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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84화 (84/445)

84화 이 술이 그 술이냐(1)

유리 진열장 안에 들어 있는 데다 남의 물건이라서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던 산하는 그 도자기 앞에 서서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 고급스럽게 생기지 않은 도자기는, 투박한 것이 정감 있는 모양새였다.

이걸 어떻게 만져볼까 고민하던 산하는 이따가 기회를 노리기로 하며 소파로 가 앉았다.

그렇게 5분여쯤 지났을 무렵.

문이 벌컥 열리더니 주성양조 대표 육대만과 홍보팀장 육상호가 동시에 들어서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산하 씨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박산하 씨 반갑습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산하가 대답한다.

"괜찮습니다. 저도 방금 왔거든요."

그러자 두 사람이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리에 앉았고, 곧 비서가 차를 내왔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찰나, 산하가 차를 한모금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았고, 육대만은 이때다 싶었는지 얼른 말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그 붓글씨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솜씨가 대단하십니까?"

"감사합니다. 저도 그 정도는 자주 나오는 게 아니라서...."

"자주 안 나온다고 해도, 정말 멋들어진 붓글씨 였습니다. 여기 벽에 걸어놓으려고 표구도 맡겨놓은 참입니다. 진짜 예술입니다. 예술."

그 옆에 앉아있던 육대만의 아들이 반발한다.

"아버지, 그렇게 마음대로 결정하시면 어떡합니까?"

"어허, 이놈이 공적인 자리에서...."

찔끔한 육상호가 어조를 바꿔 대답했다.

"대표님, 그건 우리 사무실에 걸기로 했습니다만."

"어림없다. 이건 여기 걸면 딱이다. 아 산하 씨 죄송합니다. 이게 부자지간에 같은 회사에서 일하다보니 가끔 티격태격합니다. 이해 좀 해주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두분 사이 돈독해 보이셔서 도리어 기분 좋은데요? 아, 그런데 대표님."

"말씀하십시오."

"저기 저 도자기는 굉장히 특이하게 생겼네요?"

산하의 시선이 가 닿은 곳으로 고개를 돌린 육대만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저거요. 저게 우리 할아버지가 스승님 유품 가져다 놓은겁니다."

"유품이요?"

"네, 육 팀장. 저거 좀 꺼내와 봐."

"네, 대표님."

곧바로 일어선 육상호는 대표 집무실 책상 서랍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보안장치를 해제하고 진열장을 열었다.

만졌으면 큰일날뻔했다고 산하가 생각하던 사이, 육상호가 테이블 위에 그 도자기를 조심스레 내려놨다.

그러자 육대만이 그 도자기를 살짝 들어 만지면서 산하에게 말했다.

"이거 참 요란스럽게 보관해놨죠? 사실 이거 어디 내놔도 비싼값 받을 그런 물건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 집안에 있어서는 소중한 것이라, 잘 보관해 놓은거죠."

"안 그래도 조금 귀하게 모셔져 있기도 해서 여쭤봤습니다. 무슨 유래가 있는 물건인가보네요?"

"뭐 간단합니다. 우리 집안 할아버지가 예전에 약초꾼이셨거든요."

술을 대대로 만들어 팔아 온 집안인데, 약초꾼이셨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네? 약초꾼이요?"

"네, 약초를 캐셨었는데, 어느날인가 깊은 산중에서 살고있는 한 노인을 만나셨답니다. 그곳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노인을 스승으로 삼고 술 빚는법을 배우셨다는데, 그 스승님이라는 분이 바로 우리 집안이 술로 먹고살기 시작한 배경이기도 하지요."

"아...그러면 약초꾼으로 사시다가 술 빚는 법을 배워서 지금 이 회사로까지 성장하셨다느 말씀이시네요?"

"맞습니다. 참 특이한 이력이죠? 한 번 보시겠어요?"

"네."

육대만이 내민 도자기를 받아든 산하는 아무래도 쇼를 해야 과거를 제대로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그냥 읽다가는 이상한 시선을 받을 게 분명해서였다.

