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헤어졌지만, 멋있어 (1)
도대체 뭔가 싶어 살펴보기도 전에 방문은 닫혔고, 저걸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산하는 일단 밥부터 먹기로 했다.
할머니 개인 방에 들어가 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음대로 만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양옥희의 통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안 된다고 했지? 알아서 살거라. 그게 옳은 길이다. 끊으마.”
부탁을 억지로 밀어내는 듯한 목소리에, 산하는 그녀가 자식과 통화하는구나 짐작하며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빠른 시간에 통화를 종료하고 나온 옥희가 억지로 싱긋 웃었다.
“에휴,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니, 내가 딱 그 짝이야.”
“……할머니 힘내세요.”
“암, 힘내야지. 내가 이놈들 버릇 안 고치고는 못 죽어. 하늘나라에 있는 우리 남편이 뭐라고 하겠어?”
“열심히 살았다고 하실걸요?”
“하긴, 내가 남편보다 열심히 살긴 했지. 으휴. 날이면 날마다 무슨 운동이나 하러 다닌다고, 집을 며칠씩 비우지를 않나. 그때 내 속이 참 많이도 상했어.”
“운동이요?”
“그려, 운동. 나도 뭔지는 잘 모르겠고. 뭘 전수받는다나 뭐라나. 별 애기 아니니까 어여 밥이나 먹어.”
“네, 할머니.”
산하는 밥을 먹으면서도 못내 궁금해졌다. 대체 저 방에서 빛나는 물건이 뭘까. 할머니 남편분과 관련된 물건인가?
오늘은 불가능할 것 같으니 다음을 노려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식사를 계속했다.
* * *
장도산이 컴퓨터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보내 준 악보를 바라보며, 산하는 뭔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멜로디만 보자면, 첫 시작은 독백 형태로 나지막하게, 그 후에는 잔잔한 호소, 그다음에는 폭발적인 가창력을 터뜨리다가 간절함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앨범 커버로 쓰일 새봄의 기도하는 사진과 멜로디가 매치되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던 산하는 갑자기 드르륵대며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전화를 건 상대방이 누구인지 살펴보던 산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얼마 전 달맞이꽃 화분을 선물해 주고 간 심장원 피디였다.
“네, 피디님.”
“프로그램 일정 궁금하시죠?”
“아니요.”
잠시 말이 없던 심장원 피디가 억울하다는 듯 호소했다.
“……너무하십니다. 궁금하다고 한 번만 말씀해 주세요.”
“아아, 너무 궁금해라.”
억지로 절 받다시피 대답을 얻어낸 심 피디가 신나게 말을 이어 갔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산하 씨 마음을 잘 알죠. 그 마음에 귀를 기울인 이 심 피디가 정확한 일정을 휴대폰으로 쏴 드릴 겁니다. 아 참, 보안 철저히 해 주세요. 주변에 절대 얘기하시면 안 됩니다?”
역시나 통화마저도 특이한 심 피디의 발언에 산하는 속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동안 아프지도 마시고, 감기도 안 걸리게 조심하시고요. 전 산하 씨만 믿습니다.”
“저 말고 다른 연예인한테도 이런식으로 접근하셨죠?”
“……에이, 산하 씨.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말 더듬으시는 거 보니까 맞네요. 아무튼, 개인적인 준비는 잘할 테니까 염려 마세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네, 산하 씨. 그건 정말 오해니까 이상한 생각 마시고요, 파이팅입니다!”
그와의 통화를 종료한 산하는 작년 언젠가 여동생 윤정과 통화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고 말았다.
“오우, 박산하. 스목들 한번 나가 줘야지?”
아직 녹화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그게 현실이 될 줄이야. 보안이 필수이다 보니 가족에게도 말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정말 연예인이 다 됐구나 싶어서.
같은 시각.
2차 국악 콘서트 티켓 판매 상황은 매우 치열했다. 표를 구해서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사람과 콘서트에 참가하려는 산하의 팬, 그리고 부모님을 위해 표를 구하려는 사람 등등.
특히 인터넷 뉴스 기사로 홍보가 많이 되다 보니, 그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박산하의 국악 콘서트 매진 행렬>
<효도 티켓 구하기, 온·오프라인 열띤 경쟁>
<하산해, 그의 소리엔 절절한 한이 담겨 있다>
이런 뉴스가 흘러나오자, 한 커뮤니티에 국악 콘서트를 주제로 한 게시글이 올라왔고, 댓글이 우르르 달렸다.
