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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122화 (122/445)

122화 조금 더 가까이 (2)

약 이십 분 전.

새봄은 집에서 자신의 오빠를 맞닥뜨렸다. 평소엔 자주 들르지도 않는 그가 무슨 일로 왔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던 새봄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인사했다.

“왔어? 웬일이야?”

그녀의 인사에 윤호준은 전투적인 태세로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야, 봄. 너 시완이 깠다며?”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 새봄을 탓하는 듯한 말투였고, 그녀는 또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가 싶어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오빠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그냥 잘? 시완이 아버님이랑 저번에 밥 같이 먹었다.”

당사자가 싫다는데 그의 가족과 만나서 밥까지 같이 먹었다는 소리에 새봄은 화가 잔뜩 났다.

“오빠도 지금 아빠랑 같은 소리 하려는거면, 관둬. 난 관심없어.”

“넌 진짜 철이 없어. 뭐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왠지 억압받는 느낌에 손을 파르르 떨던 새봄이 외쳤다.

“그래, 있어. 왜?”

어딘가 심각한 표정으로 변한 그의 오빠가 다그치듯 물었다.

“그 사람이 시완이보다 집안이 좋아? 아니면 돈을 잘 벌어?”

자신과 달리, 어릴 적부터 돈과 명예를 좋아했던 윤호준을 가만히 바라보던 새봄은 평소라면 내뱉지도 않았을 짧은 말을 던졌다.

“속물!”

그 말에 열 받은 윤호준이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다.

“속물? 이게 어디 오빠한테 속물이래.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야. 돈이 곧 힘이지.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을 하려면 법을 잘 알고 다룰 사람도 필요해. 그게 가족이면 금상첨화고. 넌 그걸 알기나 해?”

“지금이 조선시대야? 나 팔아넘기려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자신의 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듯한 여동생을 노려보던 윤호준이 다시금 설득의 말을 던졌다.

“알아서 못 하니까 그러지. 아버지랑 내 말 좀 들어라. 당장이야 사랑이 어떻고 저떻고 하지만, 시간 지나 봐. 안정감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최고야.”

산하에 관해 떠올리던 그녀는 어느새 자신감을 되찾고 크게 소리쳤다.

“그 사람도 능력 있고 안정감 있어!”

여동생의 고집에 화가 난 윤호준은 아버지에게 대충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진작가가? 비교할 걸 비교해라. 그러지 말고 너 다시 잘 생각해 봐, 그만한 신랑감 없어.”

“됐어.”

그때, 현관으로 들어서던 윤주상이 두 남매를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웬 소란이야?”

마침내 지원군이 도착했다고 생각한 윤호준이 뒤를 돌아보며 인사했다.

“아버지 오셨어요? 얘가 아직도 철이 없어서 잠시 대화 좀 했습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있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시완이요. 아예 만날 생각도 안 한대서요. 그만한 애가 어디 흔해요?”

왠지 수긍하는 표정으로 변한 윤주상이 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음…… 봄아. 그건 네 오빠 말도 일리가 있다. 너무 감정적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게…….”

그녀에게는 오빠가 둘이나 있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딱히 놀아 준 적도 없고, 조금 커서는 다들 유학을 가 버렸다.

그래서 두 오빠와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가족 중에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 한 명쯤은 있을 법도 한데, 집안에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보니,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날 뻔한 새봄이 외쳤다.

“싫어요. 아빠도 싫고, 오빠도 싫고, 다 싫어요!”

새봄은 그 길로 얇은 옷차림을 한 채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야, 윤새봄!”

“봄아!”

그 후, 그녀는 가족 모르게 자주 찾곤 했던 공원으로 찾아가 벤치에 힘없이 앉았다.

조금 전이야 화가 나서 뛰쳐나왔다지만, 얇은 옷차림 때문에 오들오들 떨던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했다.

갈 곳이 없네.

혼자 숙박업소에 들어가긴 싫고…….

피시방이라도 갈까.

아니면, 누구한테 연락이라도.

이내 스마트폰 주소록을 살피던 그녀는 연락할 곳이 마땅치 않음을 알아 버렸다.

주소록에 사람이야 많았지만, 마음을 나눠 줄 이가…….

생각을 이어 가던 새봄은 이내 단 한 사람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장님.

전화, 해 볼까……?

망설이던 그녀는 눈을 질끈 감더니 통화 버튼을 눌렀고, 이내 반갑게 연락을 받아 주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안심되는 그의 음성에 새봄은 잠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 삶에 위안이 되는 사람은 사장님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사이, 산하는 대답없는 그녀를 재차 불렀다.

“봄아?”

“어…… 그냥 집에 있는 데 기분이 안 좋아져서 나왔어요.”

“그랬구나, 지금 어딘데?”

“집 근처 공원이요.”

“그래? 추운데 어디 들어가서 기다릴래? 내가 지금 갈게.”

