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조금 더 가까이 (1)
그곳에는 그가 에디터와 인터뷰했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사실 대화 내용은 여타 잡지와 다를 것 없이 평범했다.
촬영장 분위기는 어땠냐, 첫 촬영 소감은 어떠냐, 앞으로 모델 해 보실 생각은 없느냐 등등.
그런데 그 아래 예상치도 못한 또 하나의 인터뷰를 발견한 산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진작가 공미숙과 에디터의 속닥속닥>
에디터 : 작가님 반갑습니다. 이번 촬영에 애로사항은 없으셨나요?
공미숙 : 산하 씨가 잘 따라와 주셔서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에디터 : 그렇군요. 이번 촬영에서 가장 주의를 기울이셨던 사항은 뭔가요?
공미숙 : 잡지 구독자분들과 산하 씨의 팬들이 공통으로 원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을 많이 해야 했어요. 특히 제가 산하 씨 팬이 아니었다 보니 조금 힘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에디터 : 그랬군요. 너무 충격적인 발언을 하셨어요. 팬이 아니시라고요?
공미숙 : 아니 꼭 아니라기보다, 팬카페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열혈팬은 아니었단 거예요.
에디터 : 공 작가님, 큰일 날 뻔하셨어요. 이 부분은 삭제할까요?
공미숙 : 아니에요. 곧바로 만회할 거니까요.
에디터 : 뭔가 이상한 눈빛을 하고 계신데요?
공미숙 : 그런가요? 이번엔 제가 에디터님께 질문 하려고요.
에디터 : 네? 어…… 뭔가 바뀐 것 같지만 해 보세요.
공미숙 : 질문 들어가요. 제가 사진을 잘 찍을까요? 아니면 산하 씨가 잘 찍을까요?
에디터 : 아, 이건 제가 대답하기 곤란한데요?
공미숙 : 제가 대답할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산하 씨가 더 잘 찍어요.
에디터 : 독자님들이 믿으실까요?
공미숙 : 글쎄요. 반신반의하시려나요? 저도 촬영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그분 실력을 알게 됐어요. 상당히 충격적이었죠. 그래서 지금은 그만한 사진작가를 상대로 촬영했다는 게 뭐랄까, 민망한 느낌도 조금 있고, 영광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답니다.
에디터 : 저도 확인하고 그렇게 느끼긴 했었습니다만, 공 작가님 실력도 만만치 않아요.
공미숙 : 그렇게 말씀하셔도 우위는 분명하다는 점!
에디터 : 그런데 독자분들이 지금 그 사진 실력을 확인할 수는 없나요? 산하 씨가 찍은 사진이라거나.
공미숙 : 지금으로선 없는 것 같은데요? 제가 사진전시회라도 하시라고 졸라 볼까요?
에디터 : 저도 거기에 동참할게요. (웃음)
마지막 장 대부분을 할애해서 빼곡히 쓰인 인터뷰에 산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그와 달리, 유나세와 봉만두는 야단법석이었다.
“형님, 형님형님. 이게 무슨 소립니까? 프로 작가보다 잘 찍으신다고요?”
“그러니까요. 사장님 이게 무슨 소리예요? 어!? 봄이 너 뭔가 알고 있지?”
새봄이 가느다랗고 투명하리만치 고운 손을 들어 선서하듯 외쳤다.
“제가 보증해요. 사장님 사진 실력은 이미 된장찌개급이에요.”
산하는 살짝 당황했다.
김구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된 능력이 발동되는 바람에 잘 나온 사진이라,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아닌데.
산하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만두와 나세는 더 난리가 났다. 만두가 곧장 새봄에게 물었다.
“봄이 넌 어떻게 알아?”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아 보인 새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짜잔! 제가 사진 모델했었어요. 저도 사장님 실력은 몰랐는데,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녀가 해맑게 웃어 보이자, 만두와 나세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산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형님 사진 실력이 그렇게 좋으셨어요? 까맣게 몰랐어요.”
