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고릴라가 나타났습니다 (1)
평소 다양한 생각이나 행동을 해도 나오지 않던 미션이 공미숙의 발언에 뜬금없이 나타나자 산하는 턱을 쓰다듬었다.
앨범 재킷이라.
재킷 만들려면 음반 작업부터 해야겠는데?
하지만 앞으로 다른 일정이 많았다. 헤어 대회도 나가야 하고, 강정열에게 약속한 판소리 공연도 해야 했다.
이 미션은 조금 미뤄 두기로 한 산하는, 자세한 건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며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그곳에 새봄의 기도하는 모습이 신비롭게 담겨 있었다.
‘봄이는 뭐 하려나…….’
그녀에 관해 잠시 떠올리던 그는 이내 두 사람과 담소를 나누다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톡을 보냈다.
[봄봄봄]
[네!]
[뭐 해?]
[그냥 이것저것? 왜요?]
[크리스마스이브 때 찍은 사진 나왔길래. 그거 주려고.]
[와, 잘 나왔어요?]
[얼굴은 잘 안 보이는데, 잘 나오긴 했어.]
산하의 톡에 답장하려던 새봄이 풉 하고 웃더니, 심술 난 척 답장했다.
[그러니까, 얼굴 가려서 잘 나왔다. 이런 말인 거죠?]
[그런가!?]
[치! 사장님은 어디신데요?]
[나 이제 막 사진관에서 나왔어. 올해 마지막 날인데, 시간 되면 저녁 같이 먹을까?]
[생각 좀 해 보고요.]
[생각? 봄봄봄, 이제 막 튕기는 거야?]
[네! 요리해 주셔야 갈 거예요.]
[콜! 오늘은 3종 세트로 간다.]
[신난다, 가요가요. 지금 식당으로 가면 돼요?]
[아냐, 지나가는 길이니까 데리러갈게. 만복이네 앞으로 출동!]
[알겠어요!]
새봄의 마지막 답장을 바라보던 산하는 상큼발랄한 그녀의 말투가 느껴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나저나, 밥 먹고 보신각이나 같이 갈까?
거긴 사람 미어터질 텐데.
일단 만나서 애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트럭을 몰고 그녀와 늘 만나는 약국 앞으로 출발했다.
* * *
“딸, 아빠랑 새해 일출 보러 갈까?”
“어…… 아니요?”
“응? 뭐라고?”
“아! 니! 요!”
“봄아, 이 아빠 섭섭하다.”
“아빠가 또 일출 보러 가다가 차 돌리실까 봐 그러죠.”
“하긴…… 그럼 집에 있으려고?”
“그것도 아니요.”
“아니야? 그럼 우리 딸 뭐 하려고 그러실까?”
“비밀이에요.”
어딘가 단단히 삐친 표정으로 변한 윤주상이 그녀에게 말했다.
“딸.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아빠 가출한다?”
“아, 맞다! 아빠 가출하시기 전에, 선물 들어온 거 조금 가져가도 돼요?”
협박이 전혀 먹혀들지 않은 딸의 태도에 윤주상은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러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선물? 그건 왜?”
“직장 동료 나눠 주려고요.”
“동료? 그래라. 어차피 다 못 먹을 거.”
“감사합니다!”
요즘 들어 자주 못 보던 배꼽 인사까지 하고 룰루랄라 선물을 챙기러 가는 딸의 모습에, 윤주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상해…….’
이참에 딸의 뒤를 밟아 볼까 하던 그는,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 그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후.
만복이네 약국 앞에 도착한 산하는 손을 흔들어 주다 말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새봄이 뭔가 커다란 박스를 발치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른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린 산하가 그녀에게 물었다.
“봄아, 그거 뭐야?”
자신의 상체보다 큰 박스를 바라보던 새봄이 배시시 웃었다.
“뇌물이요.”
“뇌물?”
“내년에도 맛있는 거 많이 먹여 달라는 뇌물이에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 덩달아 장난기가 발동한 산하가 뒷짐을 지고 근엄하게 말했다.
“오, 그래. 우리 윤새봄 사원이 뭘 좀 아네. 어디 뇌물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까?”
“그러시죠? 전 자신 있어요.”
사실 눈깔사탕 하나를 가져왔어도 무척이나 좋아했을 산하는, 장난스레 박스를 열어 살피다가 두 눈을 끔뻑였다.
한우, 홍삼, 토종 벌꿀 등 얼핏 보이는 것만 해도 고급스러워 보였는데, 그 옆에도 자질구레한 것이 많았다.
“봄봄봄, 이걸 다 주겠다고?”
“네! 주변에서 선물 들어와도 가족이 얼마 없어서 다 못 먹거든요. 아빠한테 허락도 받았으니까 염려 마세요.”
“아니, 그래도 이건…….”
“전, 사장님 된장찌개 한 그릇이 여기 선물 한 박스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말에 과장될 정도로 감동한 표정을 짓던 산하가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아…… 봄이 말에 심쿵사 할 뻔했다. 가자! 오늘은 5종 세트다!”
