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63화 (63/445)

63화 다 모을 거야(1)

딸랑 소리가 나며 젊은 남자손님 한명이 식당 내부로 들어섰다. 그는 내부가 썰렁하자 멈칫하더니 묻는다.

"안녕하세요? 식사 되나요?"

지역특성상 이 시간이면 손님도 거의 없고해서, TV시청만 끝나면 가게문을 닫으려 했던 식당주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요. 혼자오셨어요?"

"네, 콩나물국밥 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식당도 프로정신을 가져야만 살아남기에, 그녀는 애써 TV화면에서 눈을떼고 주방으로 들어서려했다.

그녀의 딸도 막 밑반찬을 담으러 가려던 그때.

화면이 전환되더니 빙글빙글 돌아가며 캄캄한 밤을 비추는 하얀등대가 나타났다.

그 등대 위쪽으로는 별이 쏟아져내릴듯 가득했고, 바람에 밀려 넘실대는 바다위에는 달그림자가 머물렀다.

이 장면은 황수호 피디가 따로 촬영해서 편집한 것이었는데,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티가 났다.

누가 봐도 낭만적이라 할만한 배경이었다.

이 바람에 엉거주춤 일어선 식당주인은 움직이지 못했고, 자리를 잡고 앉은 남자 손님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이거 무슨 프로그램이에요? 좋다..."

"소리꾼 박산하의 향토음식기행이에요."

남자 손님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향토음식기행요?"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빤히 쳐다봤다.

그곳에서는 등대아래에서 기타를 든 한 사람이 현을 튕기며 연주를 시작했다. 단지 실루엣 뿐이지만, 앞서 본 방송을 봤던 사람이라면 누군지 어느정도 알아맞힐 정도였다.

산하는 클래식 기타의 현을 뜯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 어둠을 밝게 비추이면, 나 언젠가...."

그냥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백철우의 음성, 그것이 클래식 기타의 정점에 이르렀던 유비원의 기타연주 솜씨와 합쳐져 흘러나오고 있었다.

엄마에게 재미없다고 당장 틀자고 요구했던 그녀는, 별이 빛나는 밤에 노래를 부르는 매력적인 목소리의 남성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대체 이 다큐는 정체가 뭘까.

무슨 보너스에서 저런 대단한게 나오는 거야. 보너스가 진짜 본방송 같았다.

바람소리가 섞인채로 들리는 그의 노래는, 왠지 모를 현장감마저 더해주며, 내가 마치 섬에 놀러와 라이브로 듣는 느낌마저 주었다.

"와, 엄마. 저 사람 박산하 맞지?"

"응? 으응..."

"진짜 낭만적이다. 노래도 잘 부르고..."

그녀의 어머니 또한 노래와 분위기에 푹 빠져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노래를 듣던 두 모녀는 감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딸, 저 사람, 대단한 거 인정하지?"

"이건 무조건 인정."

그때, 모녀와 비슷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남자 손님이 질문을 던졌다.

"저 가수분 이름이 박산하인가요?"

"네, 박산하 맞아요. 아참 내 정신 좀 봐. 금방 해드릴게요."

같은 시각.

하산해, 박산하, 백철우 이렇게 세개의 팬 카페에서는 난리가 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인원이 제일 많은 백철우 팬 카페.

- 여러분 여러분, 보셨나요? 낭만 저격수! 와. 저 감동먹었잖아요.

- 저도 봤습니다. 들었습니다. 세상에 정말....

- 화질만 조금 좋았어도...대박인데.

- 지금만으로도 대박 같은데요? 아무튼 우리 제육볶음님 대단하십니다. 정말.

- 그 배경, 그 노래, 그 연주 ...진짜 이번 영상은 소장각입니다.

- 전 이미 소장중입니다. 벌써 몇번째 보고 있는건지...

- 아니 단독 콘서트 좀 해주시면 안되나요? 이거 어디에다 문의해야 하죠? 소속사도 없고...

- 그러게나 말이에요.

***

박상태는 인터넷 팬카페에서 새로운 소식을 접했다. 바로 다큐 보너스 영상에 관한 소식이었다.

음침하게 웃던 그는 혼잣말을 했다.

"이 자식이, 이제 나도 다 알아."

