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59화 (59/445)

59화 낭만이 넘쳐 흐른다(1)

내년 초에 이 건물을 인수할 수 없을까 궁리하고 있던 산하는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제가 잠깐 딴 생각을 하는 바람에..."

"저 메뉴판에 붓글씨요. 어느분이 써주셨나 궁금해서요."

"아, 저거요? 제가 썼어요."

대화를 듣고 있던 그녀의 매니저는 내가 지금 뭘 들은거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채은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멍하니 있다가 재차 확인했다.

"그게 정말이세요?"

"네, 왜요?"

"아니, 전 너무 멋있길래, 소개받아서 앨범 표지에 적용해볼까 했죠."

산하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메뉴판 글씨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정순명의 붓글씨보다는 그분의 친구 글씨가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 생각 일부를 채은에게 털어놓는 산하.

"채은 씨 음반 분위기라면 조금 부드러운 느낌이 좋지 않아요? 저건 조금 안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저 메뉴판 정말 산하 씨가 쓰신거라고요?"

"네."

그때, 옆에 앉아있던 봉만두가 입을 열었다.

"형님, 이 참에 시원하게 붓글씨 한번 보여주시죠? 그냥 쓰셨다고만 하시니까 믿음이 가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아직도 날 못 믿는다 이거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게 말이야?"

두 사람의 말장난을 처음 본 채은이 살짝 놀라서 두 사람을 말린다.

"저 때문에 그러지 마세요."

"아, 채은 씨. 놀라셨어요? 저랑 이놈이랑은 원래 이렇게 장난쳐요. 싸우는 거 아니에요."

"아...그래요?"

그제야 안심한 채은이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떡국 식겠네요. 얼른 드세요."

"아 맞다."

계속 대화가 오가는 바람에 그녀의 매니저도 한술 뜨지 못한 상황이었다. 채은이 먹는 모습을 보며 이제 막 먹으려던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짤막한, 비명 비슷한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채은 씨, 왜 그러세요?"

뭔가 돌이라도 씹었나 싶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매니저는 곧 그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세상에. 너무 맛있어요. 무슨 떡국이 이래요?"

채은은 어딘가 황홀한 표정으로 연신 칭찬을 퍼부었고, 잔뜩 궁금해진 그녀의 매니저도 떡국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와! 무슨 맛이....산하 씨 대체 여기에 뭘 넣으신 겁니까?"

눈이 튀어나올듯한 표정으로 질문하는 채은의 매니저에게, 산하는 별거아니라는 듯 말했다.

"맛있다는 말씀이시죠? 입맛에 맞으셔서 다행이네요."

"맛있다 뿐이겠습니까? 떡국은 맞는데, 떡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거 화학조미료 맛은 아닌 것 같은데. 입에 착착 달라붙는게 너무 맛있네요. 첫맛과 끝맛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나요? 이건 마치..."

산하는 온갖 표현을 가져와 칭찬을 늘어놓는 채은의 매니저에게 두 손을 펴서 아래로 누르는 시늉을 했다.

"워워, 매니저님 너무 흥분하셨어요."

그때, 가만히 앉아서 떡국맛을 음미하던 새봄이 입을 열었다.

"역시, 사람 입맛은 다 똑같죠?"

얘는 또 뭐라고 하는건가 싶어 새봄에게로 고개를 돌린 산하.

"저는 여기서 일하느라 자주 먹는데도 질리지가 않아요. 매번 맛있어요."

왠지 부러운 표정으로 변한 채은이 새봄에게 말한다.

"저도 이참에 여기 취직할까봐요."

"파트타임 어떠세요?"

"그럴까요? 그거 괜찮은데요? 두 시간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두 여자가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산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참 채은 씨 정규앨범 언제 나와요?"

왠지 모를 진지함으로 새봄과 이야기를 나누던 채은이 잠시 눈을 깜빡이고는 대답한다.

"글쎄요. 어느날은 마음에 들었다가, 또 어느날은 마음에 안 들고. 그래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 맞다!"

"왜요?"

"저 혹시....."

"혹시?"

"아, 아니에요."

"뭔데요?"

왠지 망설이는 듯하던 채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음 주 사인회 있는 거 아시죠? 산하 씨 참가 못하는 대신 저번에 그 헤어 좀 만져주시면.....저 너무 염치없죠?"

미안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매만지는 채은을 보며 산하는 생각했다. 생판 남도 아니고, 이제 제법 가까워진 지인인데 그 정도도 못해주랴.

그 대신 미션아 떠라 속으로 외치며 물었다.

"아 뭘 그런걸 고민하세요. 어떤 옷 입으실건데요?"

"그때 그 옷 입어볼까 해요."

