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154화 (154/445)

154화 고릴라가 하산했다 (1)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보며 걷던 손두희는 건물 모퉁이를 돌자마자 한 손으로 앞을 가리키며 알바생을 바라봤다.

“짜잔, 도착. 저길 빠져나가면 스파게티를 나름 맛나게 하는 집이 나와.”

자신을 보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그의 행동에, 알바생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앞에 살짝 보이는 식당을 검지로 가리켰다.

“……여긴 산하네 요리 전문점인데요?”

“응? 알고 있었어? 에이, 팬이라길래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김샜다는 듯이 말을 하다 말고 식당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손두희는 몇 걸음을 더 걸었다. 그런데, 사람이 바글거리다 못해 시장통 같은 모습이 나오는 게 아닌가.

뭔가 기대하던 모습은 아니었던지라, 두희는 다급히 골목을 빠져나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 뭐지.”

“뭐긴요. 우리 산하 씨가 직접 운영하는 요리 전문점이죠.”

한참 눈을 감았다 뜨며 가만히 있던 손두희는 이내 이해했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러니까, 저기 저 사람들이 산하 씨 팬들이구나. 이야, 팬이 엄청 많네. 이렇게 인기가 좋았나? 그런데 난 왜 몰랐지. 산하 씨가 해 주는 요리 먹고 싶어서 다들 저러는 건가?”

알바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답변했다.

“여긴 된장찌개로 유명해서, 전부 새벽부터 줄 서서 기다리는 손님이에요.”

깜짝 놀란 손두희가 그 엄청난 줄을 한번 바라보고, 식당 입구를 바라보다가, 다시 알바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 저 사람들이 전부 식당 손님이라고?”

“네. 뭐, 팬도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화들짝 놀란 손두희는 할 말을 잃고, 줄을 선 손님만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뭐라고? 된장찌개?”

“네, 먹어 본 사람들은 엄청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먹어 보려다가 실패했는데.”

“실패하다니? 왜?”

“최소한 새벽부터는 줄을 서 있어야…….”

알바생이 이곳 나름의 룰을 설명해 주자, 손두희는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된장찌개, 백반집을 가도 고깃집을 가도 나오는 된장찌개. 그거 하나 먹으려고 저렇게 줄을 선다고? 우리 누나 표 스파게티도 아니고? 뭐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눈만 끔뻑끔뻑하는 손두희를 바라보던 알바생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사장님, 가요. 제가 한 삼십 분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는 맛집 알아요. 여긴 다음에 와요.”

“잠깐!”

“왜요?”

“……여기 된장찌개가 정말 그렇게 맛있어?”

“저도 들은 거지,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럼 먹고 가자.”

“네? 지금 줄 서 봐야 못 먹어요.”

“기다려 봐.”

여기까지 사람을 데려와 놓고 그냥 가기는 뭐 했던 손두희는 잠깐 망설이다가 스마트폰의 주소록을 터치하곤, 산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두희 씨. 잘 지내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 산하 씨 식당 앞인데요. 죄송하지만…….”

그의 말에 유리 벽 너머를 두리번거리던 산하는 저 멀리 모퉁이 쪽에 서 있는 손두희를 발견했다.

“잠시만 거기 계세요. 직원 보낼게요.”

이내 전화 너머로 ‘봉만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식당 유리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곧장 손두희에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손두희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두 사람은 앞문이 아니라 뒷문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을 거쳐 휴게실로 들어선 두 사람은 무슨 비밀 첩보 작전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중에서도 알바생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전자레인지,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는 냉동고, 음료가 가득한 업소용 냉장고, 그 외에도 다양한 주전부리와 읽을거리가 있는 휴게실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 한구석이 풍성해지는 느낌이었다.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면 마음껏 드시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던 남자가 사라진 틈을 타, 알바생이 손두희에게 슬쩍 달라붙었다.

“와, 여기 좀 보세요. 엄청나요. 무슨 편의점인 줄 알았어요.”

“그러게…….”

“역시 우리 산하 씨, 인성 좀 보세요. 복지 서비스도 제대로라니까요? 그런데 사장님, 언제 이렇게 친해지셨어요? 여긴 안면 있는 사람도 예외 없기로 소문났는데.”

“……그래?”

공원묘지에서 ‘정당하게’를 외친 자신의 입을 때려 주고 싶었던 손두희는 민망한 표정으로 하하 웃기만 했다.

