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이름 값(3)
은성의 대표 박산하라고? 이거 천상주 만드는 기업 이름이랑 대표 이름이잖아. 뭐야. 이 사람이 천상주 만드는 생산자라고?
붓글씨에 수묵화, 가수, 맛집도 놀라 자빠지겠는데, 천상주까지? 이게 다 한 사람 이라고?
정말이야?
말이 돼?
동명이인이 아니었다고?
한, 미 회담 당시 그도 앤더슨 대통령이 극찬한 전통주에 관심을 기울였었고, 한 병 구해보려다가 실패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생산자는 어딘가 베일에 싸여 있었는데, 어떻게 여기서 튀어나와?
이 사람이 나름 공인인데, 거짓 명함을 팔리는 없고.
혼란해하던 그는 잔뜩 당황한 기색으로 산하에게 말했다.
"이, 이게 뭡니까?"
"명함이죠?"
"아, 아니요. 은성, 이 은성이라는 회사요. 천상주 생산하는 회사잖아요."
"네, 아직은 그렇죠."
산하는 식당영업에 지장이 생길까봐 세간에 알려지기를 꺼렸었지만, 최근에 기자들이 파고들어서 알아내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기자 몇 명이 의심의 눈초리로 찾아왔을때, 잠시 생각했었다. 그냥 알려지게 놔둘것이냐, 내가 주도해서 인터뷰를 할 것이냐.
고민할것도 없이 후자였다. 그들 마음대로 소설 쓰기전에,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게 좋아보였다.
그런 이유로 나 맞다고 해버리자 기자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얼마나 당황했던가.
그 후 짧은 인터뷰까지 해버렸기에, 이제는 명함을 줘도 상관 없었다.
최초로 그의 명함을 받게 된 최중우는 흥분과 당황 등의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로 명함과 산하를 번갈아 바라보는 중이었다.
"정말 천상주 생산자세요?"
"네."
"와....."
할말을 잊고 산하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던 그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천상주 생산자가 나타나자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그러다가 산하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운 일이라서 그만."
"아닙니다. 그럼 제가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네,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결정하면 될까요?"
"아직 시간여유는 있습니다. 이달 말 까지만 결정 해주시면..."
"알겠습니다."
이후 약간의 대화를 더 나눈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
애주가들 사이에서 구하기 어렵기로 악명높으면서도, 최고로 치는 술.
천상주에 관해 알거나 궁금중을 가지는 사람이 국민 전부는 아니었지만, 술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름 높았다.
그러다보니 애주가에 속하는 기자 몇명이, 은성이라는 회사의 뒤를 캤고.
드디어 냄새를 맡은 기자 몇명이 산하가 운영하는 식당을 찾아오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오늘 떠오른 인터넷 뉴스.
<천상주 생산자, 가수 하산해로 알려진 박산하였다.>
<하산해 팬카페 야단법석>
<전통주의 새바람을 몰고 온 박산하, 알고보니 연예인?>
<못구해서 안달 난 천상주, 예상치 못한 생산자.>
뉴스기사에 나온대로 그의 팬 카페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난리법석이었다.
- 와나, 어이가 없네. 게릴라 콘서트 이후로 활동도 안 하더니, 술 만들고 있었어? 그것도 천상주?
- 미친, 천상주가 하산해 작품이라고? 이게 말이 됨?
- 미쳤다. 미쳤다. 노래도 미쳤고 술도 미쳤고.
- 사랑해요. 하산해. 나랑 결혼해주세요. 평생 천상주만 주신다면 이 한 몸.
- 난 알고 있었지. 동명이인이 아니리라 짐작했음.
- 그놈의 거짓부렁은, 저쪽 가서 하세요.
- 아니 우리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뜬금없이 무슨 결단요?
- 팬카페 차원에서 공동구매 요청요.
- 오! 그거 죽이는 발상?
- 찬성! 운영자 나와라. 아! 빨리 나오라고.
그런데.
다음 날 새롭게 추가된 뉴스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만찬주로 널리 알려진 천상주 새로운 버전 나온다.>
<천상주 오리지널 버전 단종 예고.>
<새로운 버전 천상주 86>
<86에 담긴 의미 질문 쇄도>
- 아 불안한데, 혁신이랍시고 저러다 맛 훅 가는거 많이 봐서.
- 저도요. 구관이 명관이다 이런 말 괜히 나온 거 아님. 우리 조상님들 똑똑해.
- 아니 하산해 씨, 우리 이러지 말아요. 전 예전 그대로가 제일 좋아요.
- 86이 무슨 뜻이지. 86년 됐다는 말은 아닌 것 같고. 86년산도 아니고, 86번 뭘 한건가?
- 그러게요. 의미를 모르겠네.
