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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93화 (93/445)

93화 인연은 돌고 돈다(2)

구인공고를 유심히 바라보던 유나세의 눈동자에 환희가 차올랐다. 월급, 복지, 근무시간 어느 하나를 봐도 모자람이 없었다.

이런 대단한 직장이 있었냐고 생각하던 유나세는 의자를 바짝 당겨앉고 공고를 더 자세히 읽었다. 세상에, 학력 불문, 경력 불문이라니. 역시 팬이 되기를 잘했어 라고 생각하던 유나세는 모집공고를 프린트 한 후 거실로 후다닥 뛰쳐 나갔다.

"왜 벌써 나와? 화장실 ?"

유나세는 말 없이 거실 바닥에 종이를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거 아냐, 엄마, 나 여기 면접보러 갈거야."

"이게 뭐니?"

딸 유나세가 내려놓은 구인공고를 잠시 들여다 보던 그녀가 의아한 듯 말을 이어갔다.

"요리 전문점? 딸, 요리에 관심있었어?"

"그게 아니라, 엄마 자세히 좀 봐봐, 근무환경이 너무 좋아. 월급도 많고,

"그래? 어디... 정말 그러네. 그런데 식당일 많이 힘들어, 할 수 있겠어? 왜 굳이 식당일이야? 딱히 경력도 안 쌓일텐데."

"엄마, 어차피 이렇게 빈둥거리는 바에, 여기 취직해서 일 할래, 그리고 또 알아? 잘 얻어걸리면 뭐라도 배워올지? 나중에 개인식당이라도 하지 뭐."

".....서울까지 간다니까, 걱정돼서 그러지. 식당은 여기도 많은데."

"식당은 많지만, 이 정도 혜택을 주는 식당은 없다는 거!"

"에이그..."

못내 걱정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에게 유나세는 두 팔을 하늘로 뻗어 올리며 외쳤다.

"엄마, 유나세는 다 할 수 있어."

한동안 우울감에 빠져서 조용하더니, 드디어 활달한 본모습이 돌아왔다고 생각하던 그녀의 어머니가 외쳤다.

"그래, 그래라. 집에 그러고 있는것 보다 백번 낫다."

"그치 엄마?"

"그래, 갔다가 면접 잘 못 본 것 같다고 기죽지 말고, 서울 나들이나 하고 와. 월급 보아하니 뭐가 힘들어도 힘드니까 많이 주는 것 같은데, 눈치 잘 봐서 이상한 곳이면 얼른 내려오고, 알았

지?"

"알았어. 엄마. 나 눈치 백단이잖아."

유나세는 그길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면접요강을 한번 더 읽어보고 전화를 걸어서 면접시간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일 오전, 유나세는 단아한 정장차림으로 산하네 요리전문점 앞에 서 있었다. 사진으로 보던 느낌과 전혀 다른 식당 외부 를 잠시 살펴보던 그녀는 입이 떡 벌어졌다.

무슨 손님이 저렇게 많아?

급기야 일이 힘드니까 많이 주는거라던 엄마 말이 생각났지만, 유나세는 이를 앙다물었다. 이런 미미한 경력에, 이 나이에, 이 정도 월급 받을 곳이 과연 있을까.

하자, 해보자.

그나저나 그간 집에서 편히 있느라 뱃살이 살짝 쪘는데, 이상하게 보이는 건 아니겠지? 옷이 조금 끼긴 하는데.

쓸데없는 고민을 이어가던 그녀는 또각거리며 식당 정문으로 다가섰다.

곧장 그녀의 앞을 막아선 봉만두가, 유나세의 옷차림에서 뭔 가를 알아채고 묻는다.

"면접보러 오셨어요?"

"네, 유나세라고 합니다."

들고있던 서류를 살펴보던 만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을 열고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내부로 들어선 유나세는 곧장 새봄과 마주쳤다. 뭐 이런 예쁜 여자가 다 있어? 속으로 기죽어 하던 그녀는 미모의 여성이 안내하는 대로 조용히 따라갔다.

이곳 휴게실로 추정되는 곳에는, 꿈에도 그리던 하산해가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유나세라고 합니다."

들어서자마자 씩씩하게 인사하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 산하는 맞은편을 가리켰다.

"오시는데 많이 더웠죠? 앉으세요."

면접 심사관은 단 한명.

바로 산하였다.

그는 유나세의 이력서를 받아든 후 과거부터 읽어봤다.

[17분전, 유나세는 기필코 합격해서, 부모님도 번듯한 곳에서 살게 해드리겠다고 생각했다.]

마음가짐 한번 훌륭하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서류의 어떤 항

목에 점수부터 매기고 첫번째 질문을 던졌다.

"여기 지원하신 동기가 뭔가요?"

생각보다 상투적인 면접 질문에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대답하려던 찰나, 산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면접장에서 이런 질문 많이 받아보셨죠? 물론 동기야 여기서 일하고 싶어서 왔을테니 넘기겠습니다."

"네."

생각보다 많이 당황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던 산하는, 어떤 항목에 점수를 매기고 다시 입을 열었다.

