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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78화 (78/445)

78화 러브레터(3)

그러던 그가 깜빡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뒤로 돌았다.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안경이 필요해서였다.

일반적인 활동은 안경없이도 가능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책을 보거나 모니터등 무언가를 자세히 볼때 안경은 필수였다.

그냥 대충 봐도 될텐데, 굳이 그가 이러는 이유는 맛집 사장님에게 괜찮은 조언을 해주기 위함이었다.

이곳 식당으로부터 조금 떨어진곳에 주차해놓은 자신의 차량을 찾아간 그는, 안경을 집어들자마자 다시 2층 입구로 돌아왔다.

그가 흐릿한 시선으로 처음 내부 광경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조금 없어보이긴 하네 였다. 별달리 꾸미지 않은 내벽에 LED 조명으로 구색 조금 맞춘 게 다였다.

단지 장점이라면 꾸며놓은 게 별로 없어서, 딱 작품에만 시선이 가게 될 것 같달까.

하지만 작품이 부실하다면 많이 못나보일수도 있었다. 조명과 내관을 조금 더 제대로 꾸며놨더라면 아마추어 작품이라도 확 살았을텐데.

잠시 생각하던 정 부장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가장 가까운 붓글씨 액자를 감상하러 갔다.

그 앞에서 그는 상의 주머니에 넣어놓은 안경집을 꺼내서 안경을 꺼내더니 얼굴에 썼다.

흐릿하던 시야는 또렷해졌고, 작품에 시선을 고정한 그의 눈은 이내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크게 부풀어올랐다.

심지어 헛바람까지 들이켰다. 이게 대체 뭐야?

정 부장의 실력으로는 흠을 잡아내기는 커녕 찬사밖에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전문가의 붓글씨가 그곳에 있었다.

그냥 아마추어가 몇달간 배운 솜씨를 펼쳐냈을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그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그는 붓글씨 이론만큼은 속된말로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어마어마한 작품이 거장의 솜씨라는것도 대번에 알아보았다.

아마 자신에게 서예를 배우게 만든 직장상사를 데려와도 놀라 자빠지지 않을까.

그것도 무려 두 가지 서체가 그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왼쪽의 길디 긴 문장은 강인하기 이를데 없는 글씨에 무뚝뚝한 사내가 애정만큼은 듬뿍담아 은근히 표시했다면, 오른쪽 문장은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할만한 붓글씨에 내심을 살짝 감춘 어떤 여인이 그 사랑을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듯 했다.

그는 이제 다른 관람객이 사장님에게 속았다고 말한 게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명인의 붓글씨 전시회인데 자신이 쓴 거라고 살짝 속이면서 놀린거구나.

이곳 전시회장을 이렇게 꾸민것도 정체불명의 명인이 주도한걸테고 말이지. 사장님 은근 장난기 심하시네.

몰래카메라처럼 나를 놀래주려고 그러셨구만, 이것도 단골에 대한 정이라면 정이겠지?

그는 그제야 흐뭇하게 웃었다.

제 나름으로 이해한 정 부장이 대체 누가 쓴 것인지 확인하려다가 멈칫했다. 한쪽 구석에 산하라고 쓰인 두 글자 때문이었다.

그는 방금까지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곧바로 얼어붙고야 말았다.

혼란함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액자에 담긴 전체적인 붓글씨를 한번보고 이름 두 글자를 보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 말하는 정 부장.

"에이 설마....."

이 붓글씨 솜씨는 이쪽판에서 수십년을 굴러도 재능이 없다면 도달하기 힘든 경지로 보였다. 산하는 요리에 관한한 그가 인정한 최고의 요리사였고, 노래쪽도 대단했다.

두 가지만 해도 일반인이라면 반도 도달하기 힘든 경지인데, 붓글씨까지 잘 쓴다고?

그가 첫번째 액자를 독차지하고 있자, 새로 들어선 관람객이 두 번째 액자로 옮겨가서 감탄을 자아냈다.

