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80화 (80/445)

80화 러브레터(5)

***

신청곡 소개 5분 전.

약속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한 산하는 외부관찰용 모니터를 통해 바깥상황을 살폈다.

조칠용이나 이창난은 그저 야외방송인 줄 알고 열심히 프로그램 진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 피디에게 듣기로는, 다 같이 촬영 끝나자마자 꽃놀이가서 막걸리 한잔 하기로 했다던가.

그런데 계획된 방송사고가 나고, 게릴라 콘서트가 진행된다면?

왠지 웃음이 나왔다.

산하는 어린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말을 붙여보려고 했는데, 채은이 긴장된 기색으로 심호흡하는 중이었다.

바깥의 누군가 들을까봐 속삭이듯 말하는 산하.

"채은 씨, 웬 긴장을 다 하세요? 콘서트에서도 물 만난 고기처럼 자연스러운 분이."

"어, 이게 긴장이라기보다는 설렌다고 해야하나요?"

그녀의 말을 잠시 생각해보던 산하가 손가락 튕기는 시늉을 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팬들 깜짝 놀라고 좋아하는 표정 보고 싶으신거죠?"

"비슷해요. 제 가수 생활의 원동력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런 게 더 두근대더라고요."

"조금 특이하네요."

자신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채은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디제이님 꿈에도 모르시겠죠?"

"쉿! 목소리 너무커요. 들키겠어요."

황급히 입을 틀어막은 채은이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조심스레 개미 기어가는 소리처럼 말한다.

"미안해요. 안 들렸겠죠?"

산하는 준비해놓은 밀짚모자를 머리에 쓰며 대답했다.

"미안하기는요, 그렇게 많이 크지는 않았어요. 1분 남았네요. 자 준비하시고..."

"화이팅해요."

"화이팅."

두 사람은 라디오 디제이가 신청곡을 소개한 연후에 잠시 뜸을 들였다가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이제 막 사고수습 멘트를 내뱉으려던 조칠용은 삐걱하는 큰 소리에 깜짝 놀랐다. 방송사고에 이은 또 방송사고인가?

그는 어이없어하며 소리가 들려온 곳을 슬쩍 바라봤고, 이내 붕어처럼 눈이 튀어나오려 했다.

"!?"

이창난 또 한 프로그램 진행이 고르지 못했음을 양해해달라고 멘트를 내뱉으려다가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들이 왜 저기서 나와? 아니, 신청곡 가수가 왜 직접 튀어나오냐고? 이거 뭐야?

그 와중 관광객 복장으로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게릴라 콘서트 진행요원이 관람객 사이에서 튀어나와 스탠드 마이크를 설치하고, 천막이나 장작등으로 가려져있던 음향장비를 노출시켰다.

간이 공연장이 마련되자, 산하와 채은은 마이크를 조절하며 대청마루에 걸터 앉았다.

지금 부를 곡은 바로 라디오 디제이가 신청곡으로 소개한 파스타 사랑이었다. 산하는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고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냥 연주하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이 행복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아주 약한 추억의 선율을 기타연주에 실어 내보내는 중이었다.

이 모든 상황은 순식간에 일어났고, 라디오 방송현장을 구경하던 일반 관광객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그러던 도중 젊은 몇 사람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 민채은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은 예쁘장한 한 여성에게 주목했고, 곧바로 기타 반주와 함께 채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싸늘하게, 허무하게 이별했던 우리......"

음반이나 콘서트에서만 듣던 목소리를 라이브로, 그것도 코 앞에서 듣게 된 한 팬이 감격한 표정으로 입을 감싸며 어떡해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숙인 채 반주를 이어가던 산하가 고개를 들었고, 곧장 노랫소리가 터져나왔다.

"파스타, 그 집 앞에서 숨을 쉴 수 없었어....."

백철우의 백퍼센트에 해당하는 목소리가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야외공간을 잠식했다.

민채은만 바라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던 관객 몇명의 눈동자가 휙 돌아가며 크게 부풀어올랐다.

바로 민채은의 팬이면서 하산해의 팬이기도 한 남녀 몇명이었다.

그들은 공연이 중단되기라도 할까봐 조심하는 기색으로 자그마하게 소리쳤다.

"하산해다. 와 미쳤다."

"뭐야, 하산해도 여기 왔네."

"거봐, 내가 오자고 했잖아. 느낌이 좋더라니까."

"오예!"

산하는 조금씩 웅성대는 관객의 감정 변화를 느끼며, 때로는 가사 중에서도 이별을 회상하는 부분에 슬픈감정을 자유자재로 담아내기도 했다.

백철우의 목소리만 해도 대단한데, 거기에 슬픈 내면을 건드리는 감정까지 집어넣자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채은마저 눈물을 글썽거렸다.

심지어 기타 멜로디에서 뻗어나오는 추억 자극까지.

그렇게 파스타 사랑이라는 신청곡의 주인공들이 직접 튀어나와 노래를 부르던 그때, 조칠용과 이창난은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한정규 피디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이런 말이 담겨 있었다.

"이 사람이 진짜 안 되겠네."

"두고봅시다."