"유나세 씨, 우리 식당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변하지 않는 맛과 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드셔보셨나요?"

"어...그건. 죄송하지만, 아니요. 사실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 의 평을 말했습니다."

먹어본적도 없는 것 같은데, 거짓말을 늘어놓던 다른 면접자들을 떠올리던 산하가 점수를 체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식당에서 일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렇군요. 그럼 유나세 씨 본인은 평소 친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일반적으로 친절하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일하게 된다면 어떤 상황에도 친절할 자신이 있습니다."

"앞부분은 괜찮지만, 뒷 부분은 골라가면서 하시면 됩니다."

"네?"

"평소의 친절은 중요하지만, 손님의 이유없는 시비 또는 폭언이나 추행에는 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라서요."

"아...."

왠지 이 사장님 멋있다고 생각하던 유나세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후로도 유나세는 여러가지 질문을 받았고, 면접은 마지막에 도달했다.

"유나세 씨는 꿈이 뭔가요?"

"돈 많이 벌어서 부모님도 저도 행복해지는 거예요."

다른 면접자에게 꿈을 물어보면, 식당이라고 준비도 없이 우습게 보고 온 모양인지 횡설수설 장황한 말을 늘어놓곤 했다. 그런 면접자들보다 훨씬 정직하고 괜찮은 답변이라고 생각하던 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면접 마치겠습니다. 유나세 씨 고생하셨습니다. 나가보셔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아참, 유나세 씨.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 우리 한번 본적이

있던가요? 왠지 낯이 익어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기억해주는 그의 말에 유나세는 기뻐하며 크게 대답했다.

"네!"

"이야, 목청 정말 크시네요. 죄송하지만 우리 어디서 봤었죠?"

"부산 축제장이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장소에 기억을 가만히 더듬어 보던 산하가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맞다! 부산 축제장..... 그 때 조칠용 씨 성대모사 하신분 아니세요?"

"와! 그걸 기억하세요?"

장기자랑 참가자 중에서도 유일하게, 한여름을 한겨울로만 들었던 그녀의 성대모사를 떠올린 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조칠용 씨랑 나름 잘 알고 지내서 그렇기도 하고요”

민망한 표정이 된 유나세가 산하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와 그러시구나.....그때는 썰렁해서 죄송했어요."

"아니요. 뭐 저한테 죄송하실 것 까지야. 아무튼 반갑습니다. 그때 그분을 여기서 뵙다니, 신기하네요."

아니에요. 저는 알고 찾아온거예요라고 속으로 말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때 노래 정말 대단하셨어요. 관객들 다들 얼어붙었던 거 아세요?"

"그랬나요?"

"네, 정말 정말 대단하셨어요."

산하와 그 당시의 이야기를 잠시 나누던 그녀는 왠지 뿌듯한 마음으로 면접장인 휴게실을 빠져 나왔다.

"유나세 씨, 면접비 받으세요."

새봄이 내미는 흰 봉투를 얼떨결에 받아든 유나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식당에서 면접비를 준다고?

"와, 면접비요?"

"네, 면접비요. 고생하셨어요. 안녕히가세요."

식당을 빠져 나온 유나세는 면접봉투를 슬쩍 열어서 확인해봤다. 오만원? 역시 여기는 제대로 된 직장이었어. 제발, 합격 좀.

***

새봄의 아버지 윤주상은 요즘도 자주 생각나는 된장찌개 덕 분에 입맛을 다셨다. 그 맛은 어디가서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그 박산하 씨는 어디서 무얼할까 생각하던 그는 요리대회 당시 심사위원으로 같이 참여했던 이석두의 연락을 받았다.

"윤 대표님, 찾았어요. 찾았어."

"이 셰프, 아침부터 왜 이리 호들갑이에요? 뭘 찾아요?"

"된장찌개 달인요."

뜻밖의 소식에 반가워하던 윤주상이 다급하게 질문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어디서 뭐 한답니까?"

"제 친구한테 들었는데, 그 사람이 알고보니 대단한 붓글씨 장인이었어요."

이게 뭔 소리야. 웬 붓글씨? 의아해하던 윤주상이 되묻는다.

"붓글씨 장인이요? 요리사 아니고요?"

“겸업 아닐까요? 아무튼 그 사람 장난 아닙니다. 뭐냐, 저번에 그 붓글씨 몇점으로 3억 받았다는 그 사람이 이 사람이랍니다."

윤주상은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는 이석두에게 의문을 토해냈다.

"그게 정말이에요? 3억 이야기는 나도 얼핏 들어본 것 같긴한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네, 아차. 이건 중요한게 아니고, 그 사람 하는 식당도 찾아냈습니다."

제일 반가운 소식에 황급히 물어보는 윤주상,

"그래요? 대체 어딥니까?"

"저도 아직 가보지는 못 했습니다만, 거기가 어디냐하면 ...."