빨래를 개다말고 이 모습을 지켜 보던 장순희는 요즘들어 남편의 태도가 의아하기만 했다. 짠돌이라서 새 물건 사는걸 극도로 싫어하더니, 최근에는 새 컴퓨터를 사서 들여놓지를 않나.

신문만 보던 양반이 매일 컴퓨터앞에 매달려서 뭘 하는지.

"여보."

"......"

"여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박상태가 화면에서 마누라에게 눈을 돌렸다.

"어? 어!? 왜?"

"요새 대체 뭐 하는거예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오른손 엄지를 치켜올린 박상태.

"뭐 하긴, 점차 발달하는 문명사회의 정보를 수집중이지."

"하여간에 어디서 쓸데없이 주워들은건 많아가지고."

"뭐야?"

불이라도 뿜어져 나올듯한 박상태의 눈빛에 지지 않고 맞서는 장순희.

"당신 지금 나 노려보는 거예요?"

박상태는 날이 갈수록 야생마처럼 거칠어지는 마누라의 성격에, 눈을 서서히 내려깔며 말했다.

"아니, 그럴리가. 요즘 내 눈이 좀 이상해서 그래."

"노안에 그런거 자꾸 보면 눈만 더 나빠져요. 그러지말고 나가서 따릉이 밥이나 좀 줘요."

그는 언제 눈을 내리깔았냐는 듯 버럭했다.

"뭐? 지금 내가 개밥 줄 군번이야?"

"지금 집에 당신이랑 나 밖에 더 있어요? 이따가 산하 장 가지러 온다니까 약속 잡지말고요."

반발하던 박상태는 급격히 태세전환하며 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온다고?"

"그래요."

"알았어, 개밥주고 올게."

그는 창고로 가더니 개사료가 든 봉지에서 개밥을 수북하게 퍼서 따릉이에게로 향했다.

"따릉아, 박산하 온댄다. 옜다 기분이다."

좌르륵 소리와 함께 개밥그릇에 사료가 듬뿍 쌓였다.

평소 주던 양보다 1.5배 정도는 많은 양을 본 강아지는 신나게 꼬리를 흔들더니 사료그릇에 머리를 처박았다.

"옳지, 잘 먹는다."

그는 마당에서 집안으로 돌아오자마자 꽃무늬 보자기를 꺼내왔다.

"그건 뭐하게요?"

"공짜 미용사 오잖아."

"으이구, 이 양반아."

그때, 대문에서 삐걱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현관문이 열리며 산하가 들어섰다.

"저 왔어요."

아들을 보자마자 검지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는 박상태.

"왔냐? 컴히어."

"아버지 왜요?"

사실 박상태는 저렴한 미용실 위주로 몇 곳을 옮겨봤지만, 영 이상하게 잘라줘서 마음이 불편하던 차였다.

그런데 지난번 아들이 헤어를 손질해 준 뒤로 깜짝 놀라버렸다. 어찌나 마음에 쏙 드는지.

그 후로 어떻게 다듬어달라고 할까 하다가, 정면 돌파 하기로 마음 먹은 바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박상태는 멀뚱멀뚱 눈만 뜨고 서 있는 아들에게 꽃무늬 보자기를 휙 하고 집어던졌다. 그것을 얼떨결에 뒤집어 쓴 산하는 재빨리 얼굴에서 보자기를 벗겨냈다.

"아버지, 이건 왜요?"

"내 머리나 좀 손질해봐."

눈을 반짝 빛내던 산하가 묻는다.

"오, 아버지. 제 솜씨에 탄복하신거죠?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내심을 꿰뚫을 것 같은 아들의 눈빛을 피하는 박상태.

"탄복 같은 소리하네. 공짜 미용사 두고 돈을 왜 줘?"

"아버지 전 다 알아요."

산하가 음흉한 표정으로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웃어대자, 박상태는 괜스레 심술이 나서 보자기를 뺏으려 했다.

"에이, 해주기 싫음 말아."

얼른 아버지의 손길을 피해낸 산하는 욕실 방향을 가리켰다.

"아버지 얼른 욕실 들어가세요. 제가 지난번에 짬내서 자격증도 땄거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박상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격증을 땄어?"

"네, 헤어미용사. 죽이죠?"

"죽이기는..."

박상태는 못 이기는 척 욕실로 향했고, 산하는 윤정이 올때마다 헤어 다듬어 달라며 사다 둔 미용가위를 가져왔다.

