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취미 하나 더 생겼는데 (1)
외침이 끝나자마자 손을 내민 두 사람은 침음을 흘리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강정열은 주먹, 곽기훈도 주먹이었다.
서로를 노려보며 천천히 손을 거둔 두 사람은 손을 뒤로 감춘 후 대화를 나눴다.
“기훈아,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다.”
“아저씨, 비즈니스의 세계는 냉철한 법입니다.”
“지금 나랑 해 보자는 게냐?”
“가위바위보로 해결하기로 하셨잖아요?”
“……좋다. 다시 하자. 가위! 바위…….”
그 순간, 산하에게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이 다가오더니 어설픈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음…… 헬로. 취직? 오케이, 취직……. 나는 여기 일하고 싶다. 사장님 알겠어?”
당황한 산하를 비롯해 기훈과 정열까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던 찰나.
이를 보다 못한 선아가 재빨리 다가와 말했다.
“린다, 내가 말할게. 사장님, 제 친구 한국어가 많이 서툴러서요. 얘가 나중에 여기서 일을 하고 싶다는데, 한국어도 열심히 배워 올 거래요. 혹시 사람 뽑으시나요?”
손님 중에서도 여기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이 간간이 있긴 했지만, 외국인이 여기서 일하고 싶어 하는 건 처음이라는 걸 떠올린 산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한국말도 잘 못 하는데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하던 산하는, 어차피 안내해 줘도 면접에서 탈락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글쎄요. 내년에 추가 인원을 뽑을 예정이긴 합니다만, 아직 정확한 일정은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친구한테 말해 둘게요.”
선아는 린다에게 산하의 말을 통역했다.
“사장님 말로는 내년에 추가 인원 뽑으신대. 정확한 건 아직이고.”
반색하던 린다가 입을 열었다.
“진짜? 선아, 나 최대한 빨리 영국 돌아갈 거야.”
“뭐? 콘서트는?”
“다 필요 없어. 돌아가서 취업비자, 아니 안 되면 워킹비자 받아서 올 거야.”
그녀의 파괴적인 돌진에 당황한 선아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
“응! 그리고 한국어 열심히 배워서 그 사람과 직접 대화도 해 볼 거야.”
두 여자 손님이 짧은 대화를 나누고 사라지고 난 후, 가위바위보를 하다가 중단한 정열이 산하에게 말했다.
“어허, 글로벌 식당이로구나. 뽑을 생각이냐?”
“글쎄요. 그래도 직원끼리 의사소통이 제대로 돼야 하는데 말이죠. 면접으로 결정할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가위바위보 언제 끝납니까? 그냥 무효로 할까요?”
“이런,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한다. 기훈이 이놈아, 이번엔 진짜다.”
“당연하죠. 가위바위보!”
이번에도 둘 다 보를 내며 승부를 가리지 못하자, 정열이 말했다.
“날 꼭 이겨먹어야 겠느냐?”
“네, 아저씨.”
“그래 좋다. 가위바위보!”
이번에는 정열이 보를 내고, 기훈이 가위를 냈다.
“허허, 네놈이 이겼는데, 이긴게 아니로구나. 힘내라 이놈아.”
드디어 자신이 이겼다며 좋아하던 기훈은 정열의 말을 듣고 흠칫했다.
“이, 이건…… 이건 아니죠. 아저씨는 심신상실도 모르세요? 잊어먹고 있었어요. 다시 해요.”
“어허 이놈이. 오늘따라 많이 추하구나.”
“…….”
여전히 사이좋게 싸우는 두 사람을 보던 산하가 손뼉을 살짝 쳤다.
“그럼 판소리 공연 당첨!”
* * *
아직은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이건만, 영하에 가깝게 떨어진 날씨는 모두의 옷깃을 여미게 했다.
산하도 마찬가지였다.
잡지사 모델 촬영을 하는 날에 이런 매서운 추위라니.
“아, 추워!”
하얀 입김을 하 불어 본 산하는 자취방 내부로 되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조금 더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작년에 쓰다남은 물건을 떠올렸다.
핫팩.
혹시 필요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한두 개 정도는 차에 놔둬야겠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얼른 서랍을 열어서 핫팩을 꺼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벽시계를 확인해 보니 여유 시간은 충분했다.
트럭을 몰고 산하가 향한 곳은 잡지사에서 대관한 촬영 장소가 아닌, 늘 새봄과 장 보러 갈 때 만나던 곳이었다.
잠시 후 첫 목적지에 도착한 산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입김을 호 내뱉고 있는 새봄을 발견했다. 그녀의 볼은 추위로 발그레해져 있었다.
“봄봄봄!”