그래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육상호가 다급히 묻는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불편하세요?"

"....죄송합니다만,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잠시만 이대로...."

갑자기 진지해진 그의 표정을 보게 된 두 부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산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69년전, 홍칠성은 인생 최고의 술을 빚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에 닿았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이 홍칠성이라는 분이 그 스승이라는 분인가? 잠시 생각하던 산하는 과거를 확인했다.

[69년 전으로 다가갑니다.]

.

.

.

홍칠성은 밤만 되면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와 자신의 얼굴을 까끌까끌한 수염으로 비벼대는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양조장에서 일하기 때문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아부지, 아우 냄새."

"이놈아, 이 향긋한 냄새 얼마나 좋으냐. 어으 취한다."

제발 술좀 그만마시라는 어머니의 충고에도, 그의 아버지의 술고래 기질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몇년 후.

아버지를 미워하던 홍칠성은 성인이 되자 어느새 아버지가 일했던 양조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노인과 친해져서 따로 술 빚는 법을 조금 배우게 됐는데, 술 빚는 재주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다.

그 후 이곳 양조장에서 수십년을 술 장인으로 이름 높았던 노인이 가르쳐주는 모든 것을, 그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빠르게 습득했다.

스승이란 호칭은 없었지만, 그에게는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때부터 술 만들기에 푹 빠진 칠성은 밤이고 낮이고 술 맛을 보며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바로 노인이 맛 보여주고 가르쳐줬던 특별한 전통주를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 하는 사람들은 그것 만큼은 배워봐야 재현 못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그거 배우려다가 나가떨어진 사람이 몇명인지부터 해서, 오로지 저 노인만 빚을 수 있다나 뭐라나.

그렇게 몇년이 흘렀고.

그는 그 노인과 반쯤 비슷한 술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성과는 있었지만 실망스러웠다.

뭔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질문할 상대는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뒤였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노인이 가르쳐 주었던 전통주를 재현해 내지 못했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목말라했다.

왜 똑같이 만들었는데, 그분이 만들었던 것과 이리도 차이가 날까.

그는 이것을 자신이 일생에 이뤄야할 목표로 삼은바 있었고, 결혼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루지 못하자, 새도 쉬어갈법한 두메산골로 들어가 맑은 물과 재료로 술을 빚기 시작했다.

그는 특별한 술을 빚기 위해 시냇물과 샘물, 우물물 등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실험했는데, 어느 날인가는 시냇물을 길으러 갔다가 한 약초꾼을 만났다.

사내의 이름은 육주성이라고 했는데, 다리를 다친 나머지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고, 저녁에 홍칠성이 건넨 술을 맛 보고 반해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스승에게서 여러가지 술 빚는 법을 배운 그는 하산하였는데, 홍칠성은 산에 남아 계속해서 술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헛되었는지, 제자가 양조장으로 어느정도 성공을 이뤄 찾아왔을 즈음에도 실패만 거듭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뭔가 하나가 모자랐다.

이걸 완성시켜야 한다며 늘상 고민하던 그는, 가끔 찾아와 부모님처럼 모시겠다며 데려가려는 제자 육주성의 제안도 뿌리쳤다.

그렇게 시간은 많이도 흘러, 홍칠성은 드디어 은은한 꽃향기가 흘러나오는 전통주를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것에 성공했다.

사실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술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었다.

스승의 술보다 맛도 뛰어나지만.

특히 그 향은 참으로 감미로워, 술을 따르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하나, 어느새 그의 허리는 꼬부라졌고,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며, 머리칼은 눈이 내려앉은 듯 새하얗기만 했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홍칠성.

아쉽지만 이걸 배울만한 인재가 없었다. 제자의 그릇은 이미 알아본 바, 가르쳐도 재현해내기 힘들었다.

완벽하게 만들지 못할바에야 그냥 사장시키는 게 낫다고 생각하던 그는, 삶의 끝에 이르러서야 후회 했다.

