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다 모을 거야(7)
알록달록한 텐트 행렬이 지그재그로 줄을 잇다 못해, 추위를 견디기 위해 단단히 준비한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인도 저편까지 줄을 서 있었다.
'와....'
잡지에서 소개해 준 맛집이란 맛집은 다 찾아가봤었지만, 이토록 줄이 긴 집은 처음이었다. 기다림 난이도 별 다섯개에 바로 수긍이 갔다.
오늘 먹을 수 있긴 한걸까.
넋을 놓고 식당과 줄 선 손님을 바라보던 용문주는 줄의 맨 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가 끝인거냐고 중얼거리던 그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에 줄을 서 있자니, 바로 앞에 서 있던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추워. 더 일찍 올걸."
"오늘 못 먹겠지?"
"아마도?"
"그냥 갈래?"
"상황 좀 더 보고. 된장찌개 언제 마지막으로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러게. 작년 가을에 먹을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제발 사람들이 여기 몰랐으면 했더니, 뭐가 이렇게 많아졌어."
"그러게, 딱 여기까지라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냥 오후타임까지 견뎌볼까?"
"야, 그건 너무 무리 하는 거 아니야?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난 그 정도 맛이면, 기다릴 수 있어."
"그건 나도 동의하는데, 할일이.... 에라 모르겠다. 오케이. 오후타임까지."
"오케이!"
궁금해진 용문주는 두 남성에게 슬며시 물어봤다.
"여기 지금 기다려서 먹기 힘든가요?"
각진턱을 가진 사내가 뒤를 돌아보더니 그를 슬쩍 훑어보고는 묻는다.
"처음이세요?"
"네? 네."
마치 내가 이곳 손님으로는 선배이니 가르침을 내려주겠다는 눈빛으로 돌변한 사내가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기는 말이죠. 백퍼센트 드실려면 새벽 3시 이전에는 줄을 서 있으셔야 해요. 지금 시간에는 거의 못 먹는다고 봐야죠. 그리고 혹시 아시나 모르겠는데, 여긴 재료 떨어지면 얄짤없어요. 바로 쿵!"
"쿵이요?"
"문을 닫아버리는 거죠. 여기 사장님 마인드가 대단하시거든요. 돈이고 뭐고 맛을 못 지킬바에는 팔지 않겠다. 야, 안 그러냐?"
사내의 옆에 잠자코 서 있기만 하던 스포츠머리 사내가 친구에게 옆구리를 찔리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친구 말이 맞아요. 힘들법도 한데, 사장님 마인드 변함이 없으세요. 매일 매일 장 봐오시고, 재료 떨어지면 칼 같이 문 닫으시고. 특히 맛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줄 길이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디가서도 이 맛 보기 힘듭니다. 아주 환상적이라 기절하실수도 있
으니까, 조심하세요."
잡지와 비슷한 말을 내뱉는 두 사내를 바라보던 용문주는 머리를 긁적였다. 음식이 맛있어봐야 음식이지, 대체 어느정도길래 저리도 열변을 토할까.
TV 프로그램에서 보면 많은 식당사장님이 직접 식자재를 공수해오고, 고유 레시피도 있고, 독자적인 마인드도 있고.
그거랑 대체 뭐가 다른거지. 이렇게 오버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극찬 할 맛인가.
줄이 이렇게 길다보니, 이제 맛이 있을거라는 건 인정하게 된 용문주였지만, 환상적인 맛이라서 기절할수도 있다는 찬사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그나저나...'
길게 늘어선 줄이 줄어들 기미가 안보였기에, 용문주는 이만 집에가서 일이나 하고 새벽에 다시와야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궁금증을 너무 참기가 힘들었다.
'어쩌지...'
한참 고민하며 머리를 벅벅 긁던 용문주는, 결국 집 구석에 처박혀있는 일인용 텐트를 가지고 내일 다시 오기로 했다.
"어? 가시게요?"
"네, 새벽에 다시 도전해 보려고요."
"우리는 시간이 오늘뿐이라 그런건데, 선택 잘 하신겁니다. 그나저나 큰일나셨네요."