어느새 로펌을 관두고 백수로 변신한 하동식이 그런 뉴스기사를 살펴보다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넌 미친게 분명해."
"뭘 미쳐?"
천상주 86이라 쓰인 술병을 들어보인 동식이 감탄한 듯 말한다.
"이거 인마. 와 진짜 거기서 어떻게 전진할수가 있냐?"
"그럼 후진이라도 하리?"
"하여간에 한마디도 안 져요."
"그게 내 장점 아니겠냐?"
"장점은 무슨. 그런데 86은 왜 붙인거야? 무슨 의미라도 있어?"
"그게 다 이 형님이 큰 뜻이 있어서 그런거야, 알면 다쳐."
".....아, 예."
"그나저나 너 왜 그만뒀어?"
한숨을 푹 내쉬던 동식이, 술잔속에서 찰랑이는 천상주 향을 가만히 음미하더니 입에 털어넣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산하가 맹철호의 말투를 따라했다.
"야, 이 자식이 폼 잡네. 뭐 중대한 비밀이라도 있나 봐?"
그의 친근한 타박에 어깨를 으쓱하던 동식이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고, 매번 범죄자 옹호하려니까 신물이 나서. 예전부터 그만하고 싶었는데. 결단 내린거지 뭐."
"그러냐? 네 성격에 그러겠다 싶긴 했지. 그럼 이제 뭐 하려고? 민변?"
"아니, 은성 담당 변호인겸 기타등등이 되기로 했어."
"누구 맘대로?"
눈을 동그랗게 뜬 동식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와 이 인간 봐라. 좀 유명해졌다고 안면몰수하네. 너 기억 안 나? 저기 콧구멍만한 가게에서 파티할때 나보고 뭐라고 했어?"
그 당시 기억을 떠올리던 산하가 손바닥을 짝 부딪치며 말했다.
"맞다. 바지사장!"
"아니, 왜 하필이면 바지사장이야?"
"그래? 그럼 좀 고급스럽게 하 상무, 하 이사, 하 부사장 뭐 이렇게 해줄까?"
"그래 그거 좋다."
어딘가 익살맞은 표정을 짓던 산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뭐? 시험?"
"그래, 시험."
"무슨 시험인데?"
"설거지를 잘 하나 못 하나."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항의하는 동식.
"나? 그래도 내가 고급인력인데, 이런 어거지로 부려먹는다 이거지?"
"이럴때 아니면 언제 고급인력 설거지 솜씨 보겠냐?"
"그런거냐? 알았다. 내가 또 한 설거지 하지."
그때, 유리문이 벌컥 열리며 만두가 뛰쳐들어왔다. 그 뒤로는 유나세도 따라 들어서는 중이었다.
"와, 이 향기 좀 봐. 형님들 먼저 드시기 있기 없기?"
고개를 돌린 산하가 물었다.
"왜 이제 와?"
답변은 유나세에게서 돌아왔다.
"이 앞에 사고가 나서 도로가 막혔더라고요. 여기 장 봐 온거요."
식자재가 든 마트봉지를 보며 눈을 빛내던 동식이 두 주먹을 불끈쥐고 외쳤다.
"나는 네가 내 친구라는게 자랑스럽다."
그 뜬금없는 칭찬을 듣게 된 산하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뻥 치고 있네, 요리 많이 먹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고?"
"들켰냐?"
이내 실내의 모두가 하하 웃던 그 찰나, 유리문이 다시 한번 열리며 새봄이 등장했다.
"저 늦었어요?"
"어? 봄아 어서와."
"새봄이 왔어?"
"오, 봄이 오늘 더 이쁘네?"
퇴근했다가 다시 찾아온 새봄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숨을 헐떡이는 중이었다. 왠지 만화 주인공이 책을 뚫고 나온 듯한 그 모양새에, 산하는 속으로 감탄했다.
'우리 봄이는, 뭘 먹고 저렇게 생겼을까?'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혼자 인사를 해주지 않는 산하가 미워진 새봄은 속으로 투덜대며 빈 자리에 앉았다.
그때, 산하가 모두에게 외쳤다.
"자, 바지사장, 비서실장, 영업사원도 다 왔고, 재료도 도착했으니까 요리 시작하러 갑니다."
장내에 모인 모두가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던 그때, 산하가 새봄을 가리켰다.
"봄봄봄, 보조 출동."
언제 투덜댔냐는 듯 활짝 웃던 새봄이 한 손을 번쩍 들었다.
"좋아요."
이내 그와 그녀가 주방에 나란히 서서 요리를 시작하자, 나세가 만두에게 물었다.
"바지사장은 뭐고, 비서실장은 뭐야?"
"어, 그게 그러니까..."
