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이 술이 그 술이냐(5)
그 술병을 집어들어 이름이 무엇인지 살펴보던 소믈리에는 피식 웃고 말았다. 천상주? 이름이 너무 광오해서 재미있기까지 했다.
이 술을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라고 생각하던 그는, 그냥 장난기가 조금 많은 사람이겠거니 생각 하며 밀봉된 술병을 개봉했다.
그러자 좁은 곳에 갇혀 세상에 선보일 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은은한 꽃 향기가 주변의 테이블과 전통주 위를 날아 이곳 관계 자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반응을 제일 먼저 보인 사람은 당연하게도 이 술병을 개봉했던 소믈리에였다. 그는 술의 향을 맡자마자 화들짝 놀라버렸다.
전혀 기대 하지 않았던, 심지어 만찬주에서 부적격으로 배제 되었던 술에서 이런 대단한 향이 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런 술이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술병 입구에 코를 가까이 했다. 맡아도 맡아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은 향이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
그의 눈동자가 황홀함으로 물들 즈음이었다. 또 한 사람이 향에 이끌려 천상주를 개봉한 사내에게로 다가왔다.
"이게 대체 무슨 향입니까?"
"보시다시피 이 술에서 ...."
어디에서도 이 정도의 향은 맡아보지 못했던 비서실장이 그 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향을 음미했다.
그간 정상회담에 촉각을 곤두세우느라 날카로워졌던 신경이 안정적으로 가라앉고, 어딘가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왜 이런거지 생각하던 그는, 우연의 일치인가 생각하 며 사내가 든 술병을 바라보았다.
"그 술 이름이 뭡니까?"
"여기 보니까, 천상주라고 하네요."
"천상주요?"
"네."
"이름이 상당히 좀..."
"그렇죠? 그런데 향을 보아하니 그럴 듯도 합니다. 이 정도의 술이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그건 제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향 하나는 끝내주는군요. 어디 맛 좀 볼까요?"
"안 그래도 저도 맛 보려던 참입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잔 하나씩을 앞에 두고 술을 따랐다.
더더욱 매혹적인 향이 사위를 잠재울 듯 퍼져 나갈때, 전혀 희석되지 않은 천상주가 두 사람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고,
소믈리에의 얼굴은 놀라우리만치 굳어졌으며,
비서실장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와 이거 멋진데요....?"
"세상에 이런 술도 있었습니까?"
"저도 이런 술은 처음이라..."
두 사람이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나머지 관계자들도 향을 맡고 몰려들어 서로 한잔씩을 따라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벌이 꿀을 찾아 꽃으로 모여드는 듯,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그곳 관계자들이 아쉬움을 토 해냈다.
"이런 술이 만찬장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비서실장 또한 아쉬운 표정으로 내심을 고백했다.
"규정상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들은 떠들썩하게 천상주를 칭찬했지만, 또 반대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다음 날.
오후 장사를 준비하던 산하는 청와대 관계자라는 사람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네, 제가 박산하라고 합니다."
"아쉽게도 천상주는 만찬주로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기에, 딱히 실망하지도 않은 산하가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네?"
"이 술이 우리 규정에만 맞았어도 반드시 뽑았을 겁니다."
홍칠성이 평생에 걸쳐 노력하고 만들어낸 술에 관한 칭찬이기에, 산하는 속으로 상당히 기뻐했다.
그래도 목소리만큼은 담담하게 유지하면서 묻는다.
"그렇습니까?"
"네, 정말 훌륭한 술이더군요. 이런 술이 어떻게..."
산하는 한참이나 안타까워하며 칭찬을 퍼붓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통화를 종료했다.
전화가 끊어졌다는 표시로 번쩍거리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던 그는 중얼거렸다.
'안 되면 다른 길을 찾아봐야지.'
그랬다. 그는 아직 포기한 게 아니었다.
불가능한 미션을 주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던 산하는, 속 으로만 생각해오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건 바로,
이 훌륭한 술을 본인이 나서서 제발 좀 먹어주십사 하는 것보다는, 당사자가 제발 좀 주세요 하며 달려들게 만든다는 계획이 었다.
일명, 벌이 꽃으로 날아들게 만든다는 작전,
구체적으로는 미국 대통령 귀에 이 술에 관한 소식이 들어가게 하면, 뭔가 뜻대로 되지 않을까 하는 조금 엉뚱하고도 신선한 발상이었다.
그와 관련 된 계획을 머리에 떠올리던 산하는, 이 방법의 가장 적절한 시작점으로 강정열을 떠올렸다.