"와, 이거 진짜 멋있다. 옆에 글씨는 이쁘고. 그런데 이거 무슨 내용이지?"

"옆에 설명있네. 조선시대 연애편지 2번이래."

"그러면 우리 저거부터 보자. 큰 기대 안 했는데, 장난 아닌 거 같아."

커플은 손을 다정하게 잡고 정 부장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저기요."

"네?"

"우리도 조금 볼게요."

"아, 네."

퍼뜩 정신을 차린 정 부장이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연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액자에 담긴 작품을 감상하면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 대단하네..."

한참이나 붓글씨를 감상하던 정 부장은 마지막 삼십번에 이르러서 그들의 사랑이 열매를 맺었음을 확인하고 옛날 연애시절이 생각 나 기분좋게 웃었다.

'좋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버렸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어느새 삼십번을 보고 있다니.

'이 사장님 대체 뭐야?'

돈만 있다면 이 조선시대 연애편지를 모조리 구입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정 부장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산하에게 자세한 걸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사람은 만두였다. 그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선 정 부장은 산하에게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용히 말했다.

"사장님."

"어? 왜 또 오셨어요? 무슨 문제라도?"

그는 입을 손으로 가리기까지 하면서 은근하게 물었다.

"아니요, 2층에 붓글씨 말인데요."

그의 진지한 태도때문에 덩달아 조용하게 묻는 산하.

"네, 그게 왜요?"

"정말 사장님이 쓰신겁니까?"

"네. 왜 그러시는지?"

"이런 질문은 조금 그렇지만, 혹시 저거 얼마에 파십니까?"

"네? 딱히 팔지는 않습니다만."

"전시회 끝나고도 안 파십니까?"

"그건 아직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서요."

"그렇군요. 혹시 팔게 되면 말씀 좀 해주세요."

"사시게요?"

"전 그 정도 돈은 없고, 제 아는분이 아마 사실지도 몰라서요. 아니 반드시 전부 다 사실겁니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산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겠습니다. 연락드릴게요."

"꼭 부탁드립니다."

그 시각, 잡지사 기자 안도경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붓글씨 전시회장에 들어섰다. 첫번째 액자에는 사랑을 시작하는 남녀의 달콤한 분위기가 흘렀다.

서체에서 느껴지는 감성과 문장의 내용이 합쳐져서 오는 달곰한 느낌에 그녀는 세상에를 연발하고 말았다.

그 뒤로 갈수록 남녀의 사랑이 깊어지는 과정이 보였다. 붓글씨를 저리 조화롭고 멋지게 쓰지 않았다면 느낌이 반감됐을듯한 사랑의 편지.

'이걸 산하 씨가 쓰셨다고?'

명품처럼 느껴지는 그 붓글씨를 가만히 바라보던 도경은 손을 짝 하고 마주쳤다.

오늘 그녀는 이 식당의 다른 요리를 취재했고, 그걸 이번 특집 코너에 넣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이 대단한 붓글씨를 어찌 안 집어넣을 수 있을까.

이걸 잡지속 취재 후기에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다급히 1층으로 내려갔다.

허락을 받기 위해서였다.

"사장님, 2층 전시회장 붓글씨 잡지에 실어도 되죠?"

"그걸 왜 요리잡지에...?"

"그냥 후기에 쓸까해서요."

"뭐, 상관은 없는데. 그러시다 또 혼나는 거 아니에요?"

"혼은요. 산하 씨 덕분에 우리 잡지 엄청 잘 팔렸잖아요. 제가 그 덕 좀 보려고 하는거죠."

"전 괜찮으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고마워요."

먹이를 입에 한가득 집어넣은 강아지처럼 좋아하던 그녀는 재빨리 사라졌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산하는 붓글씨 때문에 자신을 찾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고 생각하며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그때, 또 다른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강정열이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근엄한 표정으로 산하에게 다가왔다.