"아버지 컷 좀 다르게 하고, 포마드 쫙 발라서 넘기시면 멋있을 것 같은데."

"됐어. 그냥 지난번처럼만 해줘."

"네, 그런데 아버지."

"왜 자꾸 불러."

"여기 욕실 수리 한번 해야하지 않아요? 저기 위쪽에 타일 깨진 것 좀 보세요."

실제로 산하가 가리키는 곳 뿐만 아니라 욕실 전체가 상당히 낡아 있었다. 청소로는 도저히 해결 안 될 정도.

"됐어. 나중에. 아직 쓸만해."

"그리고 이 빨간색타일 너무 촌스러워요. 윤정이가 뭐라는 줄 아세요?"

"뭐래?"

"재개발지역 단독 아무 욕실이나 들어가도, 우리집보다 좋을거래요."

뜨끔한 표정을 지은 박상태가, 산하의 눈길을 회피하며 말했다.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윤정이 지가 수리하라 그래."

"그냥 제가 해드릴게요."

"뭐?"

"변기도 너무 오래됐고, 세면대도 저기 금 간것 보세요. 진짜 수리 해야해요. 조만간 사람 부를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뭐?"

"에이 좋으시면서. 움직이지 마세요. 찔리면 피나요."

"....."

뒤쪽에서 두 부자의 정다운 듯 사나운 대화를 듣고 있던 장순희는 눈을 크게떴다.

"그게 무슨 소리니?"

"아, 엄마. 욕실 수리 하게요."

남편의 영향을 받아 어느새 짠순이가 된 장순희가 욕실내부를 휘 둘러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됐어. 아직 쓸만해...저거 덧방도 안 된다던데, 다 철거하려면 돈 많이 나와. 그냥 놔둬."

"엄마 저 이제 돈 많이 벌어요.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어요."

사실 더 일찍 해드리려고 했었지만, 아버지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여태 미뤄왔던 산하는, 이번에는 반드시 수리를 해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아들에게 못내 미안했던 박상태는, 괜히 투덜거렸다.

"쓸데없는데 돈을 써...."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만 했다. 마음 좀 고쳐먹으라고 대놓고 구박하긴 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실제로 미워하지는 않았다.

자식은 다 같은 자식이다.

단지, 다른 자식들과 달리 자리를 못잡았기에 마음이 아팠다. 심지어 앞날이 걱정되어 산하에게 주려고 꼬박꼬박 부었던 적금이 있었다.

그래서 돈도 아둥바둥 아꼈던 것인데.

아무래도 이제 적금을 그만부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박상태는 괜히 산하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 그만 보고 얼른 잘라."

"그럼 허락하신거죠?"

"그건 모르겠고, 얼른 자르기나 해."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내일 부를게요."

"뭐?"

다음 날.

윤정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

귀신 나올것처럼 우중충하던 타일은 어디가고,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타일과 예쁜 도기가 자신을 반기는 게 아닌가.

욕실을 공사하자마자 바로 쓰면 하자가 생기기에 잠시 마당 야외화장실을 이용해야하지만, 윤정은 그런 불편함은 아랑곳없이 날아갈듯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비데까지 풀 세트로 설치된 모습에 감격한 그녀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엄마, 이게 다 뭐야? 아빠가 드디어 마음 고쳐먹으셨어?"

"아니, 네 오빠가 밀어붙인 거야."

"오빠? 누구?"

"누구긴 산하지. 네 아버지 쇠심줄고집 이기는 사람이 산하밖에 더 있어?"

"하긴, 와, 박산하 돈 좀 벌었는데... 아야! 엄마 왜 때려."

"오빠한테 박산하가 뭐야."

"치, 엄마도 좋지?"

"좋기야 좋지. 그런데 돈 너무 많이 쓴거 아닌가 싶다."

"에이, 오빠한테 이 정도는 푼돈일걸? 맛집으로 버는 돈이 얼만데."

"맛집이면 뭐하니?"

산하는 항상 최상의 맛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식자재가 모두 소진되면 영업을 중단하는 것도 그 이유였지만, 요리사가 항상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맛을 제대로 낸다는 신념으로 장사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산하는 신비한 능력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컨디션에 따라 그 맛이 어느정도 차이나는 걸 느꼈었다.