"오케이, 알았어요. 컷은 필요없으니까 오전 일찍 여기로 오세요. 식당에서 하긴 그렇고, 주인할머니가 2층 세 들어올때까지 써도 좋다고 하셨는데, 거기서 해드릴게요."

"2층이요?"

"네, 여기 윗층이 음악교습소 하던 자리라던데, 지금은 비어있어요."

"아....정말 고마워요."

"뭘요."

미션이 안 떠서 산하가 실망하던 그때.

새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채은에게 물었다.

"헤어요?"

"네, 모르셨어요? 산하 씨 헤어디자인 솜씨가 아마 강남 미용실 디자이너 뺨 칠걸요. 제일 중요한건 패션이랑 정말 잘 어울리게 해주신다는 거예요. 산하 씨 감각 장난 아니에요."

봉만두에게 듣긴 했지만, 장난인줄로만 알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새봄은 눈을 크게떴다. 연예인도 반해버렸다고?

"사장님 솜씨가 그렇게 좋아요?"

"네, 저번 콘서트때도 산하 씨가 옷이랑 어울리게 올림머리 해주셔서, 호응 정말 좋았어요."

왠지 모르게 샘이 난 새봄은 산하를 슬쩍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이신줄은 저도 몰랐네요."

그때 봉만두가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것도 우리 형님이 해주신 겁니다."

"와, 어쩐지. 멋있더라."

채은의 칭찬에 쑥스러워진 만두가 코 밑을 쓱 하고 비볐다.

상황이 이렇게되자 새봄은 빠른시일내에 산하의 헤어손질을 받아보겠다며 주먹을 꼭 쥐었다.

[돌발 미션 - 다음 주 금요일, 윤새봄의 헤어를 새롭게 변신시켜라]

[보상 - 오민석의 헤어디자인 솜씨 92%로 상승]

'뭐야 이건? 금요일?'

***

산하의 여동생 윤정은 발걸음도 가볍게 인도를 걸어갔다. 하늘에 둥둥 떠가는 구름도,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모든게 너무너무 멋져보였다.

'다들 놀라겠지?'

윤정이 들고있는 종이가방에는 사인지 열장이 들어있었다. 바로 산하가 사인해줬던 그 종이였다.

그녀는 그 종이가방을 한번 바라보고는, 가로수 밑동에 영역표시를 하는 강아지에게 외쳤다.

"박산하 최고야! 그치?"

이 인간이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영역표시를 중단한 강아지가 재빨리 도망쳤다. 그걸 보면서도 깔깔 웃기만 하던 그녀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표정부터 관리했다.

이내 카페 내부로 들어서자, 그녀의 친구들이 호들갑을 떤다.

"오, 윤정이 왔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사인 없어?"

"박윤정 아니지? 가져왔지?"

"얘들아, 미안. 우리 오빠가 너무 바쁘신데...."

친구들의 표정에 실망이라는 감정이 내려앉자마자 윤정이 종이가방에서 사인지 열장을 짠 하고 꺼내서 흔들었다.

"도 불구하고 열장이나 해주셨다 이거 아니니?"

"와, 역시 윤정!"

"좋았어!"

"자, 여기."

제일 처음 사인지를 받아든 윤정의 절친은 잠시 얼음이 되어 말이 없다가 감탄사를 토해냈다.

"와! 이거 뭐야?"

"윤정, 이게 바로 우리 하산해 씨의 사인이라고? 너무 멋있다."

"웃기시네. 우리는 좀 빼줄래?"

"아 왜에에."

"저리가."

"윤정아, 대박이다. 무슨 사인이 이렇게 멋있어?"

"그러니까, 뭐가 좀 대단해 보이는데, 설명 할 길이없네."

자신의 남친에 관해 자랑하다가 언젠가부터 꿀먹은 벙어리가 된 차연지는, 저것들이 또 별것 아닌일로 호들갑을 떤다며 음료를 홀짝이기만 했다.

그 도도한 모습은, 바로 옆에 앉은 동창이 테이블 위에 사인지를 내려놓자마자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이게 뭐야?'

그녀는 사인이라기보다는 거의 예술에 가까운 글자가 하얀 종이 위에서 꿈틀대는 느낌을 받았다.

보자마자 너무 갖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윤정이 필요한사람 손 들라고 할때 다리만 꼬고 앉아있었던 그녀는 처음으로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갖고 싶어. 갖고 싶다고.'

자존심에 차마 나도 구해달라고 할 수 없었던 차연지는 죄 없는 하이힐 뒤꿈치만 바닥에 콩콩 내리찍었다.

남들 다 가졌는데 자신만 못가졌다는 심리는 그녀를 더욱 압박해왔다.

'짜증나.'