다른 제자 한번 더 찾아볼걸 하고.

.

.

.

[홍칠성의 환상적인 전통주 빚는 법 관찰에 성공했습니다.]

[솜씨 일부를 가져옵니다.]

산하는 물건의 과거 주인들이 피를 토할만큼 끝없이 노력하는 그 마음가짐에 전율을 느꼈다. 두메산골로 들어가 수십년을 노력해 만들어낸 전통주.

정순명과도 비슷한 의지가 엿보였다.

저걸 그냥 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 인간의 혼이 서린 결과물에 관해 생각하던 산하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 동안에도 두 부자는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숨도 안 쉬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산하는 그런 그들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미리 생각해두었던 변명을 토해냈다.

"죄송합니다. 새로운 서체에 관한 영감이 떠올라서요. 혹시 여기 붓펜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요?"

눈을 동그랗게 뜬 육상호가 벌떡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후다닥 뛰어나간 그가 비서에게 뭔가를 지시했고, 몇분 지나지 않아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듯한 속도로 붓펜이 대표실로 전달되었다.

"여기있습니다."

A4용지 하나를 앞에 둔 산하는 경건한 표정으로 개성적인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주성양조>

그 서체는 힘이 넘치는 정순명과 아름다운 붓글씨의 최우신과 달리, 자연을 닮아 있었다.

어디 하나 인위적인 느낌 없이, 산 위에 놓여있던 바위인것처럼, 그 바위 사이를 뚫고 솟아난 소나무처럼, 그토록 자연적인 붓글씨였다.

그 글씨에서는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고, 산하는 이 붓글씨를 자연의 붓글씨라 부르기로 했다.

그가 흐뭇한 표정으로 그 붓글씨를 바라보고 있을때, 눈만 끔뻑이고 있던 두 사람 중에서 육대만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 산하 씨 무슨 도 닦는 신선이십니까? 글에서 이런 신비한 느낌이...."

자신이 착각했나 고개를 갸우뚱하던 육상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버지도 느끼셨어요?"

"너도?"

"네, 이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산하 씨 이게 정말 방금 깨달아서 쓰신 겁니까?"

"네, 그렇죠."

놀란 두 사람은 한참이나 종이에 쓰인 붓글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뒤늦게 말문을 여는 육대만.

"혹시, 이거 여기에 남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값은 치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가지세요."

이미 도자기로부터 크나큰 능력을 얻어서 값은 치렀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기분 좋은 미소만 지었고, 서로 눈을 마주친 두 부자는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이걸 그냥 받을수가 있나요. "

"맞습니다. 산하 씨. 이런 대단한 붓글씨를 공짜로 받으면 탈납니다."

"괜찮습니다. 이미 광고료도 후하게 쳐주셨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제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돈을 준다는데도 거부하는 그의 태도에 두 부자는 약간의 존경이 서린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시다면, 감사합니다."

"이 글씨, 가보로 간직할게요."

"아들, 뭐 하냐, 얼른 잘 보관하지 않고."

"네, 아버지."

잠시 후, 산하가 대화를 조금 더 나누다가 떠나자, 육대만이 아들에게 말한다.

"그래도 다른쪽으로 좀 챙겨드려."

"네, 아버지 안 그래도 어떻게 챙겨드려야 하나 고민중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자연적인 붓글씨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감탄사를 터뜨렸다.

***

산하가 광고를 찍은지도 시간이 제법 흐른 어느 날, 산하네 요리 전문점앞에 주성양조에서 직영으로 운행하는 주류 차량이 멈춰섰다.

그곳에서 내린 직원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엄청난 미모의 여성이 말을 걸자 흠칫 놀란 직원이 눈만 끔뻑였고, 새봄이 재차 질문을 해서야 그는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했다.

"아, 저는 주성양조에서 나왔는데요. 우리 회사 대표님이 여기로 전통주 배달하라고 지시를 내리셔서요."

"전통주요?"

"네."

"잠시만요."