새봄은 얼른 차 문을 열고 트럭에 타더니 말했다.
“와, 따뜻하다.”
히터를 틀어놓은 탓에 후끈한 내부를 둘러보던 새봄이 산하에게 말했다.
“이 차 진짜, 성능 하나는 빵빵한 것 같아요. 에어컨도 그렇고…….”
“그치? 그나저나 이렇게 추운 날 뭘 구경하겠다고.”
“저 그런 거 한 번도 본 적 없거든요. 그리고 실내라면서요?”
말을 이어 가려던 새봄이 눈을 또르륵 굴리더니, 조선 시대 대감 흉내를 내며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안녕하세요? 박산하 씨. 새로운 매니저 윤새봄이라고 해요. 어디 보자, 오늘 스케줄은 너른 문화사 요리 잡지 모델 촬영이군요. 이후에 더 바쁜 일정이 있으니 얼른 가 주세요.”
차 문 쪽에 대충 쑤셔 넣어 놨던 주유소 티슈를 들고 다이어리인 척 바라보던 새봄이 산하를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박 기사님? 얼른 출발하셔야죠?”
평소에는 잘 보지 못하던 그녀의 장난을 보게 된 산하는 살짝 웃음기를 띤 표정으로 말했다.
“네, 매니저님. 기사 겸 모델 박산하, 출발하겠습니다.”
오늘 촬영은 개인 레스토랑 하나를 빌려서 진행되는데, 인테리어가 고급스럽고 특색 있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곳 근처에 도착한 산하는 트럭을 주차하고 새봄과 함께 그 건물로 향했다.
레스토랑 앞은 이미 촬영 관계자들로 분주했는데, 손을 비비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빼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에디터 안도경이 산하를 발견했다.
“산하 씨!”
“왜 나와 계세요? 날도 추운데.”
“귀한 분이 오시는데 마중은 나와야죠. 새봄 씨, 안녕하세요?”
새봄이 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도경이 반갑게 인사했고, 그녀도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구경 좀 하러 왔어요.”
“잘 오셨어요. 크게 볼 건 없지만.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랄게요.”
새봄은 생각했다. 이미 좋은 시간인걸요?
세 사람은 촬영장 내부로 들어서서 촬영 준비에 돌입했다. 한쪽 임시 탈의실에서 깔끔한 요리사 복장으로 갈아입은 산하가 걸어 나오자 새봄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검은 앞치마가 진짜 잘 어울리세요. 멋있어요.”
“그래? 이제 식당에서 이거 할까?”
“네.”
그때, 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성 사진작가가 웃으며 다가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어쩜 두 분 다 모델 같으세요? 지금 막 다른 컨셉으로 촬영하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하하 웃던 산하가 말했다.
“저 보단 이쪽이 더 모델 같을걸요?”
그의 시선에 살짝 부끄러워하던 새봄이 딴청을 피웠고, 사진작가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묘하다는 걸 느꼈으나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제가 보기엔 두 분 다 모델 같아요. 아무튼, 산하 씨. 오늘 촬영 잘해 봐요.”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답을 하던 산하의 시선은 그녀의 옆구리로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아주 낡아 보이는, 스크래치와 찍힘투성이의 카메라 한 대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오늘 횡재했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저 카메라를 어떻게 한번 만져 보나 생각하며 식칼을 들었다.
오늘 촬영 컨셉은 연인에게 요리를 만들어 떠먹여 주는 것으로, 산하가 요리하는 장면 몇 컷과 미리 예쁘게 데코해 놓은 요리와 함께 몇 컷, 그리고 맞은 편 연인에게 떠먹여 주는 듯한 장면으로 마지막 컷을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이내 산하가 알록달록한 야채를 깔끔하게 썰어 내자, 눈부신 스트로보가 번쩍번쩍 빛을 발하며 촬영이 시작됐다.
“좋아요. 산하 씨, 잘하고 계세요. 담담한 미소 한번 지어 보시겠어요? 네, 좋아요. 이번엔 조금 더 행복한 미소.”
열정적으로 촬영하고 나면 안도경 에디터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촬영을 조율하던 사진작가에게도 잠깐의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이게 좋아 보이죠?”
“네, 제 생각에도 그래요. 그럼 이걸로 하죠.”
“네. 남은 촬영도 잘 부탁드려요.”
“그럼요. 믿고 맡겨 주셨는데, 최선을 다할게요.”
안도경은 이번 사진작가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사진작가는 거만하기 이를 데 없어서 촬영 조율도 잘 안 되고 애를 먹었는데, 이번 작가는 정말 싹싹하고 실력도 괜찮았다.
심지어 그녀를 따라온 어시까지 성격이 좋았다.
안도경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산하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잘 나왔나요?”
