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최우신의 붓글씨(3)
강하게 눌러오는 붓에 신음하던 화선지에 먹물이 번져나가고, 거침없이 그어진 획 하나에 힘이 살아있었다.
그 한획에 새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힘과 힘이 대결하는 듯 거침없이 그어진 선 하나하나는 일견 너무 강해 서로 자신이 잘났다고 뽐내며 어울리지 않는 듯 보였으나, 이내 합쳐져 하나의 글자로 완성되자 대단한 완성미를 보여줬다.
게다가 붓누름의 강약조절은 어찌나 능숙한지, 먹의 농도나 문자의 균형도는 대충 봐도 좋아보였다.
서예쪽에서 수십년은 구른듯한 솜씨랄까.
'와...'
그녀가 놀라는 사이에도 거침없이 그어진 붓은 일곱자의 한자를 완성했다.
<버드나무는 백번 꺾이더라도 또 새로운 가지가 올라온다. (柳經百別又新枝)>
산하가 쓴 건 조선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상촌 신흠이 쓴 시조의 일부분으로, 이 7언절구 시는 퇴계 이황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시구 중에서도 이 부분이 자신의 성격과 닮은듯하여 썼는데, 새봄과 만두는 너무 놀란나머지 눈이 동그래져서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기에, 산하는 다시금 붓을 구석으로 움직였다.
새봄은 계속해서 화선지를 바라보았고.
그는 최우신의 붓글씨 솜씨로 자신의 성을 뺀 이름 두 자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은 호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획한획 그어지는 이름.
그 무엇을 가져다놔야 아름다움을 비견할 수 있을까.
부드러운 강줄기가 굽이굽이 돌아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흘러가는 듯, 이른 새벽 이슬을 맞은 화초가 떠오르는 해를 받아 빛나 듯.
그토록 아름다운 붓글씨가 화선지 한쪽에 아로새겨졌다.
극과극이라 할 수 있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한 화선지에 담겨 묘한 조화를 자아냈다.
원래는 최우신의 붓글씨 솜씨를 전체적으로 이용할 계획이었지만, 이 시구만큼은 정순명의 붓글씨가 마음에 들어서 그의 솜씨를 이용하는 중이었다.
그 작품을 완성한 산하는 잠시 붓을 내려놓고 시구를 감상하더니, 미리 준비해 둔 붉은 도장까지 찍었다.
화룡점정이라 할만한 완성이었다.
이 놀라운 광경에 새봄은 입을 헤 벌렸고, 만두는 눈만 계속해서 끔뻑이며 화선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특히 새봄은 너무 놀라워 말도 하지 못했다. 저 강한 필체만 해도 어마어마한 서예가의 솜씨인데, 그 아래 왼쪽에 쓰인 붓글씨는 어찌 저리 아름다울까.
그 두 붓글씨의 조화는 새봄을 매료시켰다. 그는 진정 천재였던가. 요리와 노래, 악기, 헤어도 믿을 수 없는 수준인데, 저 붓글씨를 보라.
이 시대의 이름난 명필도 울고 갈 것 같았다.
"사장님...."
붓글씨에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하게 산하를 부르는 새봄.
"응?"
"천재셨어요....?"
"천재는 무슨."
"형님, 메뉴판 진짜였네요. 잘 모르는 제가 봐도 이건 좀 대단해 보이는...."
그러나 산하는 말이 없었다. 새롭게 뜬 미션 때문이었다.
[연계미션 - 첫 붓글씨 전시회에 강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룬 작품을 한글로 완성해서 전시하라.]
[보상 - 개성적인 붓글씨]
이게 웬 떡이냐고 잠시 좋아하던 산하는 이건 전시회에 내놓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한자로 쓴 거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거 몇 개 더 써서 선물이나 해야겠다고 결정한 그는 자신이 써놓은 붓글씨로 눈을 돌렸다.
역시나 정순명과 최우신이 최종적으로 완성했던 붓글씨에 비하면 모자란 감이 있었다.