머릿속으로는 누나 신세만 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다음부터는 정당하게 줄을 서거나, 안 와야겠다고 생각하던 손두희가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그때.

산하가 휴게실 내부로 들어섰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어…… 아니요. 저기, 죄송하게도…….”

“죄송은요. 그런 말 마세요.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된장찌개가 메인이에요. 부 메뉴는 하루에 한 종류만 팔아요. 미리 전화 주셨으면 스파게티 재료도 준비해 놨을 텐데, 지금은 마땅한 게 없어서요. 그건 다음에 오시면 해 드릴게요. 오늘 부메뉴는 김치말이 국수인데, 둘 중에 어떤 걸 드시겠어요?”

그때였다. 산하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다섯 번째 연결고리인 손두희가 당신의 영업장에 입장했습니다.]

[2시간 동안 영업장의 모든 음식 맛이 2% 상승합니다.]

‘이건 또 뭐지’라고 중얼거리던 산하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을 바라보자, 알바생은 산하를 카페에서 맞이했을 때보다도 더 눈을 빛내며 큰소리로 외쳤다.

“저는 된장찌개 먹을래요!”

“네, 주문받았습니다. 두희 씨는요?”

“어…… 저도 된장찌개 주세요.”

“된장찌개 2인분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가 밖으로 사라지자마자 알바생이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와, 산하 씨가 직접 주문받으셨어요. 멋있다.”

“그러네…… 죄송하게.”

뒷말을 흐리던 손두희는 누나의 요리가 메인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조금 실망하고 있었다.

된장찌개처럼 흔한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누나의 스파게티와 비교할 만한 건 아닌데. 누나의 솜씨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더라만.

그나저나, 줄이 엄청난데 말이야. 대체 뭐지? 얼마나 맛있길래?

된장찌개를 줄도 안 서고 쉽게 먹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손두희가 우중충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하자, 알바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아니…… 그냥.”

손두희의 표정을 보며, 알바생은 자신의 입가에 검지 두 개를 가져다 대고 입꼬리를 올리고 스마일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사장님. 이렇게 좀 웃으시라고요. 곧 비라도 내릴 것 같네.”

“비가 내려?”

“사장님 얼굴이요. 먹구름이 잔뜩 꼈어요. 요즘은 좀 밝아지신 것 같더니, 또 왜 그러세요?”

“그게…… 아니야. 일단 앉자.”

두 사람이 휴게실에서 잠시 기다리자, 유나세가 중국집 배달부가 쓸 법한 철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셨죠? 주문하신 된장찌개 나왔습니다.”

알바생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죄송하지만 그 가방은 뭐예요?”

“아, 이거요?”

씩 웃던 유나세가 철가방을 탕탕 두들겼다.

“사장님 가족분들이 오시거나, 엄청 가까운 분을 대접할 때 요리를 나르는 용도예요. 재밌죠?”

“그것도 사장님이 고안하신 거예요?”

“네, 그렇죠. 잠시만요. 식기 전에 드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는 익숙한 자세로 테이블 위에 철가방을 탕 내려놓더니 뚜껑을 들어 올렸고, 된장찌개 뚝배기 두 그릇과 밑반찬, 공깃밥을 세팅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철가방을 휴게실 한쪽에 고이 모셔 놓은 유나세가 밖으로 사라지자 알바생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게 그렇게 맛있다는 슈퍼 울트라 된장찌개인가 봐요.”

“……뭐? 슈퍼 울트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저 배고파요.”

“그래, 얼른 먹자.”

손두희도 시장함을 느끼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이 된장찌개를 처음 맞이하는 누구나 그렇듯, 조금 무심한 표정으로 된장찌개를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두희가 먼저 먹기를 기다리던 알바생도 이내 숟가락을 들어 된장찌개 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던 찰나였다.

두희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리더니 테이블을 손으로 탕 때렸다.

그 바람에 놀란 알바생은 ‘어맛’ 소리를 내며 숟가락을 떨어뜨렸고, 땡그랑 소리가 났다.

“깜짝이야. 사장님, 왜 그러세요?”

그는 알바생이 뭐라 말하는 것도 제대로 못 듣고 중얼거렸다.

“……세상에.”

두희는 전신에 전기가 파지직 들어오는 것만큼이나 짜릿하게 느껴지는 된장찌개 맛에 너무나 놀라고 있었다.

