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대박 물김치 (1)
“응, 통화 가능해?”
현재 상가 건물주인 옥희 할머니가 왜 전화를 하셨을까 궁금해하던 산하는 바로 대답했다.
“네, 그럼요. 말씀하세요.”
“다른 건 아니고, 그 건물 아직 구입할 의사 있어?”
“네, 그럼요. 그런데 아드님이 못 팔게 하신다고……?”
“그놈이 팔아서 뭘 또 해 보겠다네. 내 아들이지만 어휴…….”
한숨을 푹푹 내쉬던 양옥희가 말을 이어 갔다.
“아무튼. 나도 이제 나이도 있고, 모르겠다 싶어. 이왕이면 자네한테 넘기고 싶어서 전화했으니까, 살 생각 있으면 조만간 한번 들러.”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들어가세요.”
정중하게 통화를 종료한 산하를 향해, 윤정이 의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할머니?”
장순희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빤히 바라봤고, 이내 산하가 입을 열었다.
“지금 장사하는 상가 쪽 건물주 할머님이야.”
감탄사를 내뱉던 윤정이 다급히 물었다.
“그래? 왜? 팔겠대?”
“응, 정확한 건 가 봐야 알겠지만.”
맛집 장사 수익과 천상주 판매 수익, 모델료, 다큐 프로그램 출연료에 이어 한국관광공사 수묵화 전시회 수익금까지. 그간 꽤 많은 돈을 모아 놓았던 산하에겐 계획이 있었다.
더 모아서 작은 식품업체를 인수하거나 직접 차리려고 했었는데.
하지만 건물이 매물로 나왔으니 그 계획은 변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그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여겼다.
안 그래도 정든 곳을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아예 사 버린다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때, 장순희가 입을 열었다.
“얼마에 주신다는 말은 없고?”
“그것도 만나 봐야 알 것 같아요.”
가만히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윤정이 말했다.
“아무튼 걱정했는데 잘 됐어, 오빠.”
“오, 윤땡. 날 걱정했어?”
“에이 진짜, 밥이나 먹어.”
“그래.”
그나저나 저 물김치 해금은 언제 풀 수 있을지 걱정하던 산하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같은 시각.
새봄은 나름 단정하게 차려입고 어느 고급스러운 카페에 나와 있었다. 사실 대충, 체육복에 화장도 안 하고 나오려 했던 그녀는, 그래도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어느 정도는 꾸미고 나온 상태였다.
‘뭐야, 왜 안 와?’
억지로 나왔는데, 약속 상대는 아직도 오지 않고 있었다. 예의도 없는데, 그냥 집에 가 버릴까 하던 그녀는 일어설락 말락 하다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싫다…… 정말.’
그때, 제법 훤칠해 보이는 잘생긴 사내가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레스토랑에 들어서더니, 직원의 안내를 받아 새봄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늦었죠? 주시완이라고 합…….”
그 순간, 새봄이 고개를 돌렸고.
주시완은 깜짝 놀랐다.
사진으로만 볼 때는 그녀가 너무 예뻐서 사진을 조작했네, 이게 다 사진빨이지 했는데, 실물을 보니 사진이 제대로 안 나온 거였다.
이럴 수가.
나의 이상형이 여기에?
딱히 적극적인 마음도 없이 시간만 대충 때우려 했던 그는 눈부신 외모의 새봄에게 순식간에 반해 진지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귀찮은 표정으로 카페에 들어서던 조금 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사내를 바라보던 새봄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윤새봄이라고 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정말 죄송합니다.”
평소 이런 자리에서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사과도 얼렁뚱땅하던 주시완이었지만, 오늘은 표정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새봄은 과거 다른 남성에게서 많이 보던 눈빛에 께름칙함을 느끼며 조금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괜찮아요. 음료 뭐 드시겠어요? 제가 주문하고 올게요.”
평소라면 ‘전 같은 거로 주세요’라고 했을 주시완이 황급히 말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제가 다녀올게요.”
이후 음료를 주문한 후 가져온 다음까지도, 주시완 혼자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드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전 사실 어릴때부터 과학자가 꿈이었는데, 집안이 집안이다보니 힘들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이 순간, 새봄은 명확하게 알아 버렸다.
사장님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고 재미 있었는데, 이 사람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앞에 남자가 떠들건 말건 산하의 그림자만 어른거리는 것에 놀란 새봄은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사실 그녀는 산하를 좋아해서 자신의 아버지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계획을 꾸몄지만, 두려움도 함께였다.
혹시라도 헤어진다면, 그 공허함과 외로움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가가는 마음을 제지할 수도 없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에게로 한 발 더 다가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새봄도 놀랄 때가 많았다.
좋아하지만, 두렵다.