"어? 안 가셨어요?"

"산하 너?"

"네?"

"2층에 붓글씨 어쩔거야?"

"어쩌다니요?"

"전시회 끝나고 나한테 팔아라."

"제가 선물로 한 작품 드렸잖아요. 그건 어쩌시고요?"

"그거랑 이거랑 같아? 잔말말고 내가 세트로 살 생각 있으니까, 잘 생각해 봐."

"세트요? 다 구입하시게요?"

"세트로 안 사면 작품 망가져."

"그건 그렇습니다만."

"난 늘 이 앞에 줄 서 있으니까. 가격도 후하게, 알지?"

어색하게 웃던 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그가 떠나가고 난 후, 산하는 이걸 탐내는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혹여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우려되어 보안을 더 철저히 하기로 했다.

***

이날, 오후.

안도경은 퇴근도 안 하고 편집장과 대화 중이었다.

"도경 씨, 뭘 넣는다고요?"

"붓글씨 전시회요."

화를 낼뻔 했던 편집장은 저번의 일도 있고 해서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힌 후 도경에게 말했다.

"도경 씨, 우리 요리잡지에요. 아무리 박산하 씨가 하는 거라지만,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다른곳에 안 넣고 취재후기에 살짝 넣을까해요. 사진이랑 같이요."

저번처럼 고집을 부리는 그녀의 태도에 또 뭐가 있는건가 싶었던 편집장이, 취재 후기정도면 넣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대체 뭐가 얼마나 좋길래 그래요?"

"아, 보여드릴게요."

도경은 얼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카메라를 가져왔고, 전시회 작품 중 하나를 보여주려 했다.

그때, 어느새 조용히 다가온 이민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두분 퇴근도 안 하시고, 뭘 그리 다정하게 보십니까?"

편집장이 화들짝 놀라더니 두 손을 내젓는다.

"에이, 대표님 다정하다니요. 업무상 일입니다. 업무상."

"그래요? 업무상이면 저도 한번 보죠."

그때, 대표가 바로옆에 다가오자 신경쓰여하던 도경이 다시 카메라 화면에 집중했고, 드디어 붓글씨로 촬영된 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른 문화사 대표 이민재는 그 작은 화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붓글씨 아닌가요? 이걸 왜 요리잡지부서에서?"

"저도 그것 때문에 대화중이었습니다. 도경 씨 말로는, 이게 박산하 씨가 쓴거라고 합니다만. 그런데 이거 아마추어 솜씨 맞나요? 엄청 멋져보이는데."

이민재는 박산하라는 이름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 되더니,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대서 보다가 도경에게 말했다.

"도경 씨 이거 좀 크게 봅시다."

"네."

그녀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메모리 파일을 복사해서 컴퓨터로 옮겼고, 사내 이메일을 이용해 사진을 편집장에게로 전송했다.

"편집장님 보냈어요."

"오케이."

이내 모니터 화면에 뜬 산하의 붓글씨.

힘 있는 붓글씨와 유려한 붓글씨가 조화를 이루어, 일반인이 보기에도 아름답고 멋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걸 함께 들여다보던 도경이 말한다.

"정말 멋지죠? 실물은 더 대단하지만요."

이민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박산하 씨가 쓰셨다고요?"

"네."

그걸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편집장도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화면을 뚫어지라 계속 쳐다보며 생각에 빠져있던 이민재가 손뼉을 쳐 두 사람을 주목시켰다.

"이거 우리가 선점합시다. 요리잡지에는 넣기 그러니까, 패션잡지 쪽으로 해봐야 겠네요. 안 그래도 패션에 이런걸 접목하려는 시도가 있거든요."

편집장이 의문을 표했다.

"패션이요?"

