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2)
보통 다른 시구자가 하는 것처럼 편한 바지에 상의만 야구 유니폼으로 입을 생각이었던 산하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프로 야구 선수 복장으로 시구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 그를 오해한 기훈이 씩 웃었다.
“왜? 엄청난 관중 앞에서 하려니까 쫄려?”
“아니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어쭈?”
예전과 다르게 말투가 조금 상스러워진 기훈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강정열이 혀를 찼다.
“이놈 말투가 점점 왜 이래?”
산하의 안티팬과 댓글로 배틀을 벌이다가 말투까지 변해 버린 기훈이 찔끔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이게 다…… 산하 때문…….”
도저히 이런 나이에 어린 애들과 싸웠다고 말하기는 창피했던 기훈이 말을 하다가 멈추자, 산하가 의문을 표했다.
“네? 제가 왜요?”
“그런 게 있어.”
“???”
* * *
대한민국의 재벌 그룹은 생각보다 많다. 그중에서도 CG 그룹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재벌가 집안은 본래 조선의 거부라 불릴 정도의 대단한 부자였는데, 이 재산을 물려받은 후손은 일제강점기가 닥쳐오자 많은 재산을 서서히 팔아 치운 후 독립운동 단체에 헌납했고, 본인은 가난한 생활을 자초했다.
그 바람에 그의 식구는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궁핍해졌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식들에게 강조했다.
“나라 잃은 설움을 기억하거라.”
그 후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을 거친 어느 날, 재산 한 푼 물려받지 못한 후손 곽대로는 폐허가 된 나라에서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해 가며 한 푼 두 푼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 종잣돈이 모이자 그는 자그마한 포목점을 차렸고, 사업 수완과 운이 겹치자 승승장구한 그의 포목점은 섬유 공장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이 무렵 아버지를 기리던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CG 섬유’로 변경했다.
Cloth, ‘옷감’이라는 뜻을 가진 영단어에서 C를 따오고, 글로벌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맞춰서 G를 넣은 것이었다.
지금의 섬유회사를 더 크게 발전시켜 조국에 이바지하겠다는 뜻이었는데.
그렇게 탄생한 회사는 자식 대에 이르러 그룹으로 발전하며, 다른 독립운동가 집안은 명맥만 근근이 유지하는 중이었지만, 그의 집안만큼은 명실공히 성공한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 그룹명은 세간에서 놀림을 많이 받았다. 가상 그룹이냐? 컴퓨터 그래픽 그룹이다. 허상 그룹이다.
특히 몇몇 계열사 실적이 부진할 때마다 소액 주주들이 게시판에서 난리를 치곤 했다.
- 역시 허상 그룹, 믿는 게 아니었어.
- 컴퓨터 그래픽주를 사요? 바보.
그런 재벌 그룹에서는 야구 구단도 운영 중이었는데, 다른 계열사보다 더 심한 욕을 먹고 있었다.
- 가상 코끼리를 믿은 님들 잘못임.
- 어휴 맨날 져, 울화통 터짐. 내가 독립운동가 집안이라 참는다.
- 이 구단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 구단임. 그러니 열 받을 필요 없음.
- 모두 허상에서 깨어나세요. 레드 썬!
이런 구단 팬들의 반응을 보며 매일 열 받아 하는 CG 엘리펀츠 구단주는 재벌 4세였다.
곽기훈의 협박 아닌 협박에 산하를 시구자로 선정되도록 만든 장본인인 구단주 곽태성은 젊디젊은 37세였는데.
보통 기업이 야구를 기업 이미지 메이킹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적자임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유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곽태성은 마인드부터 달랐다.
야구를 사랑했던 그는 젊은 패기와 집안의 배경을 밑천 삼아 구단에 아낌없이 투자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무색하게도 팀 순위는 늘 중·하위권에 머무르곤 했다.
스포츠는 돈이고.
그 돈을 투자했으면 성과가 나와야 하는데.
결과가 영 시원찮다 보니 모그룹의 회장, 즉 할아버지를 뵐 면목조차 없었던 그는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그래서 사장에게 화를 내다 못해 단장까지 불러 압박을 가하는 중이었다.
“부상이요? 하…….”
“그게, 열심히 하다 보니.”
“프로 야구 개막이 코앞이에요. 이런 시기에 조심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최 선수가 워낙 연습광이다 보니…….”
“그게 말이에요? 코치고 감독이고 뭐 합니까? 비싼돈 주고 데려왔더니, 안 그래도 쓸 만한 투수진 부족한 거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됐고, 올해는 몇 위나 할 것 같습니까?”
잔뜩 주눅이 든, 프런트를 총괄하는 단장 송인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구단주는 프런트 중심의 야구를 할 수 있도록 열심히 밀어주었는데, 내놓은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괜찮은 선수를 영입했다 싶으면 부상을 당하거나, 도박이나 술 때문에 사고를 치기도 하고, 잘 나가다가도 슬럼프에 빠지곤 했다.