그게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로 인해 표정이 어두워져만 가는 그녀를 바라보던 주시완은 애가 탔다. 내 말이 재미없나? 몸이 안 좋은가? 이런 적은 처음인데…….
“저기, 새봄 씨?”
“네. 말씀하세요.”
“오늘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어…… 아니요. 그냥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요. 죄송해요.”
“그러셨구나. 그럼 조금 더 편한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네…… 그런데 새봄 씨는 어떤 남자가 좋으세요?”
그녀가 원하는 건 다 해 보이겠다고 다짐하던 시완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렸고, 새봄은 가만히 생각했다.
난 그냥 아무것도 필요 없이, 사장님 같은 남자가 좋은데.
그 내심은 그녀의 입에서 조금 다르게 흘러나왔다.
“전, 붓글씨 잘 쓰는 남자가 좋아요.”
주시완이 화색을 띠며 말했다.
“붓글씨요? 와, 제가 서예를 좀 배웠습니다.”
이 정도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듯한 시완을 바라보던 새봄은, 그가 자신을 싫어하게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 사이 시완이 질문을 던졌다.
“또 어떤 걸 좋아하십니까?”
“수묵화 잘 그리는 거랑.”
“수묵화요?”
“네. 그리고 술도 잘 만들고, 사진도 잘 찍고, 요리도 잘 하고, 노래도 잘 하는 그런 남자가 좋아요.”
살짝 놀라던 주시완이 도전적인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볼게요.”
저 남자의 눈빛은 살아오면서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던 남자에게서 보던 표정이었고.
그래서.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만들고자 말을 마구 내뱉던 그녀는 당황했다. 방금 저 남자가 뭐라고 한 거야? 노력해 본다고?
‘아니,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라고 말하면서 나가 줘야 하는데. 그게 맞는데…….
“그런데 새봄 씨. 엄청 미인이시네요. 아까 깜짝 놀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어, 잠시만요.”
뭔가를 많이 요구해서 그를 질리게 하려던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다음 계획으로 넘어갔다.
[사장님]
[응? 왜?]
[저 어디게요?]
[내 자취방 앞?]
[땡! 아니거든요? 사장님은 어디서 뭐 하세요?]
[나 지금 물김치 재료 사고 있지.]
[물김치요?]
[그래, 물김치 국수도 좋고, 새로 내놓을 메뉴의 시작이라고 해야 하나?]
[와! 기대기대!]
[아직 기대는 하지 말고, 그런데 어디야?]
[그냥 아빠 때문에 지루한 시간?]
[그래? 아 참, 내일 나랑 간만에 수묵화나 그릴까?]
[네!]
역시 사장님이랑 대화하면 그냥 재밌어.
그런데, 저 남자는 뭐야?
톡을 날리던 그녀는 맞은편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이런 자리 나와서 핸드폰이나 만지면 예의 없다면서 표정이라도 변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녀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주시완이 형형하리만치 눈을 빛내며 외쳤다.
“저, 새봄 씨가 무척 마음에 듭니다. 저랑 만나 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아버지 지인의 딸이라고 해서 얼굴만 비추러 왔던 주시완은 어느새 부모님을 원망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 여성이면 진작에, 억지로라도 만나게 해 주시지.
이런 천사 같은 여자가 내 눈앞에 있다니.
어디선가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 시완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때였다.
새봄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사실 전 아버지 때문에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시완 씨도…….”
“저도 처음엔 아버지 때문에 나왔습니다.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던 새봄이 당황한 표정을 지을 때, 시완이 계속 고백의 말을 던졌다.
“새봄 씨, 우리 딱 반년만 만나 봅시다. 서예건 노래건 다 자신 있습니다. 제가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죄송해요. 전 그럴 생각 없어요.”
평생 여자에게 고백을 받으면 받았지, 단호한 거절 따위는 당해 본 적 없는 주시완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새봄 씨…… 그러면 전화 번호라도 좀?”
아버지가 휴대폰 번호는 알려 주지 말라고 했던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셨구나, 생각하던 새봄은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저 먼저 실례할게요. 좋은 분 만나세요.”
고개를 한 번 더 숙여 보인 새봄은 도망치듯 사라졌고, 거절에 충격받은 주시완은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 * *
기분 좋은 듯 허허 웃으며 안방에서 나오던 윤주상이 욕실에서 씻고 나오는 새봄에게 말했다.
“어떠냐? 만나 보니 시완 군 참 좋지? 우리 사윗감도 네가 마음에 쏙 든다더구나.”
“말미잘 멍게 같아요.”
갑작스러운 새봄의 발언에 당황한 윤주상이 물었다.
“응? 말미잘?”
“네. 저 한 번 나갔으니까 다시 나가라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전화번호 절대절대 알려 주지 마시고요.”