“저도요. 괜찮으시면 사진 구경 좀 시켜 주세요.”
“……음, 아직 찍은 게 많이 없어서. 나중에 사진 전시회 같은 걸 한번 하긴 할 거야. 그때 구경해.”
그 말을 듣자마자 만두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2층에서 하실거죠? 요새 우리 식당 2층을 ‘서프라이즈 갤러리’라고 부르잖아요.”
“뭐? 서프라이즈?”
손님들이 얼마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만두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산하에게 설명했다.
“흐흐, 형님 모르셨구나. 손님 몇명이 대화하는 거 우연히 들었거든요. 아마 놀라운 작품 보여 준다고 붙인 건가 봐요. 그분들이 ‘서프라이즈 갤러리 전시회 안 하나? 요새 통 조용하네’라고 하시던데. 엄청 기대하는 눈치셨어요. 이참에 사진 전시회 딱 하시면, 그냥 막……. 제가 형님 사진을 아직 못 봐서 뭐라 더 말씀드릴 건 아니지만요.”
“그런데 난 왜 처음 듣지?”
“아직 손님들 몇 명만 개인적으로 부르는 건가 봅니다.”
두 사람이 대화하던 중에 유나세도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전시회 언제 하냐고 묻는 손님이 몇 분 계셨어요.”
“그래? 어째 정기 일정이 돼 버린 느낌인데?”
“아마 작년 분기별로 전시회를 계속하셔서 그럴거예요. 할때가 됐는데, 왜 안 하냐고 그러신 거 보니까요.”
“그렇구나. 전시회는 아직 예정에 없는데,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고 얼른 가서 쉬어. 이따가 영업 해야지?”
“옛썰!”
“알겠어요.”
두 사람이 휴게실로 사라지고 난 후 새봄이 말했다.
“모델 필요하시면 빌려드려요.”
그 말만 하고 뒷짐을 진 채 발랄한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
산하는 새봄의 장난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행동에 설렘을 느꼈다.
* * *
하산해의 팬카페는 어느새 난리가 났다. 언젠가부터 불기 시작한 수집 바람이 또 한 번 불어닥쳤기 때문이다.
- 여기 성수역 근처인데요. 매진이요.
- 노량진은 조금 남아 있어요.
- 여러분, 인터넷 서점 물건 들어왔어요. 고고.
- 아, 겨우 샀다. 여러분 그 부록 보셨어요? 우리 하산해 씨 사진도 잘 찍으시나 봐요.
- 그래요? 우리 하산해 씨는 원래 천재죠. 이번에는 놀라지 않을 자신 있어요.
- 사진도 모아야지. 사진 작품 상품으로 내놓으시면 적극 구매 의사 있는데.
- 아쉬운 대로 서프라이즈 갤러리라도 열었으면.
- 서프라이즈 갤러리가 뭐죠?
- 산하네 요리 전문점 2층에 제가 붙인 별명이에요. 요리도 작품도 미쳐 버린 건물이라서 붙였어요.
- 오, 그거 괜찮은데요? 전시회 일정이 비밀스러운 듯하니까 시크릿의 S에, 놀라운 작품이니까 서프라이즈의 S, 하산해의 중간 이니셜 S까지 더해서, 트리플 에스 갤러리는 어때요?
- 그건 좀…….
- 전시회는 언제 한대요?
- 거기 직원분이 아직 예정에 없다고 하시던데.
- 와, 여러분 우리 팬카페 연예 뉴스에 나왔어요.
- 진짜요? 보러 가야지!
<하산해 출연 잡지, 팬카페 회원 성원에 힘입어 일부 품절 사태>
너른 문화사 대표 이민재는 뉴스 기사를 살펴보다가 산하에게 태블릿을 돌려서 보여 줬다.
“보세요, 산하 씨 덕분에 우리 잡지사 한숨 돌렸습니다.”