고개를 갸우뚱하던 새봄은 안으로 들어가 산하에게 물어봤다.

"사장님, 주성양조인가에서 전통주를 배달왔다고 해요. 술 구매하셨어요? 이제 술도 파시게요?"

"주성양조? 웬 전통주?"

"사장님도 모르시는 일이에요? 어떡해요?"

"아, 반은 알아."

"반이요?"

"응, 괜찮으니까 일단 들어오시라고 해. 난 이것만 만들고."

"네."

새봄을 따라 가게안으로 들어선 주성양조 직원은 바깥부터 시작해 안쪽까지 바글바글한 손님 때문에 신기한 표정이다가, 이내 산하에게 말했다.

"상품, 어디다 놓으면 좋을까요?"

"잠시만요. 갑자기 전통주는 왜 보내셨는지 아시나요?"

"아참! 이 정신머리. 대표님께서 저번에 붓글씨 고맙다고, 감사 의미로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깜짝 선물인데, 타박하지 마시라고..."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산하가 볼을 긁었다.

"아, 저런. 신경 안 쓰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일단 알겠습니다. 여기는 공간이 없고, 2층빈곳에 쌓아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만두야, 이분 2층 문 좀 열어드려."

"네, 형님."

잠시 후, 동료직원과 함께 오르락 내리락 박스를 나르던 주류회사 직원이 산하를 다시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서류 한장이 들려있었다.

"인수증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네."

막 사인을 하려던 산하는 움찔했다. 이십 박스? 그리고 전통주 이름이 칠십야초주. 어디서 들어봤는데.

"저기, 칠십야초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이거 뭐죠?"

"아, 이거 안 드셔보셨어요? 제법 유명한데, 우리 회사 전통주 중에서도 고급라인 입니다."

"그런데 이십 박스나요?"

"그러게요. 아마 되파셔도 짭짤하실겁니다. 아, 이 말은 못 들은거로 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여기 하면 되나요?"

"네."

산하가 사인을 마치자, 멋들어지다못해 예술적인 글씨에 놀란 직원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중얼거렸다.

"와, 역시....무슨 사인이 이렇게 멋져요?"

"그런가요? 고맙습니다."

"우리회사 광고 촬영 하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진짜 그럴만하네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주류직원이 사라지고 다시 요리에 매진하던 산하는, 브레이크타임이 되자 칠십야초주에 관해 검색해봤다.

보통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주류코너에서만 파는 이 상품은, 칠십여가지의 산야초를 배합해 만들었다는 약술로, 대중적인 가격의 주류만 생산하는 주성양조 안에서는 고급라인이었고, 한 병에 십만원이 훌쩍 넘었다.

한 박스에 16병이니까, 320병이면, 얼마야.

거기에다 생산량이 많지 않아, 구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은 술이라고 설명 돼 있었다.

'아버지 몇 병 가져다 드릴까...'

어머니 장순희에게 혼날지도 모르니까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주성양조 대표에게 전화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오후 타임을 위해 손을 분주히 놀렸다.

***

영화관에서 흥행가도를 달리며 인기몰이를 하다가, 이제 조금 시들해진 영화를 보러온 사내가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아우 지겨워, 또 광고야."

"그러게, 늦게 들어올걸. 내 돈 내고 광고를 봐야하다니."

영화관 매점에서 사온 음료를 한 모금 쭉 빨아 마시고 팝콘을 우적우적 씹던 사내가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 있던 여자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오분여쯤 흘렀을까. 사내는 무슨 생각인지 여자친구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그런데 자기야."

"응? 뭐야 표정이 왜 그래?"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자신에게 입술을 들이미는 남자친구의 모습에 당황한 여자친구가 조용히 속삭인다.

"누가 봐."

"보긴 누가 봐. 사람도 많이 없는데. 그리고 커플석이라 잘 안 보여."

"다 보인다니까."

"에이 보라 그래. 오늘따라 자기 더 이쁘네."

"......아이 참."

그때였다.

- 8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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