지금 이건 그 두 명인이 한창 활동할때 썼던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하나.
"조금 부족하긴 하네...."
명인들의 최종적인 실력과 비교해서 한 말일 뿐이었지만, 그의 태연한 중얼거림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반발한 새봄과 만두가 소리쳤다.
"형님! 어딜봐서요?"
"뭐라구요?"
그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산하를 쳐다보자, 눈길을 마주한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게 있어."
새봄이 산하의 얼굴표정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고정하고 묻는다.
"설마, 여기서 더 발전하시고 그런건 아니죠?"
"왜 그러면 안 돼?"
"뭐죠, 사장님 그 자신있는 표정은..."
"글쎄, 그건 그렇고 얼른 집에 가야지?"
"아차!"
시간을 확인하던 새봄은 얼른 구석에 놔두었던 가방부터 챙기고, 산하와 만두에게 인사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내일 뵙겠습니다."
백팩을 맨 새봄이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산하가 검지손가락 하나를 들며 외쳤다.
"봄봄봄 스톱!"
"왜요?"
"둘 다 트럭에 타. 내가 오늘 배송서비스 시원하게 해준다."
"형님,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귀하디 귀한 사람입니다."
"만두는 음식인데...."
"형님! 자꾸 이러시면 저..."
"저?"
"붓글씨 한 점 선물해 주셔야 합니다."
"너 인마, 그게 목적이지?"
흐흐 웃던 만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중에, 얼른 가자."
이에 질세라 새봄도 붓글씨를 탐내며 요구한다.
"사장님 저도요."
"너도 나중에."
이날 만두를 먼저 자취방 근처에 내려 준 산하는 새봄과 단 둘이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새봄아, 요즘 일은 어때? 할만해?"
"어...재밌어요. 많이많이."
새봄은 미모와 지성, 부를 갖추었다. 그 남부럽지 않은 삶에도 결점이 있었으니, 바로 외로움이었다.
누군가를 만나서 신나게 놀아도 채워지지 않던 외로움을 그녀는 요즘 덜 느끼게 되었다.
그 시작은 바로 산하와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런 그가 핸들을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 일 계속할거야?"
"아마도요? 사장님 꿈 얘기 듣고나서 저도 거기 한 손 보태려고 결심했어요."
"네 꿈은?"
"제 꿈은 뭐랄까. 오빠랑 아버지때문에 없는 걸 억지로 만들어낸 느낌이었달까요? 오기라고 해야하나."
"그래? 그럼 지금은 꿈이 뭐야?"
"지금은 사장님 회사의 대주주?"
산하는 과장된 표정을 지어보이며 운전대를 두어번 내리쳤다.
"와, 이거 무서운 새봄이네. 난 최대주주니까 앞으로 잘 보이도록 해."
그의 장난기 섞여있는 근엄한 표정에 새봄도 고개를 숙이며 장단을 맞추었다.
"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대표님."
자신보다 더 과장되게 말하는 그녀의 머리를, 기어를 잡았던 한 손으로 콩 쥐어박는 시늉을 하던 산하가 말한다.
"실체도 없는 회사에 누가보면 둘이 잘 논다고 하겠다."
"왜요. 사장님의 천재성이면 시간 문제죠."
"어디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말 하지마라. 낯 부끄럽다."
"에이 설마요. 어? 다 왔네. 여기서 내려주세요.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이 여기 근처인 게 확실해?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니까. 위험하게."
"괜찮아요. 여기서 가까워요."
새봄은 차가 정차하자 조수석에서 내린 후 산하에게 두 손을 정답게 흔들었다.
"내일 일찍 갈게요. 같이 아침 먹어요."
"그래, 된장찌개나 먹자."
"된장찌개나 아니고 된장찌개씩이나 라고 하셔야죠."
"비행기 그만 태우고 얼른 가."
"사장님 먼저 가세요."
"아냐,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네, 그럼."
새봄은 돌아서면서도 왠지 아쉬운 표정으로 자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부르릉 트럭이 떠나가는 소리가 나자 뒤를 돌아보았다.
