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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56화 (56/445)

56화 명필(3)

***

이필묵은 이른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크게 외쳤다.

"야, 애들 여기...."

그는 말을 하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실 가죽소파가 엉망진창으로 뜯겨 있는 건 기본이고, 여기 저기 물어뜯겨 흉해진 여러 물건들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설마...."

그는 너무나 불안한 마음으로 안방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곳의 문이 열려있는 걸 발견한 그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천천히 다가가 안방문을 연 그는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아버지가 나름 아끼시는 도자기가 산산이 조각나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안 돼....'

틈만나면 강아지 팔아버리라고 하시던 아버지를 열심히 설득했고, 요즘은 그래도 자신의 강아지를 귀여워 해주시던 참이었다.

그런데 단 하룻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대형사고를 치다니. 분명 마당에 묶여있던 놈들이, 대체 여길 어떻게 들어와서 안방문까지 열었을까.

동생놈이 불쌍하다고 또 들여보냈나.

"야! 호순이, 빵그리, 리어카!"

안방에서 뭔가를 마구 물어뜯던 강아지들은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주인을 반겼다. 심지어 반갑다는 듯 짖기까지 했다.

"야 이것들아, 이 눈치도 없는... 그래 니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 다 내 잘못이다."

문을 환하게 열어젖히며 말을 이어가려던 이필묵의 동공에 지진이 찾아왔다. 그냥 도자기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만회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벽에 걸려있던 액자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애지중지 아끼시는 붓글씨인가.

그 붓글씨가 담겨있던 액자는 떨어져 유리가 산산조각 났고, 그 안에 잘 표구돼 있던 화선지는 넝마조각이 되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천천히 그 조각들을 주워서 살폈다.

아무리 봐도 돌이키기 힘들다는 걸 직감한 이필묵은 당장 스마트폰으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자리 비우는동안 강아지 좀 잘 봐달라고 했더니, 대체 어딜 간건지 전화조차 꺼져있었다.

아직도 자신들이 어떤 사고를 쳤는지 모르는 강아지들이 대체 왜 그러느냐며 멍멍 짖었지만, 이필묵은 허망한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러다가는 정말 강아지들과 함께 쫓겨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이대로 앉아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한 그는 곧바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만에 전통있는 표구사 한곳을 발견했다. 복원에도 일가견이 있다나 뭐라나.

이필묵은 곧장 이리저리 찢어지고 흩어진 화선지를 모았다. 그 중에 반정도는 너덜너덜하기만 한 배접된 화선지까지 주워들고 표구사로 향했다.

***

"고생하셨습니다."

"네, 다음에 또 오세요."

물품인수증에 사인을 끝낸 산하는, 이곳 주인이 포장해서 건넨 액자를 받아들고 이제 막 표구사를 빠져나가려다가 퍼뜩 멈춰섰다.

눈앞에 뭔가가 떠올라서였다.

[돌발미션 - 이필묵에게 붓글씨를 선물하자.]

[보상 - 모든 필기구에 붓글씨 솜씨의 80%가 적용된다.]

산하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들어선 손님 때문에 떠오른 미션인가 싶어서였다. 그곳에는 간절한 표정의 사내가 노인과 대화중이었다.

그의 이름이 이필묵이 맞나 해서 과거를 살펴봤다.

[19분 전, 이필묵은 급한 마음에 뛰다가 넘어졌다.]

그 사이에도 대화는 진행중이었다.

"어쩌다 이리 됐습니까?"

"우리 집 강아지가 물어뜯는 바람에..."

"이건 누가 와도 복원 못 합니다. 아주 잘게 다 씹어서 엉망이네요."

"그래도 한번만 더 봐주세요. 정말 안 될까요?"

"음...정말 안타깝지만 어렵겠어요."

노인은 절반 정도 남아있는, 대단해보이는 붓글씨 아래쪽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것에 애도를 표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침묵이 유지되던 그때였다.

산하가 액자를 들고 가게 안쪽으로 도로 들어오더니 이필묵에게 질문했다.

"이거 귀한건가요?"

이필묵은 이곳 관계자인가 싶어 얼떨결에 대답부터 했다.

"네? 네. 아버지가 많이 아끼시던 거라서...."

