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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138화 (138/445)

138화 달콤하게 (1)

“뭐?”

“뒷모습도 그렇고, 오늘 방송 맞춰서 집에 온 것도 그렇고, 노랫소리는 가족 아니면 못 알아보게 일부러 조금 변조한 것 같고, 딱 오빠 맞네. 실력 죽이고 나온 거지? 그치? 작가가 그러라고 시켰어?”

“…….”

산하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윤정이 선심 쓴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에헤이, 박산하 다 들켰네. 이를 어째. 방송사고네. 뭐, 걱정 마. 주변에는 말 안 할게.”

어색하게 하하 웃던 산하가 묻는다.

“어떻게 알았냐?”

코 밑을 쓱 닦은 윤정이 흐흐 웃었다.

“가족이잖아. 뒷 모습만 봐도 알지.”

개뿔, 알긴 뭘 알아.

아직 프로그램 녹화도 안 들어갔는데, 얘가 뭐라는 건지 혼자 중얼거리던 산하는 할 말을 잃어버린 채 허탈하게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을 더욱 오해한 윤정이 히죽 웃었다.

“어때? 내 눈썰미 죽이지?”

“어…… 그래. 너 좀 짱이다.”

방송에서 저 스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여동생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보니 장난기가 발동한 산하는 윤정에게 당부했다.

“윤땡, 진짜 말 하면 안 돼?”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상납 잘하라고. 노래 재벌 씨.”

조금 전의 아부 떨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어느새 당당해진 윤정은 뭘 요구해야 하나 고민했고.

이를 바라보던 산하는 속으로는 어이없어했지만, 겉으로는 당황한 모습을 연출했다.

* * *

평소보다 조금 늦게 출근하던 산하는 계단에 발을 내딛다가 우뚝 멈춰 섰다.

‘이대로는 안 돼…….’

벌써 며칠째지?

일적으로 대화를 나누긴 하지만, 그녀도 나도 너무 어색했다. 평소와는 너무 달랐다.

게다가 과거를 들여다보던 중에 그녀가 아파하던 요소가 무엇인지를 간략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아파하는 줄 몰랐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

이곳을 벗어나 조금 감성적인 장소에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뭐든 해 봐야겠어.

안 되면 직원 단체 여행 핑계라도 대서.

본격적인 프로그램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녀와의 관계를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산하가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려 할 즈음이었다.

갑자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박산하 씨 맞으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저는 금융감독원…….”

표정을 구기며 통화 종료 버튼을 거칠게 터치한 산하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른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가 보이스피싱이라니.

그때, 그의 뒤에서 맹철호가 말을 걸었다.

“웬 한숨이야?”

“어? 아저씨. 아침부터 어디 가세요?”

“어디 가긴…….”

자신의 뱃살을 퉁퉁 두들긴 맹철호가 씩 웃는다.

“살 좀 빼려고. 이놈의 살이 찌니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어. 비만은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이제 가는 거야?”

“네.”

“그런데 뭐 잘 안 풀리는 일이라도 있어?”

“어…… 아니요. 아침부터 보이스피싱 전화가 와서요.”

“이런 시간에? 이것들이 이제 미쳐 가나. 저런, 나쁜놈의 자식들. 내가 검찰에 있었으면 이것들을 그냥…….”

주먹을 앞뒤로 흔드는 그에게 산하가 농담을 던졌다.

“훌륭하십니다. 맹 검사님.”

“아, 그거 듣기 좋네. 맹 검사라…… 바쁠 텐데 얼른 가 봐.”

“네, 이따가 봬요.”

곧 트럭에 올라타 시동을 건 산하는, 잠시 후에 만나게 될 그녀를 떠올리며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만복이네 약국>

애처로운 표정으로 동물병원을 바라보던 새봄이 강아지에게 말을 걸었다.

“많이 아파?”

왠지 그렇다는 말을 들은 것만 같았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아파……. 그냥 좋은 말 해 주고 싶었는데. 나도 그 사람 좋은데…… 하지만.”

눈물이라도 흘릴 듯 슬픈 눈망울을 하고 있던 새봄의 내부에선 깊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도망 다니며 숨어 있던 외로움의 아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지금이야 좋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에게 또 한 번의 상처로 남을 거야.