과거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던 만두는, 갑자기 화가 난듯 주방에 대고 외쳤다.
"형님 전 왜 또 영업사원인데요?"
"이상하게 잘 어울려서."
"....."
큭큭 웃어대던 나세가 산하에게 묻는다.
"사장님, 저는요?"
"나세는 홍보 팀장."
"앗싸!"
"억울해, 형님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해 하는 듯한 만두를 보던 산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억울하면 출세해."
"......"
***
홈페이지 판매 타임을 기다려 천상주 새 버전을 구입한 김배욱은 아담한 도자기병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와이프 몰래 용돈을 모아, 나름 거금을 들여서 여러번의 시도끝에 겨우 구입한 천상주를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과연 이거 저번이랑 뭐가 다를까? 설마 사람들 말대로 맛 없어진 건 아니겠지?
'어디 보자...'
봉인을 뜯으려던 그는 띠리릭 소리와 함께 벌컥 열리는 현관문 소음에 화들짝 놀랐다.
얼른 천상주를 감추려 했지만, 어느새 와이프는 거실로 들어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여보, 거기서 뭐해?"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그가 묻는다.
"어...당신 벌써 왔어?"
신경질 난 기색으로 손에 든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그녀가 이유를 말했다.
"몰라, 엄마랑 싸워서 일찍왔어."
"왜 또? 잘 좀 지내라니까. 장모님같이 착하신분이 어디있다고."
"그건 나도 아는데, 왜 애를 안 낳으냐고 그러시잖아."
"또? 그건 장모님이 잘못하셨네. 우리도 계획이 있는데."
"그러니까, 그런데 아까부터 감추려는 그거 뭐야?"
와이프와 대화하며 천상주를 등 뒤로 슬그머니 감추던 그는, 자진납세하듯 탁자 위에 그 술병을 탁 하고 올려놓았다.
"자기 요즘 우울한 것 같아서, 선물해주려고 하나 샀어. 놀래주려고 했더니, 아쉽게 들켜버렸네."
황당해하던 그녀가 남편에게 묻는다.
"천상주? 그 선물이라는게 술이야?"
"응."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했다.
"자기 핑계가 너무 조잡한 거 아냐? 이제 술 그만 마시라고 했잖아. 안 마실거라며?"
저렇게 술만 퍼 마시다가 먼저 저세상으로 가 버릴까 늘 걱정하던 그녀는 남편을 타박했고, 김배욱은 어딘가 미안한 표정으로 답변했다.
"아니 그건 맞는데, 이 술이 대단한 거라서. 딱 한 병만 샀지. 자기 주려고."
"핑계는 됐고, 술이 뭐가 대단해? 간에도 안 좋고, 먹고 취하기나 하지."
"아냐, 이건 다르다니까. 당신도 향에 취해버릴걸?"
"아이고, 네 애주가 양반 다우세요."
"아니, 정말 자기도 이 술맛 보면 반할거라니까."
"그럴 일 없으니까, 자기나 많이 먹어. 어디 병이나 걸렸단 봐라."
갑자기 미소를 띠던 김배욱이 와이프에게 확답이라도 받을 기세로 묻는다.
"자기 분명히 나만 많이 먹으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철 없게 말하는 남편이 미웠던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대체 왜 그래? 나 엄마랑 싸우고 왔다니까? 화 돋구는거야?"
"아니, 난 그런게 아니라..."
"됐어. 엄마나 자기나 다 똑같아."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하던 그녀는 어깨가 축 처진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덩달아 기분이 다운된 그가 천상주를 만지작 거리다가 중얼거렸다.
'그런 거 아닌데...'
와이프가 저토록 걱정하니, 앞으로 정말 술을 줄여야 겠다고 생각하던 그는 마시려던 천상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주말의 오후, 집 내부는 어딘가 모르게 썰렁하기만 했다.
침대 위에 누워있던 그녀는, 괜스레 남편에게 화풀이한건 아닌가 싶어 죄책감을 느끼다가 거실로 나왔다.
어느새 남편은 소파에 불편하게 누워 잠들어 있었다.
주중에 일하느라 힘들었을텐데, 내가 미쳤지. 걱정돼서 그런거긴 하지만.
얼른 밥이나 맛있게 해서 줘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까 보았던 천상주라는 술병이 눈에 띄었다.
술고래인 남편의 평소 취향과 다르게 아주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술병.
'뭐 이런 걸 다 샀대?'
남편 기분도 풀어줄겸 반주나 하자고 할까? 그래 그러자. 그러면 좋아 할거야.
조용히 식사를 준비하던 그녀는, 남편을 놀라게 해주기 위해 미리 술을 따라놓을 요량으로 천상주 봉인을 뜯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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