'내일 봐요.'
다시 집으로 향하려던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라일락푸드의 대표 윤주상이 멀리서 다가오는 걸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는 가까이 오자마자 물었다.
"윤새봄, 아빠 다 봤다. 저 트럭에 놈팡이 누구야? 남자 같던데?"
윤주상이 비록 딸바보이긴 하지만, 자식을 뒤쫓아다니며 사생활을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성격을 가진 아빠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새봄은 그에게 물었다.
"아빠 여기는 왜?"
"누구냐니까. 빨리 말해 봐."
"천재요."
"뭐!?"
"아빠, 동네 사람들 들어요. 저 먼저 들어가요."
새봄은 부리나케 자택방향으로 뛰었고, 그녀가 오는지 안 오는지도 살필 겸 산책을 나왔다가 이 장면을 목격한 윤주상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딸! 거기 서."
***
세 개의 작품을 완성한 산하는 명인표구사를 찾아갔다. 새봄과 만두가 탐을 내긴 했지만, 이건 임자가 따로 있었다.
바로 자기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던 황 피디와 곽기훈, 강정열에게 선물할 예정이었다.
"어서오...어!?"
"안녕하세요? 표구 좀 맡기러 왔습니다."
"아이구,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디 한번 보여주세요."
표구사 주인은 그 힘있는 정순명의 글씨체를 빼닮은 산하의 붓글씨가 보고싶어 얼른 화선지를 받아들었다.
"제일 좋은 액자로 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화선지를 펴 본 표구사 주인은 역시 힘차고 멋있는 글씨라고 중얼거리다가, 한쪽 구석을 보고 놀라버렸다.
이 붓글씨는 대체.
화들짝 놀란 그가 고개를 퍼뜩 들더니 산하에게 말한다.
"이, 이건 누가 쓴 겁니까?"
"제가 썼죠."
"네?"
"왜 그러십니까?"
손을 파르르 떨며 화선지를 잡아 다시 들여다보던 표구사 주인은 다음 장, 그리고 또 다음 장을 보며 눈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첫째 장은 정순명 명인의 솜씨와 비슷하게, 둘째장은 최우신 명인의 붓글씨와 비슷하게, 마지막 장은 두 가지 글씨가 어우러지며 쓰여 있어서였다.
"이건 대체... 여기 이건 최우신 명인님 글씨랑 비슷한데. 한 사람이 이 정도의 붓글씨를 두 가지나 구사하신다는게..."
"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표구사 주인은 산하의 말을 다르게 알아들었다. 그거 뭐 쉽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슥슥 긋기만 하면 완성이죠.
이 사람 붓글씨 재주를 완벽히 타고났구나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표구 제대로 해놓겠습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입을 움찔거리며 뭐라고 말하려던 표구사주인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며 서류를 작성했다.
산하가 떠나가고 난 후, 점심시간 무렵이 되자 그의 아버지가 복원실 문을 열고 나오며 기지개를 켰다.
"아이고 찌뿌드드하다."
"아버지, 이거 보세요."
"뭐 말이냐?"
"이거 손님이 맡기고 가신 붓글씨인데요."
"그걸 뭐하러 보....이, 이건..."
"그 박산하 씨 있잖습니까? 그분이 표구해달라고 맡기고 가셨어요. 여기 이것 좀 보세요. 이것도 본인이 쓰셨답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젓던 노인이 무릎을 탁 쳤다.
"붓글씨 하려고 태어난 사람이로구나. 대단하다 대단해. 부드러움과 강함을 다 잡았어."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실력으로 식당을 하신다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뭐 좋은 방법 없나..."
"글쎄요. 아깝긴 하지만 우리가 뭘 어쩌겠습니까?"
"그거야 그렇다만."
***
"서울시장 후보시절 공약으로 내세웠던 복지정책이 효과를 보기 시작해, 서울역 앞 노숙자가 반 이상 사라졌고, 앞으로 서울권역 전체의 노숙자를 반 이하로 줄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서울시장은 다시 늘어난 서울역 노숙자에 관해 문의하자 말을 아꼈습니다.