- 아니 언론에 무슨 돈 먹였냐고요. 연예 뉴스 왜 저럼?
- 저기에 다 돈 먹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어휴. 생각을 좀.
- 짜잔, 하산해 음반 나온답니다.
- 진짜요? 확실해요?
- 네, 꿈속에서 들었으니까 확실해요.
- 뭐라는 거예요. 장난하지 마요. 짜증 나.
- 어어, 장난 아닌데. 저 신기 있어요.
- 뭐래요.
몇 년 전, 이 커뮤니티에서 가끔 활동했던 산하의 옛 연인 명수정은 오랜만에 찾아와 게시글 제목을 대충 훑어보다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박산하’라는 이름 세 글자에 옛날 남자 친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당시엔 그녀는 공부 중이었던지라 허전함을 채우려고 사귀긴 했었지만, 지금까지 사귄 남자 친구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었다.
미래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를 비난할 마음은 없었다. 이미 끝난 지 오래인 사이였으니까.
그런데 문득, 능력은 없는데 허황된 꿈만 찾던 그가 과연 뭘 하며 살까 궁금해졌다.
미련이 아닌,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보나 마나 아직도 식당으로 성공하겠다며 빌빌거리고 있겠지.
이제 막 유학에서 돌아와 시차 적응 중이던 수정은, 나중에 그 인간 뭐 하고 사는지나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노트북을 덮었다.
* * *
산하의 두 번째 국악 콘서트가 성황리에 막을 내리고, 따스한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던 어느 날.
산하네 요리 전문점의 단골, 또는 붙박이장이라고도 불리는 강정열과 곽기훈이 바 테이블에 앉아 요리를 음미하고 있었다.
“캬, 산하야. 김치말이 국수 끝내준다.”
살갑다 싶을 정도로 그에게 친하게 구는 기훈을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정열이 입을 열었다.
“이놈아, 어째 요즘 네놈이 영 이상하단 말이야.”
그의 타박에도, 기훈은 오히려 눈을 빛내더니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요? 아마 이상할 겁니다. 이상하죠.”
평소와 너무 다른 그의 태도에 정열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전 같으면 반항했을 텐데, 수긍을 해?
“어허,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뭐라고 하는 게야?”
“제가 산하를 위해 이상하고 특별한 선물을 준비 중이거든요.”
“선물? 무슨 선물?”
“바로 이겁니다.”
기훈은 공 던지는 시늉을 했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정열은 눈을 끔뻑이다가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아우, 나 죽네. 아저씨, 제 옆구리 구멍 납니다. 그만 좀 찌르세요.”
“그러게 누가 스무고개 하래? 그게 뭐하는 건데?”
“야구 시구요. 우리 산하를 개막전 시구자로 밀어 보려고요.”
“개막전 시구?”
“네.”
턱을 가만히 쓰다듬던 정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이 오랜만에 괜찮은 짓을 하는구나. 우리 산하라면 시구 정도는 해 줘야지.”
분주히 움직이느라 두 사람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한 산하는, 완성한 요리를 유나세에게 내주고는 얼핏 들었던 단어에 관해 두 사람에게 물었다.
“스무고개요?”
그의 질문에 기훈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한 번 더 공 던지는 시늉을 보였다.
“그거 말고. 산하 너, 시구할래?”
“시구요?”
“그래. 야구 연습도 한 김에, 이번 5월 개막전에 한번 나가 보라고. 괜찮지?”
야구 솜씨를 물려준 동준호의 원을 한번 풀어주고자 마음먹었던 산하가 흔쾌히 대답했다.
“오, 그거 좋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던 기훈이 테이블을 탕 두들기더니 산하를 가리켰다.
“오케이, 너 하기로 한 거다? 물리기 없어?”
그 말에 산하가 씩 웃었다.
“형이나 물리지 마세요. 물리면 된장찌개 열흘간 판매 중지.”
보통은 제안을 조금 미루거나, 곤란하다고 하던 산하가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나오자 기훈은 얼떨떨해졌다.
이게 아닌데.
심지어 시구는 아직 완전하게 결정 난 사안이 아니라는 걸 떠올리던 기훈이 말을 더듬었다.
“……그건 너무한 거 아니냐? 어떻게 된장찌개를 인질로…….”
“그럼 일주일.”
“…….”
“농담인 거 아시면서, 왜 그렇게 진지하세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그런다.”