이런 불운이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생각해 보던 송인호는 침울한 기색으로 머릿속을 정리하다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런 대답에 더 화가 난 곽태성은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며 화풀이했다.
“최선, 그놈의 최선 좀 집어치우세요. 그 말만 몇 번째 듣고 있는 줄 아십니까?”
“…….”
“왜 또 말이 없어요? 송 단장만 믿고 벌써 몇 년간 지켜보기만 했어요. 올해도 똑같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한숨을 푹 내쉬던 구단주 곽태성이 그에게 나가 보라는 시늉을 하자, 소파에서 힘겹게 일어선 송인호가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곽태성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소파 팔걸이를 탁 하고 두들겼다.
“아 참, 송 단장님.”
멈칫한 송인호가 몸을 되돌렸다.
“네,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시구할 박산하 씨, 구단 팬들 반응 어때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습니다.”
송 단장의 대답이, 꼭 자기 구단의 처지를 상기시키는 것만 같아 기분이 살짝 나빠진 태성은 조금 전보다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정확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구단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개막전 시구자로 나섰으면 하더군요. 아주 예전에 시구하고 나서부터 우리 구단에 연이어 승리를 안겨 줬던 연예인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구단주가 되기 전 시구자로 나섰던 연예인을 떠올린 곽태성이 입을 열었다.
“임민기 씨 말인가요?”
“맞습니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상징성도 있고.”
“그런데 왜…….”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알겠으니까 나가 보세요.”
“네, 그럼.”
스포츠는 과학이라 생각하고, 미신 따위는 잘 믿지 않던 곽태성은 자신이 구단주로 들어서며 이어지는 불운에 기분이 상당히 찝찝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팬들도 원하고 프런트에서도 밀던 임민기를 시구자로 선정하려고 했으나, 변수가 나타났다.
바로 자신처럼, 재벌 사이에서 돌연변이라고 불리는 사촌 형 곽기훈이었다.
엔터를 운영한답시고 할아버지의 말도 거스르던 그는 한동안 연락조차 뜸하더니, 얼마 전 난데없이 찾아와 시구자를 추천해 주었다.
박산하.
얼핏 들어는 봤으나 그리 유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연예인.
그래서 무시하려고 했으나, 기훈이 던진 한마디에 곧바로 수락하고 말았다.
“누가 구단주 할 수 있게 힘써 줬더라?”
수락은 했으나 도대체 이해는 가지 않았던 곽태성이 그에게 왜 그 사람이냐고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순했다.
“잘해.”
“뭘 잘해요?”
“이것저것.”
“???”
그 당시 일을 떠올린 태성은 헛웃음을 흘렸다. 잘하긴 뭘 잘해. 대체 무슨 관계이길래.
어쨌거나 이미 결정 난 사안이기에 뭔가를 해 볼 수도 없었던 곽태성은, 내년 시즌에는 꼭 임민기라는 연예인을 시구자로 내세워서, 정말 운빨이라는 게 있는지 실험해 보기로 했다.
운이 없다기에는 몇 년째 구단에 이어지는 불운은 서글퍼질 지경이었으니까.
‘젠장…….’
* * *
[연계 미션 - 당신의 팬에게서 속성 과외를 받고 그를 놀라게 하자.]
[보상 - 시구에서 문화의 힘이 발동할 확률이 일시적으로 상당히 높아진다]
필요 없다는 데도 굳이 야구 과외 한번 받아 보라는 CG 엘리펀츠 구단 측의 요청이 있었는데, 거절하려던 산하는 연계 미션이 뜨는 바람에 속성 과외를 받는 중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구단 측에 산하의 팬이 있어서 억지로 성사된 것이었고, 그 사람은 바로 엘리펀츠의 코치였다.
평소 박산하의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그는 팬으로서 산하가 시구를 멋지게 장식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심지어 광팬이다 보니, 산하를 보는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산하 씨, 자, 보세요. 이걸 혐오스러운 군대 고참이다 생각하고 확 잡아뜯는 식으로…….”
공 쥐는 법을 재미있게 알려 주는 코치의 열성에 산하도 열심이었다.
능력을 물려받긴 했지만, 또 다르게 배우는 게 있을지도 몰랐고, 일부러 가르쳐 주려는 사람 성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요?”
그의 공 쥔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코치가 물개박수를 쳤다.
“야, 역시 우리 산하 씨 기가 막힙니다. 예전에 야구 연습 좀 하셨다더니, 척하면 척! 그립 좋습니다.”
구종 중에서도 기본적인 투심 패스트볼에 관해 강의하던 코치는 칭찬을 퍼부으면서도 내심은 놀라 버렸다.
그립이 워낙 흠 잡을 데가 없었다. 그냥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속으로 의아해하던 그는 조금 더 살펴봐야겠다며 던지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산하는 기초를 더욱 튼튼히 한다 생각하며 열심히 배웠다.
잠시 후.
시범을 보여 준 후 한번 던져 보라는 코치의 요구에 공을 잡은 산하는 와인드업을 했고, 이를 지켜보던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동이라는 걸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고, 야구도 마찬가지였다.