그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큭큭 웃기만 하던 한 피디가 송나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작가님 노래 진짜 좋죠? 녹음보다 라이브가 더 대단하다니. 여전히 미쳤네요."

"네, 특히 산하 씨요."

"어? 작가님 우세요?"

자연스럽게 옷소매로 자신의 눈가를 닦아내던 송나희가 손으로 한 피디의 얼굴을 가리켰다.

"피디님 눈물이나 닦으시죠?"

"네? 제가 무슨...어?"

"피디 님, 이 정도로 감정을 자극하는 노래실력자가 있었던가요? 이건 이미 모창수준이 아닌 것 같죠?"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여기 우리 애청자 반응 좀 보세요."

보이는 라디오는 어느새 민채은과 산하의 모습을 가득 담아 송출하는 중이었고, 대화창은 쉴새없이 빠르게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대로 두면 폭발하는 거 아닌가 싶을정도로.

- 이런 미쳤, 당신들이 왜 거기서 나와?

- 신청곡 트니까 가수 본인들이 튀어나옴. 실화냐?

- 하산해다. 하산해. 아니 이런식으로 나오기 있기 없기?

- 와 진짜 이거 누가 기획한거야. 뽀뽀 천번 해주고 싶다. 졸면서 보다가 깜놀했잖아.

- 이제 소환하라 추억의가수 지루해져서 안 들으려다가 들은건데. 와, 이럴수가.

- 노래에 배경 까지 끝내주네.

- 이런 게릴라 처음이야. 잠이 확 깨네.

- 음반보다 라이브가 더 미쳤다는 가수 하산해! 아쉽다. 저기에 있었어야 하는데.

- 아, 나도 저기 관광 갈걸.

기뻐하거나 아쉬워하거나 놀라던 애청자들이 오로지 채팅만으로 난리를 피우던 사이.

산하는 남자파트를 이어받아 가창력을 폭발시켰다.

"그곳에서 너를 만나 다행이었어......."

그 소름끼치는 노래 솜씨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듣던 관람객과 제작진이 입을 헤 벌렸고, 주변은 산하의 노랫소리와 기타 반주 외에는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그렇게 잠시 후.

파스타 사랑이라는 노래 한곡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며, 그들의 팬으로 추정되는 몇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바로 채은의 콘서트 현장에서 팬들이 불러대던 구호였다.

그 구호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던 두 사람이 청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민채은."

"저는 하산해입니다."

"마포구에 사시는 이지영 씨 노래 잘 들으셨나요?"

"행복하세요."

"하산해 씨 오늘 우리가 여길 왜 왔죠?"

"네, 봄을 맞이해 게릴라 콘서트를 하러 왔는데요. 채은 씨 주제가 뭐죠?"

"봄날의 러브레터로 알고 있어요."

"그 사랑편지 누구에게 전하는 건가요?"

"물론 우리 팬과, 우리 노래를 들어주시는 분들이죠?"

"네, 여러분 들으셨죠? 지금부터 라디오 방송국 pbs와 함께하는 봄날의 러브레터 콘서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어느새 잔뜩 모여든 청중이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그 대열에는 노인부부도 있었다.

"아이구, 우리 박산하 노래 잘 헌다."

"그러게나 말이여."

라디오 제작진은 파스타 사랑이라는 노래 신청자가 없으면 아무 이름이나 집어넣어서 진행 할 계획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신청곡중에 파스타 사랑이 있었고.

이 노래를 신청한 실존 인물인 이지영은 늦은 점심으로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뱉어내며 콜록거리다가 음료를 마시고 겨우 숨을 돌리더니 말했다.

"뭐야 이거?"

***

따스한 남쪽으로 관광을 온 하산해의 팬 오민주는 노란 산수유 꽃 아래에서 한쪽 다리를 뒤로 살짝 치켜들고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찰칵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얼굴을 살짝 찌푸린 그녀는 친구에게 말했다.

"야, 지들이 방송이면 방송이지. 왜 시민한테 피해를 주는거야. 꽃놀이 좀 즐기려고 왔더니."

조금씩 소리가 높아지는 라디오 방송현장쪽을 바라보던 그녀의 친구도 혀를 찼다.

"그러게. 갑자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아까만해도 조용했는데."

사실 이토록 시끄러운 건 산하와 채은의 노래가 시끄러운게 아니라 노래가 마무리되면서 지른 관람객의 함성이었다.

그때, 희미한 구호가 들려왔다.

"하산해!"

"운전해!"

"채은해."

이곳에서는 명확히 잘 들리지 않기에 소음으로만 느끼던 두 여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끽하려고 했더니 영 안 도와준다면서.

"야, 우리 옆 동네로 가자. 거긴 조용할거야."

"그래."

친구와 합의를 보자마자 차량으로 향하던 오민주는 어쩔 수 없이 라디오 방송현장과 가까워졌고, 바삐 걸음을 옮기다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바람결에 실려 잔잔한 멜로디가 들려오는 중이었다.

"어, 야 이거 들려?"

"응, 좋은데...?"

조금전만 해도 시끄럽다고 하던 오민주가 민망한 표정으로 제안했다.