"그래요, 패션이 아니라면 잡지 제목으로 해도 좋을 것 같고, 사실 두 분이 듣기에는 조금 억지같기도 하겠지만, 박산하 씨를 보면 볼수록 아무래도 새 시대를 열어갈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 주인공의 발자취를 우리가 먼저 선점한다면 어떻게 되

겠습니까?"

편집장은 잔뜩 흥분한 기색의 대표가 주장하는 바를 생각해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만 된다면야...나중에 빵 터지겠죠? 수집가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도경도 무언가를 상상하더니 두 손을 짝 소리가 나도록 쳤다.

"대표님, 그거 좋은 생각같아요. 제가 봐도 산하 씨는 잠재력이 어마어마해 보였거든요. 그게 아니라도 산하 씨 팬덤 덕은 볼테고."

두 사람도 은근 호응하는 것 같아 보이자 신이 난 이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일단 내일 부서장끼리 모여서 연구 좀 해봅시다. 아, 도경 씨도 빠지지 마세요."

"네?"

"산하 씨랑 제일 친한 사람 아닙니까?"

"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제가 거기에..."

"괜찮아요. 아무튼 도경 씨가 산하 씨 요리 전문점 취재해온 뒤로 뭔가 희망이 샘솟는 기분이에요. 우리 화이팅합시다."

이민재 대표는 늘 어깨가 축 처져있었는데, 요즘들어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고무된 편집장과 안도경이 손바닥을 펼쳤고, 그렇게 포개진 손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패션! 음악! 요리! 너른 문화사 화이팅!"

이 구호는 이민재 대표가 사내 야유회를 가서 기분좋을때나 하던 것이었다. 그만큼 그의 기분은 좋았고, 마음은 희망의 날개를 펼친 채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산하의 붓글씨 전시회 기간이 얼마남지 않은 어느 날, 정 부장은 자신의 직장상사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여깁니다."

사각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안경을 한 손가락으로 추켜올리던 그의 직장상사가 의문을 표했다.

"자네가 대단하다고 해서 와 보긴 했는데, 웬 식당이야? 사람들 엄청 많네?"

"네, 이사님. 제가 미처 말씀 못 드렸는데, 여기가 맛집이거든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붓글씨, 여기 식당 주인분이 쓰신겁니다."

그저 대단한 붓글씨가 있다고 해서 와봤던 그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식당 2층에 전시회장이 있다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놈 중에 제대로 하는 놈 없던데, 뭐 온김에 한번 보기나 하지."

왠지 자신이 비하당한것 같아 속상해하던 정 부장은, 어디 나중에 놀라지나 마시죠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대답했다.

"네, 그리고 나중에 여기 요리 맛도 한번 보시지요."

"그래야겠군. 제법 맛이 좋은 모양이야."

"네, 아주 좋습니다."

평소 무게있는 모습과 달리 호들갑을 떠는 정 부장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천천히 걸어올라간 그는 뒷짐을 지고 내부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이게 무슨 전시회장이야.

휑한 게 참 볼품없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첫 번째 액자를 보자마자 근엄한 얼굴에 금이갔다.

"이, 이건! 정순명 명인의, 그리고 이건 최우신! 이게 대체 뭔가? 두 분이 합작으로 쓰신 게 있었던가?"

배우기만 했지, 붓글씨로 유명한 이는 잘 알지 못했던 정 부장이 눈만 끔뻑였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평소 눈썰미가 좋았던 정 부장의 직장상사는 흥분한 태도로 말을 좌르륵 쏟아냈다.

"이 서체를 좀 보게. 힘있는 이 붓글씨는 정순명, 또 이건 최우신 명인님의 붓글씨 아닌가. 내 예전에 한번 언급했을터인데. 특히나 이 작품은 처음보는데, 대체 이걸 사들인 사람이 누군가?"

"네? 이건 여기 식당 사장님이 쓰신거라고 말씀드렸는데..."

"그거 분명 거짓말이네. 이리도 똑같을리가 없지."

"하지만 여길 보시면..."

그는 정 부장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 7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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