무슨 일인지 어렴풋이 눈치 챈 산하가 일단 표구사 주인에게 양해부터 구했다.

"제가 대화중에 눈치없이 끼어든건 아니죠?"

갑자기 나가다가 되돌아온 산하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표구사 주인은, 이미 복원불가 판정을 내렸기에 더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네, 그건 아닙니다만."

"잠시만 이분하고 대화 좀 해도 될까요?"

"뭐 상관 없죠."

"감사합니다."

다시 이필묵에게로 고개를 돌린 산하가 묻는다.

"아버님이 많이 아끼시던 거라면, 더 좋은 붓글씨 가져가면 별 말씀 안하실 가능성도 있겠네요?"

"네?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런건 비쌀텐데요. 구하기도 어렵고... 아버지가 이거 옛날에 어렵게 구하셨다고 하셨었거든요."

이필묵이 눈길을 준 탁자 위에는 아름답다 칭할만한 붓글씨 반절이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물에 불린 휴짓조각처럼 수백조각으로 찢어진 종이조각이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산하는 그 중에서도 반절의 화선지조각이 왠지 모르게 빛나는 것 같아 이필묵에게 물어보았다.

"이거 잠깐만 봐도 될까요?"

"네? 네..."

그는 곧바로 화선지를 살짝 만져보았다.

[과거의 교차점과 조우했습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희미합니다.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교차점?

정순명이 과거에 경쟁상대이자 친구로 삼았던 사람의 붓글씨가 바로 이게 아닐까.

이 넓은 세상에서 우연히 만났을리는 없고, 설마 이 붓글씨는 날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온건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산하는 종이에서 손을 떼고 이필묵을 바라보았다.

"급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시면 제가 붓글씨 하나 써서 선물해드릴까요?"

"....네?"

"제가 붓글씨를 나름 괜찮게 쓰거든요. 대체용으로 쓸만할겁니다."

"어...저야 상관없지만."

이필묵은 왠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산하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 사람 뭐지? 그냥 잘 모르는 자신이 대충 봐도 집에서 가져온 붓글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걸 대체할 만한 붓글씨를 쓰겠다고? 그것도 처음 본 내게 선물을 해준다고?

혼란해하는 이필묵에게서 고개를 돌린 산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화를 듣기만 하던 표구사 주인에게 부탁했다.

"죄송한데, 붓글씨 쓸 만한 곳 없을까요? 지필묵은 제가 구입할게요."

붓글씨를 직접 썼다는 게 가짜인줄로만 여기고 있던 노인은 당황했다. 저번에 한번만 보여달라고 할때는 빼더니, 오늘은 갑자기 나서서 붓글씨를 쓰겠단다.

그것도 처음보는 사람에게 선물해 주겠다나 뭐라나. 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그는 생각을 하다 말고 표구사 주인인 아들의 옆구리를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이놈아, 대답 안 하고 뭐해?"

넋을 빼놓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표구사 주인이 일단 고개부터 끄덕였다.

"이쪽 탁자에서 바로 쓰실 수 있긴 합니다만."

"그럼 써도 될까요?"

"네? 네. 그러시죠."

잠시 후 구경꾼 두 사람과 불안함이 표정에 가득한 이필묵이 산하가 글씨 쓰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중에서도 노인의 시선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 자리까지 다 마련된 상황인데, 자기가 쓰겠다고 해놓고 설마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모두의 주목을 받은 산하는 정신을 집중하고 천천히 큰 붓에 먹을 찍었다.

느릿느릿.

처음에는 답답하다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던 그의 손길이 화선지 위에 다다르자 거침이 없어졌다.

화선지에 검은 점이 하나 찍히고, 획 하나가 그어지고, 마치 춤을 추듯 흔들린 붓이 글자 하나를 완성했다.

호기심 가득했던 노인의 눈은 어느새 터질듯 부풀어오르다 못해 입까지 떡 벌린채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세상에 이럴수가, 정말 저 젊은 손님이 쓴게 사실이었구나.

그 와중에도 산하는 손을 쉬지 않았다.

한 획 한 획 그의 붓이 지나갈때마다 용이 발톱으로 할퀴고 지나간 듯 힘있고 거센 글자가 만들어졌다.

그야말로 힘있는, 아니 힘이 넘치는 붓글씨였다.