유소년 시절부터 야구에 시간을 쏟아붓는다 해도 그중에서 소수의 실력자만이 프로로 진출하는데.
산하의 폼이 꼭 그런 프로 야구 선수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하루 이틀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뭐지……?’
그 순간 산하의 팔이 쭉 뻗어 나갔고, 공이 하얀 궤적을 그리며 구단의 실내 야구 연습장 그물망을 뚫을 듯 밀어내다가 툭 하고 떨어졌다.
이에 화들짝 놀란 코치가 멍하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보니 머릿속의 사고회로가 꼬여 버린 그는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 저 산하 씨. 그러니까, 예전에 야구 선수 생활도 하셨어요?”
“아니요.”
“정말 아니에요?”
“네, 그런 적 없습니다.”
확실히 산하의 광팬인 자신이 아는 선에서도 그는 야구 선수로 활약한 적이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던 그는 산하에게 요구했다.
“저기, 한 번만 더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그가 흔쾌히 허락하자 코치는 스피드건을 슬쩍 가져와 속도를 측정했다.
“138km/h!?”
이제는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을 지경이었던 그는 다급히 산하에게 달려들듯이 다가가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산하 씨! 정말 야구 선수 생활하신 적 없으세요?”
“네.”
“와……. 이게 말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그는 스피드건을 한번 보고 산하를 한번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 사이 산하는 눈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구에 참가할 시 문화의 힘 발동 확률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그의 야구 솜씨는 코치에게서 인터뷰를 딴 한 기자의 뉴스 기사로 인해 세상에 슬쩍 알려졌다.
<야구 속성과외 맡은 엘리펀츠 코치, 박산하 씨 야구 실력에 다들 깜짝 놀랄 것>
- 뭘 대단해, 임민기로 가자니까. 더럽게 말 안 듣네.
- 동감! 내가 엘리펀츠 골수팬이다. 말 좀 들어. 임민기 시구 탁 하면, 올해 우승한다니까.
- 놀라기는, 올해 중위권은 벗어나야 깜짝 놀라지.
- 프런트 싹 물갈이해야 해. 우리 곽 구단주 얼마나 열심히 투자하는데, 꼬라지 하고는…….
- 우리 산하 씨가 어때서요!
- 제발 올해는 잘 좀 하자.
* * *
프로 야구 개막전이 정말 얼마 안 남은 시점, 산하는 속성 과외를 자처했던 엘리펀츠 코치에게서 구단 용품을 일괄적으로 구입하거나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같은 시각, 작곡가 장도산은 오늘도 싱글벙글하며 계란후라이 두 개를 부쳐 낸 후 케첩을 촥촥 뿌리고 식탁 위에 올렸다.
그가 이렇게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산하 때문이었다. 그 사람으로 인해 꿈에 그리던 좋은 곡을 완성하다 보니 매일 매일 신나던 참이었다.
심지어 늦은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밥상 차리는 것까지 재미있었던 그는 식탁 앞에 앉아서 입을 크게 벌리고 밥을 한술 뜨려다가 멈칫했다.
“아 참!”
그는 가끔 <스타의 목소리가 들려>를 시청하곤 했는데, 저번 주 예고편에서 깜짝 놀랄 거라는 둥 호들갑을 떠는 사회자의 말에 이번 주에 누가 추가로 합류할지 기대했었다.
그걸 깜빡하고 있었던 장도산은 곧장 TV를 켰다. 오늘이 바로 스목들 방영일이었다.
“자, 오늘 스타의 목소리가 들려, 만약 1회차에 맞히시는 분이 계신다면 제 출연료를 반납하겠습니다. 아, 물론 오늘 것만요. 아휴. 심장 떨려. 그럼 준비되셨나요? 시작합니다. 저음 사냥꾼이 부릅니다. 김판중 님의 <난 다시 달린다>.”
하얀 쌀밥이 자신을 먹어 달라며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건만, 장도산은 TV 화면에 집중했다.
그건 그의 직업병이기도 했지만.
한때 오뚝이처럼 계속해서 일어나 도전한다고 해서 우스갯소리로 ‘불멸의 작곡가’라고까지 불렸던 김판중은 자신도 조금 안면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다시 달린다>는 실패해도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느낌이 있어서, 자신도 지칠 때면 한 번씩 듣는 노래였다.
<다시 달린다>? 그거 좋지.
듣기에는 쉬워 보여도 부르기는 힘들걸? 누군데 이런 노래를 골랐어?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볼까?
그러나 그는 늦은 저녁 식사 중임을 상기했는데, 바로 배꼽시계가 우렁차게 울고 있어서였다.
‘아우 배고파…….’
일단 밥이 먼저라고 생각하던 그는 느릿한 멜로디에 맞춰 고개를 까닥거리더니 밥 위에 고추 장아찌 하나를 얹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베일 뒤에서 마이크를 잡은 채 우두커니 서 있던 저음 사냥꾼이 입가로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 14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