그는 지난번 사건에서도 보여줬듯이, 티는 안내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였다.
물론 과거를 살펴보며 제대로 확인한 사항이었다.
그렇다면, 미국 대사관이나 미국본토 상원, 하원 그 어딘가에도 연결점이 있지 않을까..
일단은 그의 인맥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아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기에, 대화가 필요했다. 하나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해결 할 사안은 아니었기에,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
곽기훈과 강정열은 어김없이 산하네 요리전문점 앞에 나타났다. 오전중, 그들에게 슬쩍 다가간 산하가 입을 살짝 가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혹시 두 분 술 좋아하십니까?"
나타나서 반갑고 다 좋았는데,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생각하던 강정열이 의문을 표한다.
"술?"
그의 옆에 있던 곽기훈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산하야, 갑자기 웬 술? 아! 그렇지. 드디어 네가..."
영업 끝나고 술 한잔 하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부터 우리 함께 하자는 말을 하려는 거라고 오해하던 곽기 훈이 산하의 어깨를 반갑다는 듯 두드렸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술? 좋지."
왠지 오해를 한 듯한 그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인 산하가, 여기 온 이유 중 일부를 설명했다.
"제가 요즘 술 빚는 법을 열심히 배워서 만들었는데요. 두 분 술 좋아하시면, 오늘 저 영업 끝나고 같이 한잔 하시면 어떨까 해서요."
곽기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는다.
"어..... 그 이유였어?"
"네."
그러자 강정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허락했다.
"술이라. 거 좋지. 산하가 만들었다는데, 안 먹어 볼수야 있나."
그리고 이날 저녁.
세 사람이 식당 내부 테이블에 둘러앉아 투명한 유리병에 담 긴 술 한병을 바라봤다.
"이게 처음 만들었다는 그 전통주야?"
"네."
"색깔 이쁘네."
잠자코 앉아 술을 바라보던 강정열,
"처음이라, 처음은 원래 어설프지만 신선한 맛이 있는법이지."
곽기훈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정열에게 물었다.
"아저씨, 그거 생각하느라 말씀 없으셨어요?"
"기훈이 이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저도 나이가 있는데, 자꾸 이놈 하시니까 어린 것 같잖아요."
"그럼 나는 늙은 것 같냐?"
"네..."
"어허, 이 망나니 같은 기훈이 놈을 어찌할꼬."
매일 맛집에서 만남을 가지기에 더욱 친밀해진 두 사람은 농을 했고, 산하는 희미하게 웃다가 밀봉된 유리병을 개봉했다.
그러자 예의 그 은은한 향이 두 사람을 덮쳤다.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은 두 사람은 말을 하다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렸다.
"이게 무슨 냄새냐?"
"어허, 이리도 좋은 향이 있을까."
그들은 그 향이 산하가 개봉한 술병 입구에서 난다는 걸 알아챘고, 최근에 배워서 열심히 만들었다던 산하가 또 사고 쳤다는 걸 직감해버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초짜 맞아?"
"그러게나 말이다. 무슨 놈의 향이. 일단 먹어보자."
두 사람은 산하가 따라준 술의 향을 음미하다가 마셨고, 이내 감탄을 토해냈다.
"훌륭하다 훌륭해, 이리도 대단한 술은 처음이다. 선물 받았던 비싼 술은 저리 가라구나."
정열의 칭찬에 뒤이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곽기훈 .
"산하야, 어디 거짓말을, 이게 어딜 봐서 잠시 배워 만든 솜씨냐? 야, 이런 전통주가 다 있었어?"
향을 계속해서 맡아보던 기훈이 다시금 술맛을 음미했고, 이내 두 사람은 술의 향과 맛에 흠뻑 빠져 대화를 나눴다.
"이 정도면 외국에서도 난리 날 맛인 것 같아요. 내 친구 로버트가 알면 기절하겠네."
"아무렴, 세계에 내보여도 손색이 없겠구나."
그때, 산하가 말 한번 잘했다는 듯 은근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분 혹시 미국에 인맥 좀 있으십니까?"
***
사십을 갓 넘기고 주한 미 부대사로 부임한 사내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도자기 술병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친구놈이 한국의 전통주이자 귀한 술이라며 선물해줬는데, 누구와 마실지 고민 중이었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한 잔의 술은 재판관보다 더 빨리 분쟁을 해결해준다고 에우리피데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 술은 최근 약간의 의견충돌로 사이가 소원해진 와이프와 마시는 게 제일 좋아보였다.
