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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77화 (77/445)

77화 러브레터(2)

이미 산하의 대단한 붓글씨 솜씨를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저 뭘 써놨을까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뇌리를 지배했다.

'어디...'

좌르륵 펴진 화선지에는 생각과 다르게 한글이 촘촘하고도 길게 쓰여 있었다. 역시나 그 붓글씨 솜씨는 어디 가지 않아서 멋들어지기 그지 없지만.

이게 대체 뭐지, 무슨 옛날 남녀의 대화같기도 하고.

표구사 주인은 눈을 두어번 깜빡이면서 그걸 쳐다보다가 산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게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조선시대 연애편지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연애편지요?"

"네, 연애편지요. 그 당시 한글로 쓰인 게 있더라고요. 시리즈로 쓴 거라서 이렇게 보시면 의아할수도 있죠."

그제야 이 편지형식의 붓글씨가 무엇인지 깨달은 표구사주인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그러니까 이게 시간흐름대로, 연인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건가요?"

"대충 맞습니다."

"어떻게 이런생각을 하셨습니까? 기발하네요. 조선시대라니."

"그냥 문득 옛 선조들은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을까 궁금해 하다가 이렇게 됐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화선지를 내려다보던 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혹시 어디서 전시회라도 하시는 겁니까?"

"에이, 전시회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식당 다녀가시는 손님들 심심하실때 보시라고 걸어놓으려는 겁니다."

표구사 주인은 자신도 모르게 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올라오는걸 느꼈다. 이런 대단한 붓글씨 솜씨를 뭐라고? 손님들 심심하실때 보여드릴 용도라고?

감정을 겨우 다스린 표구사 주인이 말문을 열었다.

"이 정도면 따로 전시회 여시고 입장료까지 받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에이 무슨 입장료 씩이나요. 그런건 나중에 생각해보려고요."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정도 솜씨면 충분하다 못해 넘칩니다.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이거보다 훨씬 못한 붓글씨도 입장료 받습니다."

"그래요? 그거 좀 고민해 볼일이네요?"

"그렇죠. 그런의미에서 전시회 따로 여시는 거 어떠십니까?"

은근히 자신의 건물에서 하기를 바라는 눈치를 보내는 표구사 주인의 마음과 달리, 산하는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전시회장이라기엔 뭐하지만, 장소는 따로 마련했습니다."

안타까운 표정을 살짝 드러내던 그가 묻는다.

"어디에요?"

"제 식당 2층이요. 별건 없지만 지나가실때 한번 구경하러 오세요."

뭐 식당 2층? 별게 없어? 이 정도면 표구 제대로 하고 조명 이쁘게 하고, 내부 환경 제대로 조성하면 아주 죽여주겠구만.

겉으로는 웃으면서, 내심으로는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던 표구사 주인의 시선이 종이상자 표면에 닿았다.

<채소 도소매 전문>

겉은 그리 깨끗하지도 않고,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 있었다. 아니 이 대단한 붓글씨를 무슨 재활용 쓰레기 다루듯 하는거야.

산하의 붓글씨 솜씨에 대한 열등감인지, 아니면 무언가 막나가는 듯한 자신감에 질투가 난 것인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표구사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거 빨리 해야하나요?"

"뭐 빨리 해주시면 좋긴합니다만,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 그럼 액자부터 고르시죠."

"네."

잠시 후 표구에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을 결정지은 산하는 표구사를 빠져나갔고, 표구사 주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화선지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복원실 문이 삐걱 열리며 노인이 나타났다.

"에이그, 이거 기름칠을 좀 해야지."

"아버지, 일 다하셨어요?"

"이놈아 안에서도 들리더라. 땅 꺼지겠다. 웬 한숨이야?"

"그게, 박산하씨요."

"응? 그래 그분이 왜?"

"작품 표구 맡기고 가셨는데요. 왠지 화가나서요."

"화가 나? 왜?"

"전 여태 해봐도 발끝도 못 따라가는 붓글씨 솜씨로, 전시회도 대충, 작품 담아온 상자도 이런 거라서요. 이런게 재능의 끝을 모르는 사람의 자신감인거겠죠?"