“그럼요. 잘 나왔죠. 포즈 잘 잡아 주셔서 촬영도 쉬웠어요. 조금만 더 하면 훨씬 멋진 사진도 나올 것 같아요.”
사실 산하가 아마추어라 촬영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사진작가는 그저 칭찬만을 퍼부었다. 기를 죽이면 될 것도 안 되는 것이기에, 이런 칭찬은 그녀의 촬영 기술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포즈 잡는 게 영 어색하기만 했던 산하는 그녀의 과거를 들여다봐서 이미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웃어 주었다.
그 시선은 무심코 그녀의 옆구리로 향했고, 사진작가 공미숙은 그 시선을 따라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 카메라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산하에게 말했다.
“많이 낡았죠?”
“낡았어도 기품 있어 보이는데요?”
“그래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이게 우리 아버지 유품이거든요. 이걸 메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항상 이렇게 가지고 다녀요.”
“아…….”
“서 있지 마시고, 이쪽에 앉으시겠어요?”
그거야 바라던 바였기에, 산하는 얼른 공미숙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얘는 어딜 간 거야? 새봄이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아 의아해하던 산하는, 이내 사진작가와 다음 촬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산하는 공미숙이 가지고 있는 카메라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작가님 카메라는 우리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모델보다 훨씬 오래 돼 보이네요. 실례지만, 구경 한 번만 해도 될까요? 불편하시면…….”
“아니요. 안 불편해요. 한번 보세요.”
정겹게 웃으며 필름 카메라를 산하에게 넘겨준 사진작가 공미숙은 에디터 안도경과 열띤 토론이라도 하듯 대화했고, 그 사이 산하는 그녀의 낡은 카메라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31년 전, 공민철은 빛에 노출되어 타버린 필름을 거머쥐고 허망하게 웃었다.]
[과거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주변 눈치를 슬쩍 본 산하는 과거를 확인했다.
[31년 전으로 다가갑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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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철은 남쪽 지방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나름 부유하다 보니 부모는 그를 힘껏 뒷바라지해 주었고, 민철은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에 종사하기를 강요받았다.
“아버지, 전 사진이 좋습니다.”
“그딴 건 취미로 해도 된다. 카메라는 괜히 사 주었구나. 네 앞날을 살피고, 가문의 위신을 생각하거라.”
차마 자신을 귀하게 키워 준 부모에게 대들지 못했던 민철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의사가 된 공민철은 가끔 장롱 속의 카메라를 꺼내 보긴 했지만, 실제로 촬영에 임하지는 않았다.
자칫 한 컷이라도 찍었다간 모든 걸 그만두고 사진에 미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날이면 날마다 손이 근질거렸기에, 촬영하러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 욕구는 시간이 흐를수록 켜켜이 쌓여 민철은 자주 화를 냈고, 자주 우울해졌으며, 오랜 시간 잠을 자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와이프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고 방구석에 드러누워 있던 민철에게 딸 공미숙이 다가왔다.
“아빠 이건 뭐야?”
이제 일곱 살 먹은, 늦결혼으로 낳은 딸이 그의 눈앞에 젊은 날 메고 다니던 카메라를 내밀었다. 마음속 깊이 그리워했으나, 감히 손대기 두려워했던 그 카메라.
물건을 왜 함부로 꺼내고 만지냐고 야단치려던 민철은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보고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왜 이러지…….’
민철은 누운 채로 가만히 생각했다.
이 짧디짧은 삶에, 내가 욕망하는 것 하나 못 이룬다면 그 얼마나 허무할까. 그래, 모르겠다. 해야겠어. 난 꼭 해야겠어.
결심을 굳히자마자 벌떡 일어선 민철은 와이프에게로 향했다.
“나, 의사 때려친다.”
사람은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듯이, 두 사람은 소통이 잘 안 되는 상황이었고, 갑작스러운 남편의 통보는 그녀를 화나게 했다.
“……뭐, 뭐라고요? 당신 뭐라고 했어요?”
“나 의사 때려치우고 사진작가 할 거야.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이 집이랑 모은 돈은 당신 줄게. 당신 마음대로 해.”
“그게 지금 나한테 할 말이에요? 당신 너무 무책임한 거 알아요?”
“그래, 알아. 난 나쁜놈이고, 무책임하고, 미친놈이지…….”
그 후 두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그리고 어느 날.
남편의 우울한 표정을 보게 된 그녀는 그간 민철이 보여 주었던 부정적 행동의 모든 것이 사진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었고, 조심스레 그를 다독이며 이유를 물었다.
