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
산하는 이미 말을 꺼내 놓고도 은근히 말할까 말까 망설이던 동식을 불렀다.
“동식아.”
“어?”
“뭘 그렇게 뜸을 들여?”
자신이 소식을 들고 왔으면서도 어딘가 혼란한 표정이던 동식이 심호흡을 했다.
“그게 말이야. 이게 너무 빅 뉴스라서, 너 놀라는 바람에 경기할까 봐 그러지.”
“경기는 무슨…….”
이미 비현실적인 능력을 얻었고, 누군가의 짧은 과거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마당에 그보다 더 놀랄 일이 어디 있을까.
심지어 청와대 비서실장과 전화 통화를 하던 그때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뭘 들어도 크게 놀라지 않을 준비가 돼 있었던 산하가 재차 물었다.
“왜? 그 자식 로또라도 당첨됐대?”
“아니.”
“그럼? 아, 답답하게. 시원하게 얘기해 보세요. 하동식 씨. 난 아무렇지 않다니까.”
드디어 결심했는지 눈빛이 진지해진 동식이 식당 내부 테이블 하나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이야, 동식이 봐라. 제법 진지한데? 갑자기 무서워지잖아.”
“나 원래 진지해.”
말 그대로 웃음기 하나 없는 그의 표정 때문에 얼굴이 굳어 버린 산하가 천천히 의자를 꺼내 앉았다.
“알았어. 얘기나 해 봐.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그러니까 상식이, 우리가 알기로는 평범했잖아?”
산하는 평범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부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평범은 무슨, 사이코였지.”
그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을 짓던 동식이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맞는데, 내가 말을 잘못했네. 집안 사정 말이야. 그냥 평범하거나 그 이하로 알고 있었잖아.”
“그렇지. 그래도 나보단 형편이 괜찮았을걸?”
“그야 그렇지. 그때 너희 집은…….”
동식은 말을 하다말고 산하의 눈치를 보았다.
“야야, 우리 사이에 무슨. 그냥 우리 집 망해서 그렇다고 해. 이젠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때 생각하면 진짜, 그래서 그게 왜?”
“상식이네 형편이 확 폈다더라.”
“왜? 이름 모를 친척이 큰 재산이라도 물려줬대?”
“차라리 그런 거면 말 안 했겠는데.”
“아, 이 자식. 진짜 답답하네. 대체 언제 말할래?”
그의 재촉에도 한참이나 입술을 깨물며 말하기를 망설이던 동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상식이가 재벌가 후계자 중 한 명이 됐다더라…….”
상식선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폭탄과도 같은 그의 말에 사고회로가 정지한 듯 한참이나 말이 없던 산하가 겨우 입을 열었다.
“……뭐? 다시 말해 봐.”
“재벌가 사람이 됐다고.”
어이없다는 듯 하하 웃던 산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만우절이냐? 아닌데. 너 지금 나 놀리냐?”
“진짜야.”
“……그게 말이 돼?”
“나도 말이 안 된다고는 생각하는데, 사실인 걸 어쩌냐.”
“그 소식 출처가 어딘데?”
“동창회.”
어느새 진지한 눈빛으로 변한 산하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동창회? 누가 그래?”
“누가 그랬다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최근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 아는 애들은 다 알더라고. 너야 동창회는 거들떠도 안 보니까 몰랐겠지만.”
“고상식…… 고상식이 재벌가 사람이 됐다고?”
얼굴을 찡그리던 산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별 미친 새끼가 운도 좋네.”
평소 험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산하가 높은 확률로 말을 거칠게 하는 때가 있다면, 바로 ‘고상식’이라는 이름과 마주할 때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인간쓰레기가 재벌가 후계자라니, 세상에 정말 신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야, 동식아. 신이 있다고 해도, 누구 편을 들어주고 그러겠냐? 인간의 상식과 신의 상식은 다를걸?”
고상식이라는 놈에게도, 자신에게 벌어진 일도 신의 장난이 아닐까 생각해 보던 산하에게 동식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건 또 그러네.”
“……그래서, 재벌로 밝혀진 게 언젠데? 그 재벌 그룹은 어디야?”