***

<소리꾼 박산하의 향토음식기행>

오로지 소리 하나 때문에 개편에 들어갔던 다큐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산하는 그 담당 피디인 황수호와 통화 중이었다.

"결정은 산하 씨한테 맡길게요."

"그냥 섬으로 가시죠."

"괜찮으시겠어요?"

"왠지 분위기 있잖아요. 별이 내려앉은 외로운 섬에 소리꾼 하나와 철썩이는 파도..."

황수호가 휘파람을 휙 하고 불었다.

"역시 낭만을 아시는군요. 소리꾼 산하 씨. 이래서 제가 산하 씨를 놓지 못하는 겁니다."

"소리꾼은 좀 빼주세요."

"이미 다큐 타이틀인걸요. 그나저나 요새 어디 막 계약하시고 그러신거 아니죠? 저 불안해 죽겠습니다."

"왜요?"

"누가 산하 씨 채가서 방송 펑크날까봐 그러죠."

"에이, 누가 절 채갑니까. 걱정마세요."

"산하 씨, 저 버리시면 지구끝까지 쫓아갈겁니다."

"누가 보면 헤어지는 연인인 줄 알겠네요. 아우 징그러."

"말이 그렇다는 거죠."

여전히 넉살좋게 웃던 황수호 피디가 다른 용건을 꺼낸다.

"아참, 산하 씨...."

"네?"

"그러니까 사전모임때, 그...음..."

"왜 이렇게 뜸을 들이세요?"

"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 그럼 그때 봅시다. 산하 씨 몸관리 잘 하세요. 산하 씨 몸은 산하 씨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건데요?"

"국가 지정 보물입니다."

"오버가 심하시네요. 이만 끊을게요. 장보던 중이라서요."

"아, 그런거면 얼른 끊어야죠. 그럼 나중에 뵐게요."

"네, 들어가세요."

산하가 골라놓은 재료를 가만히 살펴보고 있던 새봄이, 통화를 종료한 그에게 묻는다.

"황 피디님이 뭐라고 하세요?"

"그냥 촬영내용 알려주셨어."

"저 다 들었어요. 첫편 촬영하셨다는 거 말도 안 해주시고."

"그걸 뭐 자랑이라고...내 이름도 인터넷뉴스에 몇번 나왔을텐데, 찾아보지도 않고,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실망이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 오늘 가서 볼거예요. 반드시!"

어딘가 야무진 표정으로 말하는 새봄에게 산하가 장난을 친다.

"그러세요. 봄봄봄 어린이. 내일까지 시청하고 감상문 1만자 이상 써 오는 거 잊지마세요."

"흥!"

오늘은 털이 복실복실 달린 후드티를 입고 온 새봄은, 새하얀 얼굴에 새침데기 표정을 지었다.

"이야, 오늘 우리 봄봄봄 왜 이렇게 귀여워? 역시 강아지처럼 털이 보송보송한 걸 입어야 귀엽다니까."

"뭐라고요?"

새봄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늘 함께 장을 보고, 같이 장사를 하다보니 정이 든건지, 아니면 이런 상황 자체가 좋은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봄봄봄,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아니에요. 추워서 그래요. 얼른가요."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다시피 앞서가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산하도 얼른 걸음을 옮겼다.

"봄봄봄, 이건 들고 가야지."

***

며칠이 더 흘렀다.

[9,427,600원/10,000,000원]

이제 돈을 거의 다 모은 산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하게 한달 안에는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오늘 공연만 끝내면 이 게릴라성 콘서트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며 상가 2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옥희 할머니가 세 들어올때까지 써도 된다고 했지만, 딱히 쓸일도 없고, 쓰기도 뭐해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던 장소였다.

주인 할머니가 함께 넘겨주신 열쇠를 문 손잡이에 밀어넣은 산하는 삐걱 소리가 나는 문을 밀었다.

창문을 통해 새 들어오는 흐릿한 가로등 불빛을 제외하면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어렴풋이 보이는 외부 불빛에 의지해 형광등 스위치를 찾은 산하는 곧바로 딸깍 눌렀다. 환하게 밝혀진 내부는 깔끔하지만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어디 보자...'

헤어 손질할만한 장소를 탐색하던 산하는 기둥 근처에 부착된 거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면 적당하겠구나 생각하던 그때, 그 옆에 나무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젠가 이곳을 사거나 얻을지도 모르니 한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이곳 저곳의 문을 열어보았다.

모든 곳은 예상대로 비어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나무문을 열었을 때였다.

거기엔 전 주인이 남기고 간 듯한 대형 보관함 몇개가 놓여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걸 확인하고 문을 닫으려던 산하는 보관함 틈새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의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걸 확인했다.

- 60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