민철은 망설이던 끝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유를 털어놓았고,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여태 끙끙 앓으며 고생했어요. 당신 마음대로 해 봐요. 이 집은 정리해서 작은 집으로 옮기고, 상가 하나 사면 될 것 같아요. 경비는 많이 못 보태 줘요,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러면 되겠죠? 대신 우리 딸 보러 한 달에 몇 번은 들러야 하는 게 조건이에요.”
“당신!?”
“그렇게 감동한 표정 짓지 말아요. 나도 쉽게 선택하는 거 아니니까. 이왕 시작하는 거 끝을 봐요. 그래야 나도 보람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럼,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여보 고마워!”
갈비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와이프를 힘껏 껴안은 민철은 곧바로 다음 날 최신형 필름카메라를 구입했고, 전국을 누비기 시작했다.
찍고, 또 찍고, 기다리고, 이슬비를 맞고, 노숙을 하고. 그의 고생은 말뿐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집에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 상업 사진을 찍는 일도 있었다.
그런 삶은 계속되었고, 어느덧 그의 나이 육십이 되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후로 그의 표정은 늘 밝았다. 오늘도 세상을 다 가진 자의 표정으로 마지막 필름을 소진한 민철이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예전에 공모전에서 2등 아니면 3등을 차지했던 민철은 자신이 있었다.
마지막 공모전 후로 약 5년간 미친 듯이 몰입한 끝에, 마지막 필름으로 촬영한 이 사진이면 세상이 놀라 자빠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제 희대의 역작을 뽑았으니 세상에 내보이기만 하면 은퇴하고, 자신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주었던 와이프와 행복하게 노후를 보내야겠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간 민철은 그녀를 껴안고 외쳤다.
“여보, 됐소. 이번엔 제대로요.”
“그래요? 잘 됐어요.”
한결같이 그를 응원해 주던 와이프의 주름진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사건은 다음 날 발생했다.
그가 피곤에 물들어 늦잠을 자고 있을 무렵, 어린 외손자가 슬며시 들어와 그의 카메라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도중 필름이 담긴 뒷면이 열렸고, 호기심에 찬 아이는 필름을 좌르륵 잡아당기고 말았다.
약간의 부주의로 인해, 희대의 역작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깨어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민철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필름을 매만졌다.
“아, 안 돼…… 안 돼!”
.
.
.
[공민철의 놀라운 사진 촬영 솜씨 관찰에 성공하셨습니다.]
[솜씨 일부를 가져옵니다.]
그의 과거를 살펴본 산하는 왠지 자신과 동류의 인간으로 느껴지는 공민철의 삶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이 열리며 새봄이 등장했다. 그녀의 양손에는 먹거리가 잔뜩 든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자, 모두 드시고 하세요.”
‘어디를 갔나 했더니, 간식 사러 다녀왔구나’라고 생각하던 산하가 일어서자, 안도경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머, 안 그러셔도 되는데, 어떡해…….”
“괜찮아요. 이 안에서 저 혼자 시간이 남아돌길래 사 왔어요.”
모두에게 긍정적이고 밝은 기운을 내뿜는 그녀를 바라보며 산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집 다용도실 한구석에 방치되다시피 놓인 서랍을 뒤적이던 산하는 마침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나름 잘 밀봉된 채로 구석에 놓여 있던 필름카메라였다.
그 옛날, 일반 사무직 종사자 몇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아버지가 사들였던 카메라.
“박산하, 왜 남의 살림을 뒤적여?”
어느새 그의 뒤로 다가선 박상태가 말투는 조금 퉁명스럽지만 호기심이 담긴 눈동자로 아들을 바라보았고, 산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사진 좀 찍어 보려고요. 이거 찾았어요.”
산하가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들어 올리자, 박상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 구닥다리 카메라로?”
“어때서요. 아날로그의 맛이 있는 법이죠.”
“그야 그렇다만…….”
‘허튼짓을 한다’거나 ‘어딜 남의 카메라를!’이라는 호통을 들을 줄 알았던 산하는 왠지 어색했다.
법인 은성에 관한 소식이 알려지며 아버지가 점점 변해 가는 느낌이었다. 저번에 페인트칠도 그렇고, 아버지의 상태가 점차 좋아지시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산하가 그에게 물었다.
“이거 저 해도 되죠?”
“마음대로 해.”
요즘은 죄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다니는 세상인데, 아들이 대체 뭘 하려나 싶어 의아하게 바라보던 박상태는 뭔가 뜻이 있겠거니 하며 밖으로 사라졌다.
그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산하는 필름 카메라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미션 - 필름 다섯 롤을 소진하여 모델이 마음에 들어 하는 사진을 건네자.]
[보상 - 모든 사진 촬영 도구에 공민철의 솜씨가 적용된다.]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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