“어…… 아니에요. 괜찮으시면 전화만…….”

“아냐, 나 한가해.”

새봄과 통화를 종료한 산하는 다시 의자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마이크도 꺼지고 산하가 화면에서 사라지자, 네티즌들은 불안해하다가 안도의 채팅 글을 쏟아냈다.

- 와우, 방종 하시는 줄.

- 그니까요.

- 흐흐, 기대 중입니다.

산하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기 위해, 마이크를 켰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제가 개인적인 일이 생겨서 오늘 방송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추후 방송 일정 올려 놓을게요. 그럼…….”

- 안 돼!

- 고릴라 형님, 안 돼요!

- 가지마!

- 개인적인 일 있으시다잖아요. 우리 쿨하게 보내 드리고, 다음엔 감금합시다.

이해해 주는 시청자와 애타게 그를 붙잡는 시청자가 뒤섞여 채팅창이 혼란하던 그때, 산하는 방송을 종료하자마자 트럭으로 향했다.

탁주문의 속도감 있는 운전 솜씨까지 활용해 최대한 빨리 공원 근처로 달려간 산하는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가 꺼져 있어…….”

왠지 더 걱정이 된 산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곧장 공원 내부로 향했다.

이 추운 날 아직도 여기 있나 싶어서 발걸음을 빨리하던 산하는 이내 벤치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던 새봄을 발견했다.

“봄아!”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든 새봄이 젖은 눈가를 훔치며 산하를 불렀다.

“……사장님.”

추운데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느냐고 말하려던 산하는 그녀의 복장을 보자마자 단번에 이해해 버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급히 나오느라 휴대폰만 가지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나마 있던 휴대폰도 배터리가 다 된 걸까?

그녀의 고운 눈가에 흐른 눈물 자국을 보자 뭐라고 하기도 그랬던 산하는 천천히 다가가 새봄의 옆자리에 앉았다.

산하는 곧장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준 후 물었다.

“춥지?”

“……죄송해요. 괜히 귀찮게 해 드려서.”

“귀찮기는, 우리 식당 투플러스 등급 종업원인데!”

새봄은 우울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을 짓다가, 산하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말투에 풉 하고 웃었다.

“그게 뭐예요……. 저 한우 아닌데.”

“그만큼 나한테는 소중하다는 얘기지.”

‘소중하다’란 단어를 듣게 된 새봄이 산하를 빤히 보며 말했다.

“진짜요?”

“그래.”

어딘가 슬퍼 보이기만 했던 그녀의 눈가에 안도감이 서렸고, 새봄은 산하가 듣지 못할 정도로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응?”

“아니에요. 진짜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아냐, 봄봄봄도 없는데 내가 무슨 할 일이 있어? 발 닦고 잠이나 자려고 했지.”

그의 말투에 웃음을 참지 못한 새봄이 한 번 더 웃었다.

“어? 웃네? 그래. 웃어야 새봄이지.”

왜 이러고 있는지, 왜 울었는지 물어보지 않고 오히려 보듬어 주기만 하는 그에게 고마워하던 새봄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소처럼 말했다.

“치, 울어도 새봄이거든요? 저 지금 빈털터리라서 그런데, 따끈한 라떼 한 잔만 사 주실래요?”

“그래, 가자. 내가 쏜다.”

“가요!”

어느새 평소의 상큼한 표정으로 돌아온 새봄이 산하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손이 산하의 손을 스쳤고, 얼음 조각처럼 차갑지만 부드러운 느낌에 흠칫한 산하는 이내 그녀를 나무랐다.

“이것 봐, 손도 꽁꽁 얼었네. 감기 걸리겠다.”

그의 다정하면서도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에 조금 더 마음이 열린 그녀는 일부러 환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얼른 가요.”

“괜찮기는…….”

이날 새봄은 산하에게 가족끼리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행복한 미소만 지으며, 산하와 웃고 떠들다가 조금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이내 현관으로 들어서던 그녀는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윤주상과 시선이 마주쳤다.

“윤새봄, 아무리 그래도 전화기를 꺼 놓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애비가…….”

“배터리가 다 됐어요.”

새봄의 대답에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하던 윤주상이 의문을 표했다.

“그러냐? 그런데 그 꼴로 어디 있었어?”

“사진작가랑 만났어요.”

“뭐!? 윤새봄. 뭐라고?”

“사진작가랑 오붓하게 만나다가 왔다고요. 저 들어갈게요.”

평소 무언가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숨겨 오던 그녀는 아예 못을 박듯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다 온 것처럼 말했고.

딸의 당당한 발언에 당황한 윤주상이 어버버하는 사이, 새봄은 이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방문에 등을 기댄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편은…….’

늘 외로웠던 그녀는, 헤어지면 남이 되는 연인 사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그와는 지금 이대로가 제일 좋겠다는 생각에 공적인 관계와 사적인 관계의 중간 어딘가쯤에 머물기를 바라 왔다는 뜻이었다.