그래서 영업시간을 그리 길게 가져가지 않았다.

그런 영업방식은 맛집의 수익에 제한을 걸었지만, 손님이 끊임없이 찾아와 찬사를 내뱉게 만들었다.

"그래도, 오빠 장사 신념이잖아. 그렇게 해도 돈 엄청 벌걸? 그리고 음원수익이랑 방송 출연료도 있는데 뭐."

"그러고보니 네 오빠 방송 나온 거 뭐 없어? 이 녀석이 말을 해야 말이지."

"아 맞다. 깜빡했네. 엄마, 저번에 다큐 개편한 거 이번에 새로 찍었더라."

"그래? 얼른 틀어 봐."

잠시 후, 윤정은 TV화면으로 그 영상을 부모님과 함께 보다가 보너스 영상을 보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엄마, 오빠 기타는 언제 배웠나 몰라. 와 또 봐도 죽인다."

"얘가 이제는 못 하는 게 없다니....."

관심없는 척 소파에 앉아있던 박상태는 신문 뒤에서 흐뭇하게 웃었다.

***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은 시점.

산하네 식당은 교육방송 이후로 손님이 더 늘어났다. 그 늘어난 손님 때문에 밥먹기가 더 힘들어진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판소리 보존협회장 강정열과 HO엔터 대표 곽기훈이었다. 그들은 이른 새벽부터 텐트 하나를 쳐 놓고 함께 들어가 앉아있었다.

잠시 충전식 온열방석의 따스함을 느끼던 강정열이 텐트 천 너머가 밝아진 것을 보며 투덜댄다.

"에이 추워. 밥 한번 먹기 힘들구나."

"아저씨, 그래도 재밌지 않습니까?"

"이놈아, 뭐가 재밌어?"

"사실 아저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돈으로 해볼만한건 다 해봤잖아요. 그런데 한겨울에 이렇게 기다리니까 운치도 있고 재밌잖아요."

"이놈아. 퍽이나 운치가 있다."

"운치 있는데... 아참, 아저씨 산하 씨 이번에 촬영한 다큐 보너스영상 보셨습니까?"

"봤지..."

"역시 산하 씨는 대중가요로 가야합니다."

강정열은 옷 소매를 걷어붙였다.

"뭐 이놈아? 또 한번 해보자는게야?"

"보셨으면 이제 인정하실때도 됐잖아요."

"이놈아, 본방송 판소리도 죽여줬어."

"그건 그래요. 그런데 산하 씨는 언제쯤에나 우리 손을 잡아줄까요?"

"글쎄다. 어째 여기 밥 먹으러 오는 게 목적이 된 것 같으니 원."

"전 그것도 목적 맞습니다."

"그래? 그럼 넌 밥이나 먹고 산하군 영입은 포기해. 내가 영입할테니까."

"그건 안 되죠."

"어허, 이 욕심만 많은 녀석을 보았나."

"그러는 아저씨는요?"

그때, 텐트 위쪽으로 난 숨구멍으로 고개를 들이민 산하.

"두 분 그만 좀 싸우세요. 언제까지 찾아 오시려고 이러세요?"

흠칫 놀라 위쪽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곧바로 대답했다.

"평생 아니겠습니까?"

"죽을때까지 올까 합니다."

"무서워서 식당을 옮기던가 해야겠네요."

"어허, 박 사장.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러니까요. 산하 씨 안 됩니다. 제가 요즘 여기 요리 먹는 재미로 사는데요."

"두 분이 그러셔도 전 아직 할 생각 없습니다. 할일이 좀 있어서요."

산하의 말에 반색하는 두 사람.

"아직? 그거 희망 있다는 소리죠? 할일이 뭔데요?"

"크흠, 말해보세요 박 사장. 내 기꺼이 도울 의향이 있음이니."

"됐습니다. 그런건 제가 알아서 해야죠."

두 사람이 아쉬운 눈빛을 지을때 산하의 등을 콕콕 찌르는 손길이 있었다. 고개를 돌린 산하는 오늘도 얼굴이 곧 패션인 그녀를 바라보았다.

"봄봄봄, 왜?"

"사장님 찾아오신 분이 계셔서요."

"날? 누구? 혹시 캠핑장 털보아저씨?"

"아니요. 무슨 요리 잡지사에서 오셨다는데요?"

"요리 잡지?"

- 64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