"에라이 이놈아, 너 요새 생각이 왜 이리 많아."

"그냥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아버지도 표구 좀 거들어 주셔야겠어요."

"왜?"

"이거 다 해야 하거든요."

테이블 한쪽에 가지런히 쌓아놓은 화선지를 보게 된 노인이 눈을 퉁방울 만하게 떴다.

"저게 다 그분거야? 무슨 전시회라도 여시나?"

"전시회라기보다는 손님들 심심하실때 보시라고 잠시 걸어놓을 거라는데요."

"뭣이!?"

노인이 뒷목을 잡았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열 받아서 그런다."

"제가 생각이 많다면서요?"

"그 말 취소다. 어디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건지 구경이라도 가 봐야겠구나."

"네, 아버지. 저도 가 보려고요."

***

오늘은 식당도 쉬어가는 주말, 산하는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미세먼지용 마스크를 쓰고 창에 비친 자신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요즘 하는 고민은, 그냥 집을 먼저 사버릴까, 아냐 그래도 상가를 사는게 맞지 않을까.

뭐 이런 종류의 행복한 고민이었다.

사실상 자신의 요리솜씨라면 어디 한적한 섬에 차리더라도 손님이 몰려올 것이기에, 한 장소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고, 따라서 오랜기간 정착할 상가건물 구입은 조금 미뤄도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건 아무리 물건을 봐도 마음에 드는 상가건물이 없어서였다. 게다가 제대로 된 방 하나 없이 살아왔기에,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참에 주택하나 사서 서예방, 노래방, 서재, 과거를 읽었던 물건 보관방 같은거나 만들까.

여러가지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정신을 차렸다. 벌써 강남역이었다. 그는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오늘은 오랜만에 민채은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반갑게 맞아주는 채은의 매니저.

"잘 지내셨죠?"

"그럼요. 산하 씨는요?"

"저야 늘 그렇죠."

"자, 들어가시죠."

내부로 들어선 산하는 응접실에서 민채은과 마주 앉았다.

"채은 씨 얼굴 좋아보이네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매만지는 채은.

"그래요? 똑같은데."

"아니에요. 좋아 보여요."

"그래요. 그럼 좋다고 해요."

한참이나 앉아 담소를 나누던 두 사람, 그때, 산하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한다.

"그러고보니 팬들이 불만이 많다고요?"

"네, 하산해 대체 언제 활동하냐. 사인회에도 안 나오고, 이래도 되는거냐? 각성하라. 뭐 이 정도?"

"각성이요?"

"네."

"각성이라고 하니까 조금 웃기네요. 저한테 시위라도 하는건가요?"

"그런 셈이죠? 사인회라도 한번 하세요. 그러면 다들 좋아할거예요."

"글쎄요. 그것보다는..."

한쪽 미간을 손가락으로 만지작 거리며 뜸을 들이던 산하가, 예전에 생각해보던 바를 말한다.

"게릴라 콘서트 한번 할까요?"

민채은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게릴라요?"

"네, 예전에 다른 프로그램에서 한번 봤는데, 호응도 괜찮던데요? 언젠가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소파 팔걸이에 가볍게 올려놓았던 두 손을 들어 짝 하고 마주친 채은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 재밌겠는데요? 진짜 하실거예요? 하실거면 저도 할래요."

"네, 당연히 채은씨도 같이 해달라고 찾아온 거죠. 주말에 해야겠지만요. 시간은 있으세요?"

"없어도 만들어야죠. 한동안 잠잠했던 하산해의 출동인데. 그럼 우리 연습 좀 해야겠네요?"

"네, 오랜만에 듀엣곡 합 좀 맞춰보고, 솔로곡으로 몇 개 준비해서 가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게릴라콘서트니까요. 이거 사전허락 받아야죠?"

"그건 우리 소속사에서 알아서 할게요. 그날 펑크만 안 내신다고 약속하시면요."

"펑크내면 어떤가요. 무려 여왕 민채은이 게릴라 콘서트를 하신다는데. 감히!"

"또 비행기 태우신다. 아무튼 정말 하신다고 약속해요."

손바닥을 심장부근에 가져다 댄 산하가 진지하게 말한다.