물론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그와는 점점 사적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특히 새봄의 마음은 오늘따라 심하게 흔들렸다.

‘어쩌면…….’

같은 시각.

새봄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던 산하.

그녀를 걱정하던 산하는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얼굴을 찌푸렸다.

‘사랑해! 하지만 오빠는 미래가 없어!’

그 말이 아직도 뇌리에 메아리치는 듯 했다. 이미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매몰차게 돌아선 그녀는, 얼마 후 사랑했다는 말이 거짓이었다는 듯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개인 SNS 계정에 올렸었다.

그 당시 얼마나 기분이 참담했던가.

이젠 시간도 많이 흘러 그녀와의 추억도 흐릿했지만, 마지막에 내뱉은 말만큼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제 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남지 않은 산하는, 그녀가 충격적으로 내뱉었던 말을 되돌려주겠다고 생각하며 액셀을 거칠게 밟았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워 가는 새봄이 저절로 떠오르는 건 막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새봄의 과거를 들여다봤었지만 쓸데없는 것만 떠올라서 답답하기만 했던 산하는 나중에 조용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핸들을 돌렸다.

* * *

드디어 세 번째 방송의 막바지에 다다른 산하는 모두에게 인사했다.

“여러분, 제 노래를 들어주시고 즐거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다시 바쁜 일정이 생겨서 정확히 언제 온다고는 말씀 못 드리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여러분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엉엉, 안 돼요. 고릴라 오빠. 이렇게 못 보내. 못 잊어.

- 고릴라 형님, 이번에 노래 너무 좋았어요. 하루빨리 바쁜 일 끝내시고 돌아오세요.

- 아니 이 정도면 현직 가수 아니세요? 그런데 이런 음색은 들어 본 적이…….

- 고릴라님, 바쁜 일 그만두고 가수 하시면 안 되나요?

- 선글라스라도 한번 벗어 주고 가요.

- 또 어떻게 기다려!

- 그래도 콘텐츠 좀 쌓였으니, 들으면서 기다릴게요.

아쉬움을 토로하는 시청자의 환호를 뒤로하고 방송을 종료한 산하는 눈앞의 보상을 확인했다.

[마운틴R 활동 당시 완성했던 목소리의 94%를 획득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100%의 노래 솜씨를 가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곧장 식당 블로그로 들어가 공지를 작성했다.

<안녕하세요? 산하네 요리 전문점을 찾아 주시는 여러분께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음 주 금요일부터 3일간 식당 문을 닫습니다.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 공지글이 올라가자마자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듯 댓글이 우수수 달리기 시작했다.

- 헉!

- 사…… 삼 일. 그래, 삼 일은 참을 수 있어요.

- 전 못 참아요. 내 된장찌개, 내 김치말이 국수, 내 떡국. 엉엉…….

- 빨리 돌아오세요. 기다릴게요.

-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마운틴R 채널의 시청자처럼 안타까워하는 그들의 댓글을 잠시 바라보며, 산하는 다음 주 일정을 떠올렸다.

금요일은 헤어 대회 예선전이 있는 날이었다.

* * *

어느 체육관 부근에 도착한 산하는 트럭을 주차하고 근처에 내걸린 현수막을 바라보았다.

<제28회 대한민국 헤어 아티스트 대회>

그때 그의 근처에 고급 외제 차가 거칠게 다가오더니 급정거했다.

곧 녹색으로 물들인 머리칼에 귀걸이를 한 남성이 운전석에서 내렸고, 그 차량 보조석에서는 미모의 여성이 내렸다.

그들은 바로 대회장으로 향했고, 산하도 무심코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까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산하에게 두 남녀의 대화가 들려왔다.

“성준 쌤, 이번 대회도 쉽게 우승하시겠는데요?”

“그런가? 그래도 아쉽게 됐어.”

“그러니까요. 그분이 참가하지 않으실 줄은 몰랐어요. 이번에도 성준 쌤이 코를 납작하게 그냥.”

그녀의 말에 피식 웃던 유성준이 다른 헤어 디자이너를 통해 듣게 된 소문을 떠올렸다.

“방송 울렁증 있다던데? 진짠지 가짠지는 모르겠지만.”

풉 하고 웃던 그녀가 말했다.

“인터넷 방송도 방송이긴 하죠.”

함께 웃던 그가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 방송은 방송이지. 춥다. 들어가자.”

“네.”

예선전부터 우승을 말하는 그들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산하는 이제는 익숙한 메시지가 떠오르자 잠시 멈춰서서 눈을 깜빡거렸다.

[미션 : 그간 갈고닦은 본인의 실력만으로 헤어 대회 예선을 통과해 보자]

[주의 - 예선에서 오민석의 헤어 솜씨 사용 불가능]

[보상 - 오민석의 헤어 솜씨 95%로 상승]

- 12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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