그건 바로 손두희가 식당에 입장하며 발생한 효과 때문이었다. 본래 된장찌개는 100%를 달성한 지 오래였는데, 거기에 2%가 더해진 것이다.

그 작은 차이는 평소 사람들이 느끼는 것보다 더한 놀라움을 가져왔고.

폭풍처럼 휘몰아친 그 맛을 처음 느껴 본 두희에게 속삭였다.

이게 바로 진정한 된장찌개다.

이걸 안 먹고 배겨? 지금 뜸 들이는 거야?

어느새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는 사장의 모습을 보게 된 알바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장님이…… 오늘 영 제정신이 아닌 것…….’

그녀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두희는 내면의 부름에 답하기라도 하는 듯 전투적인 태세로 숟가락을 움직였다.

된장찌개 한술, 밥 한술이 아니라, 우걱우걱 찹찹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 게걸스러운 모습에 당황한 알바생이 눈만 끔뻑이고 있던 찰나였다. 두희는 잠시 고개를 들어 입안에 음식물이 든 채로 웅얼거렸다.

“얼른 먹어. 맛이 굉장해.”

말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두희는 다시 고개를 처박고 된장찌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누나한테는 미안하지만, 스파게티 요리가 비빌 건 아닌 것 같다고 속으로 말하면서.

‘사장님 너무해…….’

알바생은 뚝배기에 머리를 파묻을 기세로 먹는 사장을 보며 울상을 지었고,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자신의 숟가락을 바라보다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요거트용 플라스틱 숟가락이 보였다. 또 달라고 하긴 미안하니.

“저거라도…….”

재빨리 그 숟가락을 가져온 그녀는 비닐 포장지를 뜯자마자 된장찌개를 떠서 맛보았다.

“어머! 세상에, 미쳤다!”

두희만큼이나 놀라 버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요거트 숟가락을 계속 놀려보다가 감질나서 안 되겠는지, 요거트 숟가락을 더 가져왔다.

무려 네 개의 요거트 숟가락을 한 손에 쥐고 된장찌개를 떠먹은 그녀는 그제야 흡족한 표정으로 미친 듯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된장찌개에 정신이 팔려 있던 두희가 잠시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된장찌개 진짜…… 어? 너 왜 그걸로…….”

요거트 숟가락으로 힘겹게 된장찌개를 퍼먹던 그녀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이게 다 사장님 때문이에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남은 말을 내뱉었다.

“덕분이기도 하고…….”

같은 시각.

식당 홀에서는 평소보다 더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와, 오늘따라 맛이 더 미쳤…….”

“죽인다.”

“뭐지? 장난 아닌데?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때로는 오늘 요리 맛에 관해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기에, 산하는 그저 웃으며 ‘오늘따라 식자재가 더 좋아서 그런가 봐요’라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 * *

산하는 예고 없이 본가로 오자마자 윤정에게 말했다.

“나한테 부탁해라.”

미션이 나왔으니, 윤정이 뭔가 부탁할 만한 일이 생겼을 거라고 짐작한 산하.

그러나 그의 짐작과 다르게 그의 여동생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뭐?”

“일단 해 봐. 들어는 줄게.”

“뭐래, 뭐 잘못 먹었어?”

윤정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귀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빙빙 돌렸다.

“박윤땡, 너 그런 식으로 가면 국물도 없어.”

“네, 박십칠 씨, 그러시겠지요.”

“어쭈? 또 박십칠?”

“영어로 해 드릴까요? gourd seventeen.”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덤벼!”

“와라, 박산하! 오늘 본때를 보여 주겠다!”

지나가다가 이 모습을 본 장순희가 혀를 찼다.

“어휴, 저것들은 나이를 어디로…….”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말은 듣지도 못한 듯 들러붙었고, 이내 산하가 윤정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아! 아아. 놔! 놓으라고!”

“부탁해라, 박윤땡.”

“아씨, 뭘 부탁해. 엄마, 오빠 또 미친 거 같아.”

주방에서 냉장고를 열다 말고 한숨을 쉬던 장순희가 외쳤다.

“합의해.”

“……엄마는 맨날 합의하래. 여기가 경찰서도 아니고.”

“엄마 말 들었지? 부탁해라.”

“아, 진짜 뭘 부탁해. 돌았어? 어! 맞다. 나 나 나 사인! 사인해 줘. 잘됐다.”

“기각.”

“아, 왜 부탁하라며?”

“들어는 주지만, 수락은 내 맘이다.”