새봄이 하얀 주먹을 마구 흔들었다.
“바로 그거예요! 아참, 거기에 풋고추도 넣어 놨어요. 자취방에서 아침 드실 때 된장에 콕 찍어 드세요.”
“이야, 우리 봄이 센스 좋고.”
“그쵸?”
“그래, 얼른 타. 이건 내가 실을게.”
이후 새봄과 맛난 음식을 해 먹고 보신각으로 출발한 산하는 어마어마한 인파에 기겁했다.
“봄아, 우린 그냥 조용히 새해 맞이할까?”
“네. 너무 정신없어요.”
식당으로 되돌아간 두 사람은 이내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지붕으로 씌어 있었지만, 맨 끄트머리 쪽에는 하늘이 드러나 있었다.
그 하늘에 반짝이는 위성인지 별인지 모를 것을 바라보던 산하가 스마트폰의 시계 앱을 작동시켜 한편에 놔두었다.
“봄봄봄, 올 한해도 고생했어.”
“사장님이 더 고생하셨죠.”
“별말씀을, 내년에도 잘 해 보자?”
“네! 어? 올해가 10분 남았어요.”
“그러네, 오늘 구름도 별로 없고 좋다.”
“맞아요.”
가져온 식당 의자에 나란히 앉아 주변 야경과 검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조각구름을 바라보던 두 사람.
적막 가운데 간간이 주변 소음이 들려오던 그 순간 시계는 12시를 가리켰고, 사방에서 희미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새해다!”
“한 살 더 먹었다!”
“자, 봄봄봄. 새해 선물.”
“어? 이게 뭐예요?”
작고 아담한 액자를 받아든 새봄은 사진을 보자마자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곳에는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장소에 함께 있었기에 알아본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몰라볼 법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자마자 새봄이 질문을 퍼부었다.
“우와, 이게 저예요? 이건 또 언제 찍으셨어요?”
“마음에 들어?”
“네, 진짜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다. 이거 다음 앨범 재킷에 써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던 새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래? 허락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그 앨범 언제 나와요?”
“글세.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런 게 어딨어요. 하루빨리 나올 거라 믿어요. 앨범 나오면 저도 주세요.”
“당연하지. 우리 봄이한테 가장 먼저 줄게.”
언젠가처럼 다시 한번 설렘을 느끼던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네!”
* * *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첫해가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산하의 나이도 어느덧 31살.
그는 새해를 맞아 본가 단독주택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담장도 대문도 새것처럼 반짝이는 것에 기분 좋아하던 산하는 이내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따릉이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오, 따릉이 새집이네?”
어느새 개집도 새것으로 변한 것을 눈여겨보던 산하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머리를 산발한 윤정이 뒷덜미를 벅벅 긁으며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윤땡.”
졸린 표정으로 눈을 비비던 윤정이 고개를 들었다.
“와우, 박산하.”
“그 꼴을 보면 오려던 사람도 다 도망가겠다.”
“도망가라 그래. 난 이제 편하게 살 거야.”
“아이구, 네 마음대로 하세요. 엄마랑 아버지는?”
“할아버지댁에 새해 인사드리러 가셨어.”
“어? 그런 연락 없으셨는데.”
“오빠 바쁘다고 말하지 말랬어. 나중에 어련히 알아서 간다고.”
“말씀하셔도 되는데…… 그런데 넌 왜 안 가?”
“일도 있고, 개밥도 줘야 해서. 댁과 함께 천천히 가려고 했지.”
“어쭈? 댁?”
“그렇다. 댁.”
“이걸 콱!”
“아, 엄마 오빠가 나 때려……는 안 계시네?”
“잘났다. 난 내일이나 갈 건데. 나 간다. 잘 있어라.”
“가지 마. 나 심심하단 말이야. 된장찌개라도 한 그릇 끓여 주고 가.”
“……아, 내 여동생은 정말…….”
“정말 뭐?”
“진상……. 나 바빠서 간다.”
“야! 박산하!”
여동생의 외침을 뒤로한 산하는 옥희 할머니가 운영하는 슈퍼 앞에 도착했다. 오늘 퇴원했다고 들었는데, 벌써 가게 내부에 쌓인 먼지를 청소하는 중이었다.
얼른 다가간 산하가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그녀를 말렸다.
“할머니. 더 쉬셔야 하는데, 이러시면 어떡해요?”
“왔어? 괜찮아, 다시 팔팔해졌어. 마침 부동산 최 씨도 시간 된다고 오기로 했으니까, 거기 앉아 있어 봐.”
“네? 벌써 파시게요?”
“어영부영 미룰 거 뭐 있어. 필요한 사람이 가치 있게 쓰면 제일 좋은 법이지.”
“할머니…….”
“그렇지. 감격한 표정 정도는 지어 줘야 보람이 있지. 어디 보자, 꿀물?”
“네, 할머니.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런데…….”
산하가 무슨 말을 꺼내려던 찰나, 봉황 부동산 사장 최팔봉이 가게 내부로 들어섰다.