잠시 후.

큰 붓을 내려놓고, 세필붓을 든 산하는 가장 오른쪽 아래 빈 여백에 흘림체로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보통 사람이 봐서는 흠잡을 곳 하나 없어보이는 글자를 완성해 낸 산하는 왼쪽을 돌아보았다.

"나름 괜찮죠?"

이필묵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붓글씨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힘이 넘쳐 흐르는 붓글씨는 마음마저 강건하게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마치 살아서 튀어나올것처럼 꿈틀대는 이 느낌은 또 뭘까. 눈앞의 붓글씨는 예전부터 아버지 안방에 걸려있던 붓글씨와는 상반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萬事亨通>

단 네글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대단한 분위기에 이필묵은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맘에 안드시나요?"

"아, 아니요. 아니요. 정말 마음에 듭니다. 이건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그냥 가지세요."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네? 아니 이 귀한걸 어떻게..."

"그냥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요. 가지셔도 괜찮습니다."

"초면에 이런 걸, 죄송해서..."

"뭘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아니 잠깐만요. 그래도 값은 치러야죠. 얼마나 드려야 될지 모르겠지만요."

"괜찮습니다.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이필묵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라도 흘릴뻔했기에, 곧바로 허리마저 구십도로 숙여가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마음에 쏙 들어하실 거예요. 우리 강아지들도 잘하면 안 쫓겨나겠어요."

모두를 놀라움과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의 액자를 집어든 산하가 표구사를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두 부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 틀렸잖습니까?"

"이게 말이 되냐 이놈아. 세상에."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산하는 이제 막 가게 유리문을 열고 있었다.

그때, 표구사 주인이 얼른 한발 나서며 그를 불렀다.

"저기 손님."

"네?"

"혹시 시간 있으시면...."

"시간이요?"

"차라도 한잔 하고 가시면 어떨까요?"

"오늘은 조금 바빠서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덩달아 애가 탄 노인이 산하를 불렀다.

"이, 이보시오. 손님."

"네?"

"혹시 붓글씨 전시회 할 생각 없습니까?"

"글쎄요."

"긍정적으로 잘 좀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명필이 드물어서, 만약 하신다면 전시회 참가한 분들이 아주 좋아하실겁니다."

"생각해볼게요."

인사를 꾸벅 한 산하는 액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허망한 표정가운데 놀라움이 자리한 노인이 아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작게 말했다.

"꼭 잡아야 한다. 저런 명필이 땅에서 솟아났을까, 하늘에서 떨어졌을까....천재야 천재. 나이가 들면 어느정도일지 짐작도 안 간다."

"그러게 아버지 너무 확신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정황상 말이 안 됐잖느냐."

"그야 그렇지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거짓말 하는 것 같진 않았다고."

"네놈이 날 아주 잡아먹으려 드는구나."

노인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아들을 구박하다가, 민망한지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는 산하가 남기고 간 붓글씨를 계속해서 구경했다.

늘 자신감만 넘치던 자신의 아버지가 민망한 표정을 짓자, 표구사 주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버지도 저런 모습이 다 있다며.

그때, 붓글씨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필묵이 표구사 주인에게 부탁했다.

"저기 이거 표구 좀 해주시겠어요? 제일 좋고 멋진 액자로 해주세요."

노인이 그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암, 당연하지요. 이 정도 붓글씨면 그만한 대우를 해주어야 마땅한 법이니, 잘 생각하신 겁니다."

그는 신나서 대답을 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민중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한다...'

붓글씨 주인이 전시회를 안 하겠다는데,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좋은 방법이 없나 생각중이었다.

그 사이 차에 액자를 싣고 운전석에 올라탄 산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모든 필기구에 붓글씨 솜씨의 80%가 적용됩니다.]

***

부르릉 힘찬 소리를 내며 트럭 한대가 달려오더니 정차했다. 바로 만물이라 불리는 산하의 차량이었다.

산하네 요리 전문점 옆 주차장에 트럭을 주차한 그는 조수석문을 열고 잘 포장된 액자를 꺼내서 바닥에 잠시 내려놓았다.

그걸 본 봉만두가 식당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다 말고 후다닥 달려온다.

"형님, 그거 뭡니까?"

- 5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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