“글쎄, 아직 정확한 건 나도 몰라. 아마 재벌가 쪽에서 보안 철저히 한 게 아닌가 싶다. 뭔가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겠지. 동창회에선 본인이 떠들어 댄 것 같고.”
“별일이 다 있네……. 그 자식 요즘 뭐 하는데?”
“해외에 나가 있다는 것 같던데? 그것 빼고는 나도 잘 몰라.”
“그래? 해외라…….”
산하의 진지한 표정을 마주하게 된 동식이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괜히 얘기했나 보다. 딱히 그 자식이랑 만날 일도 없는데.”
“아냐, 잘 얘기했어.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지.”
“그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마. 재벌씩이나 돼서 뭐 허튼짓 하겠어? 아무튼 나 간다.”
“벌써?”
“어. 이번에 조금 괜찮은 공장 매물이 나왔다고 해서, 거기 한번 살펴보려고.”
“공장?”
“그래, 인마. 나 고생하니까 월급 두둑이 줘라.”
“당연하지. 고맙다.”
“고맙기는…… 농담이다, 인마. 나 진짜 간다.”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동식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산하는 턱을 쓰다듬었다.
‘재벌이라…….’
이날 오후.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산하는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시를 읊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지은 이 시는 원래 산하가 자기 자신을 달래고자 시도 때도 없이 되뇌던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시에서 말한 바대로 모든 날을 견디다 보니 기쁨이 찾아왔다. 그런 이유 덕분에 산하는 이 시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 지 얼마 안 된 지금 날아온 새 소식에 산하의 기분은 조금 더러워졌다.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자…….”
과거 식당을 여러 번 말아먹었을 때처럼 시구를 중얼거리던 산하는 언제 심각했었냐는 듯 휘파람까지 불어대며 조리대를 걸레로 박박 닦았다.
그러자 휴게실 정리를 마치고 나오던 새봄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장님, 뭐가 그렇게 좋아요?”
“그게 다…….”
“저 때문이라고요? 딱 맞혔죠?”
“아니.”
입을 삐죽 내민 새봄이 항의하듯 물었다.
“그럼요?”
“우리 때문이지.”
새봄은 ‘우리’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떠올려보았다. 너와 나가 합해진 우리. 외로움에 시달렸던 지난날을 보상해 주는 것만 같은, 아주 즐겁고 기분 좋은 단어였다.
그 단어를 조금 자주 써 볼까 생각하던 새봄은 배시시 웃으며 산하에게 제안했다.
“우리…… 사장님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갈래요?”
“그거 좋지! 아는 곳 있어?”
“네, 당연히 있죠. 거기 맛있어요. 가요 가요.”
산하는 자신에게 팔짱을 끼는 새봄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해 주었다.
“우리 항상 행복하자. 봄아.”
볼이 발그레해진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각종 언론 매체에서 떠들던 산하의 강속구에 관한 이야기도 조금씩 잠잠해지는 무렵이었다. ‘스타의 목소리가 들려’에 출연한 산하는 벌써 4회차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마운틴R의 골수팬인 한 네티즌을 통해 흘러나왔다.
- 저 긴가민가했는데, 이제 확신합니다. 저음 사냥꾼이 누군지 알아요.
- 하여간에 요즘 뻥쟁이가 대세.
- 진짜라니까요. 이분 마운틴R이라고, 영상 채널 운영자예요.
- 마운틴R? 그게 누구?
그 후 인터넷 주소 하나가 스목들 관련 커뮤니티에 올라왔고, 링크를 타고 들어가 영상을 재생해 본 네티즌들은 화들짝 놀랐다.
- 와, 맞네. 저음 사냥꾼.
- 왜 이런 사람이 있는 줄 전혀 몰랐죠?
- 그러니까요. 짱이다. 그런데 노래 실력이 조금 차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 예전 방송 공지 보니까, 목이 조금 안 좋아졌다고 그랬어요.
- 아…… 그런데 다른 노래도 죽이는데요?
- 끝내준다. 그런데 여기 웃기네요. 고릴라여 귀환하라? 마운틴 고릴라? 별명 웃김.