더 아프기 전에 그만둬.

사랑은 한순간이야.

윤새봄!

정신 차려.

벌써 잊은 거야?

모두 널 떠나거나 외롭게 만들었어. 그도 마찬가지야.

세상은 홀로 서야 하는 법인 거 잊었어?

내부에서 들려오는 듯한 충고에 새봄이 고개를 힘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사장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봄아?”

흠칫 놀란 그녀는 뒤편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산하를 발견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예전처럼 상큼하고 발랄한 미소를 지으며 맞아 주던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것에 마음이 착잡해짐을 느끼던 산하는 대뜸 과거에 자주 부르던 호칭을 던졌다.

“봄봄봄!”

며칠 만에 들어 보는, 익숙하면서도 정겨운 부름에 새봄은 당황했다.

“……네?”

“우리 이번 영업일에 하루 쉬고 휴일 하루 껴서 다 같이 등대섬으로 놀러갈까 하는데, 어때? 왜 예전에 나 다큐 촬영했던 곳 있지? 시간 있으면 같이 가자.”

“……등대섬이요?”

“그래, 이번에 이것저것 더 바빠질 것 같아서. 우리 식당 가족끼리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려고. 어때 괜찮지? 거기 정말 이쁜데. 시간 없어? 아…… 봄이가 빠지면 섭섭한데.”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짓던 새봄은 자신의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 사장님이 저렇게 노력하시는데, 일단 가기로 하자.

“갈게요…….”

“진짜? 무르기 없다?”

“네.”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건만, 그녀의 수락에 산하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 * *

등대섬으로 향하기 위해 여객선 터미널 앞에 도착한 산하는 렌트한 승합차를 주차하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새봄에게 말했다.

“다 왔다. 봄아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니요.”

여전히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슬쩍 바라보던 산하가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봉만두.”

“네, 형님.”

“넌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고작 1박 2일인데. 피난 가냐?”

“형님, 모든 것은 유비무환이라 했습니다.”

“아, 그래서 튜브도 챙기시고, 식량도 잔뜩 챙기셨구나.”

하하하 웃던 봉만두가 자신의 짐 중 하나를 꼭 끌어안았다.

“맞습니다. 형님. 거기 귀여운 해수욕장이 있다더군요. 이 한 몸을 풍덩 빠뜨려서, 봉만두가 바다에 왔음을 알리고자 합니다.”

“…….”

어이없어하던 산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만두의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유나세가 입을 열었다.

“만두 너는 현실 감각이 부족해. 이 누나가 널 교육시켰어야 하는데.”

“뭐래, 유나세. 나 남자거든? 그리고 내 현실 감각이 얼마나 출중한데?”

“네, 그러세요?”

“어쭈? 유나세. 막 나가신다 이거지?”

두 사람이 고양이와 개처럼 아웅다웅하던 그때, 더 뒤쪽에 앉아 있던 강본무의 딸 윤소가 칭얼거렸다.

“아빠, 나 쉬야 마려워…….”

“그래? 사장님, 화장실부터 얼른 다녀올게요.”

“네, 배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다녀오세요. 대합실에서 만나요.”

한참 후.

여객터미널에서 관광객을 받아들인 여객선이 출발했고, 강본무의 딸 윤소는 갈매기가 새우깡을 채가자 연신 좋다며 꺅꺅 소리를 질렀다.

여기 온 목적은 새봄 때문이었지만, 다 같이 오기를 잘했다며 흐뭇하게 웃던 산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새봄이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저기…….’

어딘가 쓸쓸한 모습으로, 새하얀 포말이 일어나는 배 뒤편을 바라보던 그녀를 발견한 산하는 가서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13분 전, 윤새봄은 박산하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잘 안 되는 이 상황에 힘들어했다.]

바로 과거에서 보인 그녀의 마음 때문이었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고, 중요한 이야기는 조용한 밤에 하기로 했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섬에 도착한 배는 관광객과 섬 주민 일부를 내려놓고 다음 섬으로 향했다.

얼른 리어카 하나를 빌린 산하는 그곳에 일행의 짐을 모두 실은 후 만두에게 외쳤다.