"큰일이요?"
"우리처럼 산하네 요리전문점 노예가 될 수 도 있습니다. 바짝 긴장하세요."
"에이, 설마요."
"어어? 설마 아닙니다."
제법 진지하게 충고하는 스포츠머리 사내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네, 참고할게요."
용문주가 가벼운 인사를 하고 줄을 벗어나자, 스포츠머리 사내가 친구에게 말했다.
"잠깐만, 내가 경쟁자에게 무슨 말을 해준거냐?"
"그러게, 야 뒤에 봐봐."
용문주가 조금 전 서 있던 뒤쪽에, 어느새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언제 또 이렇게?"
"안 되겠다. 야, 우리 프리랜서 할래?"
각진턱을 가진 사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받는다.
"그럴까? 안 그래도 시간 자유로운 직업 없나 찾는 중이야. 이 집 요리가 내 삶의 낙인데, 그 정도 투자는 해야지."
"맞는 말이야. 난 내가 대체 뭘 위해 사나 했는데, 여기 된장찌개 한번 맛 보고 나서 깨달았잖아. 이 집 요리 먹으려고 살아온 것 같더라."
"너도 그러냐? 밤마다 생각난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우리 저번에 그 손님들처럼, 당분간 번갈아가면서 포장이라도 해서 먹을까?"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는 스포츠머리 사내.
"포장보다는 여기서 바로 먹는 게 더 맛있던데."
"그거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맛있잖아."
"하긴, 생각 좀 해보고. 어? 야 저기 봐라. 이탈 손님 생겼다. 네 명이 한번에 가네."
"역시 인내심 있는 사람이 산하네 요리 전문점 테이블에 앉는거지."
"그렇지. 오늘은 기대 좀 해보자."
그렇게 두 사람은 하염없이 기다렸고, 끝내 먹지 못했다.
***
"내일 영하 17도, 체감온도 23도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올 겨울 가장 추운 출근길이 될 것 같습니다. 외출 준비 단단히 하셔야 겠습니다."
일기예보를 듣던 용문주는 생각만해도 추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하필이면...'
줄 서려고 한 날 이렇게 춥냐고 구시렁거리던 그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새벽.
따르릉 울리는 스마트폰 알람소리에 눈을 번쩍 뜬 용문주는, 오늘 기어코 산하네 요리 전문점을 정복하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그 단단한 의지를 보여주듯, 내복을 두 개나 껴입고, 또 겨울옷을 덧입고, 미리 준비해 둔 핫팩까지 백팩에 챙긴 그는 1인용 텐트가 든 가방을 손에 들었다.
마치 에스키모와 같은 차림으로 변신한 용문주는 뒤뚱거리며 현관을 나섰고, 콜택시를 탔다.
"아유 추운데 캠핑 가시나봐요?"
"그건 아닌데요."
"아니에요?"
"네."
"그러시구나, 어디로 모실까요?"
맛집에 줄 서러 간다고 말하기는 뭐 했던 용문주는 별말없이 주소를 불러주었다. 그렇게 한참 후 해당장소에 도착한 택시기사는 혀를 내둘렀다.
"아니, 여기 뭡니까? 무슨 텐트가 이렇게...."
"아저씨, 여기가 맛집이래요."
"아, 그럼 손님도?"
"네."
조금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용문주의 말에, 눈을 반짝 빛내던 택시기사가 검게 송송 솟아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저도 맛집 좋아하는데. 지금 줄 서면 먹을 수 있나요?"
이 아저씨가 왜 이러나 싶었던 용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처음이라 잘 모르기는 하는데, 아마도 먹을 수 있을걸요?"
"그래요? 에이 모르겠다. 오늘 영업 끝."
그는 황당해졌다. 이 택시기사님이 방금 뭐라고 한거지?
"네? 영업 끝이요?"
"네, 영업 끝이요.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려고요."
"기다리려면 추우실텐데요."
"트렁크 구석에 캠핑장비 조금 넣어놨습니다. 제가 캠핑 마니아거든요."
