기를 기다려 물었다.
"그런데 저기 대나무 막대기는 뭔가요?"
"어떤? 아 그거요? 여기 헌집 허물고 공사할때 나왔길래 주워놨어요. 특이하게 생겨서 어디 쓸모있을까 했는데, 영 쓸데가 없네요. 그래서 그냥 버리려고요."
"헌집이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이던 털보가 제안을 했다.
"아, 제가 재미난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어떤?"
"아주 옛날에 말이죠. 명필로 유명한 두 사람이 있었다고해요. 한 사람은 필체가 유려하다는 평을 받았고, 또 한 사람은 힘이 넘친다는 평을 받았죠. 그런데........."
털보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봉만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사장님, 그거 진짭니까?"
"당연히 뻥이겠죠? 저도 그냥 여기 근처 사시는 할머니한테 주워들은 겁니다. 이게 정말 진짜겠어요? 그냥 우스갯소리로 들어주세요."
하지만 산하에게는 우스갯소리가 아닌것처럼 들렸다. 잠시 후 차를 다 마신 산하는 일행이 다 나가고 난 후 같이 나오려는 털보에게 물었다.
"사장님, 이거 버린다고 하셨죠? 저 주시면 안될까요?"
"이거요? 아, 모양 특이해서 꽂히셨구나. 가지세요. 딱히 쓸모는 없겠지만요."
"감사합니다."
얻어 온 대나무 막대기를 살펴보던 산하는 그것이 붓대가 아닐까 짐작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희미합니다. 복원이 필요합니다.]
헤어 디자이너 오민석의 가위를 얻었을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트럭에 대나무 막대기를 고이 모셔놓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모두가 담소를 나누며 설거지등의 뒷처리를 하던 그때.
데크 한구석에 앉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던 산하는 정신적으로 힐링되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렸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 쓰레기를 정리한 새봄이 산하의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말을 걸었다.
"사장님, 뭘 그렇게 보세요?"
"별. 오늘 진짜 잘 보이네. 어? 떨어졌다."
황급히 산하의 시선을 따라간 새봄은 별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반짝이자 그에게 물었다.
"별똥별 떨어졌어요?"
"그래, 소원하나 빌고 불멍하러 가자."
"불멍이 뭐예요?"
"불보면서 멍때기리 줄임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봄봄봄."
"아....그런거구나. 어! 저기."
순식간에 떨어져내린 별똥별을 보게 된 새봄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은 뒤 소원을 빌었다.
"무슨 소원을 그렇게 길게 빌어? 나한테 살짝만 말해 봐."
소원을 다 빌고, 큰 눈을 두어번 깜빡이던 새봄이 배시시 웃었다.
"안 돼요."
같은 시각.
라일락푸드의 대표 윤주상이 거실로 들어섰다.
"딸, 아빠가 늦었지? 그러게 같이 가자니까 안 가고...."
왠지 조용한 분위기를 감지한 그는 새봄의 방에 노크를 몇번 해보고 슬쩍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썰렁하니 아무도 없는 게 아닌가.
그런 그의 눈에 책상 위에 곱게 접힌 종이가 한장 눈에 띄었다. 그것은 편지였다.
<캠핑 다녀올게요.>
그 뒤쪽으로 많은 말이 쓰여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아직 화가 안 풀려 장난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캠핑을 가다니.
대체 누구랑 간거야!
누가 우리 딸을 꾀었냐며 노발대발 하던 윤주상은 이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감히 어떤 놈팡이가....."
딸바보의 눈동자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
산하의 아버지 박상태는 구형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화면이 뜨기를 기다렸다. 컴퓨터 본체는 우렁찬 굉음을 내고 있었다.
"이런 고물 같으니..."
한참이 걸려 부팅이 완료된 컴퓨터를 조작해 어느 음악관련 커뮤니티를 찾아 들어간 그는 산하와 관련된 게시글의 댓글을 살폈다.
- 하산해 씨 음반 하나 내더니 왜 소식이 없을까요? 노래 하나 더 나올때 됐는데.
- 그러니까요.
- 솔로곡으로 데뷔 한번 하시면 좋겠어요. 그럼 감쪽같은 백철우님 신곡.
- 찬성!
박상태는 회원들의 댓글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새로운 사실이 있는지 샅샅이 훑었다.
아들이라는 놈이 말을 안 하는 통에 추석명절에 얼마나 당황했던가. 이제는 이놈을 샅샅이 추적하리라고 생각하던 그는 비난 댓글 하나를 발견했다.
- 그런데 아쉬운건, 모창가수는 항상 원 가수와 비교질 당하죠. 원 가수보다 못한다. 잘한다....
그 뒤로 쭉 이어진 내용은 욕설도 아닌것이 신경을 살살긁는 아주 악질적인 댓글이었다.
화가 난 박상태는 눈에 불을 켜고 어설픈 타자솜씨로 한참이나 걸려 답글을 달았다. 그의 닉네임은 '강산이 변했어' 였다.
- 당신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닙니다. 제가 볼때 우리 하산해는 크게 될 사람이에요.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답글이 달리는 게 아닌가.
- 아, 이상한 사람 또 왔네. 당신이 무슨 하산해 아빠나 엄마라도 돼요? 왜 매번 시비에요?
아, 이 자식 잘 맞추네라고 중얼거리던 그가 답글을 달려고 하던 그때, 고물 컴퓨터가 퍽 하고 꺼져버렸다.
"이런 젠장...."
한동안 아무도 안 쓰고 거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오래된 컴퓨터가 말썽이었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내게는 스마트폰이 있지라고 중얼거린 박상태가 곧 안경을 가져와서 휴대폰 화면을 터치하기 시작했다.
계속 오타가 나자 구시렁거리면서.
***
이른 아침, 산하가 새로 이전한 가게 앞.
오전부터 차량 한대가 정차하더니 뒷좌석에서 어두운 남색빛의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내렸다. 그의 이름은 강정열.
"여기로구만."
허허롭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어딘가 익숙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손을 동그랗게 말아 눈에 대고 가게안을 살피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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