“봉만두, 너의 힘을 보여 줘라.”

그의 말에 씩 웃어 보인 만두가 두 팔을 굽혀 알통을 선보였다.

“형님, 헬스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가자 리어카!”

이내 리어카 바퀴가 데굴데굴 굴러가자, 그곳에 올라탄 윤소가 소리쳤다.

“만두 삼촌, 더 빨리! 빨리! 2단계!”

진땀을 흘리던 만두가 말을 더듬었다.

“윤소야, 이게 최대 속력…….”

“만두 삼촌 거짓말쟁이.”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윤소는 만두에게 따지듯 말했고, 그는 리어카를 끌면서 투덜거렸다.

“친해지지 말걸…….”

“만두 삼초온!”

“알았어. 간다 가. 2단계 발동!”

만두가 소와 같은 울음을 뱉어내며 전신에 더욱 힘을 주자, 강본무가 자신의 딸을 나무랐다.

“어허, 윤소야. 삼촌한테 그러면 못 써.”

“힝…… 만두 삼촌이 총 3단계가 있다고 했단 말이야.”

“응? 3단계?”

“응응! 만두 삼촌은 총 3단계의 힘을 낼 수 있는데, 마지막 힘은 지구를 위해 참고 있다 그랬어. 지금은 아마 1단계일 거야.”

“윤소야, 2단계라니까. 아우 죽겠네.”

“…….”

함께 리어카를 밀던 강본무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고, 유나세는 그냥 대놓고 웃었다.

그 바람에 새봄도 덩달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만두의 헛소리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때도 있네’라고 생각하던 산하가 새봄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래, 봄아. 넌 웃는 게 이뻐…….’

이날 이른 저녁.

맛깔나다 못해 기절할 정도의 맛을 자랑하는 산하표 요리 여러 개가 식탁에 선보였고, 이 요리를 주목적으로 따라온 강본무와 봉만두, 유나세가 환호를 질렀다.

“사장님, 잘 먹겠습니다.”

“우와, 산하 삼촌 최고.”

지금보다 어릴 때부터 산하의 요리를 접해 왔던 윤소는 보석 같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좋아했다.

모두가 그렇게 좋아하자, 이런 여행을 조금 자주 기획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새봄을 바라보았다.

남들처럼 잘 먹겠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고백하기 전이었다면 그녀도 무척이나 기뻐했을 텐데.

그래, 오늘 반드시…….

굳은 결심을 한 산하는 저녁 식사시간이 끝나자마자 숙소에 들어간 새봄에게 톡을 날렸다.

[봄봄봄, 우리 등대 보러 가자.]

[등대요?]

[그래, 거기 파도 소리도 좋고, 별 보기도 좋거든. 기타 연습하기 좋을 것 같아.]

[……네.]

숙소 앞으로 나온 새봄은 산하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는 그의 행동에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만두 오빠랑 나세 언니는요?”

“저기 뒤쪽 평상에 다들 누워 있어. 별 본다고. 우린 등대 구경 다녀온다고 했으니까 걱정 마.”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산하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가요…….”

계획했던 대로 기타를 챙겨 든 산하는 그녀와 함께 천천히 등대섬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베짱이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작은 소로길을 천천히 걷던 새봄이 산하에게 말을 걸었다.

“……실망하셨죠?”

“무슨 실망? 난 그런 거 안 키우는데.”

“피…….”

“여기 경치 엄청 좋지?”

“네, 공기도 깨끗하고…….”

대화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얼마 전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분위기를 이어 가던 두 사람은 한참 만에야 등대 아래에 도착했다.

바로 산하가 다큐를 찍으며 <저 바다를 비추네>라는 곡을 기타로 연주한 곳이었다.

오늘 산하는 이곳 바위에서 얻었던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선율에 실어내고, 슬픈 감정과 추억까지 혼합해 그녀를 치유할 계획을 세웠다.

특히 슬픈 감정을 자유자재로 실어내는 능력에 묘한 비밀이 숨어 있다는 걸, 산하는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 그녀의 과거를 들여다보며 알게 된 아픔을 없애 주고 싶었다.

“자, 윤새봄 사원. 여기 앉으세요.”