"아!"
그래서 캠핑 어쩌고 하셨었구나 생각하던 용문주는, 택시 문을 열었다.
"그럼 저 먼저 가서 줄 서 있을게요."
"네, 손님. 뒤따라 가겠습니다."
새벽 2시에도 장사진을 이루는 산하네 요리전문점은,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불구하고, 기대감의 열기로 뜨끈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더 흘러갔고, 드디어 대기표를 나눠주는 식당 직원이 등장했다.
시간을 쏟아붓고 추위를 견디며 대기표를 받아든 용문주는 쾌감을 느꼈다. 내가 해냈다 뭐 이런 성취감이라고나 할까.
그가 맛집을 잘 못 끊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때, 그의 뒤쪽에 텐트를 치고 앉아있던 택시기사가 지퍼를 열고 조용히 말을 걸었다.
"손님, 저기 뒤엣분들이, 여기가 그렇게 미친듯이 맛있다네요?"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용문주도 지퍼를 빼꼼히 열고 대답했다.
"네, 사람들 말로는 그런데, 과장을 조금 많이 보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음식은 어디까지나 음식이죠."
"그건 맞습니다. 맛을 최대치로 올려봐야 음식이죠. 아까 엿듣기로는, 입안에서 무슨 폭죽쇼가 벌어진다는 둥, 훨훨 날아갈것 같은 맛이라는 둥. 이상한 말 많이 하더군요."
"그래도 이 정도 줄 선 거 보니까, 꽤 괜찮은 맛집일 것 같습니다."
"그건 그래요. 저도 손님 덕분에 새로운 맛집 줄 서보네요. 고맙습니다."
"뭘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도 한참이 더 지난 후, 드디어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 용문주는 신나는 걸음으로 입장해서 바 형태로 된 테이블에 택시기사와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잠깐만에 미리 주문했던 된장찌개가 앞에 놓였다.
뭐가 들어가있나 한번 살펴보던 그는, 이곳을 처음 찾았을때 여타 손님들이 보이는 반응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별거없는데라고 중얼거리던 그는 깜짝 놀랐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택시기사 아저씨가 난리를 쳐서였다.
"와! 그 말 맞네. 아니 뭐 이런 맛이 다 있어? 세상에..."
그 뜨거운 걸 제대로 식히지도 않고 흡입하듯 떠먹는 택시기사의 모습에, 용문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바로 된장찌개를 입에 집어넣었다.
무언가 확 터지는 맛이 입 전체를 휘돌아 나갔다.
'아.....'
맛있다. 너무 맛있다. 진짜 맛있다. 말도 안 되는 맛이다.
세상에는 찬사를 위한 많은 단어가 존재하지만, 그는 그 찬사를 위한 용어를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충격받았다.
오로지 맛있다는 말만이 그의 머리를 둥둥 떠다녔고, 혓바닥은 빨리 더 달라며 아우성쳤다.
노래 실력보다 더 미쳐버린 이 요리 솜씨는 대체 무엇인가.
저 사장님 뭐야?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뜨고 된장찌개를 내려다보던 용문주는 이내 택시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된장찌개 백반을 해치운 용문주는, 다른 손님의 충고를 인정하고 말았다.
이곳의 노예가 될거라던 그 말.
심지어 안도경이라는 맛집 기자에게는 마음속으로 사과까지 했다.
그 후 국물 한방울까지 싹 긁어먹은 그는, 앞으로 여기에서 끊임없이 줄을 설 것 같다고 생각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미치게 맛있어...'
***
식당 영업을 끝낸 산하는 발걸음도 가볍게 자취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때,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아들?"
"이야! 장 여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여사는 무슨, 너 오늘 바빠?"
그때 산하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갓난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니요 뭐 바쁘진 않은데, 이게 무슨 소리예요?"
"뭐긴 뭐야, 제동이 내외 여기로 피신왔다. 주변에서 항의가 많이 들어와서."
"그렇게 많이 울어요?"