“……이런 미친…….”

“뭐?”

“아, 아냐. 그럼 된장찌개 만들어 줘.”

“기각!”

“우이씨, 그럼 뭐! 뭘 부탁해! 자꾸 이러면 오빠 사이코라고 인터넷에 소문낼 거야.”

그녀의 협박에 흠칫한 산하가 헤드록을 풀어주며 여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긴, 오늘 내가 너무하긴 했다. 우리 윤정이도 다 컸는데, 그치 윤정아?”

산하의 말에 눈을 데구루루 굴리던 윤정이 소리쳤다.

“……엄마, 오빠 진짜 미쳤어!”

* * *

가발을 벗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껴입고 있던 두툼한 옷마저 벗어 던진 산하가 소리쳤다.

“살았다.”

그러자 심 피디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피디님.”

“네, 말씀하세요. 저는 경청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저번부터 생각했는데, 이거 속임수 아니에요?”

화들짝 놀라는 제스처를 취한 심 피디.

“속임수라니요. 프로그램 제목 그대로 ‘스타의 목소리가 들려’, 스타의 노래와 작은 힌트만으로 알아맞혀야 하는 거죠. 그러니 속임수는 아닙니다. 그냥 트릭이라고 해야 할까.”

“……아, 그게 속임수잖아요.”

“산하 씨, 제발 믿어 주세요. 이건 마술 같은 트릭이다. 트릭이다.”

심 피디가 산하의 눈앞에 검지를 빙빙 돌리며 최면 거는 시늉을 했다.

“……알겠습니다. 이건 트릭입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잠깐! 아직 끝난 거 아닙니다. 정체 잘 숨기시고, 보안 구역으로 가시는 거 잊지 마세요.”

“네, 그럴게요.”

며칠 후.

저음 사냥꾼의 정체가 밝혀지는 날이 다가왔다.

산하의 동생 윤정은 이러다 놓치겠다는 듯, 현관에서 신발을 집어 던지듯이 벗으며 거실로 뛰어가 리모컨을 잡아챘다.

“아빠, 다녀왔습니다. 바빠서 늦었어요. 나 다른 거 좀 볼게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딸의 모습에 당황한 박상태가 리모컨을 뺏으려 들었다.

“어허, 딸. 이러는 거 아니다.”

리모컨을 등 뒤로 감춘 윤정이 아양을 떨었다.

“한 번만요. 아빠아! 아빠아아앙.”

딸이 어깨까지 흔들며 애교를 피우자 견디지 못한 박상태가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드디어 TV 채널권을 확보한 윤정이 채널을 돌렸다.

“프로그램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네요. 같은 시기에 시작했던 스타분들은 정체가 다 밝혀지고, 새로운 분들이 출연한 지 오래인데요. 저음 사냥꾼님이 유일하게 남았습니다. 자, 오늘 맞히든 못 맞히든 저음 사냥꾼님의 정체가 밝혀지게 될 텐데, 끝까지 오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그의 질문에 변조된 목소리로 답하는 산하.

“집에 가고 싶습니다.”

“역시 우리 저음 사냥꾼님, 유머 감각도 탁월하시죠? 집에 가고 싶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금의환향하고 싶다,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에헤이, 그거 아닙니다. 진짜 집에 가고 싶습니다. 심 피디님, 이거 놓으세요. 놓으시라고요.”

그의 익살맞은 말투에 좌중을 둘러보며 웃음 짓던 MC 최웅석이 멘트를 이어 간다.

“……담당 피디님과의 사이가 정말 돈독하신 것 같죠? 자, 그럼 투표 결과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선택한 추천 후보는!”

이내 스크린에 ‘불일치’ 판정이 뜨자 사회자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 끝까지 못 맞히셨네요. 지금이라도 안 늦었습니다. 아시는 분? 마지막 기회로 1분 드리겠습니다.”

1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자 다들 이 사람 저 사람을 언급했지만, 그중에 하산해는 없었다.

“안타깝습니다. 그럼 이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한 저음 사냥꾼님의 정체를 밝혀야겠죠? 저음 사냥꾼님? 정체를, 밝혀 주세요!”

청중 일부가 그의 말을 따라 하고, 게스트들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어둠에 잠긴 무대 바닥 일부가 양쪽으로 갈라졌고, 그 사이로 의자에 뒤돌아 앉아 있는 누군가가 서서히 떠올랐다.

- 15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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