그 태블릿 화면을 잠시 훑어본 산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부록 마지막 인터뷰는 너무 과하셨던 게 아닌지 싶습니다. 누가 보면 요리 잡지가 아니라 제 칭찬 특집인 줄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늘에 맹세코 진실만을 써 넣은 것 뿐입니다.”
예전에는 불안한 기색을 비롯해 어두움이 언뜻 나타나곤 하던 이민재의 표정은 이제 활짝 개어 있었다.
그 얼굴이 곧장 옆자리에 앉은 도경에게로 향했다.
“어떻습니까? 도경 씨. 제 말이 틀렸나요?”
“아니요? 진짜 진실만 넣었는데요.”
“산하 씨, 들으셨죠? 우리 잡지사는 거짓말 못하기로 소문났습니다.”
“그런가요? 아무튼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감사를 드려야죠. 아참 그런데 이제 매니저라도 한 명 두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직은 괜찮습니다. 제가 전문적으로 프로그램을 여러 개 하면서 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보니, 혼자서도 할 만해요.”
“하긴, 그럼 산하 씨 그 교육 방송 다큐 말고 다른 방송은 안 하십니까?”
“글쎄요. 올해 안에 하나쯤 할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하게 잡힌 일정은 없습니다.”
“그러시군요.”
그 후 세 사람은 담소를 조금 더 나누다가 헤어졌다.
* * *
이제나저제나 마운틴R을 찾기 위해 쪽지도 보내며 고군분투하던 작곡가 배일상은 눈을 부릅떴다.
방송을 했어?
이런 미친.
마음도 다스릴 겸 잠시 여행을 다녀온 배일상은 다급히 최신 영상을 재생했다. 그곳에서 선배 작곡가 장도산의 <진군하라>가 흘러나오자, 그는 심장 부근을 부여잡았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심장이 거세게 뛰었기 때문이다.
노래를 다 듣고 난 그는 한참이나 넋 놓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군하라>를 저런 식으로 부를 수 있다니.
목소리가 조금 안 좋아졌다던 것 때문인지 이전보다 실력이 죽긴 했지만, 그래도 현직 가수들과 비교하면 상위권이었다.
거기에 저 어마어마한 감정 표현은 과연 누가 따라 할 수나 있을까? 듣기만 해도 가슴이 울리는 감정 표현이 이 노래를 제대로 살린 셈이었다.
목소리를 회복하고 저런 감정 표현이 들어간 노래를 부른다면…….
행복한 상상을 하던 그는 속으로 말했다.
제발 답장 좀 주세요.
당신에게 꼭 맞는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속으로 빌기까지 하던 열혈 작곡가 배일상이 다시 한번 쪽지를 날렸다.
<실례합니다. 마운틴R님, 저는 작곡가 배일상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비슷한 시각.
작곡가 장도산은 바퀴벌레를 잡으려고 파리채를 들고 설치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이 진짜…….’
내일은 좋은 바퀴벌레약을 사다가 뿌려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는,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다. 오늘은 잠시 시간을 내서 대중에게 공개된 메일로 날아오는 스팸을 지우던 참이었다.
그런데 다음 페이지를 넘기던 그는 일반인이 보낸 듯한 메일을 보고 하하 웃었다.
<와우, 이번에 장도산님 노래가 완벽하게 재탄생했어요. 여기 가셔서 한번 들어 보세요. 이분이 마운틴R…….>
완벽한 재탄생? 까고 있네.
또 어떤 놈이야?
과거에 노래를 완벽하게 만들겠답시고 고군분투하며 만들어 놨더니 제대로 부르는 놈이 없었다. 불러낼 수 있겠다 싶은 놈은 거절하기 일쑤였고.
그 당시 그의 별명은 ‘욕먹으며 진군하라’, 줄여서 욕진 작곡가였다.
그 후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다가, 이제 완벽이고 뭐고 시대에 부응하는 노래.