기훈은 못 먹게 되는 상상이라도 했는지 괴상한 표정을 지었고, 속으로 풉 하고 웃던 산하는 다시 요리 삼매경에 빠졌다.
이날 오후.
식당 영업을 종료한 산하가 문을 닫으려고 준비할 무렵이었다. 기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형.”
“오늘 투구 연습 한번?”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선약?”
“네, 오늘 라디오 출연하기로 했거든요.”
“라디오? 그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무슨 프로그램인데?”
“소환하라, 추억의 가수라는 프로그램인데요. 거기 피디님이 이번 판소리 콘서트 때문에 잠시만 출연해 달라고 하셔서요.”
산하에 관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 기훈도 들어 본 프로그램이었다.
“이야, 오늘 나도 들어야겠는데?”
라디오 방송이 몇 시에 시작하는지 물은 곽기훈은 그와 잡담을 조금 나눈 후 전화를 끊었고, 산하는 다시 분주히 움직였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만두와 나세가 차례로 인사하고 빠져나간 후, 직원 중 혼자 남은 새봄이 산하에게 쪼르르 다가왔다.
“저도 가 볼게요. 방송 화이팅!”
털이 복실복실 솟아난 분홍색 후드티를 입은 새봄이 식당 출입구로 향하자, 산하가 그녀에게 말했다.
“봄봄봄, 가긴 어딜 가. 나랑 가야지.”
유리문을 열다 말고 고개를 돌린 그녀가 물었다.
“네? 사장님 방송국 안 가세요?”
“아직 방송 시간은 아직 멀었어. 가는 길에 태워다 줄게.”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정 그러시다면야, 탑승해 드리는 게 도리죠. 가요.”
조금 전만 해도 어딘가 아쉬워하던 새봄은 신난 표정으로 산하와 함께 트럭에 올라탔다.
비슷한 시각.
산하의 옛 여자 친구인 명수정은 어딘가 따분하면서도 묘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웬 판소리?’
한국 생활에 적응하려고 커뮤니티 정보를 살펴보는 중이었지만, 전혀 관심조차 없는 국악 콘서트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나 더 기분이 이상한 건, 옛 남자 친구와 동명이인인 ‘박산하’라는 소리꾼인지 연예인인지가 자주 언급되기 때문이었다.
“아, 진짜…….”
옛 연인의 이름을 계속 들었더니, 그의 현재 삶이 아주 조금 더 궁금해졌던 수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과거 그가 운영하던 블로그 주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옛날에 쓰던 다이어리에서 주소를 찾아낸 그녀는 곧장 블로그에 접속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게시글 하나 없이 썰렁했고, 달랑 한 줄만 쓰여 있었다.
<블로그 이사했습니다. 여기 클릭>
이사는 무슨, 내 생각날까 봐 다 지우고 새로 시작했겠지.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곧장 링크를 클릭했다.
<산하네 요리 전문점>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가득 채우다시피 한 블로그 제목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풉 웃고 말았다.
예상대로 아직 식당을 운영하는 것 같긴 한데, 이름이 너무 과장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옛날 그 요리가 어딜 봐서 전문점 요리란 말인가.
특히나 간판에 대표적인 메뉴가 무엇인지 나타내면 좋을 텐데, 그냥 요리 전문점이라고 하다니.
‘산하네’를 붙여 놓으니 간판도 너무 촌스럽게 느껴졌다.
역시 이 사람은 아직도 미래가 없다며, 빨리 헤어지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던 수정이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을 때였다.
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999>
한 게시글에 어마어마한 양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그것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게시글도 그랬다.
온통 댓글이 꽉 차다 못해 터져 나갈 것처럼 ‘+999’를 표시하고 있었다.
‘뭐야…….’
심지어 방문자 수도 어마어마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과 마주하는 바람에 당황한 그녀는 조심스레 게시글 중 하나를 클릭했다.
<영업 일정 임시 변경 안내 드립니다.>
- 아휴, 영업 중단으로 착각하고 심장 내려앉을 뻔했어요.
- 저도요. 깜짝 놀랐어요.
- 사장님, 김치말이 국수 짱짱이에요.
- 된장찌개도 죽여주죠.
- 하긴, 사장님 아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실 거예요.
- 그니까요. 그냥 영업만 유지해 주셔도 감지덕지.
이게 다 뭐야? 언제 이 정도 맛집이 된 거지? 아니 그렇다기엔, 맛집 블로그에 이 정도로 많은 댓글이 달리기나 하던가.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던 명수정은 댓글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눈이 동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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