이석두가 말해 준 장소를 기억해 둔 윤주상은 회사로 출근 했 고, 오늘따라 흘러가지 않는 시간을 탓하며 겨우 하루 일과를 끝낸 그는 해가 져버린 밖을 살펴보며 얼른 식당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영업이 끝나자마자 청와대에 납품할 천상주를 마련해놓은 산하는, 식당으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었다.

모든 직원이 퇴근하고 적막하기만 한 내부를 둘러보던 그때. 유리문이 살짝 열렸다.

"실례합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산하는 아주 낯익은 얼굴을 보게 되었다.

"아이고, 맞네. 박산하 씨. 저 기억나십니까?"

라일락 푸드의 대표 윤주상을 오랜만에 보게 된 산하가 일어서서 반갑게 인사했다.

"어? 라일락푸드 대표님 아니세요? 잘 지내셨어요? 여긴 어떻게...?"

"우연히 알게 돼서 찾아왔습니다. 그때 된장찌개 맛을 잊을 수가 있어야죠."

"아, 그러셨구나, 그런데 어쩌죠? 지금 영업이 종료됐거든요."

"그래요? 괜찮습니다. 나중에 먹으러 오면 되니까요."

그게 쉽지 않을텐데라고 생각하던 산하가, 한쪽 자리를 가리켰다.

"아참, 일단 앉으세요."

"아이구, 쉬는데 실례한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차 한잔 드릴게요. 잠시만요."

잠시 후 새봄의 아버지는 식당 테이블에 산하와 마주앉아 대회 당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제는 붓글씨로 옮겨갔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얼마나 붓글씨를 잘 쓰시면 ...."

"아닙니다. 그곳 대표님이 잘 봐주셔서 그렇죠."

"그럴리가요. 기업 하는 사람이 그렇게 허투루 돈을 쓸리가 없죠."

그렇게 한참이나 담소를 나누던 산하는 배가 출출해져 옴을 느꼈다.

재료가 뭐가 있더라. 아, 그렇지.

"윤 대표님, 괜찮으시면 떡국 한 그릇 드시겠어요?"

산하의 제안을 들은 윤주상은 요리대회당시 기억을 잠깐 떠 올렸다.

다른 요리도 나름 맛있긴 했었다. 된장찌개에 비할바는 아니었지만.

찰나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그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떡국이요? 좋죠.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런데 괜히 저 때문에."

"아니요. 아닙니다. 저도 마침 배가 출출해서요. 잠시만요.”

잠깐 사이 현란한 솜씨로 떡국 한 냄비를 뚝딱 만들어버린 산하는 그의 앞에 떡국 한 그릇을 내려 놓았다.

“자, 시간이 늦어서 조금 대충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먹기는 괜찮을 거예요."

"아이고,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산하가 만들어 준 떡국을 후후 불며 입안에 집어넣은 윤주상은 화들짝 놀라버렸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이 맛은 대체 뭐지? 뭐야? 무슨 떡국에서 이런 맛이 나?

된장찌개를 아쉬워하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의 눈동자에 놀라움만이 자리했다

"사, 산하 씨 이게 대체 뭡니까?"

"떡국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대체...."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아닙니다. 맛이 너무 훌륭해서요."

"감사합니다."

대화를 끝내고 아래를 내려다 본 윤주상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만난 듯 떨렸고, 혀는 떡국을 쉴새없이 더 달라며 시위중이었다.

그는 난생 처음 맛보는 진귀한 떡국의 맛에 넋을 놓았고, 이내 떡국을 마구 퍼먹으며 생각했다.

이런 요리 평생 먹었으면 좋겠다고,

***

주말을 맞아 동묘 벼룩시장을 찾아온 산하는, 같이 구경 온 새봄을 바라보았다. 흰티에 청바지 하나 걸쳤을 뿐인데, 뭇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리는 중이었다.

심지어 엄마손을 붙잡고 지나가던 아이 한명이 새봄을 가리키며 '엄마 저 누나 되게 이뻐' 라고 말하다가 등짝을 맞고 끌려 갔다.

그런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산하.

"새봄아, 사람 엄청 많다."

"그러니까요. 뭔가 보물이 잔뜩 있을 것 같아서 그런가봐요.."

새봄은 마치 데이트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만끽하며 산하를 힐끔 바라본 후 여러 가지 물건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수입과자부터 중고신발, 가방, 꽹과리에 냄비, 악기까지 정말 별의별게 다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시장을 한참이나 구경하던 산하는 실망하고 말았다. 이런 구경이 싫지는 않았지만, 원하는 물건이 전혀 안 보여서였다.

왠지 목이 마름을 느낀 산하가 옆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

"봄봄봄, 우리 시원한...."

"어!? 저거 골동품."

어느새 한쪽으로 쪼르르 달려간 새봄은 어떤 노인이 벌려 놓은 좌판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가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모습을 본 산하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평소에는 예쁘지만, 또 이럴때 보면 귀엽기 그지없었다. 팔색조의 매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바로 새봄이라고 해야할까.

그녀가 뭘 그렇게 유심히 바라보나 싶어 다가간 산하는 흠칫놀랐다. 새봄이 만지작거리는 물건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9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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