“아이고 할머니, 몸은 좀 어떠세요? 산하 씨 반갑습니다.”
“와, 사장님. 얼굴이 확 피셨네요?”
“그런가요?”
최팔봉이 기분 좋게 하하 웃었고, 산하와 옥희도 덩달아 웃었다.
잠시 후.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세 사람은 이내 모여 앉아 본격적으로 상가 매매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오가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제법 흘렀고, 최팔봉이 서류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이야, 우리 산하 씨 땡잡으셨네요. 우리 옥희 할머니 인심이 그냥…….”
“그런 말 말어. 누가 보면 공짜로 주는 줄 알겠네.”
“할머니, 감사합니다.”
그 후 계약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진행되었다.
계약금을 이체한 산하는 새해 선물처럼 건물을 넘겨준 양옥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돈 받고 파는 건데, 뭐가 계속 감사해?”
“그래도요. 저렴하게 주셨잖아요.”
“그거야, 자네가 성실하니까 그리 주는 거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잘 해.”
“네, 그럼요. 할머니도 건강 꼭 챙기셔서, 이 슈퍼도 오래오래 해 주세요. 그래야 저도 놀러와서 간식거리도 사 먹기죠.”
“아무렴, 나도 오래오래 할 거야.”
그녀와 한참이나 담소를 나눈 산하는 곧장 식당으로 돌아가 건물 외관을 살펴보았다. 이제 눈앞의 식당을 법인 은성의 소유로 두고 나니 마음이 뿌듯했다.
은성식품도 증조할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에서 출발했었지.
꿈이 다가온다.
내게로.
아니, 내가 다가간다. 꿈에게로.
과거부터 미련하게 끙끙대며 속에 품고 있던 꿈이 서서히 실체화되는 것에 감동한 산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꿈은 애증 어린 과거의 집착으로부터 비롯된 것.
그것이 실현될 날이 머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꿈에는 끝이 없으니.
세계적인 가수, 세계적인 헤어디자이너, 세계적인 소리꾼, 세계적인 주조가…….
능력을 얻으며 계속해서 확장된 산하의 꿈은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 꿈들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릴 적부터 체한 것처럼 마음 어딘가에 걸려 있는 이 꿈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우리 문화를 세계 만방에 알리겠다고 생각하던 산하가 씩 웃었다.
* * *
새해가 되자 산하는 떡국이 인기를 끌 줄 알았지만, 생각과 달리 된장찌개와 김치말이 국수가 투 톱을 달리며 인기몰이 중이었다.
오늘도 그 두 가지 요리를 주로 만들며 식당의 바쁜 일정을 소화한 그는 모두 퇴근하고 없는 식당 내부 테이블 한쪽에 앉아 있었다.
‘어디 보자…….’
노트북 화면에는 헤어 대회에 관한 상세 일정이 안내되어 있었는데, 2월경 개최로 예정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헤어 아티스트 대회>
<주제 - 헤어로, 세계로>
이미 참가 신청은 해 놓은 상태였기에 확인 정도만 하던 산하는 즐겨찾기를 눌러 다른 걸 확인하려다가 영상 채널명에 시선이 머물렀다.
<마운틴R>
한동안 방치하다시피 했는데, 어떤 댓글이 달렸을까 궁금해하던 산하는 이내 자신의 영상 채널로 접속했다.
- 아아, 고릴라 그는 갔습니다. 오지를 않아요.
- 화가 난다. 아니 왜 노래를 안 부르냐고.
- 벌써 어디서 가수로 데뷔한 거 아니에요?
- 절대 아님, 제가 고릴라 형님 노래 엄청 들었는데, 이런 목소리 가진 가수 안 나옴.
- 울어라 고릴라여, 세상이 진동한다.
- 아 좀, 이상한 소리들 좀 그만해요. 고릴라라고 해서 안 오시는 거 아니에요? 마운틴R님 그만 복귀하시죠?
- 그러니까요. 복귀 좀 하세요. 이제 노래 너무 들어서 다 외웠다니까요.
- 아…… 기다린지도 어언…… 얼마나 됐지? 기억도 안 나네.
- 여러분, 천재는 게으르다. 이런 말도 모르십니까? 우리 고릴라 형님이 천재라서 그런 거니까, 다들 이해하세요.
- 그건 인정. 국내, 아니 세계적으로도 이만한 가수는 찾기 힘들죠.
이 방송을 그만두기 전에도, 혹시 미션이 떠서 100%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자주 접속했던 산하는 잔뜩 실망만 했었다.
모든 건 엿장수 마음이라더니, 이 정체불명의 미션에 기대를 하면 되는 법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생각 없이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댓글만 바라보던 산하는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노래 실력이 100%는 아니지만, 방송을 켜서 인사라도 할까? 뭐라고 하지?
산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댓글부터 하나 달아 보려고 자판 위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미션 - 마운틴R의 깜짝 방송 3회]
[보상 - 마운틴R 활동 당시 완성했던 목소리의 94%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 11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