그는 밤이 되자 싸늘한 태도를 유지중인 와이프에게 슬쩍 다가갔다.
"여보, 우리 한잔할까?"
"계속 이럴건 아니지?"
침묵을 유지하던 그의 와이프는 못 이기는 척 남편이 가리키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1단계가 성공하자, 오늘 취중에 제대로 화해 하겠다고 생각하던 그는 얼른 술을 가져가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이게 한국 전통주라는데, 아주 비싸다면서 친구놈이 선물해줬지 뭐야. 당신 생각나서 바로 가져왔어."
그녀는 자신이 생각나서 저 술을 가져왔다는 남편의 말에 기분이 아주 약간 풀렸다.
그러는 사이 사내는 술의 포장을 벗기고 밀봉된 뚜껑을 개봉했다.
그 순간 은은하면서도 매혹적인 꽃 향이 퍼져나가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이, 이게 뭐죠?"
하지만 당황하기는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놀라운 향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친구가 귀한 술이라고 하긴 했는데."
"얼마나 귀한 술이길래 이런 향이 나요?"
"그러게, 일단 마셔 볼까?"
어느새 차가운 표정은 사라지고, 호기심이 가득해진 그의 와이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술을 마신 두 사람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런 술이 있죠?"
"그러게나 말이야. 귀한거라길래 그냥 인사치레인 줄 알았더니, 진짜였군, 한국에 온 뒤로 이런 술은 본적도 없는데, 그리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지 않아?"
"나도 그래요. 신기하네. 잠시만요. 이거 찍어서 자랑 좀 해야겠어요."
당신 아직도 그 쓸데없는 SNS 하냐고 말하려던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사이가 좀 풀리고 있는데, 또 망칠 필요는 없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고, 그의 와이프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자마자 자신의 계정에 사진을 올리고 글까지 올렸 다.
<한국의 신비한 전통주, 환상적인 꽃 향과 술 맛이 날 사로잡 았다. 이 행복한 느낌은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안 먹어 보면 모두 후회할 걸>
자랑글을 쓰던 그녀가 의문어린 표정으로 남편에게 묻는다.
"그런데 이 술 이름이 뭐죠?"
"글쎄, 뭐라고 하긴 했는데, 아 그렇지, 한국 발음으로 춘상? ㅤㅊㅝㄴ상 뭐라고 했던 것 같아. 내일 한번 더 물어볼게."
"그런데 이 한자 엄청 멋지네요."
"그렇지? 나도 그런 생각 들더라니까. 고급 술은 뭐가 달라도 달라."
주문제작한 도자기에 새겨진 산하의 글씨는 직접 화선지에 쓴게 아니라서 부족했다. 그런데도 두 부부는 칭찬을 아끼지 않 았다.
다음 날,
에밀리는 결혼하고 몇년 후 한국이라는 나라로 떠나버린 친구의 새소식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무슨 도자기 술병 사진을 찍어놓고, 극찬에 극찬을 해대는 게 아닌가.
"얘가 또 오버하네."
타국에서 외로워 그러나보다 싶었던 그녀는 밑에 댓글을 달아주었다.
- 그런 술 있으면 나도 줘봐
그때 남편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당신 뭐해?"
그녀는 상원 의원인 자신의 남편에게 말했다.
"한국 간 내 친구 알아?"
"알지, 왜?"
"많이 외로운가봐. 이런 장난글이나 올리고."
그녀의 남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만도 하지, 타국이잖아. 잘 위로해 줘."
"알았어. 안 그래도 호응해 주는 중이야."
***
산하는 원래 강정열에게 부탁을 하려 했었다. 하지만 계획을 어느정도 말했더니, 의외로 곽기훈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적당한 사람에
게 전달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나 뭐라나..
그는 아주 젊은시절 미국에서 상류층이 많이 분포해있는 대학을 다닌것 뿐만 아니라, 재벌가 자손이었다. 따라서 친구중에서도 대단한 인물이 많으리라 짐작했다.
그래서 그가 유학시절 사귄 지인의 지인이나 원래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을 통해 여러 사람에게 술을 전달했고, 산하는 한동안 잠잠한 것을 보며 왜 아직 반응이 없을까 의아해했다.
일부러 고급 도자기로 주문제작까지 했는데.
이번 미션은 난이도가 조금 있기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었다. 과연 미션에 실패하면 어떤 메시지가 떠 오를까.
브레이크 타임을 맞아 기지개를 켜던 그가 의문에 잠길 때, 유리문이 벌컥 열리며 곽기훈이 뛰쳐들어왔다.
"산하야
- 8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