- 아니, 그래서 이 사람이 누군데요?
- 그건 여기 골수팬들도 궁금해하는 사항임.
- 그래도 조금 진전이 있었으니까, 오늘 방송에서 힌트 좀 찾아보죠.
이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던 장본인이자 마운틴R의 골수팬, 아니 골수팬을 넘어 고인물이 돼 버린 이유순은 흐흐흐 웃고 있었다.
고릴라 형님, 이번엔 잡히겠군요.
아무도 누구인지 맞히지 못한다 해도, 출연 회차가 끝에 다다르면 반드시 밝혀지겠죠.
안 그렇습니까?
눈까지 게슴츠레하게 뜨며 그날을 고대하던 이유순은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냉장고에서 각종 먹거리를 가져오고, 주문했던 치킨을 받아 와 식탁 위에 세팅했다.
요즘 그의 즐거움은 스목들로 옮겨 왔고, 즐거운 시간에 행복한 식사를 함께하기 위함이었다.
‘자, 그럼…….’
리모컨을 들어 TV를 켠 이유순은 신나는 표정으로 치킨 날개를 집어 들었고, 그사이 다른 출연자의 노래가 끝나고 저음 사냥꾼의 차례가 다가왔다.
* * *
스목들, 4회차 녹화 당일.
어둑한 무대 한 편에서 분위기를 잡고 마이크를 잡은 산하는 훅 치고 들어온 눈앞의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언제 봐도 반가운 문화의 힘이었다.
[문화와 관련된 행위입니다.]
[마운틴R의 노래 솜씨가, 현재 가진 솜씨 대비 일시적으로 9% 상향됩니다.]
[남은 시간 20분]
주먹을 꽉 쥐어 본 산하는 오늘 부를 노래에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했다.
오늘 부를 노래는 외국곡을 국내로 들여와 편곡한 것으로, 늑대인간의 전설에서 착안하여 작곡한 노래였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늑대인간으로 태어난 한 사내의 처절하고 냉혹한 삶을 그린 가사가 주 내용이었다.
그 참혹하고 소름 끼치는 느낌을 담기 위해, 작곡가는 얼음물에 몸을 담그거나 벌레를 씹어먹고, 한겨울에 눈밭을 뒹굴며 자신을 학대했다고 전해진다.
그 말마따나, 도입부부터 음산하고 소름이 끼치는 이 노래를 국내의 한 가수가 불렀는데, 그저 그렇다는 평을 받은 바도 있었다.
노래가 뭔가 기분 나쁘기만 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니 딱히 화제가 되지도 않았고, 아는 이도 별로 없었다. 그나마 원곡은 해외에서 나름 괜찮은 평을 받고 있었다.
중반부에는 인간을 사랑했던 늑대인간이 제정신을 잃고 사랑했던 연인의 목줄을 물어뜯는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고뇌, 슬픔, 고통, 안타까움이 담겨 있어야만 진정한 노래가 완성되었고, 원곡자는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털어놓은 바 있었다.
그만큼 부르기 어려운 노래를 완성하기 위해, 산하는 늑대인간과 관련된 영화도 수십 번 보고 온 참이었다.
공포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로 쓰이는 악기인 워터폰(Waterphone)을 가미해 두려움과 음산함을 자아내던 전주가 흘러나오던 그때.
네티즌들은 설왕설래를 이어 갔다.
- 어, 이거 그거 아니에요? 영화 OST.
- 노노. 원래 있던 곡을 영화에서 가져다 쓴 거죠.
- 그게 그거죠.
- 아니거든요?
- 이거 누가 편곡해서 불렀다가 폭망하지 않았어요? 누구더라.
- 폭망까진 아니고 무관심 쩔었죠. 비난도 쪼금?
- 으, 납량특집인가. 소름 돋네.
- 우리 저음 사냥꾼 씨, 과연…… 민세욱 씨도 실패했는데.
- 아, 맞아요. 민세욱
- 전 그럭저럭 부른다에 한 표
- 겁나 잘 부른다에 한 표
- 민세욱 꼴난다에 한 표
이때, 어둠에 잠겨 있던 산하가 천천히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 146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