"그래, 나도 잠시만 봐서 이 정도인 줄은 몰랐지 뭐니. 시도때도 없이 우네. 잠들었나 싶으면 또 울고, 잠잠한가 싶으면 또 칭얼대고. 그래서 같이 병원가봐도 아무 이상없다 그러고. 아주 환장하겠다."
"큰일이네요."
"큰일이고 뭐고, 너 유진이 좀 봐줘. 네 품에만 안기면 안 운다며?"
"어...그렇긴 하죠."
"너한테는 미안한데, 당분간 밤만이라도 유진이 좀 데리고 자라. 안 그러면 이 동네도 난리나겠다."
"뭐, 알았어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 지금 갈게요."
"아들 땡큐다."
한참 후 단독 본가에 도착한 산하는 유진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자지러지는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반응한 따릉이가 마구 짖어대고, 주변이 꽤 소란스러웠다.
얼른 대문을 열고 들어선 산하는 현관문을 지나 거실로 들어섰다. 그곳 거실에는 당황한 표정의 윤정이 유진이를 달래는 중이었다.
그 주변으로는 지친 표정의 박제동과 산하의 형수가 쓰러지다시피 앉아있었고, 박상태와 장순희는 이 사태를 대체 어찌 해결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유진아, 그만 울어. 응?"
"윤땡, 잘 어울리는데?"
"뭐래, 여기 옆 옆집 수험생 아들 둔 김 씨 아줌마가 와서 아까 뭐라하고 갔어. 빨리 유진이 좀 안아 봐."
"이리 줘."
장순희는 아들 내외의 말이 사실인지에 대해 긴가민가 하는 중이었다. 집안의 누가 안아도 저렇게 울어대는데, 쟤가 안으면 울음을 뚝 그친다고?
그 시선을 받으며, 산하는 유진이를 안아들었다.
"유진아, 잘 지냈어? 오로로 까꿍?"
눈물까지 살짝 고인채로 칭얼대던 유진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끝내는 까만 눈동자로 삼촌을 멀뚱멀뚱 바라보더니 방긋 웃었다.
가까이 다가와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순희는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했고, 박상태는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산하와 유진이를 바라보았다.
그때, 제동이 산하에게 말했다.
"산하야, 미안하다. 우리끼리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도련님..."
"괜찮습니다. 유진이 이쁘잖아요. 당분간 밤에는 제가 데리고 잘게요."
"그래 줄래? 진짜 고맙다. 내가 옆에서 분유 타 먹이는 거랑 기저귀 가는 건 할게."
"알았어. 이 정도야 뭐."
어느새 방실방실 웃기만하는 조카를 바라보던 윤정은, 아이를 향해 웃어주는 산하의 모습을 보았다.
'이건 사기야...'
***
펜 끝으로 책상 위를 툭툭 두들기던 편집장이 화난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도경 씨, 우리 잡지 애독자한테 돈 먹었냐는 항의 전화 몇 번 온 줄 알아요?"
"죄송합니다."
"몇 가지만 수정하면 다 되는 줄 알았어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체 그 식당 사장이랑 무슨 관계에요? 뭐 내가 마지막 점검 제대로 못한 탓도 있겠죠. 앞으로 맛집 코너 다른 사원이 맡을테니까, 도경 씨 사과문 작성하세요."
"네?"
도경은 상상도 못해봤던 사과문이라는 단어에 당황했고, 편집장은 강하게 압박했다.
"못 알아들어요? 단독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과문. 제멋대로 했으니까 그 정도는 내야죠. 우리 회사가 아무리 자유롭기로서니, 책임도 없는 줄 알았습니까? 오히려 더 강한 책임이 따르죠. 그간 쌓아온 우리 잡지사 이미지 어쩔겁니까? 사과문 내고도 해결
안 되면 시말서 준비하세요."
"시말서요?"
"시말서 몰라요? 다른 말로는 경위서."
사실대로 썼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됐나 생각하던 도경은 편집장에게 항의하려 했다. 일단 가서 드셔보시고 말씀 하시라고.
그때였다.
- 7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