등대 근처 바위에 손수건을 깔자마자 익살맞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의 행동에 새봄이 풉 웃었다.

“어? 웃었다.”

“……이제 노래 들려주시게요?”

“역시 우리 봄이, 척하면 딱이네.”

“어디 불러 보세요.”

“오케이.”

예전 같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산하가 자세를 잡았다.

파도의 속삭임만이 함께하던 그 순간, 기타 현에서부터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 멜로디는 장도산이 산하에게 주려고 작곡한 것으로, 아직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멜로디와 가사가 완성된 곡이었다.

“잊을 수 없었지……. 그때부터였어…….”

어쩐지 외롭게 느껴지는 그의 독백에 새봄은 마음 한편이 아려옴을 느끼며 귀를 기울였다.

“……간절히 소원을 빌기 시작한 것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계속되는 그의 노래를 듣다 보니 간절한 자신의 소원을 떠올린 새봄은 조금 침울해졌다.

이 쓸데없는 외로움이 제발 사라지기를.

사장님과 평생 함께할 수 있기를.

이 아픔이 사라지기를.

언제나 빌어 왔지만, 결국에는 마음속의 걸림돌을 넘어서지 못한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지을 때였다.

외로움과 슬픔을 잔뜩 실어낸 그의 노래와 기타 선율이 새봄의 감정을 순식간에 뒤흔들었다.

그녀의 손마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어느새 눈물이 고이던 그녀의 눈동자에서 또르륵 흘러내린 물방울이 볼을 적셨고.

새봄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오르자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러웠고, 외로웠고, 아팠던 모든 기억이 수면 위로 떠 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슬픔에 차올라 우는 것이 아니었다.

슬픈 감정을 담아내는 노래 솜씨가 추억, 외로움의 선율과 만나 그녀를 억누르고 있던 아픔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보듬고 있었다.

산하는 그녀가 그 아픔을 모조리 토해내도록 더욱 슬프면서도 간절하게 노래했다.

그 바람이 그녀에게 닿은 걸까.

새봄은 산하의 노래가 마지막 소절에 닿았을 즈음 눈물을 훔치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어떡해, 우리 봄이 못생겨졌네.”

옷소매로 촉촉해진 눈가를 닦은 새봄이 입을 삐죽거렸다.

“치……. 언제는 뭘 해도 이쁘다고 해 놓고…….”

“어? 그러고 보니 지금은 또 이뻐.”

“뭐예요……. 못됐어.”

그 후로 말없이 자신을 보며 한없이 미소짓는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왜인지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해졌음을 느꼈다.

아직도 파도의 속삭임은 여전했고, 밤하늘의 별은…… 안 보이고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 어딘가가 간지러움을 느끼던 그녀는 괜히 다른 말을 꺼냈다.

“사장님, 비 오겠어요.”

하늘을 올려다본 산하가 과장되게 투덜거렸다.

“어? 오늘 비 안 온다고 했는데…….”

기상청을 원망하던 산하는 얼른 그녀와 피신하려 했으나, 어느새 툭툭 떨어지던 비는 장대비로 화했다.

“어떡해…….”

“봄아, 여기로.”

그녀와 함께 등대로 뛰어가 그 아래로 바짝 붙은 산하는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말했다.

“사장님…….”

“응?”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저 평생 안 떠나실 거예요?”

찰나적으로 그녀의 말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던 산하가 이내 답을 내놓았다.

“떠나라고 해도 못 떠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봄이 넌 내 전부가 돼 버렸으니까.”

감격한 표정으로 수줍은 표정을 짓던 새봄이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못 떠나. 난 우리 봄이만 있으면 돼.”

“그럼…….”

“…….”

“우리 만나요.”

말소리는 조용했으나 마치 천둥벼락 소리처럼 느끼던 산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묘한 두근거림을 느끼던 산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했고, 움찔하던 새봄의 눈망울은 사라지고 고운 속눈썹이 내려앉자 입술을 포개 버렸다.

부드러운 입술과 입술이 맞닿자, 두 사람을 시샘이라도 하듯 장대비는 더욱 거세게 내렸고, 파도는 하얀 포말을 잔뜩 만들어 내며 거칠어졌다.

- 13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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