새봄은 어딘가 지친 표정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가 버렸고, 윤주상은 저기압 상태의 딸을 보며 당황했다.
아니, 잘 생겼지, 집안 좋지, 학벌 좋지, 직업 좋지, 성격 좋지. 뭐가 모자라서 저러는 거야?
고작 사진작가 놈한테 반해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내일 다시 잘 얘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윤주상은 조금 전 주시완에게서 날아온 문자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아버님, 새봄 씨 정말 마음에 듭니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딸을 어찌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새벽.
전보다 일찍 일어난 새봄은 살금살금 거실을 지나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잔디 정원으로 나섰다.
산하 만날 생각에 신나서 추위도 아랑곳 않던 그녀는 운동화를 신은 채로 폴짝폴짝 뛰며 만복네 약국으로 향했다.
이내 약국 앞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트럭을 본 새봄이 손을 흔들었고, 차창을 내린 산하가 화답했다.
“봄봄봄, 승차!”
“아자! 일찍 오셨네요?”
“응, 잠이 일찍 깨더라고.”
“그러셨구나.”
어제저녁의 지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상큼해진 새봄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출발!”
오늘도 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에 기분이 좋아진 새봄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별일이네,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글쎄요?”
그녀의 컨디션이 좋은 건가라고 생각하던 산하는 트럭을 출발시켰다.
* * *
양옥희가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매매 관련 약속이 무산되듯 미뤄졌다. 아들이 속을 썩인다던데, 그것 때문일까?
매매에 관한 염려보다는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그녀가 걱정되었던 산하는 조만간 병문안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오래 사셔야 할 텐데.’
중얼거리던 산하는 가지런히 모아 놓은 물김치 재료를 바라보았다.
그걸 보자마자 주먹을 불끈 쥐는 산하.
계속해서 물김치를 만들었지만, 자연스럽게 더 달라는 말을 듣는 데 실패한 탓에 오기가 생겼다.
평소 가족들이 된장찌개, 떡국 등 최고의 요리를 맛봐서 그러지 싶었는데.
그래도 그렇지, 맛있다고만 하고 한 번 더 달라는 가족이 없었다. 이제는 해금보다 자존심 문제였다.
다른 요리는 그렇게나 더 달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기필코’라고 외치며 물김치를 담던 산하는 예상치 못한 메시지에 당황했다.
[문화와 관련된 행위입니다.]
[박산하의 물김치 담그는 솜씨가, 현재 가진 솜씨 대비 일시적으로 32% 상향됩니다.]
[남은 시간 20분]
그간 음식에선 한 번도 뜨지 않길래 음식도 문화인데 왜 안 뜨나 했더니, 이제야 떠 버렸다.
안 그래도 잘 안 뜨는데, 음식은 확률이 더 낮기라도 한걸까 하며 생각하던 산하는 신나게 물김치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면서.
며칠 후, 영업이 막 종료된 시간.
만들자마자 실온에서 조금 익힌 후 김치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던 물김치 통을 꺼내든 산하가 맛을 보았다.
“오!”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던 산하는 이 정도면 홍혜영의 솜씨에는 못 미치지만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가족들도 더 달라고 하지 않을까.
“사장님? 혼자 뭐 드세요?”
현재 2층은 전시회도 안 하고 잠시 비어 있는 상태라 임시 창고로 사용 중이었는데, 그곳을 정리하고 내려온 새봄이 뒷짐을 진 채 큰 눈을 깜빡이며 호기심을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돌아본 산하가 씩 웃었다.
“물김치가 다 익어서, 맛 좀 봤어.”
새봄은 어제 다 같이 점심을 먹을 때 나왔던 물김치를 떠올렸다.
“아! 그 생각보다 평범하지만 맛있는 물김치…….”
왠지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말투에 산하가 괴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봄봄봄, 너도 내 동생이랑 같은 과였어?”
“네?”
“아니야. 그리고 이건 어제 그거랑 다른 거야.”
“정말 다른 거예요?”
“그래.”
“그렇구나. 아 참, 사장님. 2층에서 사진 전시회는 안 하세요?”
“그게, 마음에 드는 작품이 새봄이 너한테 준 그 사진인데. 네 얼굴이 팔릴까 봐 다음에 하려고.”
“전 괜찮은데…….”
“난 안 괜찮아서.”
안 괜찮다는 말에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끼던 새봄은 생각했다. 저 말 무슨 뜻이야?
날 아껴 주는 건가.
그녀가 감정의 동요에 휩싸인 사이, 물김치를 약간 덜어낸 산하가 새봄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자, 맛 좀 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던 새봄은 얼른 그릇을 받아들고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물김치에 집중했다.
오늘따라 물김치가 불그스름한 게 맛있어 보였고, 어느새 침을 꼴깍 삼키던 그녀는 곧장 숟가락을 들고 맛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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