"보러갈래?"

"응."

이내 그녀는 아름다운 기타선율에 이끌려 게릴라 콘서트 현장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있어서 현장을 확인할수가 없었다. 까치발을 들어도 소용없자 시무룩해진 그녀는 친구와 함께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모여드는 관광객이 한둘이 아니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산하와 채은은 주변 관광객을 다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그런 청중에게 둘러싸인 산하는 조금 긴 전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지금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봄날이여, 내게.>

라는 곡으로, 꽃놀이를 떠났던 작곡가가 살랑대는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을 보고 느꼈던 마음을 담았다고 하는 노래였다.

조금은 템포가 빠르며 통통튀는 멜로디가 청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가운데, 드디어 산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람은 살랑살랑, 내 맘은 간질간질...."

산하의 파트가 끝나자 채은이 여성파트를 이어받았다.

"노랗고 하얀 꽃이, 어느새 이렇게도...."

듣기좋은 두 사람의 목소리와 아름다운 기타선율이 봄꽃놀이를 온 관광객의 마음을 들었다놨다 했고, 이곳의 열기는 콘서트 현장만큼이나 뜨거웠다.

이 목소리를 알아 들은 오민주가 친구의 팔뚝을 마구 때리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미쳤다. 하산해다, 하산해!"

"아파! 바보야, 그만해."

그리고.

이 게릴라 콘서트 현장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하산해 팬 카페 회원들이 분노했다.

- 나 이 콘서트 반댈세.

- 나도 나도.

- 하산해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어요? 저 사람들 부러워 미치겠네.

- 그런 거 서울에서 좀 하라고. 그럼 당장 달려갔을텐데.

- 남도 끝자락이라니. 남도라니! 으아악!

- 아쉬운대로 보이는 라디오 청취중. 이제 우리 하산해 씨 기타까지 들고 나옴.

- 기타 연주도 장난 아닌듯요.

- 제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산해 씨 서울에서 콘서트 하게 해주세요.

이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게릴라 콘서트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

식당의 영업이 종료되고, 산하는 2층 전시회장을 정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이 전시회 마지막 날이지만, 그곳은 사람들로 웅성대는 중이었다.

명인표구사를 통해 알고 찾아온 수집가도 있었고, 정 부장이 데려온 직장상사도 있었으며, 그 외에도 식당 단골중에 나름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산하의 붓글씨 시리즈물을 탐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전시회가 종료되었습니다. 보내주신 성원 감사드립니다."

눈을 빛내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산하에게 묻는다.

"작품 판매 계획은 있으십니까?"

"작가님, 이 작품 얼마에 파실 계획이십니까?"

"혹시 경매회사에 맡기실 건가요?"

그냥 간편하게 강정열에게 작품을 넘기려고 했던 산하는 조금 난처해졌다. 구매할 사람이 이미 있다고 언질해 두었던 정 부장의 직장동료도 이 자리에 와 있었다.

역시 정순명과 최우신의 붓글씨는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그는 사실 그대로 발표하려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한 작품당 삼십만원, 총 구백만원 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가격제시에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던 현장이 다시 시끌해졌다.

표구하는데 돈 좀 든 것 같은데 그 가격은 좀 그렇지 않냐는 둥, 무명 작가인데 생각보다 비싸다는 둥, 이런 대단한 작품에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냐는 둥, 각양각색의 의견이었다.

그때, 정 부장의 직장상사가 눈에 불을 켜고 손을 들었다.

"모두 천만원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시작된 경매 분위기에 산하가 어이없어 하면서도 호기심에 지켜보던 그때, 경매가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인간의 탐욕은 계속해서 높은 금액을 만들어갔고.

정 부장의 직장상사는 어떻게든 사겠다는 열망을 표출하며 크게 소리질렀다.

"오천!"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그 가격에 넋을 놓았고, 어떤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술품 가격은 정확한 측정이 안된다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데다 그림도 아닌 붓글씨였다.

그런데 이런 가격이라니.

사람들은 멋진 작품임을 인정하면서도 포기할듯한 기색을 보였고, 정 부장의 직장상사는 속으로 승리를 확신했다.

조금 세게 부르긴 했지만, 무명작가에게 이토록 높은 가격을 제시한 이유는, 식당 주인이 다양한 분야에서 유명세를 떨칠것이 확실시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리 작품의 주인에 관해 알아보고, 미래가치 계산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일종의 투자라고나 할까.

산하라는 사람이 생각한대로 유명해진다면, 초기에 제작한 이 시리즈 작품은 희소성을 가지게 될 테고, 부르는 게 값이 될지도 몰랐다.

그는 작품을 구매하기로 확정지었다는 사람도 이 정도 가격은 제시하지 못할거라 생각하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산하에게 말했다.

"자, 사장님. 가격 만족하십니까? 아마도 제가 이 작품들을 가지게 될 것 같네요. 정확한 거래는...."

그때였다.

뒤늦게 올라왔다가 이 뜬금없는 경매장면을 보게 된 강정열이 허허롭게 웃더니, 한 손을 천천히 치켜

- 8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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