"나 박산하는 게릴라 콘서트에 반드시 참여할것을 맹세합니다."

마치 학교다닐때 운동장에서 하던 국기에 대한 맹세 같았기에,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린 민채은이 얼른 표정을 고치며 사죄했다.

"죄송해요. 너무 진지해 보이셔서."

"괜찮아요. 웃으시라고 한건데요. 그럼 언제쯤이 좋아 보이세요?"

"산하 씨 생각은요?"

"전 따스한 바람 불어오는 봄이 좋아보입니다. 제 생각이지만, 듀엣곡도 사랑 노래니까, 콘서트 주제는 러브레터 어때요? 팬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손뼉을 치는 민채은.

"와, 굿! 그거 너무 좋은데요? 봄꽃 필 무렵에 러브레터 게릴라 콘서트라니. 우리 그거 해요."

채은은 생각만 해도 좋은지 두 손을 마주잡았다.

***

정 부장은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한동안 중요한 프로젝트때문에 너무 바빠서 산하네 요리 전문점에 오지 못했는데, 이번에 시간이 나서였다.

그는 산하가 포장마차로 영업하던 당시부터 단골이었다. 처음 포장마차를 마주했던 당시만해도 부하직원을 타박했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밥을 먹냐고.

하지만 된장찌개를 먹고 난 후의 그는 완전히 다른사람이 되었다. 산하의 요리 팬이 돼버린 것이었다.

그때부터 매료된 된장찌개를 오랜기간 못 먹었기에 자꾸만 입안에서 군침이 감돌았다.

아주 오래 줄을 서야하겠지만, 그런 시간과 바꿀만큼의 가치가 있는 음식이었다. 게다가 텐트안에서 영화도 한편보고 책도 읽고 하다보면 시간은 금방 가버릴 터였다.

"웃차!"

차 트렁크에서 텐트를 꺼내 든 그는 천천히 걸어서 산하네 요리전문점으로 향했다. 골목길을 지나쳐 코너를 돌자 드디어 반가운 산하네 요리전문점이 보였다.

그런데 못 오던 사이 2층에 이상한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산하네 요리 전문점 붓글씨 전시회, 무료 입장>

붓글씨를 좋아하는 직장상사 때문에 억지로라도 서예를 배워서 점수를 따야했던 정 부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실력도 이제는 만만치 않았고, 개인적인 전시회도 몇번 개최한 바 있었다.

여기 사장님이 서예에 취미를 들이셔서 아마추어 전시회라도 여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던 그는, 어디 한번 보고 모자란점이 있으면 가르쳐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줄부터 섰다.

그렇게 해가 뜨고.

정 부장은 빨리 된장찌개 먹을 생각에 메뉴판 따위는 보지도 않고 지나쳤고, 주방과 가까운 바 테이블에 앉았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전 또 이제 안 오시는 줄 알았지 뭡니까?"

"안 오다니요. 무슨 말씀을, 제가 조금 바빴어요."

"그러셨구나. 몸 챙겨가면서 일하세요."

"그래야죠. 그러고보니 사장님 서예 배우시나봐요? 현수막 봤습니다."

"네, 조금요?"

"이따가 다 먹고 구경한번 해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썼으니까 예쁘게 봐주세요. 그런데 오늘 음식 어떠세요?"

"늘 최고죠. 여기 정말 오래오래 해주세요. 저 여기 없어지면 울지도 모릅니다."

산하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네, 흰머리가 파 뿌리 될때까지 하겠습니다."

"정말이시죠?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

"그럼요."

포장마차 시절에 찾아오던 단골이기에, 그를 볼때마다 산하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한참 후.

더 먹고 싶지만, 더 먹을수가 없음을 안타까워하던 정 부장은 밖으로 빠져나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쪽에서는 사람 두 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뭐라고 속삭이며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사장님한테 속았네."

"그러니까."

이를 오해한 정 부장.

아마추어 솜씨가 다 그렇지. 뭐 그런걸 가지고 뒷말을 하냐고 생각하던 정 부장은 계단을 저벅저벅 올라가 입구로 들어섰다.

- 7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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