다시 말해 그가 싫어하던 후크송이건 뭐건 가리지 않고 집어넣어서 마구 만들 생각으로 작곡에 매진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잊으려 했던, 아니 잠시 잊고 있었던 <진군하라>에 관한 소식을 또 듣자 그는 분노했다.
이런 메일이 한두 번 온 게 아니었다.
또 어떤 인간이 날 놀리려고 이러나 싶어 턱살이 부르르 떨리도록 화를 내던 그는 삭제를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이런 메일은 꽤 오랜만에 왔는데, 한번 보기나 할까? 사실일 수도 있잖아.
잠시 고민하던 그는 메일에 담긴 링크 주소를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혹시 랜섬웨어나 악성코드가 담긴 그런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결국 사이트를 직접 찾아가 마운틴R로 검색했다.
‘진짜 있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곳에서 영상을 하나 재생했는데, 백철우의 <기운내라 그대여>를 듣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뭐지……?’
이런 게 장난일 리 없잖아.
그것도 잠시.
다급히 다른 영상을 클릭해 자신이 작곡한 <진군하라>를 찾아 헤매던 그는 마침내 목표물을 찾아내고 재생을 눌렀다.
그러나 무작정 듣고 있지는 않았다.
익숙하다 못해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는 도입부 멜로디를 휙 넘겨 버린 그는 조금 기대 어린 표정으로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다가 산하의 노랫말을 듣자마자 입을 쩍 벌렸다.
초입의 박력 있고 힘찬 노래 솜씨도 놀라웠지만, 중반부에서 이어진 애절한 감정 표현이 마음을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거야!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
잠시 후, 눈물까지 훔치며 노래를 다 듣고 난 장도산은 파리채로 책상을 미친 듯이 후려치며 외쳤다.
“봐! 부를 수 있는 사람 있잖아. 나 잘못한 거 없어! 되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 그래!?”
과거 자신의 노래를 놀림거리로 삼았던 연예인 일부와 댓글, 메일 보낸 사람 등등에게 항의하듯 외치던 그가 돌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 난 틀리지 않았어. 운이 안 좋았던 거야. 이젠 내 노래 불러 줄 사람도 생겼잖아. 후크송? 꺼져. 내가 하고 싶은 거 할 거야.”
그런데 이 사람하고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하나 궁리해 보던 그는 쪽지부터 보냈다.
<친애하는 마운틴R님, 제가 작곡한 진군하라를 이토록 빛내 주셔서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부디 이 쪽지 보시면 연락처를 남겨 주시거나, 아니면 제 번호로 연락을…….>
* * *
예전에 이상한 사람들이 쪽지를 많이 보내는 바람에 영상 채널로 날아오는 쪽지를 볼 생각도 안 하던 산하는 벌써 세 번째 방송을 맞이했다.
미션에서 제시한 마지막 방송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곧 카메라가 켜지고 채팅방에 네티즌이 입장했다. 그들은 글에서도 신남이 느껴질 정도로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 호우, 우리 고릴라 형님, 이런 성실함 좋아요.
- 가두고 군만두만 먹이면서 노래 부르게 하고 싶었어요.
- 저도요.
- 오늘은 뭐 부르실까요?
- 글쎄요, 최악의 노래를 찾아서 명곡으로 바꾸셨으니까, 오늘도…….
그 채팅을 바라보던 산하는 오늘 부를 노래 가사를 잠시 떠올리던 와중 의아한 눈빛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진동과 함께 발신인이 떠올라 있었다.
<봄이 왔어요>
보통 톡으로 대화하던 그녀가 전화하다니. 무슨 일일까?
시청자에게 양해를 구한 산하는 마이크를 끄자마자 카메라에서 벗어나 전화를 받았다.
“응, 봄아.”
“……사장님. 바쁘세요?”
평소와 다른 새봄의 음성에 그는 흠칫 놀라 버렸다. 얘가 울었나?
“봄아, 무슨 일 있어?”
- 12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