이에 거대 야당...."
작품으로 전시할 붓글씨를 쓰다가 방금 집에 돌아온 산하는, 조카 유진이에게 혹시라도 안 좋은 영향이 갈까봐 라디오를 작게 들으면서 중얼거렸다.
'저거 나 때문인가...'
그때, 옆에서 딸의 기저귀를 갈아입힌 박제동이 산하에게 말한다.
"산하야."
"어?"
"촬영은 잘 했냐?"
"그럭저럭?"
이 짧은 대화가 오가고 둘은 어색하게 말이 없었다. 그때, 제동이 기저귀를 다 갈고 유진을 안아들며 말한다.
"이 방에서 둘이 살때 생각나냐?
"무슨 생각?"
"그 왜 있잖아. 라면 한 봉지."
"아, 당연히 기억나지. 그걸 어떻게 잊어."
"그 순간만큼은 참 행복했는데."
"맞아. 좋았지."
형과 대화를 하던 산하는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 당시는 집에 돈도 별로 없고, 집안에 빚도 조금 있었다.
당장 다섯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급급하던 어느 날, 한창 자랄 나이인 두 형제는 밤중에 배가 너무 고팠다.
"야, 돈 있어?"
"없어, 형은?"
박제동이 주머니에서 천원짜리 한 장을 꺼내더니 들어보였다.
"없지라고 말 할 줄 알았냐?"
"어? 어디서 났어?"
"선생님 심부름 하니까 주셨어. 라면 한 봉지만 사와. 잔돈 너 하고."
"진짜?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산하는 신나게 뛰어가서 달랑 라면 한봉지를 사온 다음 셋이 나눠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윤정이가 반 먹었다."
"알아, 윤땡이는 그 은혜도 모르고, 기억도 안 난대."
"안 되겠네. 박윤땡."
그때 살짝 열려있던 문틈으로 윤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뭐래, 이 사람들이 내 뒷말하네. 아 홀아비 냄새, 칙칙한 남자 둘에 귀여운 유진이가 웬 말이냐."
산하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럼 네가 볼래?"
"노노노, 오빠 미안. 내가 잘 못 했어."
"미안하면, 야식으로 라면이나 끓여줘."
"그때를 추억한다 이거지? 그럼 완전 오리지날로 끓여야겠네. 둘 다 기대하셔."
윤정은 그 옛날이 기억 안 난다고 했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가난했지만 오빠들 덕분에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뭐라도 하나 생기면 늘 그녀 먼저 챙겨주곤 했었다. 윤정은 그 시절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
이제는 기다림에 익숙해진 두 사람, 곽기훈과 강정열은 장기를 두고 있었다.
"장이요."
"어허, 이놈이."
곤란해 하던 강정열은 텐트너머로 그림자가 어른거리자 얼른 장기판 위에 손을 짚으며 지퍼를 잡았다.
어질러진 장기판을 씩씩거리며 바라보던 곽기훈이 외친다.
"아저씨, 일부러 그러신거죠?"
"뭐라는게냐?"
지퍼를 주르륵 내린 강정열이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산하 와서 그런건데."
그의 말에 옆을 돌아본 기훈은 산하를 보자마자 기분좋게 웃었다.
"좋은 아침. 무슨 일이야?"
업무방해 사건을 겪으며 산하와 상당히 친해진 두 사람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저번에 도와주신 것도 고맙고 해서, 선물 하나 드리려고요."
"선물?"
턱을 쓰다듬던 강정열이 눈을 반짝이며 짐작한 바를 말한다.
"선물이라. 특급 서비스?"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부피가 커서, 일단 저랑 함께 가시겠어요? 2층에 있거든요."
잠시 후 산하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산하가 내미는 포장된 액자를 각자 받아들었다. 그가 얼마전에 맡겼다가 찾아온 표구된 붓글씨였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서 풀어보는 두 사람.
드디어 포장이 벗겨지며 내용물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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